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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 (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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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수는 원나라의 문인으로,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에게 길러졌다. 1270년 몽골 귀족 학교에 들어가 쉬헝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친왕부 문학, 제형안찰부사, 태자빈객, 영록대부를 역임했다. 이후 한림직학사, 대사농승, 세조실록 편찬 총재, 한림학사 승지, 지제고, 수국사를 거쳐 1313년 귀향하여 이듬해 사망했다. 저서로 『국통리합표』, 『목암문집』 등이 있으며, 문장은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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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 (원나라)
기본 정보
요수의 초상
요수의 초상
이름요수 (姚燧)
단보 (端甫)
시호문헌 (文獻)
출생1238년
사망1313년
국적원나라
민족한족 (漢族)
출신지하내 (河內, 현재의 허난성 친양시)
묘소요수 묘 (姚文獻公墓)
관직
주요 관직예부상서 (禮部尙書)
태자첨사 (太子詹事)
집현대학사 (集賢大學士)
봉작초국공 (楚國公)
생애
주요 활동문학가
사학가
정치가
서예가
가족
아버지요추 (姚樞)
아들요수 (姚綬)
손자요충 (姚翀)
요광효 (姚廣孝)
작품
저서《목암집 (牧庵集)》
《중암집 (中庵集)》
기타
서예송설체 (松雪體)

2. 생애

요수는 3세에 아버지 야오거를 여의고 쑤먼에 있던 백부 야오수에게 맡겨졌다. 1270년 (지위안 7년) 몽골 귀족 학교에 들어가 쉬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친왕부의 문학, 제형안찰부사, 1308년(지다 원년) 태자빈객, 1309년 (지다 2년) 영록대부, 한림직학사·대사농승, 『세조실록』 편찬 총재, 한림학사 승지·지제고·수국사 등을 역임하였다. 1313년 (황경 2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이듬해 1314년 (연우 원년)에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요수는 3세에 아버지 야오거를 여의고 쑤먼에 있던 백부 야오수에게 맡겨졌다.[1] 1270년 (지위안 7년) 몽골 귀족 학교에 들어가 저명한 학자 쉬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1]

2. 2. 관직 생활

1270년(지위안 7년) 몽골 귀족 학교에 들어가 쉬헝에게 배웠다. 후에 친왕부의 문학이 되었고 지위안 연간에는 제형안찰부사를 역임하였다. 1308년(지다 원년)에는 태자빈객이 되었으며, 1309년(지다 2년)에는 영록대부를 수여받았다. 그 후 한림직학사·대사농승과 『세조실록』 편찬의 총재를 맡았다. 한림학사 승지·지제고·수국사를 역임하였다.

2. 3. 은퇴와 죽음

1313년 (황경 2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314년 (연우 원년)에 사망하였다.[1]

3. 저작

国統離合表|국통리합표중국어

牧庵文集|목암문집중국어 36권

요수의 문장은 "굉사(閎肆)하고 해흡(該洽)하며, 호방(豪)하면서도 방탕하지 않다" 즉, 기력이 넘치면서도 문체는 탄탄하며 "서한의 풍"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동시대의 장양호는 "재기가 종횡무진한 점은 고금 제일"이라고 평했다. 황종희도 요수의 문장을 논하며 "명대 작가들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라고 단정한다. 원곡의 작시에도 손을 대어 노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1]

기정의(寄征衣)
욕기군의군불환(欲寄君衣君不還)그대에게 옷을 보내려 하나 그대는 돌아오지 않네
불기군의군우한(不寄君衣君又寒)그대에게 옷을 보내지 않으니 그대는 또 춥겠지
기여불기간(寄與不寄間)보낼까 말까 하는 사이
첩신실만난(妾身實萬難)첩의 몸은, 실로 만 가지 어려움에 있네


4. 평가

요수의 문장은 "굉사(閎肆)하고 해흡(該洽)하며, 호방(豪)하면서도 방탕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즉, 기력이 넘치면서도 문체가 탄탄하며 "서한(西漢)의 풍"이 있다는 것이다. 장양호(張養浩)는 "재기가 종횡무진한 점은 고금 제일"이라고 칭송하였고, 황종희(黃宗羲)는 요수의 문장이 "명대(明代) 작가들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라고 단정하였다. 원곡(元曲) 작시에도 능하여 노치(盧摯)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 1. 작품 예시

요수(姚燧)의 문장은 "굉사(閎肆)하고 해흡(該洽)하며, 호방(豪)하면서도 방탕하지 않다"는 평을 받는다. 즉, 기력이 넘치면서도 문체는 탄탄하며 "서한(西漢)의 풍"이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의 장양호(張養浩)는 "재기가 종횡무진한 점은 고금 제일"이라고 평했다. 황종희(黃宗羲)도 요수(姚燧)의 문장을 논하며 "명대(明代) 작가들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라고 단정했다. 원곡(元曲) 작시에도 손을 대어 노치(盧摯)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기정의(寄征衣)
욕기군의군불환(欲寄君衣君不還)그대에게 옷을 보내려 하나 그대는 돌아오지 않네
불기군의군우한(不寄君衣君又寒)그대에게 옷을 보내지 않으니 그대는 또 춥겠지
기여불기간(寄與不寄間)보낼까 말까 하는 사이
첩신실만난(妾身實萬難)첩의 몸은, 실로 만 가지 어려움에 있네


참조

[1] 문서 지금의 중국 허난 성 뤄양(洛陽)이다.
[2] 문서 지금의 중국 랴오닝 성 차오양(朝阳)이다.
[3] 서적 고려사 권제34 세가제34 충선왕 5년(1314년) 3월
[4] 서적 원사
[5] 서적 목암문집 서문
[6] 서적 명문수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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