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봉 (경시)
1. 개요
왕봉은 신나라 말기에 녹림군에 참여한 인물이다. 기근으로 인한 분쟁을 조정하다가 무리의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녹림산에서 세력을 키웠다. 신시병을 이끌고 경시제를 옹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곤양 전투에서 유수와 함께 신나라 군에 맞서 싸웠다. 경시 2년 의성왕에 봉해졌으나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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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먼시 출신 -
왕광 (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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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먼시 출신 -
쑹이 (배우)
쑹이는 2009년 드라마 《홍루몽》으로 데뷔하여 《위장자》에서 위만리 역으로 인지도를 얻고, 《경여년》, 《선혼부》, 《낙양》 등 드라마에 출연하며 주연 배우로 활동하는 중화인민공화국 배우이다. -
한나라의 민란 관련자 -
오두미도
오두미도는 2세기 후한 말 장도릉이 창시하여 쌀 다섯 말을 내게 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장로에 의해 신정 국가를 세웠으나 조조에게 항복 후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도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쳐 현대 정일교로 이어진 도교 종파이다. -
한나라의 민란 관련자 -
흑산적
흑산적은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 이후 태항산맥 일대에서 활동한 도적 연맹으로, 장연을 중심으로 백만 명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하여 여러 군을 약탈했으나 조조에게 항복하며 와해되어 후한 사회 혼란을 심화시킨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2. 생애
신나라 말기에 남쪽 지역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물건을 빼앗고 다툼이 심해지자, 왕광과 함께 분쟁을 조정하였다. 그러다 사람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고, 마무, 왕상, 성단 등이 합류하였다. 왕봉의 무리는 거병하여 녹림산(綠林山)으로 숨었는데, 수개월 만에 7, 8천 명으로 수가 늘어났다. 지황 2년(21년)에는 형주목이 2만의 군사를 보내 이들 녹림군을 공격했는데, 강하군 운두(雲杜)현에서 이를 격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경릉현을 함락시켰다. 마침내 녹림군의 수는 5만 여명에 달하였고, 주와 군의 통제 능력을 능가했다.
지황 3년(22년), 역병이 들어서 반수가 죽어, 녹림군은 흩어졌다. 이때 왕광·마무·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한의 남양군)으로 들어갔다. 이쪽 녹림군의 일파를 신시병이라 한다.
용릉에서 전한의 종실 유인이 용릉병을 일으키고 녹림군과 연합하려 하자, 평림병의 지도자 진목(陳牧)과 함께 호응해 장취(長聚)를 쳤다. 그러나 소장안취에서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참패하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회군하려 했다. 유인은 녹림군의 다른 일파인 하강병을 끌어들였고, 결국 지황 4년(23년) 정월에 녹림 연합군은 함께 신나라 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베었다. 이후 녹림군에서 황제를 추대할 때 신시병과 평림병의 장군들은 유인의 위명을 꺼려서 유약한 평림병 소속 경시장군 유현을 지지했고, 결국 유현이 황제가 됐다.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에 봉해졌다.
경시 원년(23년) 3월, 녹림군의 별장으로 나중에는 후한을 세워 황제 곧 광무제가 되는 유수가 제장들을 거느리고 영천군의 곤양·정릉·언현을 함락했다. 신나라 황제 왕망은 대사도 왕심과 대사공 왕읍에게 갑사 42만 명을 포함하는 100만 군대를 파견해 5월에 이들이 영쳔에 당도했다. 녹림군의 제장들은 이 어마어마한 신나라 군대의 위세에 눌려 달아나려 했으나, 유수가 반대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장수들은 결국 유수의 계책대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왕봉은 정위대장군 왕상과 함께 성을 수비하고, 유수는 표기대장군 종조(宗佻)와 오위대장군(五威大將軍) 이일(李軼) 등과 함께 성을 나가 바깥에서 군대를 긁어오기로 했다. 유수가 포위망을 뚫고 정릉과 언현의 장군들을 불러모으는 사이, 신나라 군은 곤양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었고, 이를 견디지 못해 항복하려 했으나 왕읍이 받아주지 않았다. 6월, 유수가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신나라 군대를 무찔렀다(곤양 전투).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한 경시 2년(24년) 2월,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왕봉은 사서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
2.1. 녹림군 초기 지도자
신나라 말기에 남쪽 지역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물건을 빼앗고 다툼이 심해지자, 왕광과 함께 분쟁을 조정하였다. 그러다 사람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고, 마무, 왕상, 성단 등이 합류하였다. 왕봉의 무리는 거병하여 녹림산(綠林山)으로 숨었는데, 수개월 만에 7, 8천 명으로 수가 늘어났다. 지황 2년(21년)에는 형주목이 2만의 군사를 보내 이들 녹림군을 공격했는데, 강하군 운두(雲杜)현에서 이를 격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경릉현을 함락시켰다. 마침내 녹림군의 수는 5만 여명에 달하였고, 주와 군의 통제 능력을 능가했다.
지황 3년(22년), 역병이 들어서 반수가 죽어, 녹림군은 흩어졌다. 이때 왕광·마무·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한의 남양군)으로 들어갔다. 이쪽 녹림군의 일파를 신시병이라 한다.
2.2. 신시병 결성과 경시제 옹립
지황 3년(22년), 역병으로 인해 녹림군이 흩어지자, 왕봉은 왕광, 마무, 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한의 남양군)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신시병이라 불렸다.
용릉에서 전한의 종실 유인이 용릉병을 일으키고 녹림군과 연합하려 하자, 평림병의 지도자 진목(陳牧)과 함께 호응해 장취(長聚)를 쳤다. 그러나 소장안취에서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참패하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회군하려 했다. 유인은 녹림군의 다른 일파인 하강병을 끌어들였고, 결국 지황 4년(23년) 정월에 녹림 연합군은 함께 신나라 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베었다.
이후 녹림군에서 황제를 추대할 때, 신시병과 평림병의 장군들은 유인의 위명을 꺼려서 유약한 평림병 소속 유현을 지지했고, 결국 유현이 황제가 됐다.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에 봉해졌다.
경시 원년(23년) 3월, 훗날 광무제가 되는 유수가 영천군의 곤양, 정릉, 언현을 함락시켰다. 이에 신나라 황제 왕망은 대사도 왕심(王尋)과 대사공 왕읍(王邑)에게 100만 군대를 파견해 5월에 이들이 영쳔에 당도했다. 녹림군 장수들은 신나라 군대의 위세에 눌려 달아나려 했으나, 유수가 반대했고 결국 유수의 계책대로 하기로 했다. 왕봉은 정위대장군 왕상과 함께 성을 수비하고, 유수는 성을 나가 군대를 긁어오기로 했다. 유수가 포위망을 뚫고 구원군을 이끄는 사이, 신나라 군은 곤양성을 공격했고, 왕봉 등은 항복하려 했으나 왕읍이 받아주지 않았다. 경시 원년(23년) 6월, 유수가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신나라 군대를 무찔렀다(곤양 전투).
경시 2년(24년) 2월,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이성제후왕을 봉할 때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봉해졌다.
2.3. 곤양 전투와 경시제 정권
신나라 말기에 남쪽 지역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물건을 빼앗고 다툼이 심해지자, 왕광과 함께 분쟁을 조정하였다. 그러더니 사람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고, 마무, 왕상, 성단 등이 합류하였다. 왕봉의 무리는 거병하여 녹림산(綠林山)으로 숨었는데, 수개월 만에 7, 8천 명으로 수가 늘어났다. 지황 2년(21년)에는 형주목이 2만의 군사를 보내 이들 녹림군을 공격했는데, 강하군 운두(雲杜)현에서 이를 격파하여 수천 명을 죽이고 경릉현을 함락시켰다. 마침내 녹림군의 수는 5만 여명에 달하였고, 주와 군의 통제 능력을 능가했다.
지황 3년(22년), 역병이 들어서 반수가 죽어, 녹림군은 흩어졌다. 이때 왕광·마무·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한의 남양군)으로 들어갔다. 이쪽 녹림군의 일파를 신시병이라 한다.
용릉에서 전한의 종실 유인이 용릉병을 일으키고 녹림군과 연합하려 하자, 평림병의 지도자 진목(陳牧)과 함께 호응해 장취(長聚)를 쳤다. 그러나 소장안취에서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참패하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회군하려 했다. 유인은 녹림군의 다른 일파인 하강병을 끌어들였고, 결국 지황 4년(23년) 정월에 녹림 연합군은 함께 신나라 군을 무찌르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베었다. 이후 녹림군에서 황제를 추대할 때 신시병과 평림병의 장군들은 유인의 위명을 꺼려서 유약한 평림병 소속 경시장군 유현을 지지했고, 결국 유현이 황제가 됐다. 왕봉은 성국상공(成國上公)에 봉해졌다.
경시 원년(23년) 3월, 녹림군의 별장으로 나중에는 후한을 세워 황제 곧 광무제가 되는 유수가 제장들을 거느리고 영천군의 곤양·정릉·언현을 함락했다. 신나라 황제 왕망은 대사도 왕심과 대사공 왕읍에게 갑사 42만 명을 포함하는 100만 군대를 파견해 5월에 이들이 영쳔에 당도했다. 녹림군의 제장들은 이 어마어마한 신나라 군대의 위세에 눌려 달아나려 했으나, 유수가 반대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장수들은 결국 유수의 계책대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왕봉은 정위대장군 왕상과 함께 성을 수비하고, 유수는 표기대장군 종조(宗佻)와 오위대장군(五威大將軍) 이일(李軼) 등과 함께 성을 나가 바깥에서 군대를 긁어오기로 했다. 유수가 포위망을 뚫고 정릉과 언현의 장군들을 불러모으는 사이, 신나라 군은 곤양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었고, 이를 견디지 못해 항복하려 했으나 왕읍이 받아주지 않았다. 6월, 유수가 구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신나라 군대를 무찔렀다(곤양 전투).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한 경시 2년(24년) 2월,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왕봉은 사서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
3. 평가
4. 등장 작품
왕봉은 후한서 유현유분자열전에 등장한다. 칭호켄 바이안(称好軒梅庵)의 주우출판(宙出版)에서 출판한 2020년 일본 라이트 노벨 광무대제전에도 등장한다.
5. 같이 보기
wikitext
* 신말후한초
* 녹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