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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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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융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항복하여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다. 신라 문무왕에게 굴욕을 겪고 백제 부흥 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이후 웅진도독부와 신라의 갈등 속에서 웅진도독부 축출 후 요동에서 백제 유민을 통치하다가 뤄양에서 사망했다. 융이 태자였는지, 부여효가 태자였는지에 대한 기록의 차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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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5년 출생 - 예식진
    예식진은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에 투항하여 의자왕을 당나라에 이끌고 귀의했으며, 그의 가문은 웅진 지역의 토착 호족으로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 682년 사망 - 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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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사막은 당나라 이전 의학을 집대성하고, 의학 저서 《비급천금요방》과 《천금익방》을 저술했으며, 건강 유지법과 의사 윤리를 강조한 중국의 의학자이다.
부여융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부여융
한자 표기扶餘隆
로마자 표기Buyeo Yung
출생615년
출생지사비성
사망682년
사망 원인노환
매장지낙양 북망산
부여 능산리 고분군
국적백제
당나라
작위백제의 왕태자 (644년 ~ ?)
후임부여효
작위 2백제군공 (664년 ~ 677년?)
후임 2(대방군왕으로 승격)
작위 3대방군왕 (677년 ~ 682년)
서훈광록대부(문산관)
보국대장군(무산관 추증)
자녀부여문선
부여덕장
부모의자왕
가문부여씨

2. 생애

부여융은 의자왕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선(善)과 의(義)를 따랐다고 한다.[6] 637년(무왕 38년) 당 태종에게 조공 사신으로 다녀왔으며,[7] 644년(의자왕 4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같은 해(654년) 봄, 큰 가뭄에도 불구하고 이듬해(655년) 2월에 태자를 위해 궁궐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개축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 결국 의자왕 말년에 태자는 부여효로 교체되었다.

660년 음력 7월,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는 웅진성으로 피신했다. 이 틈을 타 의자왕의 차남 부여태가 왕을 칭하자, 의자왕의 적손 부여문사와 함께 항복하였다. 중국 기록에서는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 대피한 태자를 융이라고 하여[8] 무엇이 맞는지 명확하지 않다. 항복 과정에서 김법민(훗날 문무왕)에게 얼굴에 침을 맞는 굴욕을 당했는데, 이는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법민의 누이 고타소랑이 죽은 탓이었다.[9] 웅진성으로 도주한 의자왕 일행도 예군(禰軍)과 예식(禰植) 형제의 배반으로 잡혀오면서[10] 백제는 멸망했다.

660년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으로 웅진도독부가 고립되자 663년 손인사(孫仁師)와 부여융은 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견되었다.[14] 663년 6월(음력),[15] 복신이 부여풍에게 처형당하는 등 부흥군의 내부 분열을 틈타 나·당 연합군은 주류성을 공격했다. 유인원, 손인사, 문무왕은 육군을, 유인궤, 두상(杜爽),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었다. 663년 8월(음력),[16] 백강 전투에서 왜선 400척을 불사르는 대승을 거두고 주류성도 함락시켜 백제 부흥군을 완전히 토벌하였다.[16]

664년(인덕 원년) 부여융은 칙사 유인원의 주재로 신라의 김인문, 김천존과 화친을 맹약했다.[17] 665년 유인원이 다시 칙사로 와서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 회맹을 주선하여 옛 땅 일부에 대한 지배를 용인받았다.[19] 그해 10월(음력) 웅진도독이 되었고,[18] 백제군공에 봉해지고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馬韓道安撫大使)에 임명되어 유민들을 통치하였다.[6]

그러나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완패하여 당나라 장수였던 부여융은 다시는 한반도에 돌아오지 못했다. 677년(의봉 2년) 광록대부(光綠大夫) 태상원외경(太常員外卿) 사지절(使持節) 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임명받아 요동에서 백제 유민들을 억압했다.[23] 682년(영순 원년) 68세의 나이에 뤄양에서 병사해 북망산에 묻혔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받았다.[6]

2. 1. 왕자 시절 및 백제 멸망

의자왕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조용했으며 (善)과 (義)를 따랐다.[6] 637년(무왕 38년) 당 태종에게 조공 사신으로 다녀왔다.[7] 644년(의자왕 4년)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의자왕 말년에 부여효로 교체되었다.

644년 (의자왕 4년), 태자가 되었다. 의자왕은 같은 해 14년(654년) 봄 국내의 큰 가뭄에도 불구하고 이듬해(655년) 2월, 태자를 위해 궁궐을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개축했다.

660년 음력 7월, 나·당 연합군이 몰려와서 수도 사비성이 포위되자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는 웅진성으로 대피하였다. 이 틈을 타 의자왕의 차남 부여태가 외람히 왕을 칭하자 의자왕의 적손 부여문사와 함께 성을 나가 항복하였다. 중국 기록에서는 의자왕과 같이 웅진성으로 대피한 태자를 한결같이 융이라고 하여[8] 무엇이 맞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때 김법민(훗날 문무왕)에게 얼굴에 침을 맞으며 엎드리는 굴욕을 당했는데,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법민의 누이 고타소랑이 죽은 탓이었다.[9] 웅진성으로 도주한 의자왕 일행도 예군(禰軍)과 예식(禰植) 형제의 배반으로 잡혀오면서[10] 백제는 패망했다.

같은 해 20년(660년) 7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을 때 항복했다. 이 때 신라의 문무왕은 융을 말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너의 아버지는 예전에 나의 여동생을 죽이고 그 시체를 옥중에 묻었다. 나의 마음을 20년 동안 상하게 했다.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다"고 꾸짖었다고 한다.[1]

2. 2. 백제 부흥운동 진압

660년 백제가 멸망했으나 부흥 운동으로 웅진도독부가 고립되면서 662년 당나라 조정은 웅진도독 유인원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유인궤는 이곳을 지켜야 고구려도 무너뜨릴 수 있다며 증원군을 요청했다.[13] 이에 663년 손인사(孫仁師)와 부여융이 7,000명을 이끌고 파견되었다.[14]

663년 6월(음력),[15] 명장 복신이 부여풍에게 처형당하는 등 부흥군의 내부 분열을 틈타 나·당 연합군은 그들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공격했다. 유인원, 손인사, 문무왕은 육군을 통솔하고 유인궤, 두상(杜爽),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었다. 663년 8월(음력),[16] 백강 전투에서 왜선 400척을 불사르는 대승을 거두고 주류성도 함락시켜 백제 부흥군을 완전히 토벌하였다.[16]

2. 3. 웅진도독 활동과 최후

664년(인덕 원년) 칙사 유인원의 주재로 신라의 김인문, 김천존과 화친을 맹약했다.[17] 665년 유인원이 다시 칙사로 와서 신라 문무왕과 취리산(就利山) 회맹을 주선하여 옛 땅 일부에 대한 지배를 용인받았다.[19] 이때 1도독부 7 51을 획정하였다.[20]

그해 10월(음력) 대방주자사(帶方州―) 겸 검교웅진도독 유인궤가 표를 올려 부여융은 웅진도독이 되었고,[18] 이내 백제군공에 봉해지고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馬韓道安撫大使)에 임명되어 유민들을 통치하였다.[6] 직후에 유인궤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서 666년(건봉 원년) 고종의 봉선(封禪)에도 참여하였다.

악화되던 나당관계가 고구려 멸망 후 표면화되면서 웅진도독부와 신라는 전투를 벌였고, 결국 672년(함형 3년)에 웅진도독부는 신라에 의해 축출되었다.[21] 웅진도독부는 676년(상원 3년) 고구려의 성이었던 건안성(建安城)에 재설치되어 서주(徐州)와 연주(兗州) 등에 있던 백제 유민들도 옮겨갔다.[22]

677년(의봉 2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가 완패하여 당나라 장수였던 부여융은 다시는 한반도에 돌아오지 못했다. 대신 광록대부(光綠大夫) 태상원외경(太常員外卿) 사지절(使持節) 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임명받아 요동에서 백제 유민들을 억압했다.[23] 682년(영순 원년) 68세의 나이에 뤄양에서 병사해 북망산에 묻혔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받았다.[6]

3. 미궁의 마지막 태자

중국 기록에는 부여융이 태자이자 맏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부여효가 태자이자 맏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상반된다. 이 때문에 크게 세 가지 설이 대립하고 있다.


  • 융이 태자이며 맏아들이라는 설
  • 효가 태자이며 맏아들이라는 설
  • 효가 태자이며 셋째 아들 이하라는 설

3. 1. 융이 태자이며 맏아들설

융이 태자이며 맏아들이라는 설은 중국의 각종 기록과 《삼국유사[24]를 우선시한다. 〈대당평백제국비〉와 〈당유인원기공비〉는 당대의 기록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높다. 물론 이 기록들은 승자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삼국사기》 역시 승자의 기록을 기반으로 하였고, 시기는 오히려 12세기로 늦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가 오류라고 한다. 부여융이 615년생이라는 점도 이 설을 뒷받침한다. 정리하면, 융은 644년 태자에 책봉된 이래 그 자리가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25][26]

3. 2. 효가 태자이며 맏아들설

《삼국사기》를 우선한 설이다. 《삼국사기》가 신라사를 제외하고는 상당수 중국의 기록을 원전으로 했음에도 굳이 태자를 융에서 효로 고치고 부여문사가 사비성에서 얘기하는 상대도 부여융으로 설정했다. 융의 항복 시기도 의자왕보다 앞서며 〈김인문전〉에서도 태자를 효라 한다.[27] 중국의 기록은 태자가 누구인지 잘 몰랐거나 효를 태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융의 태자 책봉 기사에 대한 설명은 다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 융의 태자 책봉 기사는 효의 오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효가 태자였다.[28]

# 644년 융이 태자로 책봉되기는 하였으나 의자왕 말년에 정국 변동이 일어나 효로 교체되었다.[29]

3. 3. 효가 태자이며 삼남 이하설

융은 64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의자왕 말년에 효로 교체되었다고 한다.[30]

4. 평가

부여융은 당나라 장수로서 백제의 유민들을 통치하고 백제 부흥운동을 토벌했기 때문에 의자왕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사료를 검토했을 때, 부여융에 맞서 부흥운동에 참여한 자들은 공통적으로 과거 부여융과 다툼이 있었거나[26] 웅진도독부를 당의 지배기구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31] 그러나 한편에서는 부여융이 단지 당나라의 지배정책을 수행했을 뿐 악의는 없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32]

5. 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무왕? ~ 641, 재위: 600~641
조모선화공주
부왕의자왕599년 ~ 660, 재위: 641~660
모후은고[33]
장남부여문사의자왕의 맏손자는 명확하나 아버지가 부여융인지 부여효인지 불분명
손자부여경부여융의 맏손자는 확실하나 아버지 불명확
차남부여덕장부여융의 차남 이하는 분명하나 형제 유무 불명확
손녀부여태비
동생부여태의자왕의 차남
동생부여효
동생부여연
동생부여풍무왕의 아들일 가능성 존재
동생부여용
동생부여충승(扶餘忠勝)
동생부여충지
관계 불명부여문선(扶餘文宣)[34]


6. 대중문화

참조

[1] 서적 『三国史記』
[2] 서적 『旧唐書』『資治通鑑』
[3] 서적 『旧唐書』『三国遺事』
[4] 서적 倭人のルーツと渤海沿岸 [[星雲社]] 1997-12-01
[5] 서적 《[[당회요]]》, 《[[통전]]》
[6] 웹사이트 부여융묘지명 http://gsm.nricp.go.[...]
[7] 서적 《[[구당서]]》3권 본기 제3 태종 이세민下 정관 11년
[8] 서적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9] 서적 《[[삼국사기]]》5권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
[10] 논문 백제 유민 예씨일족 묘지명에 대한 단상 한국사학회 2012
[11] 서적 《신당서》111권 열전 제36 소정방
[12] 서적 《구당서》〈백제전〉, 《신당서》〈백제전〉, 《삼국사기》
[13] 서적 《신당서》108권 열전 제33 유인궤
[14] 서적 《구당서》〈백제전〉, 《신당서》〈백제전〉, 《삼국사기》〈백제본기6〉
[15] 서적 《[[일본서기]]》27권 [[천지천황]] 2년
[16] 서적 《구당서》84권 열전 제34 유인궤
[17] 서적 《삼국사기》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4년
[18] 서적 《자치통감》201권 당기 제17 고종 인덕 원년
[19] 서적 《삼국사기》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5년
[20] 서적 《삼국사기》37권 잡지 제6 지리4 백제
[21] 서적 《삼국사기》36권 잡지 제5 지리3 신라
[22] 서적 《자치통감》202권 당기18 고종 의봉 원년
[23] 서적 《구당서》199권上 열전 제149上 백제
[24] 서적 《삼국유사》1권 제1기이 태종춘추공
[25] 논문 백제 부여융 묘지명에 대한 검토 국사편찬위원회 1995
[26] 간행물 의자왕 후예들의 과거와 현재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2004
[27] 서적 《삼국사기》44권 열전 제4 김인문
[28] 논문 백제왕위계승고 역사학회 1959
[29] 논문 해동증자 백제 의자왕 한국인물사연구소 2005
[30] 간행물 백제 의자왕대의 정치 변동에 대한 검토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2004
[31] 논문 당과 백제 유민의 웅진도독부 인식의 변화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2
[32] 서적 신편한국사 2002
[33] 서적 《일본서기》26권 [[제명천황]] 6년
[34] 논문 백제국 의자왕 회손녀 태비 부여씨 묘지 백제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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