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타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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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타울러는 1300년경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나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간 신비주의 설교가이다. 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향을 받아 1330년경부터 스트라스부르에서 설교를 시작했으며, 바젤에서 추방 생활을 하며 "신의 친구"들과 교류했다. 타울러는 강림절 찬송가 "Es kommt ein Schiff, geladen"의 가사를 썼으며, 136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사망했다. 그의 설교는 독일어로 된 훌륭한 설교로 평가받으며, 마르틴 루터에게 영향을 미쳤고, 현대에도 영성 훈련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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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타울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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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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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목사 |
이름 | 요하네스 타울러 |
국적 | 독일 |
직업 | 독일 신비주의 신비주의자, 가톨릭교 설교가, 신학 신학자 |
사망일 | 1361년 6월 16일 |
사망 장소 | 스트라스부르 |
출생일 | 1300년경 |
출생지 | 스트라스부르 |
칭호 | Doctor Illuminatus et sublimis (조명받고 숭고한 박사) |
종교 | |
종교 | 가톨릭교 |
업적 | |
주요 업적 | 가장 중요한 라인란트 신비주의 신비주의자 |
2. 생애
요한 타울러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활동한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신학자이자 설교가였다. 1330년경부터 스트라스부르에서 설교를 시작했으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헨리 수소처럼 주로 여성 신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한 것으로 보인다.[4]
1338년 또는 1339년에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교황 요한 22세와 루이 4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스트라스부르에서 추방되었다. 타울러는 바젤에서 추방 생활(약 1339–1343)을 하며 '신의 친구'(Gottesfreunde)라는 모임과 교류했다. 타울러는 설교에서 신의 친구들을 자주 언급했으며, 노르트링겐의 헨리와 마가렛 에브너의 편지를 통해 이들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4]
타울러는 신의 친구들과 함께 영혼의 상태는 외부 행위보다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신념을 가르쳤으며, 에크하르트보다 더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전파했다.[5]
1343년경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온 후, 타울러는 지진, 화재, 흑사병 등 여러 위기를 겪었지만, 도시를 떠나지 않고 설교와 개인적인 방문을 통해 시민들을 격려했다.[11]
그는 생애 마지막 25년 동안 쾰른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설교했다. 그의 설교 중 상당수는 중고 독일어의 쾰른 방언으로 남아있으며, 1350년대에는 그로에넨달의 루이스브룩의 요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타울러는 강림절 찬송가인 Es kommt ein Schiff, geladen의 가사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6] 그는 1361년 6월 16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사망하여 도미니크 교회에 묻혔으며, 뇌프 사원에 묘비가 남아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요한 타울러는 1300년경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1304년 스트라스부르 시의회 의원이었던 핀크바일러(현재 핀크바일러 거리)의 니콜루스 타울러 또는 타벨러의 아들로 추정된다.[1] 18세쯤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으며, 스트라스부르의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타울러에게 큰 영향을 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1313년에서 1326년 사이에 스트라스부르에서 활동했는데, 둘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2] 타울러는 수도원에서 관례적인 8년 과정의 학업을 하면서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쾰른의 도미니크 대학으로 갔고, 파리의 생 자크 대학으로 갔다가 결국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쾰른에서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더 높다.[3]2. 2. 설교 활동과 신비주의
요한 타울러는 1330년경부터 스트라스부르에서 설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 도시에는 도미니크 수녀원 8곳과 베긴 공동체 70여 곳이 있었는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헨리 수소처럼 타울러의 설교도 대부분 성스러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4] 타울러의 설교 약 80편은 대부분 수녀원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4]1338년 또는 1339년,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교황 요한 22세와 루이 4세 간의 갈등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추방되었다. 타울러는 1339년경부터 1343년경까지 바젤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신의 친구'(Gottesfreunde)라는 경건한 성직자와 평신도 모임과 교류했다. 그는 설교에서 신의 친구들을 자주 언급했으며, 노르트링겐의 헨리와 도미니크 수녀 마가렛 에브너 간의 편지를 통해 이들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헨리를 통해 마그데부르크의 메흐틸트의 『신의 빛의 흐름』을 접하기도 했다.
타울러는 신의 친구들과 함께 영혼의 상태는 외부 행위보다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신념을 가르쳤다. 그는 에크하르트보다 더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전파했다.[5]
1343년경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온 타울러는 여러 위기를 겪었다. 1346년에는 지진과 화재가 발생했고, 1347년 말부터 1349년까지는 흑사병이 도시를 휩쓸었다. 많은 이들이 도시를 떠났지만, 타울러는 남아 설교와 개인적인 방문으로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을 격려했다.
타울러는 생애 마지막 25년 동안 쾰른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설교했다. 그의 설교 중 상당수는 중고 독일어의 쾰른 방언으로 남아있다. 신뢰할 만한 기록에 따르면, 1350년대에 그로에넨달의 루이스브룩의 요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타울러는 강림절 찬송가인 Es kommt ein Schiff, geladen의 가사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텍스트는 1450년 이전에 작성된 필사본으로, 타울러가 자주 방문했던 스트라스부르 도미니크 수도원 "St. Nicolaus in undis"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사는 그의 다른 저작과 문체적으로 유사하다.[6]
타울러는 라틴어와 독일어로 된 공식적인 논문을 남기지 않았지만, 80편의 설교가 전해진다. 그의 설교는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수집되기 시작했으며, 14세기 필사본 3권은 타울러가 바젤 망명 생활을 마치고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온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타울러의 설교는 1498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인쇄된 후, 1508년 아우크스부르크, 바젤(1521년, 1522년), 할버슈타트(1523년), 쾰른(1543년), 리스본(1551년) 등에서 재판되었다. 라틴어 번역본은 1548년과 1553년 쾰른에서 처음 인쇄되었다. 19세기에는 율리우스 함베르거(프랑크푸르트, 1864)와 페르디난트 베터(베를린, 1910, 더블린/취리히, 1968 재판)가 편집본을 출판했다.[7]
타울러의 설교는 독일어로 된 가장 훌륭한 설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헨리 수소의 설교만큼 감정적이지 않고, 에크하르트의 설교만큼 사변적이지 않지만, 매우 실용적이며 도덕적, 영적 삶의 심오한 문제를 다각도로 다루었다.
타울러는 아말릭 드 베나, 요한 반 루이스브루크와 함께 중세 시대의 기독교 만인 구원론자 중 한 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8] "모든 존재는 아들로서 동일한 탄생을 통해 존재하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 그들의 본래의 근원, 즉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그의 가르침이 그 근거로 인용된다.[9] 그러나 타울러는 승천 대축일 첫 번째 설교에서 "악인은 천국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 저주받은 자의 가장 큰 고통은 그들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확신이다"라고 언급하여 만인 구원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10]
2. 3. 스트라스부르 귀환과 말년
타울러는 1343년경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여러 위기를 겪었다. 1346년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큰 지진과 화재가 발생했다. 1347년 말부터 1349년까지는 흑사병이 도시를 휩쓸었다. 도시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만, 타울러는 남아 설교와 개인적인 방문을 통해 공포에 질린 시민들을 격려했다.[11]타울러는 말년의 25년 동안 꽤 넓은 지역을 여행했다. 쾰른을 여러 번 방문했고, 그의 설교 중 상당수는 쾰른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설교가 중고 독일어의 쾰른 방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믿을 만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1350년대 어느 시점에 그로에넨달의 루이스브룩의 요한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강림절 찬송가인 Es kommt ein Schiff, geladen의 가사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찬송가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50년 이전에 작성된 필사본으로, 타울러가 자주 방문했던 스트라스부르 도미니크 수도원 "St. Nicolaus in undis"에서 발견되었다. 이 가사는 그의 다른 저작들과도 몇 가지 문체적 유사성을 보인다.[6]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타울러는 1361년 6월 16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사망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도미니크 교회에 묻혔으며, 뇌프 사원에는 그를 기리는 묘비가 남아 있다.
타울러가 "오버란트의 신의 친구"에게 개종하고 훈계를 받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11]
3. 사상과 신학
타울러는 라틴어와 모국어(독일어)로 된 공식적인 논문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80편의 설교를 통해 전해진다.
타울러의 설교는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수집되기 시작했는데, 14세기 필사본 3권은 그가 바젤에서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온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타울러의 설교는 1498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인쇄되었고, 150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재판되었다. 이후 에크하르트 등의 내용이 추가되어 바젤(1521년, 1522년), 할버슈타트(1523년), 쾰른(1543년), 리스본(1551년)에서 출판되었다. 라틴어 번역본은 1548년과 1553년 쾰른에서 처음 인쇄되었다. 19세기에는 율리우스 함베르거(프랑크푸르트, 1864)와 페르디난트 베터(베를린, 1910, 더블린/취리히, 1968 재판)가 편집본을 출판했다.[7]
타울러는 설교로 유명했는데, 그의 설교는 독일어로 된 가장 훌륭한 설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설교는 헨리 수소의 설교만큼 감정적이지 않고, 에크하르트의 설교만큼 사변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실용적이며 도덕적, 영적 삶의 심오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다루었다.
3. 1. 주요 개념
제공된 자료에는 요한 타울러의 주요 개념에 대한 명시적인 정보가 없으므로, 이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전 출력과 동일하게 유지한다.3. 2. 만인 구원론 논쟁
타울러는 아말릭 드 베나, 요한 반 루이스브루크와 함께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 만인 구원론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8] 그의 가르침 중 "모든 존재는 아들로서 동일한 탄생을 통해 존재하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 그들의 본래의 근원, 즉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구절이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인용된다.[9] 그러나 타울러의 다른 설교 구절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승천 대축일 첫 번째 설교에서 "악인은 천국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 저주받은 자의 가장 큰 고통은 그들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확신이다"라고 언급했다.[10]4. 영향과 유산
요한 타울러는 생전에 직접적인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그의 사후 그의 설교와 저술은 종교 개혁과 독일 신비주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타울러의 사상은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루터는 타울러의 설교집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의 저술을 "순수하고 견고한 신학"이라고 칭찬했다. 루터는 타울러의 영향을 받아 죄인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했다.[1] 타울러의 신비주의적 경향은 또한 경건주의와 같은 후기 개신교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타울러는 또한 독일 신비주의 전통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설교는 중세 후기 독일 신비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타울러의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하인리히 수소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요한 폰 테플과 같은 다른 신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
타울러의 유산은 그의 설교와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여전히 신학, 철학, 영성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남아있다.
5. 저작
타울러는 라틴어와 자국어(독일어)로 된 공식적인 논문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은 80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타울러의 설교는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수집되기 시작했는데, 14세기 필사본 3권은 타울러가 바젤에서 망명 생활을 마치고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온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7]
타울러의 설교는 1498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인쇄되었고, 150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재판되었다. 이후 에크하르트 등의 내용이 추가되어 바젤(1521년, 1522년), 할버슈타트(1523년), 쾰른(1543년), 리스본(1551년)에서 재판되었다. 라틴어 번역본은 1548년과 1553년 쾰른에서 처음 인쇄되었다. 19세기에 율리우스 함베르거(프랑크푸르트, 1864)와 페르디난트 베터(베를린, 1910, 더블린/취리히, 1968 재판)가 편집본을 출판했다.[7]
타울러는 설교로 유명했는데, 그의 설교는 독일어로 된 가장 훌륭한 설교 중 하나로 여겨진다. 헨리 수소의 설교만큼 감정적이지도, 에크하르트의 설교만큼 사변적이지도 않았지만, 매우 실용적이었으며 도덕적, 영적 삶의 심오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다루었다.[8]
타울러는 때때로 아말릭 드 베나 및 요한 반 루이스브루크와 함께 중세 시대의 여러 저명한 기독교 만인 구원론자 중 한 명으로 주장되기도 한다.[9] "모든 존재는 아들로서 동일한 탄생을 통해 존재하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 그들의 본래의 근원, 즉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그의 가르침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인용되기도 한다.[10] 그러나 그의 설교에서 다른 구절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승천 대축일 첫 번째 설교에서 "악인은 천국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 저주받은 자의 가장 큰 고통은 그들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확신이다"라고 언급했다.[11]
5. 1. 현대어 번역
타울러의 설교는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었다.[11]타울러 설교의 현대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 페르디난트 베터, 《타울러의 설교》(베를린: 바이데만, 1910; 사진 복각, 1968): 소수의 필사본에만 기반, 설교의 전례 순서를 따르지 않음. 몇 가지 다른 내용을 제시하지만 출처 주석이 부족하고, 진본이 아닌 설교도 일부 포함.
- E. 위그니, G. 테리, A-L. 코린, 《타울러의 설교: 가장 오래된 독일어 필사본을 기반으로 번역》(파리, 1927–35) 3권: 완전한 프랑스어 번역본.
- 게오르그 호프만, 《요하네스 타울러: 설교》(프라이부르크: 헤르더, 1961; 재판, 아이젠지델른, 1979): 독일어 번역본 제공. 중세 고지 독일어 텍스트의 비판적 판본은 아님.
- 요하네스 타울러, 《설교집》, 피터 프렌스(2015)의 완전한 네덜란드어 번역본. ([http://Taulerpreken.nl Taulerpreken.nl])
타울러 설교의 영어 번역본은 좋은 번역본이 부족하다.
- 에리스 콜리지와 수녀 메리 제인, 《요한 타울러, OP(1300–1361)의 영적 회의》(뉴욕: 헤르더, 1961; 재판 1978): 베터의 설교와 발췌 부분을 자유롭게 번역, 신학적 제목에 따라 재배열.
- 마리아 슈라디, 《요하네스 타울러, 설교집》(뉴욕: 폴리스트 출판사, 1985): 23편의 설교 번역. 중세 고지 독일어가 아닌 호프만의 현대 독일어판에서 번역. 누락과 오류가 있으며 주석도 부족.
이전 영어 번역본들은 라우렌티우스 수리우스의 라틴어 버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 위작을 포함하는 등 문제가 있다.
- 캐서린 윙크워스, 《존 타울러 박사의 역사와 삶, 그의 설교 25편》(런던, 스미스, 엘더, 1857). ([http://www.ccel.org/ccel/winkworth/tauler])
- APJ 크루익생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에 대한 묵상》(런던: 토마스 리차드슨과 아들, 1875) ([http://www.ccel.org/ccel/tauler/meditations])
- JR 모렐, 《그리스도를 따름》(런던: T. 피셔 언윈, 1886) ([http://www.ccel.org/ccel/tauler/following])
- 아서 윌라스톤 허튼, 《내적 길, 존 타울러의 축제 설교 36편》(런던: 메튜엔 & Co, 1901) ([http://www.ccel.org/ccel/tauler/inner_way])
6. 비판적 평가
제공된 자료는 요한 타울러의 생애와 사상, 저작에 대한 연구 문헌 목록이며, 타울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적 평가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주어진 자료만으로는 "비판적 평가" 섹션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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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ymnary.org/[...]
1907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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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John Tauler." The Catholic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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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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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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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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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dervan
[6]
서적
Geistliches Wunderhorn: Große deutsche Kirchenlie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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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Online im Digitalen Mittelhochdeutschen Textarchiv (mhgta)
http://mhgta.uni-tri[...]
[8]
간행물
Apocatastasis
http://www.cce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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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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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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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Apostolic Mission House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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