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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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몬 류이는 1229년 마요르카 섬에서 태어난 중세 카탈루냐 출신의 작가, 철학자, 신학자, 선교사이다. 그는 기사도와 궁정 생활을 경험한 후, 종교적 회심을 통해 이슬람교 개종과 불신자 교화, 세계 최고의 책 저술을 목표로 삼았다. 류이는 '아르스'(Ars)라고 불리는 독창적인 논리 체계를 개발하여, 백과사전적 저술, 철학, 신학, 신비주의, 교육,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저작은 라틴어, 카탈루냐어, 아랍어로 쓰였으며, 특히 카탈루냐어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류이는 선교 활동을 통해 유럽의 언어 연구를 촉진하고, 여러 대학 설립을 지원했으며, 컴퓨터 과학과 선거 제도 분야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847년 복자로 추대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카탈루냐 문학 및 지성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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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몬 류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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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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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복자 |
존칭 접미사 | TOSF |
사망일 | 1315년 3월 25일 또는 |
축일 | 6월 30일 (프란치스코회 제3회) |
공경 대상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팔마 데 마요르카, 마요르카 왕국 (현재의 팔마, 스페인) |
라틴어 표기 | Raimundus/Raymundus Lullus/Lulius/Lullius |
철학자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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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전통 | 륄주의 |
영향을 준 인물 |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데니스 에리우게나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요아킴 데 피오레 아르날두스 데 빌라 노바 마태우스 플라테아리우스 페트루스 히스파누스 이븐 알 무카파 알 파라비 알 가잘리 아비센나 이븐 사빈 알 슈슈타리 |
시대 | 중세 철학 |
지역 | 서양 철학 |
주요 관심사 | 기독교 신학 철학 논리학 수학 |
주요 저서 | 블랑케르나 과학의 나무 아르스 마그나 |
주요 사상 | 륄주의 사상 선거 이론 |
영향을 받은 인물 | 조르다노 브루노 니콜라스 쿠사누스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르네 데카르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피터 오브 리모주 헤이메리크 데 캄포 라몬 시비우다 베르나르도 부일 조지 리플리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 샤를 드 보벨 베르나르 드 라비네타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요한 로이힐린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파라켈수스 존 디 줄리오 파체 얀 아모스 코메니우스 후안 데 수마라가 프랜시스 베이컨 존 윌킨스 조지 달가르노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 요한 하인리히 비스터펠트 조지 허버트 존 던 토머스 트라헌 로버트 보일 프란시스코 데 오수나 후니페로 세라 조셉 페르나우 |
기타 정보 | |
약칭 | TOSF |
2. 생애
라몬 류이는 1232년경 마요르카 섬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카탈루냐 출신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마요르카 왕국의 궁정에서 활동하며 세속적인 삶을 살았으나, 30세 무렵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경험하고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여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후 그는 이슬람교도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고, 이를 위한 저술 활동과 선교사 양성 기관 설립을 목표로 삼았다. 성지 순례 후 아랍어, 라틴어, 철학, 신학 등을 독학했으며, 특히 이슬람 문화와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려 노력했다. 1274년 란다 산에서의 명상 중 영감을 받아 모든 학문과 종교의 진리를 통합적으로 증명하려는 자신의 독창적인 논증 체계인 '술'(Ars)을 창안했다.
류이는 '술'을 바탕으로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마요르카 왕과 교황의 지원을 받아 1276년 미라마르에 선교사 양성을 위한 아랍어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 주요 도시와 북아프리카 지역을 순회하며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고, 이슬람교도 및 유대인과의 철학적 논쟁을 벌이며 선교 활동에 헌신했다. 그의 노력은 1311년 비엔 공의회에서 주요 대학에 히브리어, 아랍어, 아람어 강좌를 개설하는 결정으로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다만, 유대인의 강제 개종이나 추방을 주장하는 등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활동도 하였다.
80세가 넘은 고령에도 선교 활동을 이어가던 류이는 1314년 세 번째 북아프리카 선교 여행을 떠났고, 1315년경 튀니스에서 이슬람교도들의 공격을 받아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중세 유럽의 중요한 철학자, 신학자, 선교사이자 카탈루냐어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1229년 아라곤 연합 왕국의 하이메 1세는 발레아레스 제도의 마요르카 섬을 침공하여 이전 알모아드 칼리파조(무와히드 왕조) 세력을 몰아내고 섬을 정복했다.[77][78] 이는 아라곤 왕관 영토 확장의 일환이었으며, 하이메 1세는 1231년 팔마 데 마요르카를 수도로 하는 마요르카 왕국을 세웠다. 이 정복 이후, 류이의 부모는 이베리아 반도 본토의 카탈루냐 지방에서 식민 활동의 일환으로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한 바르셀로나 출신의 부유한 귀족 가문이었다. 당시 마요르카 섬은 여전히 이슬람교도(사라센인)가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대인들도 문화 및 경제 활동에 참여하며 기독교도와 공존하는 독특한 사회였다.
류이는 마요르카 왕국 성립 직후인 1232년경[71]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하이메 1세의 궁정에서 시동으로 지내며 기사도와 시 작법 등 궁정 신하로서 필요한 소양을 익혔다. 이후 하이메 1세의 차남인 자우메 2세의 호위가 되었고, 1291년 자우메 2세가 마요르카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행정 장관 격인 세네스찰(집사)로서 왕의 상담역을 맡기도 했다.
1257년, 25세 무렵 류이는 블랑카 피카니와 결혼하여 아들 도메네크와 딸 막달레나, 두 자녀를 두었다.[11][12][13][14][15][16]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은 시절 트로바도르(음유시인)처럼 방탕하고 세속적인 생활을 보냈다고 훗날 스스로 회고했다.
2. 2. 종교적 회심과 독학
1263년경, 30세였던 류이는 마요르카 왕국의 시종(또는 집사장)으로 일하며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가치 없는 노래와 시를 짓는 등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17]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노래를 쓰던 중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게 되었다. 그는 자서전 『Vita coaetanea』("동시대인의 삶")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라몬은 아직 젊은 나이에 마요르카 왕의 시종이었을 때, 가치 없는 노래와 시를 짓고 다른 방탕한 짓을 하는 데 매우 열중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어리석은 사랑으로 사랑했던 한 여인을 위해 속어로 노래를 지어 쓰려고 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른쪽을 보았고, 공중에 매달린 듯한 모습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린 채 보았다.[17]
이 환시는 총 다섯 번[18] (혹은 여섯 번[79]) 나타났으며, 이를 계기로 류이는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신을 섬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18][79]
# 하느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사라센인(이슬람교도)을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
# 이교도들의 오류를 논박하고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책을 저술한다.
# 이교도 지역에서 활동할 선교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외국어 교육 기관(수도원) 설립을 추진한다.
이러한 결심 후, 류이는 성 프란치스코 데 아시시의 삶을 본받아 자신의 재산을 정리했다. 일부는 처자식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처분했으며,[19] 로카마두르의 성모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등 여러 성지를 순례했다.[19] 순례 도중 바르셀로나를 거쳐 파리 유학을 고려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단념하고[79] 마요르카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는 이전의 가족과 직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19] 대신 아랍어와 아랍 문화를 배우기 위해 무슬림 노예를 사들여 약 9년 동안 공부에 매진했다.[19][79] 또한 라틴어, 자유 교양(자유 7과), 기독교 및 이슬람 신학과 철학 등을 독학하며 방대한 지식을 쌓았다.[20][79] 이 시기 그는 상대적으로 고독 속에서 학문 연구와 명상에 전념했다.[20]
1270년에는 마요르카에 '미라마르'로 알려진 성 삼위일체 은둔소를 설립하기도 했다.[21] 1271년에서 1274년 사이에는 무슬림 사상가 알가잘리의 논리학 요약본과, 명상을 통해 진리를 찾는 과정을 담은 방대한 저서 『Llibre de contemplació en Déu』(『하느님에 대한 묵상』)을 집필했다.
1274년, 푸이그 데 란다 산의 은둔소에서 머물던 류이는 마침내 자신이 저술해야 할 위대한 책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신의 계시를 받게 된다. 그는 이 복잡하고 독창적인 사상 체계를 자신의 '예술'(Ars)이라고 명명했으며, 이는 이후 그의 삶과 학문 활동 전반을 이끄는 핵심적인 동기가 되었다.
2. 3. 저술 활동

1271년부터 1274년 사이에는 이슬람 사상가 알 가잘리의 이론 개요와 묵상을 통해 진리를 찾는 안내서인 『신의 관상에 대한 서』를 저술했다. 1274년, 류이에게 아랍어를 가르쳐주었던 무어인 노예가 사망한 후, 그는 마요르카 섬의 란다 산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술(Ars)의 요약』 초고를 작성했다. 이후 란다 산의 수도원에 들어가, 이슬람교도(사라센)에 대한 복음 선교가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1275년에는 프란체스코회 소속 신학 전문가들이 류이의 저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했다. 1276년, 당시 왕자였던 마요르카 왕 자우메 2세의 재정적 지원과 교황 요한 21세의 승인을 받아, 마요르카 섬 발데모사의 미라마르에 아랍어 학원을 설립했다. 이는 13년 전 세웠던 세 가지 목표 중 하나를 실현한 것으로, 13명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아랍어와 류이의 "술"(Ars)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류이가 1287년 마요르카를 떠난 후 적임자를 찾지 못해, 이 학원은 설립 12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1276년부터 1287년까지 류이는 주로 마요르카 섬의 미라마르와 남프랑스의 몽펠리에에서 머물렀다. 1283년에는 몽펠리에에서 소설 『에바스트와 알로마와 브란켈나에 대한 서』를 저술했다. 그는 꾸준히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1287년 이후에는 지중해 전역을 순회하며 선교 활동에 힘썼다. 같은 해 교황청을 방문했으며,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를 만나 자신의 "술" 체계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했다. 1290년에는 프란체스코회 총장 레이먼드 드 고프레디의 요청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수도원에서 "술"을 가르쳤고, 1292년에는 교황 니콜라 4세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
2. 4. 선교 활동
류이는 무슬림과 분열주의 기독교인을 개종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럽 내에서 아랍어 및 기타 언어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22] 그는 미래의 선교사를 체계적으로 양성할 특별 대학 설립을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교황, 여러 왕들, 그리고 공작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 등 유럽 전역을 순회했다.[24]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276년, 마요르카 왕의 지원을 받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을 위한 언어 학교가 미라마르에 세워졌다.[25]
이미 60세를 넘긴 나이에도 류이는 선교 활동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고, 북아프리카에서 첫 번째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291년경에는 튀니스로 가서 사라센인들에게 설교하고 철학적 논쟁을 벌였으며, 이후 파리에서 잠시 머문 뒤 다시 선교사로서 동방으로 향했다.[26] 1293년에는 북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1294년 남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요양 후 고향인 마요르카 섬으로 돌아왔다.
1295년에는 로마에 머물며 자신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학문의 나무'(Tree of Science영어) 집필에 착수했다. 1297년부터 1299년까지는 파리에 머물면서 『사랑의 철학의 나무』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게 헌정했으며, 이 시기 파리 대학교에서 둔스 스코투스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류이는 유럽 내 유대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유대교가 가톨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바르셀로나의 랍비 슈로모 이븐 아데레트, 살레르노의 모세 벤 슐로모 등과 논쟁을 벌였다.[80]
1300년부터 약 1년간 마요르카 섬에 머물렀다가, 1302년에는 지중해 동부의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등 선교 여정을 이어갔다. 1303년부터 1305년까지 제노바와 파리에 체류했다. 1304년경에는 튀니스를 두 번째로 방문하여 튀니스 왕에게 여러 편지를 보냈으나, 이 시기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다.[27][28]
1307년에는 북아프리카로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났고, 1308년 유럽으로 돌아와서는 무슬림의 개종은 무력이 아닌 기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했다. 같은 해 피사에서는 『결합술』을 저술했다. 1309년에는 다시 파리를 방문하여 『아베로에스주의 반론』을 포함한 30편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당시 파리에서는 이슬람 철학자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라틴 아베로에스주의(Averroism)가 유행했는데, 류이는 저술 활동 외에도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직접 논쟁을 벌였다.
류이의 오랜 숙원이었던 언어 교육 강화는 1311년 비엔 공의회에서 결실을 보았다. 그의 제안에 따라 히브리어, 아랍어, 칼데아어(아람어) 강좌를 볼로냐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파리 대학교, 살라망카 대학교, 그리고 교황청 소재 대학(로마 대학교) 등 5개 주요 대학에 설치하도록 결정되었다.[27] 그러나 그가 주장했던 "술"(Ars, 그의 논리 체계)의 공식적인 사용은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류이는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의 추방을 주장했으며, 이는 이후 일부 유럽 군주들의 유대인 추방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29]
1313년부터 1314년까지는 남이탈리아의 메시나에 머물렀다. 1314년부터 1315년에는 세 번째로 이슬람교도 지역 전도를 위해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때 아라곤 왕 하이메 2세의 친서를 현지 술탄에게 전달하고 자신의 저작을 헌상하기도 했다.
류이의 마지막 선교 활동은 1315년 12월부터 1316년 3월 사이 튀니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이곳에서 선교 활동 중 이슬람교도들에게 돌을 맞는 등 공격을 당했고, 이때 입은 부상이 원인이 되어 고향인 마요르카 섬으로 돌아온 직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마요르카로 돌아오기 전에 사망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의 정확한 출생 및 사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84세에서 90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장수한 것이다.
3. 라몬 류이의 '아르스'(Ars)
라몬 류이의 '아르스'(Arsla)는 그의 사상의 중심이자 모든 저작의 기초를 이루는 보편적 논리 체계이다. 이는 조합 과정을 통해 활성화되는 일반 원칙에 기반하며, 문자 및 다이어그램을 독특하게 사용하여 대수적 또는 알고리즘적 특성을 지닌다. '아르스'는 신과 창조에 대한 명제(예: 신은 삼위일체이다)를 증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종종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명제를 공식화하고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누적적으로 작동한다.
류이는 수십 년에 걸쳐 '아르스'를 발전시켰으며, 그 과정은 크게 사원기(1274-1290)와 삼원기(1290-1308) 두 단계로 나뉜다. 각 단계는 여러 변형을 포함하며,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또한, 삼원기 전환 직전에는 "상관관계(correlatives)"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의 존재론적 사유와 '아르스'의 논리 구조를 뒷받침했다.[33][34]
'아르스'는 후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4세기에는 파리나 발렌시아 등지에서 류이 학파가 형성되었고, 15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그의 사상이 퍼져나갔다. 16세기 후반 스페인에서는 국왕 펠리페 2세의 지원 아래 류이의 저작이 수집되었으며, 이냐시오 데 로욜라,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등 당대의 주요 신비주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류이의 '아르스'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면서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그의 사상은 오컬티즘이나 비밀결사 등에서 사용하는 도구로 여겨지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서는 수리논리학, 기호학, 도상학 등의 분야에서 류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관련 연구 기관 설립과 학술 활동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카탈루냐 문화권에서 류이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바르셀로나 대학교나 발렌시아 대학교 등에서 그의 사상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장 영향력 있는 카탈루냐 저술가로 평가받는다. 영어가 "셰익스피어의 언어", 프랑스어가 "몰리에르의 언어", 스페인어가 "세르반테스의 언어", 독일어가 "괴테의 언어"라고 불리는 것처럼, 카탈루냐어는 종종 "류이의 언어"라고 불린다. 스페인의 과학 연구 고등 평의회(CSIC)는 로고 마크에 류이의 『학문의 나무』를 채용하고 있으며, 카탈루냐어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공적 기관인 라몬 류이 연구소(Institut Ramon Llull)가 2002년에 설립되었다.
3. 1. 사원기 (1274-1290)
류이의 예술(라틴어: Ars|아르스lat)는 그의 사상의 중심이자 모든 저작의 기초를 이룬다. 이것은 조합 과정을 통해 활성화되는 일반 원칙들에 기반한 보편적 논리 체계로, 신과 창조에 대한 명제(예: 신은 삼위일체이다)를 증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종종 '예술'은 이러한 명제를 질문과 답변 형태로 공식화하며(예: Q: 신에게 삼위일체가 있는가? A: 그렇다.), 반복적 과정을 통해 누적적으로 작동한다. 신에 대한 진술을 증명하려면, 신의 본질적 속성 각각에 대해 신의 본성에 관한 진술을 증명해야 한다(예: 선은 세 겹, 위대함은 세 겹, 영원함은 세 겹, 권능은 세 겹 등).류이의 시스템은 문자 및 다이어그램을 독특하게 사용하여 대수적 또는 알고리즘적 특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각 새로운 버전을 설명하는 새로운 책을 저술했다. '예술'의 발전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며, 각 단계에는 여러 변형이 있다. 첫 번째는 사원기(四元期, 1274-1290), 두 번째는 삼원기(三元期, 1290-1308)이다. 이 용어는 앤서니 보너(Anthony Bonner)가 만들었다.
사원기 단계의 주요 저작은 『진실을 발견하는 간결한 기술』(Ars compendiosa inveniendi veritatemlat, 약 1274년)과 『증명하는 기술』(Ars demonstrativalat, 약 1283년)이다. 『증명하는 기술』에는 12개의 주요 도표가 포함되어 있다. 16개의 원리 또는 '존엄성'(dignitateslat, 신성한 속성) 세트가 시스템 작동의 일반적 기반을 이루는데, 이는 첫 번째 도표(도표 A)에 포함되며, B부터 R까지의 문자가 할당되어 있다. 나머지 도표들은 사용자가 이 원리들을 가지고 진술의 진실을 상세히 증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도표 T는 "관계 원리"(principia relativalat, 예: 소수, 다수, 평등)를 포함하며, 여기에도 문자가 할당되어 있어 중요하다. 이후 '기술'은 가능한 모든 원리 조합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각적 보조 장치처럼 문자 조합을 나열한다. 도표 S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영혼의 능력(의지, 지성, 기억)과 그 행위(의지하기, 이해하기, 기억하기)를 보여준다. 도표 S는 1290년 이후 '기술'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버전에서도 류이는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영혼의 능력이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점이 류이의 시스템을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와 구별하는 특징이다. 고전 논리는 영혼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류이가 보기에는 신학적 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3. 2. 삼원기 (1290-1308)
류이의 '예술'(라틴어: ''Ars'') 발전 과정에서 두 번째 주요 단계는 삼원기(三元期, 1290-1308)로 구분된다. 이 용어는 앤서니 보너가 처음 사용하였다.류이는 1290년에 발표한 두 저작, ''진실 발견의 기술''(Ars inventiva veritatislat)과 ''사랑의 기술''(Art amativalat)을 통해 삼원기 단계를 시작했다. 이 시기 류이는 '예술' 체계를 수정하여 주요 개념을 나타내는 그림(figure)의 수를 4개로 줄였다.
삼원기 '예술'의 주요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그림에서는 신의 본질적 속성을 나타내는 원리를 9가지(선함, 위대함, 영원함, 힘, 지혜, 의지, 덕, 진실, 영광)로 축소했다.
- 그림 T는 사물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원리를 기존 15가지에서 9가지(차이, 일치, 대립, 시작, 중간, 끝, 다수, 평등, 소수)로 줄였다.
- 이전 단계의 특징이었던 원리들의 조합을 통한 논증 과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삼원기 단계는 1308년에 '예술'의 최종 버전으로 평가받는 ''최후의 일반 기술''(Ars generalis ultimalat)이 발표되면서 완성되었다. 같은 해에 류이는 이 최종판의 내용을 요약한 ''간결한 기술''(Ars brevislat)도 저술했다.
3. 3. 상관관계
류이(Llull)는 그의 사상 체계인 '예술'(Arsla)이 삼원기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 "상관관계(correlatives)"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이 개념은 ''Artis demonstrativae의 그림에 대한 강의''(Lectura super figuras Artis demonstrativaela, c.1285-7)라는 저작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그의 존재론적 사유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33]상관관계 이론에 따르면, 존재의 모든 수준에서 모든 것은 행위자(agent), 수동자(patient), 행위(act)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구조를 가진다. 예를 들어, 신성한 속성 중 하나인 '선(goodness)'은 '선을 행하는 것'(행위자), '선을 받는 것'(수동자), 그리고 '선을 행함'(행위)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류이는 이러한 상관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라틴어 접미사를 활용하는 독창적인 체계를 개발했다. 예를 들어 '선'을 의미하는 bonitas|보니타스la는 bonificans|보니피칸스la(선을 행하는), bonificatus|보니피카투스la(선을 받는), bonificare|보니피카레la(선을 행하다)라는 형태로 파생되어 표현될 수 있었다.
이 상관관계 개념은 류이 사상에서 여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첫째, 신 안에 있는 다양한 신성한 속성들(선, 위대함, 영원함 등)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동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리적 기초가 되었다. 즉, 각 속성은 고유한 상관관계를 가지면서도 모두 동일한 세 가지 구조(행위자, 수동자, 행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는 '예술'의 핵심 원리인 조합적 작용, 예를 들어 '신 안에서 선은 위대함이고 위대함은 선이며, 선은 영원함이고 영원함은 선이다'와 같은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했다. 셋째, 삼위일체 교리를 증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각 신성한 속성이 세 가지 상관관계를 가지며, 이러한 속성들이 모여 신성을 이루므로, 신성 자체도 삼위일체적 구조를 가진다고 설명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육신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에도 이 개념이 적용되었다. 류이는 능동적 상관관계와 수동적 상관관계가 각각 형상(form)과 질료(matter)에 해당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삼위일체적 전개가 현실의 모든 차원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34]
4. 기타 저작
라몬 류이는 자신의 사상 체계인 '예술(Ars)'을 전파하고 기독교 선교에 활용하기 위해 방대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당시 학술 언어였던 라틴어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과 선교 대상을 고려하여 모국어인 카탈루냐어와 아랍어로도 글을 썼다. 특히 카탈루냐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자국어 저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38]
그의 저작은 이슬람 사상의 영향을 보여주며,[35][36][37] 대화, 나무 도표, 잠언, 소설 등 다양한 형식을 포괄한다. 이러한 다양한 형식의 저작들은 그의 사상을 보다 폭넓은 독자층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이었다.
4. 1. 이슬람의 영향과 초기 작품
라몬 류이의 조합 역학은 중세 아랍 점성가들이 사용한 장치인 자이르자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다.[35][36] 또한 그의 '예술'(Ars)이 신성한 속성에 의존하는 방식은 이슬람 전통에서 알라의 99가지 이름을 묵상하는 것과 유사성을 보인다.[37] 류이가 이슬람 지적 전통에 익숙했다는 점은 그의 첫 작품(1271-1272년)이 알 가잘리의 논리학 요약집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38]류이는 라틴어, 카탈루냐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로 저작 활동을 했다. 현재까지 진본으로 확인된 저작은 265편이며, 그 외에 류이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위서(僞書)도 400여 편에 달한다. 당시 학술 저작은 라틴어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류이는 대부분의 작품을 카탈루냐어로 집필했다. 이로 인해 그는 라틴어 외의 자국어로 저술한 최초의 중세 기독교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이는 단테 알리기에리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보다 앞선 시도였다. 또한 선교 대상이었던 이슬람교도를 위해 그들의 언어인 아랍어로도 저술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아랍어로 쓰인 저작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초기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에 대한 책』'''(1276-1278년)은 마요르카 섬에서 저술되었으며, "류이의 신비주의뿐만 아니라 전체 철학이 요약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문학 작품으로는 교육적 내용을 담은 설화인 '''『에바스트와 아로마와 브란켈나에 대한 책』'''(『브란켈나』, 1283년-1285년)이 잘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그의 초기 저작으로는 『신의 관상에 대한 서』(1271-1273년), 『이교도와 세 현인에 대한 서』(1274-1276년) 등이 있다.
4. 2. 대화
라몬 류이는 자신의 사상 체계인 '예술'을 설명하고 전파하기 위해 경력 초창기부터 대화 형식을 활용했다.[39] 이는 '예술'을 통해 세계 모든 사람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선교적 목적과 연결된다. 류이는 '예술'을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당시 대중적인 장르였던 대화 형식을 실험적으로 사용했다.그의 초기이자 가장 잘 알려진 대화 작품은 1270년대에 카탈루냐어로 쓰여지고 후에 라틴어로 번역된 『이교도와 세 명의 현자 책』이다. 이 책은 숲 속에서 이교도 한 명과 세 명의 현자(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가 만나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류이의 사상 원리가 새겨진 잎을 가진 나무들을 발견하고, 지혜의 여인으로부터 나무의 속성과 사용법을 배운다. 세 현자는 이 나무(류이의 '예술')를 이용해 각자 자신의 신앙을 이교도에게 설명하고 증명하려 시도한다. (다만, 일부 이슬람 원리는 류이의 방식으로 증명되지 못한다고 묘사된다.) 결국 이교도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류이는 이 외에도 많은 대화 형식의 글을 썼다. 말년에는 파리 대학교 예술학부에서 논란이 된 사상들에 대해 우려하며,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논쟁" 형식의 글을 쓰기도 했다.[40][41] 그는 종종 자신을 기독교 현자 캐릭터로 설정하여 대화에 등장시켰는데, 1311년에 쓰인 『매우 높고 심오한 문제에 관한 책』이 그 예이다.
류이는 라틴어, 카탈루냐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저술 활동을 했다. 그의 작품으로 진본 265편과 위서(僞書, 다른 사람이 류이의 이름으로 쓴 책) 400편 가량이 전해진다. 당시 학술 저작은 라틴어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류이는 대부분의 작품을 모국어인 카탈루냐어로 집필했다. 이 때문에 그는 라틴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한 중세 최초의 기독교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이탈리아어로 쓴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나 독일어로 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경-1328경)보다 앞서 자국어로 저술한 선구자로 여겨진다. 또한 선교 대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이 사용하는 아랍어로도 글을 썼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1276년부터 1278년까지 마요르카 섬에서 쓴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에 대한 책』은 "류이의 신비주의뿐만 아니라 그의 전체 철학이 요약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문학 작품 중에서는 교육적인 내용을 담은 설화 『에바스트와 아로마와 브란켈나에 대한 책』(『브란켈나』)이 잘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그가 아랍어로 쓴 저작들은 모두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4. 3. 나무 도표
류이는 그의 많은 저작을 나무 구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예를 들어, 《이방인과 세 명의 현자들의 책(Book of the Gentile and the Three Wise Men)》과 같은 작품에서 나무의 "잎"은 《예술(Art)》의 조합 요소(원리)를 나타낸다. 다른 작품에서는 일련의 나무들이 《예술》이 어떻게 모든 ("백과사전적") 지식을 생성하는지 보여준다. 《과학의 나무》(1295-6)는 세속적이고 도덕적인 것에서 신성하고 교육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16개의 나무로 구성되어 있다.[42] 각 나무는 7개의 부분(뿌리, 줄기, 가지, 잔가지, 잎, 꽃, 열매)으로 나뉜다. 뿌리는 항상 류이의 신성한 원리로 구성되며, 거기에서 나무는 해당 범주의 현실의 차별화된 측면으로 성장한다.[43]4. 4. 잠언
류이는 지역 사람들이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카탈루냐어로 여러 권의 잠언집을 저술했다. 1302년에 쓰여진 천 개의 잠언집은 신학, 철학, 도덕, 사회생활, 실생활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격언들을 엮은 것이다. 류이 잠언의 주요 특징으로는 간결함, 교훈적인 단순함, 그리고 음악성을 꼽을 수 있다.4. 5. 소설

류이는 당대의 문학적 전통(서사시, 기사도 로망스)을 활용하여 자신의 '예술'(Ars)을 표현하는 서사 산문을 썼다. 이는 '예술'의 복잡할 수 있는 내용을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소설은 ''블랑케르나''(c.1276-83)이다. 이 작품은 『에바스트와 아로마와 브란켈나에 대한 책』으로도 불리며, 교육적인 내용을 담은 설화이다.
''펠릭스''(1287-9) 역시 주목할 만한 작품이지만, 생전에는 널리 읽히지 않았고 카탈루냐어로만 쓰였다. 이 소설은 일종의 교양 소설 형식을 띠고 있으며, 주인공 펠릭스가 "경이의 책"을 쓴 아버지의 권유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이는 류이의 '과학의 나무'가 지닌 백과사전적 범위를 반영한다), 펠릭스는 여행을 통해 신, 천사, 하늘, 원소, 식물, 광물, 동물, 인간, 낙원, 지옥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 그의 여정은 한 수도원에서 끝나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겪은 모험담과 아버지의 "경이의 책" 내용을 합쳐 이야기한다.
류이는 라틴어, 카탈루냐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로 글을 남겼다.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작품은 진본 265편과 위서(가탁 문서) 400편에 달한다. 당시 학술 저작은 라틴어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류이는 대부분의 작품을 자신의 모국어인 카탈루냐어로 집필했다. 이는 단테 알리기에리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보다 앞서 자국어로 저술 활동을 한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받으며, 중세 최초로 라틴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한 기독교 철학자로 여겨진다. 또한 선교 대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위해 아랍어로도 저술했다는 점이 특징적이지만, 아쉽게도 아랍어 저작은 현재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1276년부터 1278년 사이 마요르카 섬에서 쓴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에 대한 책』은 "류이의 신비주의뿐만 아니라 전체 철학이 요약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5. 평가 및 영향
라몬 류이의 사상, 특히 그의 독창적인 논리 체계인 '아르스'는 발표 초기부터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류이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1280년대 파리 대학교에서 처음 발표되었을 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으며, 이는 그가 '아르스'를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13세기와 14세기 초 학계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카르투시오회 수도사들이 파리 보베르에서 다수의 류이 관련 필사본을 수집했고, 여러 신학자들이 소르본 도서관에 그의 필사본을 기증했다. 제자 토마스 르 미예지에르는 류이의 작품을 정교하게 편집하여 프랑스 여왕에게 헌정하기도 했다.[45]
그러나 그의 사상은 니콜라스 에이메릭, 장 게르송 등 일부 신학자들에게 비판받기도 했으며, 특정 시기에는 가르침이 금지되기도 했다.[46]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류이의 사상은 후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초기 근대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 중 한 명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류이의 많은 작품을 수집하고 그의 사상을 자신의 신비주의 신학에 통합했다.[47]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은 류이의 저서 여러 권을 출판하여 카탈루냐 외부 지역에 그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으며,[48]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류이의 '아르스'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저서 『조합술(De Arte Combinatoria)』을 저술했다.[50]
한편, 류이의 이름으로 다수의 연금술 문헌이 유통되었으나 이는 후대의 위작으로 밝혀졌다.[54][55] 스페인에서는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으며,[59] 오랜 노력 끝에 184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61][83]
현대에 이르러 류이는 카탈루냐 문학과 지성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그의 저작들은 꾸준히 편집, 출판되고 있으며,[62][63] 프랜시스 예이츠 등의 연구를 통해 기억술과 인지 시스템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재조명받았다. 또한 그의 사상은 예술, 문학, 컴퓨터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조명받고 있다.[64][65][67][69] 류이는 중세 기독교 사상과 근대 사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간의 대화를 시도한 선구적인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5. 1. 중세
1200년대 말부터 1300년대 초에 걸쳐, 라몬 류이는 문자열을 생성하는 기계 장치를 통해 세계의 진리를 얻는 방법인 '룰루스의 술법', 즉 알스 마그나를 고안했다. 이는 걸리버 여행기의 라퓨타에 등장하는 더 엔진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부르바키 수학사』에서는 기호의 기계적인 조작만으로 올바른 추론을 얻으려는 라이프니츠의 수학적 발상이 라몬 류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언급한다.
류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여러 직함과 별칭을 얻었다.
구분 | 내용 |
---|---|
직함 | 철학자, 신학자, 신비가(신비 사상가), 선교자(선교사), 백과사전가, 교육자, 작가(저술가), 시인, 기사, 궁정 시인, 의사, 약학자, 수학자, 어학 연구자 |
별칭 | 몽상가, 유토피안(이상주의자), 광인(광기에 찬 사람), 견신 박사, 카탈루냐 문학의 시조, 마법사 |
그의 저술에서는 성경, 코란, 탈무드뿐만 아니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오, 아에기디우스 로마누스, 생 빅토르의 리카르두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등 다양한 사상가들을 인용했다. 또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대전』과 같은 교회 박사들의 저작도 참고했다. 반면, 이븐 시나 (아비센나), 마테우스 플라테아리우스,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 등의 의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류이는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년경-1274년)보다 약 10살 어렸다. 활동 내용과 영향력 면에서 류이는 아퀴나스와 비견될 만하다. 두 사람 모두 성경과 교부 문헌에 정통했으며, 이슬람 사상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류이는 중세 기독교 사상과 근대 사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더 나아가 기독교 사상과 이슬람교, 유대교 등 다른 종교 사상 간의 대화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사후인 1376년, 가톨릭 심문관인 니콜라우스 에이메릭스는 류이의 100가지 이론과 사상을 잘못된 것으로 비난했다. 같은 해인 1376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공식적으로 류이의 20개 저서를 비난했고[81], 이윽고 로마 교황 바오로 4세가 그레고리오 11세의 비난을 추인했다[82]. 한편, 1416년에는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그레고리오 11세의 비난을 철회했다[81]. 이처럼 사후에 로마 교황의 비난을 받았지만, 생전의 류이는 가톨릭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프란치스코회에서 류이는 순교자로 여겨졌으며, 1857년에는 로마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로 추대되었다[83]. 류이의 축일은 6월 30일이며, 프란치스코회 제3회에 의해 기념되고 있다[83].
5. 2. 초기 근대
1360년대에 종교 재판관 니콜라스 에이메릭은 아라곤에서 룰리즘(류이의 사상)을 비난했다. 그는 1376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로부터 칙서를 얻어 류이의 가르침을 금지하려 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같은 시기 파리에서는 신학자 장 게르송 또한 룰리즘에 반대하는 여러 글을 발표했으며, 결국 신학부에서 류이의 '아르스'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공식 문서가 발행되기도 했다.[46]
사후인 1376년, 가톨릭의 심문관이었던 니콜라스 에이메릭은 류이의 이론과 사상 중 100가지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며 비난했다. 같은 해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공식적으로 류이의 저서 20권을 비난했으며[81], 이후 교황 바오로 4세가 이러한 비난을 재확인했다[82]. 그러나 1416년에는 교황 마르티노 5세가 그레고리오 11세의 비난을 철회하는 등[81], 류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이처럼 사후에 교황청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생전의 류이는 가톨릭 교회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프란치스코회에서는 류이를 순교자로 여겼으며, 1857년에는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로 추대되었다[83]. 류이의 축일은 6월 30일로, 프란치스코회 제3회에서 기념하고 있다[83].
5. 3. 가짜 류이와 연금술
상당수의 연금술 관련 논문이 라몬 류이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 위작 문헌들 중 대표적인 두 가지는 14세기에 만들어진 ''Testamentum''과 ''Liber de secretis naturae seu de quinta essentia''이다.[51]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나 조르다노 브루노와 같은 오컬트 사상가들은 이러한 가짜 류이 문헌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52]실제로 류이에게 귀속된 수많은 연금술 저작들은 모두 위작으로 밝혀졌다.[54] 19세기 이후 진행된 역사적 비판 연구를 통해, 100편이 넘는 방대한 양의 연금술 문헌 전체가 류이의 저작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립되었다.[55] 1980년대까지 과학사 연구자들은 이 문헌들 중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것들이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 사이에 만들어진 위조품이며, 이후 다른 내용들이 덧붙여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20세기 말, 미켈라 페레이라 교수는 이보다 앞선 1332년경에 작성된 원본 텍스트 그룹을 발견했는데, 이 초기 문헌들은 처음부터 류이의 이름을 빌리려는 위작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니었다.[56] 페레이라는 이 원본 저자를 그의 대표작 제목을 따서 'magister Testamenti'라고 명명했다. 이 익명의 저자가 쓴 원작에는 잠정적으로 ''Testamentum'', ''Vademecum'' (Codicillus), ''Liber lapidarii'' (=Lapidarius abbreviatus), ''Liber de intentione alchimistarum'', ''Scientia de sensibilibus'' (=Ars intelectiva; Ars mágica), ''Tratatu de aquis medicinalius'' (=''De secretis naturae''의 초기 형태), ''De lapide maiori'' (=Apertorium), ''Questionario'', ''Liber experimentorum'', 그리고 ''Compendium animae transmutationis metallorum'' (=''Compendium super lapidum''; ''Lapidarium'')의 초기 형태 등이 포함될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초기 핵심 저작들에 다른 글들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페레이라 교수의 연구는 이 초기 연금술 문헌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크게 바꾸었다. 의도적인 위조품이 아니라, 실제 연금술사의 사상, 개성, 삶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페레이라는 ''Testamentum''과 저자가 직접 언급한 다른 저작들에서 정보를 종합하여, 이 익명의 저자가 Ramon de Termensca라는 인물일 것으로 추정했다.[57] 그는 법학이나 인문학 교육을 받은 기사 계급의 마요르카인으로, 행정, 상업, 외교, 치안 등의 분야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몽펠리에에서 의학, 특히 외과 분야의 지식을 습득했으며, 코르푸 섬과 알바니아 지역 도시들에서 활동한 기록이 남아있다. 베라트와 블로러에서는 행정관 또는 백작(capitaneo 또는 comitis) 직책을 맡았고,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를 무대로 나폴리의 로베르 1세와 타란토의 필리포 1세를 위해 상업 및 외교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가짜 류이 연금술 저작 중 하나인 ''Liber de secretis natura sive de quinta essentia'' 역시 실제 저자는 라몬 데 테르멘스이다. 그는 1330년에서 1332년 사이에 이 책의 여러 초기 판본을 저술했다. 하지만 현재 가장 유명한 판본은 1360년에서 1380년경 카탈루냐 지역의 위조자들이 라몬 류이의 이름으로 퍼뜨린 것으로, 이것이 유일하게 인쇄되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58]
5. 4. 이베리아 부흥과 시복
한편, 스페인에서는 톨레도 대주교인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이 개혁 사업을 위해 류이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시스네로스는 여러 지식인과 편집자를 동원하여 대학에 강좌를 개설하고 류이의 작품을 출판했다.[59] 1633년에는 마요르카에 류이 사상 교육의 중심지인 라 사피엔시아 교황청이 설립되었다.사후인 1376년, 가톨릭 심문관 니콜라우스 에이메릭스는 류이의 100가지 이론과 사상을 잘못된 것으로 비난했다. 같은 해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류이의 20개 저서를 공식적으로 비난했고[81], 이후 교황 바오로 4세가 이를 추인했다.[82] 그러나 1416년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그레고리오 11세의 비난을 철회했다.[81] 이처럼 사후에 교황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생전의 류이는 가톨릭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프란치스코회에서는 순교자로 여겨졌다.[83]
17세기에 라 사피엔시아 출신의 프란치스코회는 류이의 시성을 로마에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은 18세기에 재개되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60] 마침내 184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61][83] 그의 축일은 6월 30일로 지정되었으며,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서 기념한다.[61][83]
5. 5. 20세기와 21세기
류이는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카탈루냐 문학사 및 지성사 모두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1906년부터 1950년까지 'Comissió Editora Lul·liana'는 류이가 카탈루냐어로 작성한 작품을 편집하는 프로젝트(Obres de Ramon Llull, ORL)를 이끌었다. 1957년에는 류이의 라틴어 작품 편집을 위해 독일 프라이부르크에 라이문두스-룰루스-연구소(Raimundus-Lullus-Institut)가 설립되었으며, 이 시리즈(Raimundi Lulli Opera Latina, ROL)는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62] 1990년에는 'Nova Edició de les Obres de Ramon Llull'(NEORL)을 통해 카탈루냐어 텍스트 작업이 재개되었다.[63] 영어권 학계에서는 프랜시스 예이츠가 기억 체계에 관해 쓴 저서 『기억의 기술』(1966)을 통해 류이가 인지 시스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새롭게 조명받게 되었다.지난 세기 예술과 문학에서 류이의 영향이 나타났으며, 특히 초현실주의, 철학적 판타지, 메타픽션 장르에서 두드러졌다. 살바도르 달리의 연금술적 사고는 라몬 류이의 영향을 받았으며, 달리는 류이의 저서인 『아르스』에 나오는 도표를 자신의 작품인 『철학자들의 연금술』에 통합했다.[64] 1937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류이의 『아르스』를 시를 창작하는 장치로 제안하는 "라몬 류이의 사고 기계"라는 짧은 글을 썼다.[65] 라몬 류이에 대한 다른 주목할 만한 언급으로는 올더스 헉슬리의 단편 소설 『롤리의 죽음』이 있는데, 이는 튀니스에서 돌에 맞아 죽은 류이가 마요르카로 그를 데려가는 제노바 선박에서 벌어진 허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66] 폴 오스터는 자신의 회고록 『고독의 발명』의 두 번째 부분인 『기억의 책』에서 류이를 (레이몬드 럴로) 언급한다. 류이는 또한 시인 존 메이스필드의 어린이 소설 『기쁨의 상자』의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류이의 『아르스』는 때때로 컴퓨터 과학 및 계산 이론의 전조로 인정받는다.[67] 1200년대 말부터 1300년대 초에 걸쳐, 문자열을 생성하는 기계 장치(룰루스의 원반)를 통해 세계의 진리를 얻는 술법(알스 마그나)을 고안했다. 걸리버 여행기의 라퓨타에 나오는 더 엔진은 이것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부르바키 수학사』는 라이프니츠의 수학에서 기호의 기계적인 조작만으로 올바른 추론을 얻는다는 발상이 라몬 류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언급했다. 2001년, 그의 잃어버린 원고인 『아르스 노탄디』, 『아르스 엘렉시오니스』, 『알리아 아르스 엘렉시오니스』가 발견되었고, 이들을 통틀어 『아르스 마그나』(오늘날 어떤 종류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논리 시스템)로 알려지면서,[68] 류이는 또한 선거 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오늘날 보르다 점수와 콩도르세 기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장샤를 드 보르다와 니콜라 드 콩도르세가 수 세기 후에 독립적으로 제안했다.[69]
류이는 철학자, 신학자, 신비가, 선교자, 백과사전가, 교육자, 작가, 시인, 기사, 궁정 시인, 의사, 약학자, 수학자, 어학 연구자 등 다양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또한 몽상가, 유토피안(이상주의자), 광인, 견신 박사, 카탈루냐 문학의 시조, 마법사 등과 같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류이는 저서에서 성경, 코란, 탈무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오, 아에기디우스 로마누스, 생 빅토르의 리카르두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등을 인용했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이교도대전』 등 교회 박사의 저작도 인용했다. 반면, 이븐 시나 (아비센나), 마테우스 플라테아리우스,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 등의 의견을 비판하기도 했다.
류이는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아퀴나스(1225년경-1274년)보다 약 10살 어리며, 활동 내용과 영향력 면에서 아퀴나스와 견줄 만하다. 류이와 아퀴나스 모두 성경과 교부의 사본에 정통했으며, 이슬람 사조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들과 사상을 달리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류이는 중세 기독교 사상과 근대 사상의 가교 역할을 했으며, 나아가 기독교 사상과 이슬람교, 유대교 등 이교 사상 간의 대화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사후인 1376년, 가톨릭 심문관인 니콜라우스 에이메릭스는 류이의 100가지 이론과 사상을 잘못된 것으로 비난했다. 같은 해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공식적으로 류이의 20개 저서를 비난했고[81], 이후 로마 교황 바오로 4세가 이 비난을 추인했다[82]. 그러나 1416년에는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그레고리오 11세의 비난을 철회했다[81]. 이처럼 사후에 로마 교황의 비난을 받았지만, 생전의 류이는 가톨릭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프란치스코회에서 류이는 순교자로 여겨졌으며, 1857년 로마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로 추대되었다[83]. 류이의 축일은 6월 30일이며, 프란치스코회 제3회에 의해 기념되고 있다[83].
6. 라몬 류이 대학교
'''라몬 류이 대학교'''(Universitat Ramon Llullca)는 스페인 카탈루냐 자치주 바르셀로나 주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사립 대학교이자 가톨릭 대학교이다. 1990년 3월 1일에 설립되었으며, 대학의 명칭은 13세기에 활동한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라몬 류이에서 유래했다.
1989년 10월, 4개의 교육 기관이 모여 대학 설립을 추진했으며, 1990년 3월 1일 라몬 류이 대학교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1991년 5월 10일 카탈루냐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대학은 서로 다른 여러 칼리지의 연합체 형태로 운영되며, 대부분의 기관은 바르셀로나 시내에 위치하고 있다. 설립 이후 여러 교육 기관이 추가되었다.
구분 | 기관명 | 설립 연도 | 비고 |
---|---|---|---|
설립 당시 기관 | 라 살레 공학·건축 학교 (La Salle Campus Barcelonaes) | 1903년 | |
사리아 화학 연구소 (Instituto Químico de Sarriáes, IQS) | 1905년 | ||
블랑케르나 재단 (Fundación Blanquernaes) | 1948년 | ||
카탈루냐 철학 사제 학교 (Facultad de Filosofía de la Universidad Ramon Llulles) | 1864년 | 철학과, 인문학과 포함 | |
추가된 기관 | ESADE | 1958년 | 예수회 설립. 경영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포함 |
팔레 타레스 사회 연구 대학 학교 | 1998년 | ||
에브로 관측 조사 연구소 | 1904년 | ||
비달 이 바라케르 재단 | 1964년 | 정신 보건 전문 | |
보르하 생명 윤리 연구소 (Instituto Borja de Bioéticaes) | 1974년 | ||
ESDi 디자인 고등 교육 학교 | 1989년 | ||
철학부 | - | ||
블랑케르나 심리·과학 교육·스포츠 학부 | - | ||
블랑케르나 정보·국제관계 학부 | - | ||
블랑케르나 건강과학부 | - | ||
팔레 타레스 사회 교육·사회 노동 학부 | - | ||
산 이그나시오 관광·호텔 경영 학부 | - | ||
라 사예 통신 기술 공학 대학 학교 | - | ||
라 사예 정보 전자 공학 고등 공과 학교 | - | ||
라 사예 건축 고등 공과 학교 | - | ||
ESDi 디자인 학교 (ESDi School of Design영어) | - | ||
ESADE 비즈니스 스쿨 | - | ||
ESADE 로스쿨 | - | ||
IQS 공학 학교 | - | ||
IQS 경영 학교 | - |
7. 각주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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