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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치에 공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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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케치에 공항 사건은 1980년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일탈 행위로 시작되어 폴란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탈리아로 출국하기 전, 골키퍼 요제프 므워진치크의 음주와 선수들의 항의, 언론 보도, 정부의 개입 등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선수들은 징계를 받았고, 감독이 사임하는 등 축구계에 혼란이 발생했다. 므워진치크,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 Władysław Żmuda 등은 징계가 조기 해제되어 대표팀에 복귀했지만, 스타니스와프 테를레츠키는 징계가 풀리지 않아 선수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건은 폴란드 사회의 모순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며, 스포츠가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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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치에 공항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오케치에 공항 사건
발생 위치바르샤바 오케치에 공항
날짜2011년 11월 29일
관련 인물마리우시 슈카우카
아르투르 보르주크
스타니스와프 코미사르추크
야쿠프 가르추차르크
관련 단체레기아 바르샤바
사건 상세
원인레기아 바르샤바 팬들의 유로파 리그 경기 후 소란
내용경찰과의 충돌
공항 직원 폭행
공항 장비 파괴
결과다수의 체포 및 기소
레기아 바르샤바에 대한 벌금 및 경기장 폐쇄
법적 조치
처벌혐의를 받은 사람들에게 벌금형 및 징역형 선고
레기아 바르샤바에 대한 UEFA의 제재

2. 배경

1970년대 후반 폴란드는 경제난과 공산 정권의 억압 속에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1976년 6월 시위 이후 노동자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자유와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며,[1][2] 1980년에는 동구권 최초의 자유 독립 노동조합인 연대(Solidarność)가 결성되는 등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되었다.[2]

이러한 사회적 격변기 속에서도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1974년 FIFA 월드컵 3위를 차지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3] 당시 대표팀은 리샤르트 쿨레샤 감독의 지휘 아래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몰타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이탈리아에서 전지훈련과 평가전을 가질 예정이었다.[11][5] 선수단은 1980년 11월 29일 출국할 계획이었다.[5]

2. 1. 1970년대 폴란드 사회와 스포츠

함께 축하하는 흰색 셔츠와 어두운 반바지를 입은 축구 선수들


1976년 6월, 공산주의 폴란드 정부가 많은 기본 상품의 고정 가격을 대폭 인상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프워츠크, 라돔, 우르수스에서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번졌으나, 시위는 강제로 진압되었고 정부는 가격 인상 계획을 철회했다.[1] 이러한 시위와 그 여파는 폴란드 노동자지식인 반대 세력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1980년까지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 저항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2] 1980년 7월 루블린에서 발생한 산업 파업(루블린 7월)은 그 다음 달 그단스크 항구 도시에서 연대(Solidarność)가 결성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연대는 동구권 국가에서 탄생한 최초의 비공산주의 노동조합이었다. 정부는 연대의 활동을 막기 위해 언론 검열을 강화하고 해안과 내륙 간의 전화 통화를 차단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0년 말에는 폴란드 노동자 5명 중 4명이 연대 조합원이 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커졌다.[2]

한편,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감독 리샤르트 쿨레샤의 지도 아래 1974년 FIFA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하는 등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팀으로 평가받고 있었다.[3] 1980년 11월에는 엘로 평점 시스템 기준으로 세계 6위에 올랐다.[4] 그달 말, 대표팀은 1982년 FIFA 월드컵 예선 첫 경기인 몰타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경기는 12월 7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며,[11] 선수단은 경기 10일 전인 11월 29일에 출국하여 이탈리아에서 훈련 캠프를 갖고 이탈리아 리그 대표팀과 평가전을 치를 계획이었다.[5]

당시 폴란드 대표팀의 핵심 선수 중 한 명은 ŁKS 우치 소속의 스타니스와프 테를레츠키였다. 대학 강사의 아들로 태어나 우치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위를 받은 그는, 확고한 반공산주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19] 그는 공산주의 체제와 권력자들을 공공연히 조롱하고 비판했으며, 이로 인해 폴란드 축구 협회(PZPN)와 바르샤바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15] 테를레츠키는 체육 외 분야에서 대학 학위를 가진 최초의 폴란드 국가대표 선수였으며, 원정 경기 이동 중에도 동료들이 주로 읽던 폴란드 스포츠 잡지 대신 ''Newsweek''나 ''타임''과 같은 서방 시사 잡지를 즐겨 읽었다.[19] 많은 폴란드 지식인들처럼 그 역시 연대와 같은 민주화 운동에 깊이 공감했으며,[6][19]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1970년대 후반 두 차례에 걸쳐 폴란드 축구 선수들을 위한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다. 하지만 PZPN은 두 번 모두 그의 시도를 저지했고, 테를레츠키에게 각각 6개월과 1년 동안 모든 축구 활동을 금지하는 징계를 내렸다.[19]

3. 오케치에 공항 사건

1980년 11월,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원정 경기를 앞두고 바르샤바오케치에 공항에서 발생한 선수단 내부의 갈등 사건이다.[15] 이 사건은 주전 골키퍼 요제프 므워진치크의 경기 전날 음주와 이에 대한 일부 선수들의 항명, 그리고 폴란드 축구 협회(PZPN)의 징계로 이어졌다.[7][15]

3. 1. 사건 발생

정장을 입은 콧수염 신사
요제프 므워진치크, 팀의 골키퍼. 그의 음주가 논란을 촉발했다


1980년 11월 28일 늦은 밤,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바르샤바에서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날, 팀의 골키퍼인 요제프 므워진치크와 공격수 Włodzimierz Smolarek(둘 다 비제프 우치 소속)는 허락 없이 숙소인 호텔 베라를 빠져나갔다. 스몰라레크의 주장에 따르면, 호텔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간 것이었다. 그들은 아드리아 나이트클럽에서 므워진치크의 친구이자 스포츠 기자인 보이치에흐 질린스키를 만났다. 팀 동료 안제이 이반에 따르면, 대화의 주된 내용은 질린스키의 별거 중인 아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바르샤바에서 매춘을 하다 이탈리아로 이주한 상태였다.[15] 여러 폴란드 선수들이 그녀를 알고 있었고, 특히 므워진치크는 최근 비제프 우치 소속으로 유벤투스와의 경기를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반은 질린스키 기자가 므워진치크에게 아내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술을 권했다고 주장했다. 스몰라레크는 오전 2시경 클럽을 떠났지만, 므워진치크와 질린스키는 약 세 시간 더 머물렀다.[15]

국가대표팀 고위 관계자였던 폴란드 육군의 로만 리시비치 대령은 므워진치크와 질린스키가 오전 5시 직후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므워진치크는 자신의 방으로 가지 않고 질린스키와 다시 나갔다가 오전 7시경에야 돌아왔다.[15] 피곤하고 심한 숙취에 시달린 므워진치크는 아침 식사에 참여했지만, 테를레츠키에 따르면 식사 내내 감독의 징계 가능성을 걱정했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자신의 짐조차 들 수 없었고, 스몰라레크가 대신 들어주어야 했다.[7] 팀 버스 앞에서 리샤르트 쿨레샤 감독의 코치 중 한 명인 베르나르트 블라우트는 스몰라레크에게 므워진치크는 팀과 함께 갈 수 없다고 통보했다.[7]

이 결정에 스몰라레크, 테를레츠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폴란드 선수이자 비제프 우치 소속인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와 브와디스와프 주무다는 격분하여 블라우트와 거의 물리적인 충돌 직전까지 갔다.[7] 팀의 베테랑 공격수 그제고시 라토는 이 항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므워진치크가 제외될 정도로 심하게 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8] 결국 팀 버스는 테를레츠키와 므워진치크를 남겨두고 출발했다. 이에 테를레츠키는 자신의 차로 므워진치크를 태우고 오케치에 공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대립은 계속되었다.[15]

공항에는 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는데, 테를레츠키는 므워진치크를 촬영하려는 기자들을 막기 위해 뛰어다니며 소리치고, 카메라와 마이크를 빼앗으려고 시도하는 등 거칠게 항의했다. 이는 그의 평소 반항적인 기질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다른 선수들은 쿨레샤 감독에게 므워진치크에게 심각한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고 설명하며 설득했다. 결국 쿨레샤 감독은 선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므워진치크가 팀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15]

3. 2. 언론 보도와 파장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 출신으로, 선수 중 한 명인 스타니스와프 테르레츠키의 요청으로 폴란드 대표팀을 만났다.


사건 당시 오케치에 공항에는 폴란드 텔레비전(Telewizja Polska)의 야체크 구츠와, 폴란드 라디오(Polskie Radio)의 보그단 흐루시치키, 그리고 주간 축구 저널 ''필카 노즈나''의 레미기우시 헤트만 등 여러 언론사 기자들이 있었다.[15] 테르레츠키가 기자들 앞에서 보인 행동 때문에 사건 소식은 폴란드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반은 나중에 테르레츠키가 "너무 소란을 피워서 모든 것을 덮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15] 보니에크는 테르레츠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테르레츠키가 믈리나르치크를 자신의 차로 공항에 데려왔고, TV 카메라의 전원 플러그를 벽에서 뽑았다"고 증언했다.[15] 그러나 폴란드 국가기억연구소의 역사가 그제고시 마이흐르자크는 보니에크가 사건 이후 테르레츠키와 거리를 두기 위해 사건을 왜곡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그의 증언에 의문을 표했다.[15]

당시 폴란드 정부는 사회적으로 확산되던 파업과 같은 움직임에서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다.[9] 이는 당시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종종 나타나던 언론 통제의 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다수의 언론 매체들은 믈리나르치크를 지지했던 선수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포츠 잡지 ''프제글롱트 스포르토비''는 "공항 스캔들 유죄자들에게 자비는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고, 또 다른 잡지인 ''템포'' 역시 "이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15] ''필카 노즈나''는 선수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비꼬면서도, 동시에 사건 당시 팀의 비선수 스태프들의 대응 방식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모습을 보였다.[15]

한편,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한 선수단 내에서 테르레츠키는 다시 한번 기성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을 보였다. 선수들은 로마에 머무는 동안 바티칸과 접촉하지 말라는 엄격한 지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테르레츠키는 폴란드 출신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19] 이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종교 활동이 제약받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의미 있는 행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폴란드 축구 협회(PZPN)는 이를 공항에서의 항명에 이은 두 번째 반항 행위로 간주하고, 테르레츠키, 믈리나르치크, 보니에크, 줌다 네 명의 선수를 즉시 폴란드로 귀국시켰다. 당시 폴란드 육군 장군이자 축구 협회 회장이었던 마리안 리바가 직접 이들의 귀국을 호송했다.[15][7] 결국 몰타와의 경기에는 레흐 포즈난 소속의 표트르 모블릭이 믈리나르치크를 대신해 골키퍼로 출전했고,[10] 폴란드는 이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다.[11]

4. 사건의 여파

오케치에 공항 사건은 폴란드 축구계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사건 직후 폴란드 축구 협회(PZPN)는 관련 선수들에게 중징계를 내렸고,[15] 특히 테를레츠키와 보니에크는 "선동가"로 지목되었다.[15]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여 쿨레샤 감독이 사임했으며,[15] 관련 선수들이 속한 구단과 동료 선수들도 협회의 처사를 비판했다.[15] 사건의 여파는 축구계를 넘어 정치적인 영향으로 이어져, PZPN 내부 인사 교체가 이루어져 폴란드 통일노동자당과 연계된 인물들이 협회의 주요 직책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15]

웃는 표정으로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남자
리샤르트 쿨레샤(Ryszard Kulesza), 당시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맸다
안토니 피에흐니체크(Antoni Piechniczek)는 사건 이후 쿨레샤의 후임 감독이 되었다.


징계 이후 선수들의 행보는 엇갈렸다. 주무다, 므위나르치크, 보니에크는 후임 감독 피에흐니체크의 중재와 사과 표명 등을 통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징계가 해제되어 대표팀에 복귀할 수 있었다.[13][11][14][9][15] 반면,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테를레츠키는 정치적인 배경 등이 작용하여 끝내 대표팀에 복귀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주하는 길을 선택했다.[19][7] 이러한 내부적인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폴란드 대표팀은 1982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여 3위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당시 계엄령 하에 있던 폴란드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었다.[17]

4. 1. 징계와 반발



1980년 12월 1일, 폴란드 축구 협회(PZPN)의 실권자였던 리바 장군은 사건에 연루된 선수들을 대표팀에서 제외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15] 선수단이 폴란드로 돌아온 후, 테를레츠키는 다시 한번 축구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하며 PZPN에 저항했다. 그는 다른 16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의 지지를 얻어 공동 서한을 PZPN에 보냈으나, 당국은 관련 선수들에게 재판 출석을 명령했다.[19] 결국 법정 심문에서는 테를레츠키, 보니에크, 주무다, 므위나르치크 네 명만이 서한에 대한 지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19]

12월 15일, PZPN 관계자들은 선수들과 스태프들을 불러 사건 경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진상 조사를 시도했다. 그러나 선수들과 스태프의 진술은 여러 부분에서 엇갈렸는데, 특히 므위나르치크의 음주량에 대한 주장이 크게 달랐다. 기술 스태프는 므위나르치크가 명백히 취한 상태였다고 증언했지만, 므위나르치크 본인은 친구와 "샴페인 세 잔과 맥주 한 모금"만 마셨다고 주장했다.[15] 또한, 선수들이 므위나르치크의 개인적인 문제를 언급하며 쿨레샤 감독을 설득했던 공항에서의 대화 내용도 논란이 되었다. 비선수 스태프는 이를 감정적 협박이라고 비난했지만, 선수들은 감독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반박했다.[15] 이 조사 과정에서 전직 군 검찰관이었던 리바 장군의 질문에 대한 테를레츠키의 답변은 그의 저항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 리바가 호텔 출발 시간을 묻자 테를레츠키는 "08:00"이라고 답했고, 리바가 "정확히 08:00이었나? 08:02가 아니었나?"라고 다그치자 "아니요. 어쩌면 08:03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러시아 시계가 하나 있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19]

일주일 후, PZPN은 최종 징계를 발표했다. 협회는 쿨레샤 감독과 블라우트 코치의 진술만을 근거로 삼았고, 선수들과 팀 물리 치료사, 스포츠 심리학자의 이야기는 모두 무시했다. 징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15]

오케치에 공항 사건 관련 선수 징계 내용[15]
선수징계 내용비고
테를레츠키12개월 출전 금지"선동가"로 지목, 이전 불복종 기록 고려됨
보니에크12개월 출전 금지"선동가"로 지목, 이전 불복종 기록 고려됨, 조기 해제 (사과 후)
주무다8개월 출전 금지조기 해제 (사과 후)
므위나르치크8개월 출전 금지조기 해제
스몰라레크2개월 출전 정지6개월 집행유예



PZPN은 특히 테를레츠키와 보니에크를 이전의 불복종 사례와 비행 기록을 언급하며 "선동가"로 지목했다.[15]

이러한 중징계에 반발하여 쿨레샤 감독은 즉시 사임했다. 그는 선수들에 대한 징계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판단하여 항의의 표시로 감독직을 내려놓았다.[15] 보니에크, 므위나르치크, 스몰라레크가 소속된 비제프 우치 구단 관계자들은 PZPN이 선수 관리에 실패했으며 편향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비제프 우치와 테를레츠키의 소속팀인 LKS 우치는 잠시 PZPN 회원 자격을 포기하고 자체 리그를 조직하는 방안까지 고려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 협의회(구성원: 마레크 지우바, 파베우 야나스, 보이치에흐 루디) 역시 공개 서한을 통해 테를레츠키, 보니에크, 즈무다, 므위나르치크에 대한 징계가 과도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므위나르치크의 행동이 모범적이지는 않았지만 사건 자체가 사소했으며, 언론의 과도하고 부정적인 보도로 인해 문제가 커졌다고 지적했다.[15]

징계에도 불구하고 비제프 우치는 1980-81 시즌 폴란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2] 한편, 리바 장군은 1981년 4월, 축구 역사가 스테판 슈체프레크가 "정직한 관계자들과 축구를 좋아하는 몇몇 폴란드 육군 장교들"이라고 묘사한 동료들과 함께 PZPN에서 물러났다.[15] 그러나 이들의 빈자리는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과거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 위원이었던 브워지미에시 레체크와 같은 공산당 관료들이 차지하게 되었다.[15]

므위나르치크, 보니에크, 즈무다의 출전 금지 징계는 이후 조기에 해제되었다. 즈무다와 므위나르치크는 1981년 5월 2일 동독과의 홈 경기(1-0 승리)에 복귀했고,[13] 보니에크는 그로부터 4개월 뒤에 복귀했다.[11][14] 선수들의 복귀에는 쿨레샤의 후임인 안토니 피에흐니체크 감독의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9] 마이흐르작에 따르면, 보니에크와 즈무다는 PZPN의 상급 기관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 체육 및 스포츠 총위원회 앞에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지만, 이 과정에서 테를레츠키는 배제되었다.[15] 테를레츠키는 여러 차례 징계 해제를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7]

4. 2. 선수들의 복귀와 월드컵

오케치에 공항 사건 이후 선수들의 거취는 엇갈렸다. 특히 스타니스와프 테를레츠키는 사건 이전부터 그의 모교인 우치 대학교와 폴란드 전역에서 벌어진 학생 파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학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그의 소속팀 ŁKS는 1981년 초 그의 선수 등록을 취소했다.[19][7]

사건에 연루된 다른 선수들과 달리 테를레츠키는 유일하게 폴란드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지 못했는데,[7] 이는 폴란드 내무부와 비밀 경찰(SB)이 그의 사회 참여 활동과 비판적인 태도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테를레츠키 본인은 공항 사건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은 것 자체가 선수들의 자체적인 노조 결성을 막으려는 SB의 의도적인 조작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폴란드 내에서 "문둥병 환자처럼 취급받는다"고 토로한 테를레츠키는[7] 1981년 6월 미국으로 이민을 선택했다. 그는 메이저 실내 축구 리그의 피츠버그 스피릿에 입단하며 미국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19] 테를레츠키는 미국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널리 인정받았다. 피츠버그 스피릿에서 3시즌 동안 뛰며 팀 역대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었으나,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감독들이 선수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0] 또한 그의 아내 에바는 심한 향수병을 겪었다고 한다.[19]

한편,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폴란드 국가대표팀은 1982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여[16]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비록 준결승에서 이탈리아에 패했지만, 3·4위 결정전에서 프랑스를 꺾고 최종 3위를 차지하며 당시 계엄령 하에 있던 폴란드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다.[17] 사건 당시 감독이었던 리샤르트 쿨레샤는 이후 튀니지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나중에는 바르샤바에 코칭 스쿨을 설립했다.[18]

1985년, 테를레츠키는 폴란드의 정치 상황 개선과 가족과의 재회를 이유로 귀국 의사를 밝혔다.[20] 그는 이듬해인 1986년 폴란드로 돌아와[21] 다시 폴란드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7] 테를레츠키는 국가대표팀 복귀를 희망했지만,[20] 끝내 다시 대표팀에 선발되지는 못했다.[7]

5. 사건의 의의와 영향

테를레츠키는 사건 발생 몇 달 전부터 그의 모교인 우치 대학교를 비롯해 폴란드 전역에서 벌어진 독립 학생 연합의 학생 파업에 공개적으로 참여하며 식량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소속팀 ŁKS는 1981년 초 그의 선수 등록을 취소했다.[19][7] 사건에 연루된 다른 선수들과 달리 테를레츠키만이 유일하게 폴란드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지 못했는데, 이는 폴란드 내무부와 비밀 경찰(SB)이 과거 그의 학생 운동 지원 등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19][7] 테를레츠키 자신은 공항 사건 이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 선수들의 자체 노조 결성을 막으려는 SB의 의도적인 공작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실제로 주된 문제를 일으킨 믈리나르치크의 경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음주 관련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았다. 심지어 1981년 10월 아르헨티나 원정 당시 만취 상태로 공항에 나타났지만,[15] 대표팀 스태프는 그를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비행 중 부상 통증 완화를 이유로 술을 더 제공하기도 했다.[15] 이는 선수들의 음주 문제 자체보다는 테를레츠키 개인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성격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결국 테를레츠키는 자신을 "문둥병 환자처럼 취급한다"고 토로하며[7] 1981년 6월 미국으로 이주하여 메이저 실내 축구 리그의 피츠버그 스피릿에 합류했다. 그는 미국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3시즌 동안 팀의 역대 최다 득점자가 되었지만,[20] 순탄치만은 않았다. 격렬한 성격 탓에 감독과의 마찰이 있었고,[20] 그의 아내는 심한 향수병을 겪었다.[19] 1985년, 테를레츠키는 폴란드의 정치 상황 개선과 가족과의 재회를 이유로 귀국 의사를 밝혔고,[20] 이듬해 폴란드로 돌아와[21] 클럽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7] 그는 국가대표팀 복귀를 희망했지만,[20] 끝내 다시 선발되지 못했다.[7]

오케치에 공항 사건은 단순한 선수들의 일탈 행위를 넘어, 당시 폴란드 사회의 경직된 시스템과 통제, 그리고 이에 맞서 자유를 추구했던 개인의 희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특히 테를레츠키의 사례는 스포츠가 때로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그가 치른 대가는 불의한 권력에 맞선 이들의 어려움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The Dilemmas of Dissidence in East-Central Europe: Citizen Intellectuals and Philosopher Kings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2] 서적 Civil Resistance and Power Politics: The Experience of Non-violent Action from Gandhi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World Cup 1974 finals https://www.rsssf.or[...] 2012-08-04
[4] 웹사이트 World Football Elo Ratings: Poland http://www.elorating[...] Advanced Satellite Consulting 2012-08-04
[5] 뉴스 (Re)prezentacja skandalistów http://www.slowoludu[...] 2012-08-04
[6] 뉴스 The rise of Solidarnosc http://www.isj.org.u[...] 2012-08-04
[7] 뉴스 Terlecki: Życie zaczyna się po 50-tce http://www.sport.pl/[...] Agora SA 2012-08-04
[8] 웹사이트 Stan wojenny i piłka nożna (via Wayback) http://www.grzegorzl[...] Wojciech Malicki 2012-08-04
[9] 뉴스 Poligon: Rola alkohola http://www.zczuba.pl[...] Agora SA 2012-08-04
[10] 뉴스 Wielkie mecze Włodzimierza Smolarka http://www.dziennikl[...] Polskapresse Sp. 2014-06-13
[11] 웹사이트 Poland: Fixtures and Results https://www.fifa.com[...] FIFA 2014-06-13
[12] 뉴스 Taki był Wielki Widzew http://www.widzewtom[...] Polskapresse Sp. 2012-08-04
[13] 웹사이트 Wladyslaw Zmuda – International Appearances https://www.rsssf.or[...] 2012-08-04
[14] 웹사이트 Zbigniew Boniek – International Appearances https://www.rsssf.or[...] 2012-08-04
[15] 간행물 Banda czworga, czyli afera na Okęciu http://www.uwazamrze[...] Presspublica 2014-06-13
[16] 웹사이트 World Cup 1982 Qualifying https://www.rsssf.or[...] 2012-08-04
[17] 웹사이트 World Cup 1982 finals https://www.rsssf.or[...] 2012-08-04
[18] 뉴스 Dobry człowiek http://www.rp.pl/art[...] Presspublica 2012-08-04
[19] 간행물 Stan The Fran, Free Spirit http://sportsillustr[...] 2012-08-04
[20] 뉴스 'Homesick' Stan Terlecki to leave U.S. https://news.google.[...] 1985-09-19
[21] 뉴스 Spirit will not add Albuquerque https://news.google.[...] 1986-01-07
[21] 웹사이트 MISL 1985–86 http://www.oursports[...] 201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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