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례
1. 개요
왕사례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영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군이다. 그의 아버지 왕건위는 당나라 삭방군의 장교였으며, 왕사례는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749년 석보성을 함락하고,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여 사공에 임명되었다. 761년 사망 후 태위로 추증되었으며, 《구당서》에는 영주성 방 고구려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 이름 | 왕사례 |
|---|---|
| 한글 | 왕사례 |
| 한자 | 王思禮 |
| 히라가나 | 오우 시레이 |
| 로마자 표기 | Wang Sallae |
| 원어명 | 王思禮 |
|---|---|
| 출생 정보 | 미상 |
| 사망 정보 | 761년 |
| 국적 | 당나라 |
| 성별 | 남성 |
| 본관 | 낙랑 왕씨(추정) |
| 시호 | 무열(武烈) |
| 부모 | 왕건위(王虔威) |
| 복무 | 당나라군 |
|---|---|
| 최종 계급 | 사공(司空)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석보성 전투 안녹산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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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년 사망 -
사사명
사사명은 안사의 난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우다 아들에게 살해당한 당나라의 장군이자 연나라 황제로, 본래 이름은 사사간이었으며 돌궐과 소그드인 혼혈로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
당나라의 장군 -
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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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장군 -
부여융
부여융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자 당나라 장수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백제 유민을 다스렸으나 신라와의 관계 악화로 축출되어 낙양에서 사망했으며, 백제 마지막 태자 여부 논쟁과 엇갈린 행적으로 평가가 나뉜다. -
8세기 중국 사람 -
두보
두보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여겨지며 '시성'이라 불리고, 사회 현실 비판과 민생에 대한 연민, 안사의 난을 겪으며 전쟁의 참상과 민중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시사'라는 평가를 받는 등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8세기 중국 사람 -
당 대종
당 대종은 안사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당나라 황제에 올랐으나, 환관의 권력 장악, 절도사의 세력 확대, 토번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당나라 중앙집권 체제 약화와 봉건화의 시작을 초래했다.
2. 생애
왕사례는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으며, 749년 석보성(石堡城)을 함락시켜 우금오위장군, 관서병마사에 임명되고 하원군사를 겸하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워 병마부원수 관내절도사가 되었다.
2.1. 가문 배경
왕사례의 가문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영주로 이주했다. 왕사례의 아버지 왕건위는 당나라 삭방군 장수였다. 왕사례는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장군으로 안사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사공에 이르렀다.
남북조 시대부터 수나라, 당나라 시대의 낙랑 왕씨 출신으로는 왕파, 왕반, 왕정국, 왕당성, 왕광조, 왕정, 왕기, 명덕황후, 왕맹 등이 있는데, 이들은 낙랑군 출신이 아니라 중국 출신이며, 낙랑 왕씨는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이 상당수 존재한다. 당나라 시대 왕사례는 『구당서』 권110 왕사례전에 영주성 인근 고구려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낙랑군 시대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고구려에 현저하게 동화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2.2. 당나라에서의 활약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의 집안은 당나라 영주 지방에 정착해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왕건위(王虔威)는 당나라 삭방군(朔方軍)의 장교직을 지냈다. 그는 기록에 의하면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며, 당나라 장수로서 749년 석보성(石堡城)을 함락시켜 우금오위장군에 제수되어 관서병마사에 임명되고 하원군사를 겸하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마부원수 관내절도사로서 난을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당나라로부터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
761년, 그가 병으로 죽자 당나라 황제는 하루 동안 조회를 폐하고 그를 태위(太尉)에 추증했다고 한다.
3. 평가 및 의의
왕사례는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약한 장군이다. 그의 집안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영주 지방에 정착했으며, 아버지 왕건위는 삭방군의 장교였다. 왕사례는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석보성 함락, 안사의 난 진압 등에서 큰 공을 세워 사공에 임명되었다. 그가 죽자 당나라 황제는 조회를 폐하고 태위에 추증할 정도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왕사례의 일족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영주로 이주했으며, 왕사례는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3.1.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군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의 집안은 당나라 영주 지방에 정착해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왕건위(王虔威)는 당나라 삭방군(朔方軍)의 장교직을 지냈다. 그는 기록에 의하면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며, 당나라 장수로서 749년 석보성(石堡城)을 함락시켜 우금오위장군에 제수되어 관서병마사에 임명되고 하원군사를 겸하게 되었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병마부원수 관내절도사로서 난을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당나라로부터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
761년, 그가 병으로 죽자 당나라 황제는 하루 동안 조회를 폐하고 그를 태위(太尉)에 추증했다고 한다.
3.2. 낙랑 왕씨와의 관계
왕사례의 일족은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로 이주했다. 왕사례의 아버지인 왕건위는 당나라의 삭방군 장수였다.。왕사례는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장군으로 안사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관직이 사공에 이르렀다.。
남북조 시대부터 수나라당나라시대의 낙랑 왕씨 출신자에는 왕파, 왕반, 왕정국, 왕당성, 왕광조, 왕정, 왕기, 명덕황후, 왕맹 등이 있는데, 이들 인물은 낙랑군 출신이 아니라 중국 출신이며, 낙랑 왕씨는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자가 상당수 존재한다.。당나라 시대의 왕사례는 『구당서』 권110 왕사례전에 영주성 방 고구려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낙랑군 시대부터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기 때문에 고구려에 현저하게 동화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