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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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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흑산적은 후한 말 황건적의 난 이후 혼란한 시기에 화북 평원을 약탈하며 세력을 키운 도적 연맹이다. 장우각의 부하 장연이 이끄는 흑산적은 태항산맥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상산, 조, 중산, 상당, 하내 등의 군현을 약탈하며 백만 명에 달하는 세력을 구축했다. 후한 조정의 통제를 받기도 했으나, 동탁의 혼란스러운 통치 이후 다시 약탈을 시작했다. 흑산적은 공손찬, 원술 등을 지원하며 조조, 원소 등 군벌 세력과 대립했으며, 결국 205년 장연이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흑산적은 멸망했다. 흑산적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으며, 주요 인물로는 장연, 우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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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적
개요
유형도적 군벌 반군
활동 시기185년 ~ 205년
활동 지역태행산맥
주요 지도자장연
저수
우독각
이대목
청우각
황룡
좌자장팔
곽대현
우저근
장뢰
한섬
호재
왕당
손경
양봉
도승
역사
발생 원인후한 말기의 사회 혼란과 황건적의 난의 여파
주요 활동조조의 세력 확장 저지
원소와의 대립
여포 지원
헌제 옹립 시도
결과세력 약화 및 와해
일부 세력은 조조에게 투항하거나 흡수됨
규모
병력 규모수십만 명 (보병, 기병)
주요 인물
장연 (지도자)흑산적의 우두머리
조조에게 투항
저수장연의 부하
조조에게 투항
우독각, 이대목, 청우각, 황룡, 좌자장팔, 곽대현, 우저근, 장뢰, 한섬, 호재, 왕당, 손경, 양봉, 도승흑산적의 주요 수령들
기타
영향후한 말의 혼란을 가중시킴
삼국시대 형성에 간접적인 영향

2. 역사

황건적의 난 이후, 후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도적과 반란군이 일어났다. 장우각이 이끌던 도적 집단은 화북 평원 서부 지역을 약탈하며 태항산맥 산악 지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185년, 장우각은 동료 도적인 저연과 연합하여 영도(癭陶)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장우각이 사망하자, 그의 부하들은 유언에 따라 저연에게 합류했다. 저연은 죽은 동료를 기리기 위해 성을 장(張)으로 바꾸었다.[1] 이후 장연은 태항산맥 동쪽 도적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흑산적(黑山賊)이라 불리는 도적 연맹을 결성했다. 흑산적의 세력은 꾸준히 증가하여 백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상산, 조, 중산, 상당, 하내 등을 약탈했다. 주준이 이들을 수도에서 몰아냈지만,[2] 후한은 황하 북쪽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고, 형식적인 항복을 받아들여 흑산적에게 공식적인 지위를 주었다.[3] 그러나 189년, 동탁의 혼란스러운 통치로 중앙 정부가 약화되자 흑산적은 다시 약탈을 시작했다.

동탁 토벌전 실패 후 내전에서 장연과 흑산적은 공손찬 편에 섰다. 191년, 흑산적은 원소의 측근 조조가 통치하는 동군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93년, 흑산적은 선비족 남부 세력과 함께 원술을 지원하여 진류(陳留)에서 조조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이후 우독 휘하의 흑산적이 업을 공격하여 태수 이성을 살해하자,[4][5] 원소는 대대적인 토벌전을 벌여 우독을 비롯한 많은 흑산적 지도자들을 죽였다. 그러나 원소는 흉노오환의 지원을 받은 장연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채 철수했다.[6] 원소의 공격으로 흑산적 남부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장연은 상산군 북부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2. 1. 후한 말의 혼란과 흑산적의 발흥

황건적의 난 이후, 후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도적과 반란군이 일어났다. 장우각이 이끌던 도적 집단은 화북 평원 서부 지역을 약탈하며 태항산맥 산악 지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185년, 장우각은 동료 도적인 저연과 연합하여 영도(癭陶)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장우각이 사망하자, 그의 부하들은 유언에 따라 저연에게 합류했다. 저연은 죽은 동료를 기리기 위해 성을 장(張)으로 바꾸었다.[1] 이후 장연은 태항산맥 동쪽 도적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흑산적(黑山賊)이라 불리는 도적 연맹을 결성했다. 흑산적의 세력은 꾸준히 증가하여 백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상산, 조, 중산, 상당, 하내 등을 약탈했다. 주준이 이들을 수도에서 몰아냈지만,[2] 후한은 황하 북쪽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고, 형식적인 항복을 받아들여 흑산적에게 공식적인 지위를 주었다.[3] 그러나 189년, 동탁의 혼란스러운 통치로 중앙 정부가 약화되자 흑산적은 다시 약탈을 시작했다.

2. 2. 군벌과의 관계

황건적의 난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해지자, 장우각과 저연이 이끄는 도적 집단이 태항산맥에서 세력을 키웠다. 185년 영도(癭陶)를 습격했으나, 장우각은 전투 중 사망했다. 저연은 장우각을 기리기 위해 성을 장(張)으로 바꾸고, 흑산적(黑山賊)이라 불리는 도적 연맹을 결성했다.[1] 흑산적은 상산, 조, 중산, 상당, 하내 등지를 약탈하며 세력을 확장했다.[2] 후한은 이들을 형식적으로 항복시키고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했지만, 189년 동탁의 집권으로 중앙 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흑산적은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3]

동탁 토벌전 실패 후 내전에서 장연과 흑산적은 공손찬 편에 섰다. 191년, 흑산적은 원소의 측근 조조가 통치하는 동군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93년, 흑산적은 선비족 남부 세력과 함께 원술을 지원하여 진류(陳留)에서 조조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이후 우독 휘하의 흑산적이 업을 공격하여 태수 이성을 살해하자,[4][5] 원소는 대대적인 토벌전을 벌여 우독을 비롯한 많은 흑산적 지도자들을 죽였다. 그러나 원소는 흉노오환의 지원을 받은 장연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채 철수했다.[6]

원소의 공격으로 흑산적 남부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장연은 상산군 북부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199년, 장연은 역경 전투에서 공손찬의 지원 요청을 받았으나 제때 도착하지 못해 공손찬은 몰락했다. 205년, 조조가 이 지역에서 원씨 일족을 몰아내자 장연은 부하들을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다.[7]

2. 3. 장연의 항복

199년, 장연은 역경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던 공손찬의 지원 요청에 응했으나, 그의 군대는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공손찬을 구원하지 못했다. 205년, 조조가 이 지역에서 원씨 일족을 몰아내자, 장연은 부하들을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다.[7]

3. 주요 인물

이름별명설명
보케흰 참새
보 라오흰 고리
푸윈뜬 구름
궈뎨시안궈의 훌륭한 덕
황롱황룡
쿠지우마른 애벌레대머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 있음
리다무큰 눈의 이
류시
루오시[9]
핑한다지한을 평정하는 큰 계획
칭니우줴푸른 소 뿔
쓰리위안청성벽을 기어오르는 관료
쑤이구고정된 시선
쑨칭[10]
타오셩[11]
왕당
우루다섯 사슴무언가를 착용해서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 있음
양펑
위디겐털이 많은 얼굴이나 성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 있음[12]
위두독 위
장니우줴소 뿔 장
장레이궁우레의 신 장우렁찬 목소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
장연비연 장(飛燕張)민첩함 때문에 붙여진 이름
줘쯔장바80 피트 수염의 좌
쭤샤오좌측 울타리궁궐 건축가 아래에서 죄수 노동자를 담당하는 관리의 직함에서 이름을 따왔을 가능성이 높음


참조

[1] 서적 de Crespigny (1989), p. 193
[2] 서적 Houhanshu vol. 71
[3] 서적 de Crespigny (2007), p. 1083
[4] 서적 de Crespigny (1996), p.113
[5] 서적 de Crespigny (2007), p.408
[6] 서적 de Crespigny (2010), p. 161
[7] 서적 de Crespigny (1996), p. 340
[8] 서적 de Crespigny (1989), p. 193 and pp. 567-8 note 12; de Crespigny (1996), p. 115
[9] 서적 de Crespigny (2007), p. 634
[10] 서적 de Crespigny (2007), p. 772
[11] 서적 de Crespigny (2007), p. 788
[12] 서적 de Crespigny (1989), p. 568 note 12
[13] 서적 de Crespigny (1989), p. 193
[14] 서적 de Crespigny (2007), p. 1083
[15] 서적 de Crespigny (1996), p.113
[16] 서적 de Crespigny (2007), p.408
[17] 서적 de Crespigny (2010), p. 161
[18] 서적 de Crespigny (1996), 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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