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비노 전쟁
1. 개요
우르비노 전쟁은 1516년부터 1517년까지 교황 레오 10세와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 사이에 벌어진 분쟁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작령을 장악하여 자신의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일족이 통치하는 로마냐 공국을 건설하려 했고, 우르비노 공작은 교황의 종주권에 도전하며 자치권을 유지하려 했다. 전쟁은 우르비노 공작의 승리로 끝났지만, 교황 레오 10세는 정치적 어려움과 재정적 손실을 겪었다. 이 전쟁은 이후 코냐크 동맹 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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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비노 공국 -
몬테펠트로가
몬테펠트로 가문은 이탈리아 귀족 가문으로, 카르페냐 영주 가문에서 분파하여 말라테스타 가문과 경쟁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페데리코 3세 다 몬테펠트로 시대에 우르비노를 르네상스 문화 중심으로 발전시켰으나 델라 로베레 가문 단절 후 쇠퇴하여 교황령으로 반환되었다. -
마르케주 -
차우스콜로
차우스콜로는 이탈리아 마르케 지역의 부드러운 돼지고기 소시지로, 어깨살과 삼겹살에 양념을 더해 숙성 및 훈연하여 제조하며, 2009년 유럽 연합의 지리적 표시제 지위를 획득했다. -
이탈리아 전쟁 -
코냐크 동맹 전쟁
코냐크 동맹 전쟁은 1526년부터 1530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주도한 코냐크 동맹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분열 심화, 교황권 쇠퇴,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
이탈리아 전쟁 -
이탈리아 전쟁 (1494년-1498년)
1494년부터 1498년까지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을 차지하려 이탈리아를 침공하며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은 복잡한 정치적, 외교적 배경과 이탈리아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유럽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역사적 배경
보름스 협약(1122)으로 성직자 서임권을 교회가 가져가며 교황의 권위가 상승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11~13세기) 실패, 아나니 사건, 아비뇽 유수, 서방 교회 대분열(1378~1417)을 거치며 교황권은 크게 추락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1414~18)로 서방교회 분열은 해결되었으나, 공의회 수위설이 대두되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이에 로마 가톨릭은 교황청 권위 회복을 시도하였다.
15세기 후반, 교황들은 친족을 중용하는 족벌주의를 통해 출신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들은 명목상 지배령이었던 중북부 로마냐 지역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 행사, 혹은 통합하여 출신 가문의 영지로 만들고자 하였고, 이는 잦은 분쟁을 야기했다. 독립된 자치를 원했던 지역민, 지배 가문을 형성하여 세력을 뿌리내린 지방 호족들은 교황 대리(비카리오)라는 호칭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악정을 일삼아 주민 원성이 높았고, 교황청 조공을 체납하는 등 교황의 명령에 불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메디치 가문과의 갈등 속에서 15세기 유명한 암살 사건인 파치 음모 사건(1478년)을 일으켰던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84)의 이탈리아 중북부 장악 시도는 피렌체 전쟁(1478~80)과 페라라 전쟁(1482~84)으로 좌절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는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통해 로마냐 공국 건설을 시도했으나,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공국은 해체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를 혐오했던 교황 율리오 2세는 족벌주의를 배척하며 로마냐 지역을 교황령에 포함시켜 장악하고자 했다. 그는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처럼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볼로냐와 페루자를 정벌했다.
면죄부 판매로 종교 개혁을 촉발시킨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21)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명목상 교황령인 파르마, 피아첸차, 페라라 등을 장악하고, 메디치 가문 일족이 통치하는 로마냐 공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국을 첫 목표로 삼아, 우르비노 공작을 폐위하고 동생 줄리아노에게 공작위를 주려 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의 간섭을 피하고 협력을 얻고자, 줄리아노와 프랑수아 1세의 이모인 사보이의 필리베르테 공녀를 혼인시켰다.(1515년 2월)
3. 전쟁의 원인
교황 레오 10세와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 사이에는 몇 가지 갈등이 있었다. 우르비노 공작은 전임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 시절에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켰기에 트집 잡힐 만한 일이 많았다. 우르비노 지역민들은 자치권을 유지하려 했고, 우르비노 공작은 이에 동조하며 교황 레오 10세와 대립하였다. 1513년 우르비노 공작은 캉브레 동맹 전쟁(1508~1516)으로 혼란한 이탈리아 상황을 틈타 스스로 페사로의 군주에 오르며 교황의 종주권(宗主權)에 도전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우르비노 공작은 캉브레 동맹 전쟁 중 교황군 지휘관으로 참전했으나, 1511년에 적국인 프랑스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했다. 같은 해 프란체스코 알리도시 추기경을 살해했지만, 당시에는 그의 삼촌인 교황 율리오 2세의 정치적 후광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또한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군에 맞서 이탈리아를 보호하고, 피렌체를 정벌하여 메디치 가문을 복권시키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151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사망하자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잃었다.
1515년 9월 캉브레 동맹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교황군은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에 대패한 후, 교황과 프랑수아 1세는 그해 12월 19일 볼로냐에서 협상을 체결했다. 이때 교황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국에 대한 교황군의 공격에 프랑스가 간섭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았다.
4. 전쟁의 경과
1516년 캉브레 동맹 전쟁이 종료되자 교황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작에게 과거 그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며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우르비노 공작은 교황의 소환에 불응하였고, 교황은 즉시 그를 파문하고 우르비노에서 추방하였다. 1516년 5월 30일, 교황은 조카를 보내 우르비노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추방되었던 우르비노 공작은 1517년 1월 23일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우르비노 탈환을 시도, 교황의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델 몬테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승리한 후 시민들의 환호 속에 재입성에 성공한다.
교황은 로베레를 응징하기 위해 다시 1만의 군사를 고용하여 우르비노로 보냈다. 그런데 지휘관이었던 로렌초 2세 데 메디치가 4월 4일 몬돌포 공성 중에 총상을 입고 토스카나로 퇴각하였다. 이에 교황은 추기경 베르나르도 도비치를 대신 내세웠으나, 도비치는 몬테 임페리알레(현재의 포지본)에서 우르비노군과 격돌해 대패하고 페사로로 후퇴하였다. 전투에서는 계속 로베레가 승리했으나 재정 상황이 악화되어 용병들을 계속 고용할 수 없었다.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교황에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
5. 결과와 영향
1517년 9월, 양측은 조약을 맺었다. 로베레는 우르비노 공작직을 내려놓는 조건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만토바로 후퇴하는 데 합의했다. 우르비노 공작위는 교황의 조카인 로렌초 2세가 차지했으나 1519년 5월 4일에 사망했다. 우르비노 공작위는 로렌초 2세의 딸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상속했으나, 아버지 사망 3주 전에 태어나 실질적인 통치는 불가능했다. 교황 레오 10세가 1521년 12월 1일에 죽자 로베레는 우르비노 공작위를 되찾았다.
우르비노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이 전쟁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명예롭지 못했으며 정치적 어려움을 불러왔다. 이 전쟁에 대해 불만이 있던 세력들이 교황을 독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사전에 발각되어 몇몇 추기경들이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교황청은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이 발생했는데, 전쟁 비용으로 총 800000두카트가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의 영향으로 로베레는 훗날 코냑 동맹 전쟁(1526~1530) 중에 동맹군의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매우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1527년 5월 6일에 로마 약탈이 벌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 이유는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가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21)와 같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과의 악연으로 인해 교황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로베레는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이 주도하여 벌어진 코냑 동맹 전쟁에 열심히 임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전쟁 초반기 이미 밀라노와 롬바르디아가 제국군의 수중에 넘어갔고 동맹국이었던 베네치아와 프랑스가 전쟁에 소극적이었으며 교황은 일방적으로 동맹 탈퇴와 재가입을 반복하여 신뢰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