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장 (낭중령)
1. 개요
왕장(王臧)은 《시경》에 능통하여 전한 경제 때 태자소부를 지냈으며, 한무제 때 낭중령을 역임했다. 무제가 유학을 숭상하고 왕장과 조관을 등용했으나, 두태후의 반대로 인해 결국 자결했다. 그는 기원전 140년부터 기원전 139년까지 전한의 낭중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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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9년 사망 -
비리아투스
비리아투스는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에 맞서 루시타니아 부족을 이끈 지도자로, 게릴라 전술로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으나 배신으로 암살당했으며 현재 포르투갈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
기원전 139년 사망 -
조관 (전한)
전한의 유학자 조관은 무제에 의해 어사대부에 임명되었으나, 두태후의 견제로 탄핵받고 자결하였다. -
전한 사람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
전한 사람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관료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관료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2. 생애
《시》를 익혀 경제 때 태자소부를 지냈으나, 면직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제는 왕장을 불러들여 숙위를 맡겼고, 왕장은 승진을 거듭하여 한 해만에 낭중령이 되었다. 이때 무제는 유학을 숭상하기로 하여, 역시 신공의 밑에서 수학한 조관을 불러들여 어사대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노자를 숭상하였던 두태후는 무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곧 왕장과 조관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무제를 꾸짖었다. 결국 왕장과 조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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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은 경제 때 태자소부를 지냈으나 면직되었고, 무제 즉위 후 어사대부에 임명되었으나 두태후의 반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제는 왕장을 낭중령에 임명하였으나, 두태후의 반대로 왕장 또한 조관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태후는 노자를 숭상하여 유학을 숭상한 무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왕장과 조관을 비판했고, 결국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1. 조관
경제 때 태자소부를 지냈으나, 면직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제 즉위 후 유학을 숭상하여, 왕장과 함께 신공에게서 수학한 조관을 어사대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노자를 숭상하였던 두태후는 무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곧 왕장과 조관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무제를 꾸짖었다. 결국 조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2. 무제
무제는 왕장을 불러들여 숙위를 맡겼고, 왕장은 승진을 거듭하여 한 해만에 낭중령이 되었다. 이때 무제는 유학을 숭상하기로 하여, 역시 신공의 밑에서 수학한 조관을 불러들여 어사대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노자를 숭상하였던 두태후는 무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곧 왕장과 조관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무제를 꾸짖었다. 결국 왕장과 조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 두태후
두태후는 노자를 숭상하였는데, 유학을 숭상하기로 한 무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곧 왕장과 조관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무제를 꾸짖었고, 결국 왕장과 조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 전한의 역대 구경
| 전한의 역대 낭중령(광록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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