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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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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맹은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부견의 신임을 받아 내정과 군사 분야에서 큰 업적을 세웠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환온에게 천하의 형세를 논하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부견의 등용 이후 문벌 귀족 억압, 내정 정비, 중농 정책 추진, 도로 정비를 통해 전진의 국력을 강화했다. 370년에는 10만 군을 이끌고 전연을 멸망시켰으며, 승상에 임명되어 국가 대사를 관리했다. 그는 유교 기반 교육 보급, 호적 제도 확립, 민족 간 화합 도모에도 힘썼으며, 죽기 전 동진 정벌과 선비족, 강족 경계를 부견에게 유언했지만, 부견이 이를 따르지 않아 전진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왕맹은 당나라에서 중국 역사상 64명장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 부견과의 각별한 관계는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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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맹
인물 정보
이름왕맹
로마자 표기Wang Meng
다른 이름경략 (景略)
출생325년
사망375년
시대오호 십육국 시대
국가전진
민족한족
관직
주요 관직사공
중서감
상서령
승상
생애 및 업적
주요 활동내정 개혁
군사 전략
동진 정벌 계획
가족 관계
아버지왕영 (王永)
아들왕옹 (王邕)
관련 인물
주요 관련 인물부견

2. 생애

왕맹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어릴 적 가난했지만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학문과 병서(兵書)를 즐겨 읽었고, 학식 있는 스승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당시 선비들은 청담(淸談)을 즐겼기에 왕맹을 얕보았고, 왕맹 또한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1]

2. 1. 초기 생애와 환온과의 만남

한문(寒門) 출신으로 어릴 적 집안은 가난했지만, 왕맹은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학문과 병서(兵書)를 애독했고, 학식 있는 스승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당시 선비들은 청담(淸談)을 즐겼기에 왕맹을 얕보았고, 왕맹 또한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1] 젊은 시절 후조의 수도 예성(Ye, China)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며, 탈곡용 대나무 용기 제작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총명했지만 후조 관리들에게는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불결한 외모 때문에 지식인들도 그와 어울리기를 꺼렸다. 위군으로 이주하여, (대나무와 짚을 엮어 만든 물건을 담아 나르는 도구)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후조의 사예교위 서통만이 왕맹을 공조로 발탁하려 했으나, 왕맹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화음산(현재 산서성 위남시 화음시에 있는 화산을 가리킨다)으로 은둔하여, 세상을 구할 뜻을 품고 용안(천자에 걸맞는 인물)의 군주를 바라며, 때를 기다리며 천하의 동정을 살폈다.

전진이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354년 동진의 대장군 환온이 대군을 이끌고 전진을 공격하러 와 관중(關中)에 이르러 패상에 주둔했다. 이때 왕맹은 화음산(華陰山)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환온의 군대가 온 것을 알고 낡은 누더기 옷을 걸친 채 동진의 진영에 찾아가 환온을 만났다.[2] 후조가 멸망한 후에는 전진(前秦)의 영토인 화음산(華陰山)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전진은 디족 출신의 부씨(苻氏)가 다스리고 있었다.

왕맹은 환온과 만나 천하의 형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편으로 손으로 자신의 옷을 뒤집으며 이를 잡았다. 그의 모습에 동진의 장군들은 비웃었지만, 그의 태도는 매우 침착하며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하였다.[3] 단정치 못한 차림새로 벼룩과 진드기를 잡던 왕맹은 환온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지식과 전술로 환온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환온은 동진에서 왕맹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그에게 물었다.[4]

[나는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10만 명의 정병을 이끌고 북벌을 나서 백성들의 해악을 제거하고자 하오. 하지만 관중의 호걸들은 지금까지 나를 만나러 오지 않으니, 이건 무슨 까닭이오? ][4]

왕맹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였다.[4]

[장군께서는 천릿길도 멀다 하지 않고 오시어, 대군들은 이미 적지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장안은 눈앞에 있는데, 장군께서는 패수를 건너 장안으로 쳐들어가지 않으시니, 백성들은 모두 장군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무도 맞아주는 이가 없는 것입니다. ][4] 왜 전진 백성들이 진에 귀순하지 않는지 묻자, 왕맹은 환온이 灞水(바수)를 건너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환온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본시 환온은 잃어버린 영토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북벌이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고 하였다. 때문에 환온은 기회만을 엿보며 장안을 공격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왕맹의 이 말은 바로 환온의 속셈을 그대로 밝힌 것이어서, 환온은 계속 말하지 않았다. 환온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왕맹을 내보냈다. 교착 상태가 지속되자 환온은 식량이 부족해져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환온은 왕맹에게 함께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왕맹은 환온이 따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거절했다.

환온은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왕맹에게 거마(車馬)를 보내고 그에게 관직을 주며, 함께 남쪽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맹이 말했다.

[저로 하여금 잠시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왕맹은 스승에게 의견을 여쭈었다.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환온과 같은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자 하느냐? 아직은 여기에 머물며 기회를 기다리도록 하여라.]

이에 왕맹은 그냥 머무르게 되었다.

2. 2. 부견과의 만남과 전진의 부흥

357년 부견이 스스로 대진천왕(大秦天王)에 올라 인재를 구했고, 신하의 천거로 왕맹을 추천했다. 왕맹과 부견은 이야기를 나누자 서로 뜻이 맞았고, 부견은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부견은 그를 삼국 시대 제갈량에 비견하며 자신은 유비의 심정을 알겠다고 말했다.[1]

부견의 정책과 전략의 대부분은 왕맹에게서 나왔다. 왕맹은 처음엔 중서시랑(中書侍郎)이었으나, 수년 동안 연이어 승진하여 경조윤(京兆尹), 이부상서(吏部尚書),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산기상시(散騎常侍), 사례교위(司隷校尉) 등을 역임하면서 중책을 맡았다. 부견이 왕맹을 중용하는 것에 대해 귀족들이 불만을 품었으나, 왕맹은 귀족이 문제를 일으키자 법으로 엄히 다스렸다. 부견은 왕맹을 지지하여 이후 아무도 함부로 왕맹의 개혁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다.[1]

왕맹은 문벌과 귀족을 억누르고, 내정을 정비하고 법제를 정비했다. 현인을 발탁하여 중상(重商)보다는 중농(重農) 정책을 추진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전진의 중국 왕조화를 진행하였다. 또한 수도 장안으로부터 각지에 이르는 도로를 정비하고 도로 양쪽에 수목을 심어 전진의 치안을 좋게 하였다. 왕맹의 정책으로 전진의 국력은 강대해졌고, 오호십육국 시대 국가 중 가장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도 했다.[1]

354년, 진의 장군 환온이 대규모로 전진을 공격하여 전진의 수도 장안(長安) 부근의 灞水(바수)까지 진격하자, 왕맹은 환온을 만났다. 단정치 못한 차림새로 벼룩과 진드기를 잡던 왕맹은 환온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지식과 전술로 환온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환온은 왜 전진 백성들이 진에 귀순하지 않는지 물었고, 왕맹은 환온이 灞水를 건너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환온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교착 상태가 지속되자 환온은 식량이 부족해져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환온은 왕맹에게 함께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왕맹은 환온이 따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거절했다.[4]

355년 전진의 건국 황제 부견의 아들 부생이 황제가 되자, 그는 엄격하고 잔혹하며 독단적으로 다스리며 마음대로 관리와 귀족들을 죽였다. 부생의 사촌 부견(음이 다름) 동해왕(東海王)은 자신이 다음 목표가 될까 두려워 여러 사람들과 비밀리에 음모를 꾸몄다. 呂婆樓(여파루, Lü Polou)의 제안으로 부견은 왕맹을 만났고, 둘은 즉시 친구가 되었으며 부견은 그들의 만남을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에 비유했다.

전진(前秦)의 황제 부생(苻生)은 잔혹하고 포악한 인물로, 관리와 궁녀 등을 끊임없이 살해하였다. 부생의 사촌인 부견(苻堅)은 문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큰 뜻을 품고 있었기에, 신하들은 부생을 제거하고 부견이 대신 즉위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부견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상서(尚書) 여파루(呂婆樓)(후량의 군주 여광의 아버지)에게 이 일을 물었다. 그러자 여파루는 왕맹(王猛)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국가의 중대한 일을 상의할 만한 인물이라고 추천하였다. 부견은 즉시 여파루를 파견하여 왕맹을 초빙하였다. 왕맹은 부견을 만나자 마치 오랜 벗과 같이 국가의 흥망과 중대한 일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모습은 유비가 제갈량을 만났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이후 왕맹은 부견을 보필하며 계략을 펼치게 되었다.

357년 6월, 부견은 정변을 일으켜 부생을 살해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8월, 왕맹은 중서시랑(中書侍郎)에 임명되어 국가의 기밀을 처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당시 흥평시(興平市) 시평현(始平縣)에는 방두(枋頭)에서 많은 이주민이 유입되어 호족(豪族)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며 강도와 약탈이 만연하였다. 그 때문에 부견은 왕맹을 시평현령(始平縣令)에 임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왕맹은 부임하자마자 법을 명확히 하고 엄격하게 형벌을 집행하여 선악을 분명히 하였고, 유력한 호족이라도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부정을 저지른 한 관리를 매질하여 죽인 일로 인해 백성들이 상소를 올려 고소하였다. 관리들이 이를 탄핵하였기에 왕맹은 죄수 수레에 실려 廷尉(정위)에 압송되었다. 부견은 직접 왕맹을 만나 “통치의 예의는 우선 교화를 행하는 것이고,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인을 행하는 것은 폭정이라고 들었다. 이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라고 질책하였으나, 왕맹은 “제가 듣기로는, 평화로운 나라를 다스리려면 예로써 행하고, 어지러운 나라를 다스리려면 법으로써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폐하는 저 맹을 무능한 자로 여겨 이 혼란스러운 지역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폐하를 위해 흉악한 자들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먼저 한 명의 간악한 자를 처형하였지만, 아직도 만 명이 넘는 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만약 제가 남은 폭도들을 진압하고 법을 어기는 자들을 숙청하지 못한다면, 솥에 삶아 죽는 형벌로 죄를 사죄하겠습니다. 그러나 폭정을 행했다는 죄는 아직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부견은 감탄하여 신하들에게 “왕경략(王景略)은 관중·자산과 같은 인물이다.”라고 말하며 그를 용서하였다.

2. 3. 군사적 업적과 전연 멸망

366년 12월, 농서(隴西)의 이엄(李儼)이 전진에 반란을 일으키자, 왕맹이 직접 군을 이끌고 가 이엄을 평정하고 동진을 격파했다.[2] 369년 환온전연을 공격하였으나 전연에게 연패했다. 부견은 왕맹을 도독관동대주제군사(都督関東六州諸軍事), 거기대장군, 기주목에 임명하여 전연 공격의 책임자가 되었다. 370년에는 왕맹은 전연 정벌군 총사령관이 되어 직접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전연을 멸망시켰고,[2] 그 공적으로 372년 장안으로 돌아와 승상이 되어 국가대사를 모두 관리하였다.

367년 10월, 부쌍(苻雙)·부류가 부견에게 반기를 들었고, 부수·부무도 이에 호응하여 공동으로 장안 침공을 준비했다. 368년 1월, 부견의 명령을 받아 왕맹은 등강(鄧羌)과 함께 출격하여 부류가 지키는 포삭(蒲坂)으로 진격했다. 4월, 부류가 결전을 걸어 왕맹을 도발했지만, 왕맹은 성채를 굳게 닫고 응하지 않았다. 9월, 왕맹은 포삭을 공략하고 부류를 비롯한 그 가족의 목을 베어 장안으로 운반했다. 왕맹은 그대로 포삭에 머물러 등강과 왕감(王鑒)에게 명하여 섬성(陝城)을 지키는 부수 공격에 나서게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부쌍·부무도 전진의 다른 부대가 토벌했고, 난은 진압되었다.

369년 7월, 동진대사마 환온이 전연 토벌(제3차 북벌)에 나서자, 전연은 호로 이서의 땅을 부견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원군을 요청하였다. 왕맹은 부견에게 전연과 함께 환온을 공격하고, 환온이 물러간 후 전연을 정벌할 것을 권했다.[2] 부견은 이에 동의하여 8월, 등강 등을 파견하여 동진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모용위가 할양 약속을 어기자, 부견은 크게 노하였다. 부견의 명령에 따라, 왕맹은 3만을 이끌고 전연을 침공하였다. 370년 1월, 왕맹은 낙주 자사 모용축이 지키는 낙양을 함락시켰다.

5월, 부견은 왕맹을 총대장으로 임명하고, 6만의 군사를 주어 전연 토벌에 나서게 하였다. 7월, 왕맹은 스스로 호관을 침공하고, 양안에게는 별동대를 맡겨 진양 공략을 명하였다. 8월, 호관을 함락시키고 전연 상당군 태수 모용월을 생포하였다. 9월, 왕맹이 진양에 도착하여 지하 통로를 통해 성을 함락시키고 전연의 병주 자사 모용장을 사로잡았다.

왕맹의 습격 소식이 업에 전해지자, 모용위는 태부 모용평에게 40만[2]이 넘는 군사를 주어 구원을 명하였다. 그러나, 모용평은 왕맹을 두려워하여, 로천에 군사를 머물게 하여 지구전으로 끌고 가려 하였다. 10월, 왕맹은 로천으로 진군하여 모용평과 대치하였다. 왕맹은 곽경에게 정예 5천을 주고 밤에 몰래 적 진영 후방으로 돌아가 불을 지르게 하여 모용평 군의 치중을 불태웠다.

왕맹은 위원에 진을 치고, 병사들에게 용감하게 싸울 것을 독려했다. 왕맹은 등강·장호·서성 등을 모용평의 진영에 돌격시켜 적진을 유린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병을 살상하였다. 낮에는 모용평의 군대가 궤멸되었고, 포로와 전사자는 5만을 훨씬 넘었다. 이 승리에 편승하여 더욱 추격을 가하자, 포로와 전사자는 10만에 달하였고, 그대로 군대를 진격하여 마침내 업을 포위하였다.

11월, 승전보를 받은 부견은 스스로 정예 10만을 이끌고 업으로 향했다. 왕맹은 부견의 지휘하에 들어가 업 공략을 시작하여, 마침내 이를 함락시켰다. 모용위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유격장군 곽경에게 붙잡혔고, 전연은 멸망하였다.

2. 4. 죽음과 유언

王猛|왕맹중국어은 375년 7월 병으로 죽었다. 죽기 직전, 왕맹은 부견에게 동진 정벌을 하지 말고, 선비족과 강족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1] 왕맹은 특히 동진과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물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1]

부견은 왕맹의 유언을 듣지 않고 383년 동진을 공격했으나, 비수 대전에서 크게 패배하여 전진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1]

부견은 왕맹이 죽자 매우 슬퍼하며 "하늘은 나에게 중화를 통일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어째서 나에게서 경략(왕맹)을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갔는가!"라고 한탄했다.[1] 왕맹에게는 무후(武侯)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1]

3. 왕맹의 정치와 개혁

357년 부견이 대진천왕(大秦天王)에 즉위하며 인재를 찾던 중, 신하의 추천으로 왕맹을 등용했다. 부견은 왕맹과 대화를 나누고 그를 삼국 시대 제갈량에 비견하며 매우 존경하였다. 부견의 정책과 전략 대부분은 왕맹에게서 나왔다.[3]

왕맹은 처음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시작했으나, 수년 동안 승진을 거듭하여 경조윤(京兆尹), 이부상서(吏部尚書),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산기상시(散騎常侍), 사례교위(司隷校尉) 등 요직을 역임하며 중책을 맡았다. 부견의 귀족들은 왕맹의 중용에 불만을 품었으나, 왕맹은 법으로 엄격히 다스렸고 부견의 지지를 받아 개혁을 추진했다.[3]

왕맹은 승상으로서 전진의 정부를 효율성과 정직성의 모범으로 조직했다. 364년 부등(苻騰) 옹주공이 반란을 일으켜 처형당하자, 왕맹은 부견에게 부숭의 남은 네 형제도 죽일 것을 제안했지만 부견은 거절했다. 왕맹은 통치 능력뿐만 아니라 군사적 재능도 보였다. 366년 부견은 그를 양안(楊安), 요창(姚萇)과 함께 진(晉)나라의 형주(荊州)를 성공적으로 급습하도록 파견했다.

372년 6월, 왕맹은 승상(丞相), 중서감(中書監), 상서령(尚書令), 태자태부(太子太傅), 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거기대장군(車騎大将軍), 청하군후(清河郡侯)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8월, 장안(長安)에 도착하자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가 추가되었다. 왕맹은 여러 차례 상소하여 사퇴 의사를 전달했지만, 부견은 왕맹 이외에는 이러한 중책을 감당할 자가 없다고 답하며 사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국가의 내외 모든 정무는, 사안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모두 왕맹에게 귀속되었다. 왕맹의 정치는 공정하여, 녹을 받고도 직무를 다하지 않는 자를 파면하고, 은퇴하여 세상에 쓰이지 않던 인재를 발굴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외부적으로는 군비를 정비하고, 내부적으로는 유학을 중시하였다. 농업과 양잠을 장려하고, 염치를 가지고 교화에 힘썼다. 죄 없는 자가 처벌받는 일이 없었고, 재능 없는 자가 임명되는 일이 없었다. 이로써 여러 가지 업적이 모두 번성하였고, 백관은 그에게 복종하였다. 이때 군사는 강해지고 나라는 부유해지며 태평성대에 가까워졌다. 이러한 것은 모두 왕맹의 공이었다.[3]

부견은 왕맹에게 “경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게으름 피우지 않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 일하고 있다. 마치 문왕이 태공(태공망)을 얻은 것과 같다."라고 칭찬했고, 왕맹은 "신이 어찌 고대 성인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부견은 “내가 보기에는 태공이 그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왕맹을 높이 평가했다.[3] 부견은 항상 태자 부홍(苻宏)과 장락공 부비(苻丕)에게 “너희들이 왕공(왕맹)을 섬기는 것은 나를 섬기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왕맹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3]

3. 1. 중농주의와 법치주의

왕맹은 문벌 귀족을 억누르고 내정과 법제를 정비하는 데 힘썼다. 현인을 발탁하여 중상주의보다 중농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등 전진의 중국 왕조화를 다방면으로 진행하였다. 또한 수도 장안에서 각지로 이어지는 도로를 정비하고 도로 양쪽에 나무를 심어 전진의 치안을 크게 개선했다. 이러한 왕맹의 정책 덕분에 전진은 국력이 강해져 오호십육국시대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왕맹은 유교에 기반한 교육을 보급하고, 호적 제도를 확립했으며, 도로를 정비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정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저족의 세력을 억제하고 여러 민족 간의 화합을 도모했다. 그는 중농주의로의 전환, 관료 기구와 법제의 정비를 통해 국가 제도를 확립하고, 오호십육국 시대에 보기 드문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

3. 2. 인재 등용과 민족 화합

왕맹은 부견이 대진천왕에 즉위한 후 등용되어 전진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부견은 왕맹과 대화를 나눈 후 그를 제갈량에 비견하며 유비의 심정을 알겠다고 할 정도로 신뢰했다. 왕맹은 부견의 정책과 전략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단기간에 여러 요직을 거치며 중책을 맡았다. 귀족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왕맹은 법치주의를 통해 엄격하게 문제를 해결했고, 부견의 지지를 받아 개혁을 추진했다.

왕맹은 문벌 귀족을 억누르고, 현인을 발탁하며, 중농 정책을 추진하는 등 전진의 중국 왕조화를 이끌었다. 또한 도로 정비와 수목 식재를 통해 치안을 개선하여 전진의 국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전진은 오호십육국 시대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366년, 왕맹은 농서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동진을 격파했다. 369년에는 전연 공격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370년에는 10만 병력을 이끌고 전연을 멸망시켰다. 372년, 왕맹은 승상에 올라 국가 대사를 총괄하며 전진의 행정을 효율적이고 정직하게 운영했다. 그는 부패를 척결하고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여 사회 질서를 확립했다.

왕맹은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나 366년 진나라 형주를 성공적으로 급습하고, 367년에는 전진과 전량 사이의 갈등을 해결했다. 367년 말 부견의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맹은 부류를 격퇴하고 다른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369년 환온의 전연 공격 당시, 왕맹은 전진이 전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전진군 파견을 이끌어냈다. 이후 전연이 약속을 어기자, 왕맹은 6만 군대를 이끌고 전연을 공격했다. 그는 모략을 통해 전연의 내부 분열을 유도하고, 370년 낙양을 점령한 후 호관과 진양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모용평이 이끄는 30만 대군에 맞서 왕맹은 뛰어난 전략으로 승리하여 전연을 멸망시켰다.

왕맹은 유교 교육 보급, 호적 제도 확립, 도로 정비, 농업 장려 등 내정에 힘쓰고, 저족 세력을 억제하며 민족 간 화합을 도모했다. 군사적으로는 이엄 토벌, 부류 등의 반란 진압, 전연 토벌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전연 토벌에서는 6만 군사로 40만 대군을 격파하여 전연을 멸망시켰다. 왕맹의 이러한 업적은 전진을 오호십육국 시대 최고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그는 무묘육십사장(武廟六十四將)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3. 3. 교육 진흥과 도로 정비

왕맹은 문벌 귀족을 억누르고 내정을 정비하며 법제를 정비하는 데 힘썼다. 현인을 발탁하고 중상(重商)보다는 중농(重農) 정책을 추진하는 등 전진의 중국 왕조화를 이끌었다.[1] 또한 수도 장안에서 각지로 이어지는 도로를 정비하고 도로 양쪽에 나무를 심어 전진의 치안을 크게 개선했다.[1] 이러한 왕맹의 정책으로 전진의 국력은 강해졌고, 전진은 오호십육국시대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기도 했다.[1]

4. 평가와 영향

왕맹은 오호십육국 시대를 통틀어 굴지의 정치가로 알려져 있으며, 후조의 재상 장빈과 비교되기도 하였으나, 공적을 비하자면 왕맹이 더욱 뛰어났다.[1]

4. 1. 당대와 후대의 평가

왕맹은 오호십육국 시대를 통틀어 뛰어난 정치가로 알려져 있으며, 후조의 재상 장빈과 비교되기도 했지만, 업적을 비교하면 왕맹이 더 뛰어났다.[1]

372년, 부견은 왕맹을 장안으로 불러 다시 재상으로 삼았다. 왕맹의 능력은 매우 뛰어나 부견이 직접 정무를 볼 필요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사마광은 왕맹의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1]

:"왕맹은 기개가 강하고 총명하며, 성실하고 단호하고, 청렴하고 엄정했으며,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았다. 그는 무능한 관리들을 파면하고, 인맥이 없어 낮은 직책에 머물던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했다. 백성들이 밭을 갈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도록 감독했고, 군대의 훈련도 강화했다. 각 관리들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했고, 형벌은 모두 죄에 합당했다. 그 결과, 나라는 부강해지고 무적이 되었다. 전진이 가장 잘 다스려진 시대였다."[1]

375년 여름, 왕맹은 병에 걸렸다. 왕맹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부견은 사면령을 내렸지만, 가을이 되자 왕맹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임종 직전, 왕맹은 부견에게 동진 정벌을 경계하고, 선비(전연 귀족)와 강이 앞으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부견은 이러한 유언을 듣지 않고 383년 가을 동진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으나, 같은 해 겨울 비수 대전에서 크게 패배하여 전진은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394년 멸망했다.[1]

4. 2. 부견과의 관계

왕맹은 부견에게 매우 중요한 신하였다. 371년, 왕맹은 장천희에게 서신을 보내 전진에 복종할 것을 설득했다.[4] 부견은 왕맹을 전연의 옛 영토였던 6개 주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왕맹은 그곳에서 황제와 같은 권한을 행사했다. 372년, 부견은 왕맹을 다시 재상으로 삼았다. 당시 왕맹의 능력은 뛰어나 부견이 직접 정무를 볼 필요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4]

사마광은 왕맹이 기개가 강하고 총명하며, 성실하고 단호하고, 청렴하고 엄정했으며, 시비를 분명히 알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무능한 관리들을 파면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했다. 백성들이 밭을 갈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도록 감독했고, 군대의 훈련도 강화했다. 그 결과, 전진은 부강해지고 잘 다스려졌다.[4]

375년 왕맹은 병이 들었고, 죽기 직전 부견에게 동진 정벌을 경계하고, 선비족(전연 귀족)과 강족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부견은 이 유언을 듣지 않고 383년 동진을 공격했다가 패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전진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4]

왕맹은 저족 관료들로부터 부당한 탄압을 자주 받았는데, 이는 한족 출신인 왕맹이 자신들에게 명령하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견의 왕맹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참언한 자가 처벌받았다.[4] 부견의 아우 부융은 왕맹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높이 평가했다.[4]

부견은 왕맹의 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지만, 몇 가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견은 선비족 모용수와 강족 요장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우대했고, 왕맹은 이들이 국가의 재앙이 될 것이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동진 공격에도 반대했지만, 부견은 결국 남정을 강행하여 패배했다. 이를 계기로 전진에서는 여러 부족들의 반란과 독립이 잇달았고, 부견은 패전 2년 후 요장에게 살해되었다.[4]

부견의 공적 대부분은 왕맹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것으로 평가된다.[4]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375
[2] 서적 十六国春秋
[3] 서적 長安大街、夾樹楊槐、下走朱輪、上有鸞栖、英彦雲集、誨我萌黎 晋書
[4] 서적 苻堅載記下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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