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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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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양 전투는 신나라 말기, 왕망의 통치에 반발한 녹림군과 신나라 군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신나라의 대규모 병력에 맞서 유수의 지휘 아래 곤양을 지키던 녹림군은, 유수의 활약과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한 신나라군의 붕괴를 이끌어내며 승리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신나라의 멸망과 후한 건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의 권력 균형을 완전히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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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교전곤양 전투
부분전녹림의 난
신나라 봉기
곤양 전투 위치 및 신나라 주요 봉기
시기23년 6월 ~ 7월
장소곤양, 허난성
결과녹림군의 결정적 승리
신나라 멸망
교전 세력
교전 1신나라
교전 2녹림군
지휘관 및 지도자
신나라 지휘관왕읍
왕심
녹림군 지휘관유수
왕봉
왕상
이질
병력 규모
신나라 병력430,000명 (《한서》)
50,000 ~ 60,000명 (《동관한기(東觀漢記)》)
30,000명 (《논형(論衡)》)
녹림군 병력약 10,000명
피해 규모
신나라 피해막대함
녹림군 피해미미함
추가 정보
원인신나라 멸망

2. 역사적 배경

신나라 왕망의 통치는 이상주의적이고 고대적인 정책으로 인해 현실과 맞지 않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3] 이러한 상황에서 적미군녹림군이 유력한 반란 세력으로 떠올랐다. 왕망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건국했지만, 점차 민심을 잃어갔다. 특히 농민들은 가혹한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유현을 황제로 옹립한 녹림군은 농민과 호족 연합군으로 성장하여 신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다.

곤양 전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벌어진 전투로, 유수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가 왕읍과 왕심이 이끄는 신나라 군대를 상대로 곤양에서 벌인 전투이다.

2. 1. 경시제 옹립과 녹림군의 성장

신나라 말기, 무능한 통치에 반발한 각지의 농민들이 왕망에 대항해 봉기했다. 이들은 왕망이 무너뜨린 한나라를 다시 세울 것을 요구했고, 이러한 요구에 따라 녹림군의 지도자들은 유현을 새로운 한나라 황제로 추대했다.[3]

새로운 한나라 정권이 세력을 확장하기 전에 진압해야 한다고 판단한 왕망은 사촌 왕이와 재상 왕순에게 수십만 대군을 주어 녹림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녹림군은 둘로 나뉘었는데, 한 부대는 왕풍, 왕창, 유수가 이끌었고, 다른 부대는 유연이 지휘했다. 왕풍, 왕창, 유수는 곤양(昆陽|곤양중국어), 정릉(定陵|정릉중국어), 언현()을 함락시켰다. 유수의 군대는 양관( )을 공격하다가 신나라 주력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곤양으로 후퇴했다. 곤양의 9,000명 반군은 신나라 군대에 비해 수가 적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흩어져 형주로 후퇴하려 했으나, 유수는 흩어지면 각개격파 당하기 쉬우므로 곤양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그는 이 지역의 모든 가용 병력을 모아 신나라 군대를 뒤에서 공격하겠다고 약속했고, 반군은 결국 유수의 의견에 동의했다.

서기 8년, 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시건국 원년으로 정한 왕망이었지만, 그가 추진한 이상주의적이고 고대적인 정책은 당시 현실과 맞지 않아 점차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적미군녹림군이 가장 강력한 반란 세력이었다.[3]

이때 남양 호족 유현도 녹림군에 합류했고, 지황 3년(22년), 동족 유연, 유수 형제도 왕망의 선양을 "찬탈"이라 칭하며 봉기했고, 녹림군은 농민과 호족 연합군으로 발전했다. 유연은 납언장군 장우(엄우), 질종장군 진무가 이끄는 신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형주(남양군)을 위협했다. 이 성을 공격하는 중에 유현이 황제로 추대되었고(즉, 경시제), 유연은 대사도에, 유수는 태상 편장군에 임명되었다.[3]

이에 신나라는 지황 4년(23년) 3월[3], 유 형제 등 경시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사공 왕읍, 대사도 왕심이 100만 명(실제로는 40만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같은 해 5월[4], 왕읍 등의 군대는 영천군으로 들어가 장우 등의 잔군과 합류했다. 이에 맞서는 유수군은 수천 명의 병력밖에 없었고, 성공상공 왕봉, 정위대장군 왕상 등 다른 경시군과 함께 일단 곤양성으로 후퇴했다. 그래도 성 안에는 8천에서 9천 명의 병사밖에 없었다. 이 위기에 유수는 계책을 위임받고, 왕봉·왕상에게 곤양성 수비를 맡기고, 표기대장군 종조, 오위장군(중랑장의 설도 있음) 이일 등 13기와 함께 성 밖으로 탈출하여 언·정릉(모두 영천군)에서 병사를 모았다.[3]

2. 2. 신나라의 대응과 곤양 포위

왕망은 새로 건립된 한나라 정권이 기세를 얻기 전에 진압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서기 23년 3월, 사촌 왕이와 재상 왕순에게 수십만 명에 달하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주어 녹림군을 공격하게 했다.[3] 이들은 100만 명으로 칭했지만 실제로는 40만 명 정도였다. 같은 해 5월,[4] 왕읍 등의 군대는 영천군으로 들어갔다.

이에 맞서는 유수군은 수천 명의 병사밖에 없었고, 왕봉, 왕상 등 다른 경시군과 함께 일단 곤양성으로 도망갔다. 성 안에는 8천에서 9천 명의 병사밖에 없었다. 이 위기에 유수는 왕봉·왕상에게 곤양성의 수비를 맡기고, 13기와 함께 성 밖으로 탈출하여, 언·정릉(모두 영천군)에서 병사를 모았다.

한편, 신나라 진영에서는 장우가 유연을 토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으로의 진군을 건의했지만, 왕읍 등은 듣지 않고, 먼저 곤양을 포위했다. 또한 곤양에 갇혀 있던 왕봉 등이 항복하려 하자, 왕읍은 이를 용서하지 않고, 더욱 포위를 강화했다. 장우는 전의를 잃은 적에 대해서는 도망갈 길을 한 방향만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왕봉 등은 필사적으로 신나라 군대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3. 전투의 전개

지황 4년(23년) 3월, 신나라 왕망은 경시제 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사공 왕읍, 대사도 왕심이 이끄는 40만 대군을 출진시켰다. 같은 해 5월, 왕읍 등의 군대는 영천군으로 들어갔고, 이에 맞선 유수 군은 수천 명의 병력으로 곤양성으로 후퇴했다. 성 안에는 8천에서 9천 명의 병사밖에 없었기에, 유수는 왕봉, 왕상에게 곤양성의 수비를 맡기고, 13기와 함께 성 밖으로 탈출하여 언·정릉에서 병사를 모았다.

한편, 신나라 진영에서는 장우유연을 토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완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지만, 왕읍 등은 듣지 않고 먼저 곤양을 포위했다. 곤양에 갇혀 있던 왕봉 등이 항복하려 하자, 왕읍은 이를 용서하지 않고 더욱 포위를 강화했다. 장우는 전의를 잃은 적에게는 도망갈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곤양 공략에 애를 먹는 사이 5월 말에 완은 유연에 의해 함락되었고, 6월에는 유수가 수천 명의 원군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다. 유수는 보병·기병 1천여 명을 이끌고 신나라 대군 진영에서 4, 5리 떨어진 곳까지 진군했다. 왕읍·왕심은 이를 얕보고 1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유수군에게 덤벼들었으나 격파당했다. 유수는 완이 함락된 것을 알지 못하고 거짓으로 "(유연 등의) 완으로부터의 원군이 도착했다"라는 소식을 곤양에 전하게 하여 성 안의 사기를 높였다.

유수는 결사대 3천 명을 이끌고 곤양성 서쪽의 강을 건너 신나라 진영의 핵심으로 돌격했다. 신나라 군은 대군이라 오히려 대응하지 못했고, 왕심은 전사했다. 성 안의 한군도 유수군에 호응하여 출격하여 협공당한 신나라 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왕읍은 지휘를 포기하고 도주했다. 때마침 몰아친 강풍 호우에 휘말려 신나라 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왕읍은 불과 수천 명의 병사로 낙양에 도착했다.

3. 1. 유수의 전략과 분전

劉秀|유수중국어는 13명의 기병을 이끌고 밤에 곤양을 빠져나가 딩링(定陵)과 연현(郾縣)에서 지원군을 찾았다.[2] 압도적인 병력에 자신감을 얻은 신나라 사령관 왕읍(王邑)은 곤양을 포위하고, 공성탑과 성벽 아래로 파낸 터널을 동원하여 공격했다. 곤양의 방어군은 7월 7일에 유수가 10,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돌아올 때까지 버텼다.[2]

유수는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나라 군대와 교전하는 한편, 다른 3,000명의 병력으로 신나라 군대의 후방을 우회하여 본진을 공격했다. 왕읍은 여전히 녹림군을 과소평가하여 왕순(王尋)과 함께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맞섰으나, 전투에서 왕순이 죽고 곤양 안의 녹림군이 성에서 뛰쳐나와 신나라 부대를 공격하면서 신나라 군대는 붕괴되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돌발 홍수가 발생하여 도망치는 많은 병사들이 익사했다.[2]

지황 4년(23년) 3월,[3] 신나라 왕망은 경시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사공 왕읍, 대사도 왕심이 이끄는 40만 대군을 출진시켰다. 같은 해 5월,[4] 왕읍 등의 군대는 영천군으로 들어갔고, 유수군은 곤양성으로 후퇴했다. 성 안에는 8천에서 9천 명의 병사밖에 없었기에, 유수는 왕봉·왕상에게 곤양성의 수비를 맡기고, 표기대장군 종조, 오위장군 이일 등 13기와 함께 성 밖으로 탈출하여 언·정릉에서 병사를 모았다.

신의 진영에서는 장우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지만, 왕읍 등은 듣지 않고 곤양을 포위했다. 왕봉 등이 항복하려 하자, 왕읍은 이를 용서하지 않고 더욱 포위를 강화했다. 장우는 전의를 잃은 적에게는 도망갈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말에 완은 유연에 의해 함락되었고, 6월에는 유수가 수천 명의 원군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다.[5] 유수는 1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나라 군대 진영에서 4, 5리 떨어진 곳까지 진군했다.[6] 왕읍·왕심은 1만여 명의 군대[7]를 이끌고 유수군에게 덤볐으나 격파당했다. 유수는 완이 함락된 것을 알지 못하고 거짓으로 완으로부터의 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곤양에 전하게 하여 성 안의 사기를 높였다.

유수는 결사대 3천 명을 이끌고 곤양성 서쪽의 강을 건너 신나라 진영의 핵심으로 돌격했다. 왕심은 전사했고, 성 안의 한군도 유수군에 호응하여 출격하여 협공당한 신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왕읍은 지휘를 포기하고 도주했고, 강풍 호우에 휘말려 신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왕읍은 불과 수천 명의 병사로 낙양에 도착했다.

3. 2. 곤양 대첩

서기 8년, 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신을 건국한 왕망의 이상주의적 정책이 실패하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2년, 녹림군에 가담한 유현과 유연, 유수 형제는 왕망의 선양을 "찬탈"이라 비판하며 봉기했다. 23년 3월,[3] 신나라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대사공 왕읍과 대사도 왕심이 이끄는 100만(실제로는 40만) 대군을 출진시켰다.

5월,[4] 왕읍 등의 군대는 영천군에 도착했고, 유수군은 곤양성으로 후퇴했다. 성 안에는 8천~9천 명의 병사만 있었고, 유수는 주변에서 지원군을 모으기 위해 13기와 함께 성을 탈출했다. 왕읍은 곤양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거부하며 곤양 공략에 집중했다.

5월 말, 유연이 완을 함락시키고, 6월에는 유수가 수천 명의 원군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다.[5] 유수는 1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신나라 군대와 교전했고, 왕읍과 왕심은 1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맞섰으나 격파당했다.[6][7] 유수는 완 함락 소식을 숨기고 거짓으로 원군 도착 소식을 곤양에 알려 사기를 높였다.

유수는 3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나라 군대의 본진을 공격했고, 왕심이 전사했다. 곤양성 안의 한군도 호응하여 출격했고, 신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져 왕읍은 지휘를 포기하고 도주했다. 갑작스러운 폭우로 돌발 홍수가 발생하여 도망치는 많은 신나라 병사들이 익사하는 등[2] 신나라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왕읍은 수천 명의 병력만 이끌고 낙양으로 도망쳤다.

3. 3. 신나라 군대의 붕괴

유수는 13명의 기병을 이끌고 밤에 곤양(昆陽)을 빠져나가 딩링(定陵)과 연현(郾縣)에서 지원군을 찾았다.[2]

압도적인 병력에 자신감을 얻은 신나라 사령관 왕읍은 곤양을 포위하고, 자신의 군대가 "가는 길을 모두 궤멸시키고, 마을을 학살하며, 그들의 피 속에서 춤을 출 것"이라고 말했다. 공성탑과 성벽 아래로 파낸 터널에 직면한 곤양의 방어군은 7월 7일 유수가 10,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돌아올 때까지 버텼다.[2] 이때쯤 신나라 군대의 사기는 떨어지고, 유수의 귀환으로 인해 녹림군의 사기는 높아졌다. 유수는 이 기회를 틈타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나라 군대와 교전하는 한편, 다른 3,000명의 병력은 신나라 군대의 후방으로 우회하여 신나라의 본진을 공격했다.

왕읍은 여전히 녹림군을 과소평가하여 왕순과 함께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적과 맞섰고, 나머지 병력에게는 공격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자, 경미한 손실 이후 다른 부대들은 지원을 주저했고, 유수는 전투에서 왕순을 죽였다. 그 일이 발생하자 곤양 안의 녹림군은 성에서 뛰쳐나와 다른 신나라 부대를 공격했고, 훨씬 더 많은 수의 신나라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져 돌발 홍수가 발생하여 도망치는 많은 병사들이 익사했다.[2]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왕읍은 대부분의 병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남은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퇴각해야 했다.[1] 곤양 전투의 결과, 왕조는 건국 15년 만에 멸망했다.[1]

4. 1. 신나라의 멸망

곤양 전투의 결과에 대한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지자, 백성들은 제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많은 이들이 지방 정부 관리들을 살해하고, 다른 이들은 새로운 한(漢) 왕조의 관리라고 자칭했다. 한 달 안에 제국의 대부분이 신(新)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났다.[1] 왕이(王邑)는 대부분의 병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남은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퇴각해야 했다.[1]

곤양 전투의 결과는 당시 중국의 권력 균형을 완전히 뒤바꾸어, 같은 해에 갱시군의 공격을 받아 왕망은 살해당하고 은 건국 15년 만에 멸망했다.[1]

또한, 곤양 전투의 승리자인 갱시 정권 내에서도 갱시제 및 그 측근 그룹과 유씨 형제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벌어져, 갱시제에 의해 유연이 죽임을 당했다.[1] 유수는 하북 평정이라고 칭하며 갱시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25년에 황제에 즉위하여 을 계승하는 것을 명분으로 중국 통일을 향해 나아갔다.[1] 이 유수, 즉 광무제의 왕조를 후한이라고 부른다.[1]

4. 2. 후한 건국과 유수의 역할

왕읍은 대부분의 병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남은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낙양으로 퇴각해야 했다. 곤양 전투의 결과에 대한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지자, 백성들은 제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많은 이들이 지방 정부 관리들을 살해하고, 다른 이들은 새로운 한(漢) 왕조의 관리라고 자칭했다. 한 달 안에 제국의 대부분이 신(新)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났다.[1]

곤양 전투의 결과는 당시 중국의 권력 균형을 완전히 뒤바꾸어, 같은 해에 갱시군의 공격을 받아 왕망은 살해당하고 은 건국 15년 만에 멸망했다.[1]

또한, 곤양 전투의 승리자인 갱시 정권 내에서도 갱시제 및 그 측근 그룹과 유씨 형제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벌어져, 갱시제에 의해 유연이 죽임을 당했다. 유수는 하북 평정이라고 칭하며 갱시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25년에 황제에 즉위하여 을 계승하는 것을 명분으로 중국 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이 유수, 즉 광무제의 왕조를 후한이라고 부른다.[1]

5. 등장 작품

칭호헌 매암(称好軒梅庵) 『광무대제전(光武大帝伝)』 (2020년), 일본라이트 노벨, 츄우출판[1]

참조

[1] 서적 Liu Xiu'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0023-07-07
[2] 서적 Crespigny
[3] 서적 『[[漢書]]』王莽伝
[4] 서적 『漢書』王莽伝
[5] 서적 『漢書』王莽伝
[6] 서적 『後漢書』光武帝紀
[7] 서적 『漢書』王莽伝
[8] 문서 훗날 후한 세조 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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