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브레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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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캉브레 동맹 전쟁은 1508년부터 1516년까지 이어진 이탈리아 전쟁의 일부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력 확장에 대한 교황 율리오 2세와 주변 강대국들의 반발로 발발했다. 교황,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아라곤 왕국은 캉브레 동맹을 맺고 베네치아를 공격했으나, 베네치아의 저항과 동맹 내부의 갈등으로 전쟁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프랑스와 베네치아의 동맹, 교황의 신성 동맹 결성 등 외교적 변화가 있었으며,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했으나, 이후 프랑스의 쇠퇴와 신성 동맹의 반격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결국,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며 전쟁은 프랑스의 밀라노 지배, 베네치아의 영토 회복을 인정하는 누아용 조약과 브뤼셀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재촉하고, 군사 기술 발전, 외교 전략의 변화, 종교적 권위의 쇠퇴 등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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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중 캉브레에서 영국군이 독일군의 힌덴부르크 방어선을 공격한 캉브레 전투는 전차를 대규모로 사용하여 초반에는 성공했으나 독일군의 반격으로 점령지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전술과 무기가 전쟁 양상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전투이다.
캉브레 동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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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요 | |
명칭 | 캉브레 동맹 전쟁 |
일부 | 이탈리아 전쟁 |
시기 | 1508년 2월 – 1516년 12월 |
장소 | 이탈리아,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
결과 |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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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1508–1510) | |
캉브레 동맹 | 교황령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제국 페라라 공국 |
반대 세력 | 베네치아 공화국 |
교전 세력 (1510–1511) | |
프랑스-페라라 동맹 | 프랑스 왕국 페라라 공국 |
반대 세력 |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
교전 세력 (1511–1513) | |
프랑스-페라라 동맹 | 프랑스 왕국 페라라 공국 스코틀랜드 왕국 피렌체 공화국 나바라 왕국 |
신성 동맹 |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스페인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왕국 구 스위스 연방 |
교전 세력 (1513–1516) | |
프랑스-베네치아 동맹 | 프랑스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페라라 공국 |
반대 세력 | 교황령 스페인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왕국 밀라노 공국 구 스위스 연방 |
주요 지휘관 (1508–1510) | |
캉브레 동맹 | 교황 율리오 2세 루이 12세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 루이 드 라 트레무유 샤를 2세 당부아즈 막시밀리안 1세 알폰소 1세 데스테 데스테 추기경 페르난도 2세 |
베네치아 공화국 | 레오나르도 로레단 니콜로 디 피틸리아노 안드레아 그리티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 |
주요 지휘관 (1510–1511) | |
프랑스-페라라 동맹 | 루이 12세 샤를 2세 당부아즈 알폰소 1세 데스테 |
교황령 | 교황 율리오 2세 |
주요 지휘관 (1511–1513) | |
프랑스-페라라 동맹 | 루이 12세 가스통 드 푸아 자크 드 라 팔리스 루이 드 라 트레무유 앙드레 드 푸아 알폰소 1세 데스테 제임스 4세 몬트로즈 백작 호안 3세 페드로 데 나바라 |
신성 동맹 | 교황 율리오 2세 페르난도 2세 라몬 데 카르도나 알바 공작 페드로 나바로 막시밀리안 1세 헨리 8세 캐서린 오브 아라곤 노퍽 공작 에드워드 하워드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
주요 지휘관 (1513–1516) | |
프랑스-베네치아 동맹 | 프랑수아 1세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 루이 드 라 트레무유 부르봉 공작 샤를 3세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 |
반대 세력 | 라몬 데 카르도나 페르난도 다발로스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 마테우스 시너 마르크스 뢰이스트 |
주요 전투 | |
조약 |
2. 배경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로마냐 지방을 장악하면서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교황령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군의 곤팔로니에레로 활동하며 볼로냐를 통치하던 벤티볼리오 가문을 추방하고 이 지역에 보르자 가문의 영지를 만들려 했다.[102]
그러나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고 교황 비오 3세 (곧 사망하여 교황 율리오 2세가 즉위함)가 선출되면서 체사레의 힘은 약화되었다.[103] 이를 기회로 로마냐 지역의 영주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복종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베네치아는 이 제안을 수락하여 1503년 말 리미니, 파엔차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104]
새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가 점령한 도시들의 반환을 요구하며 로마냐 지역에 대한 교황령의 지배권을 다시 세우려 했다. 베네치아는 교황의 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의향은 있었지만, 도시 반환은 거부했다.[105]
이에 율리오 2세는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어 베네치아를 압박했다. 비록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사망(1504년)으로 동맹이 곧 해체되었지만, 베네치아는 일부 도시를 포기해야 했다.[105] 율리오 2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506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페루자와 볼로냐를 정복했다.[106][107]
1507년, 율리오 2세는 다시 베네치아에 도시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베네치아 공격을 요청했다.[109] 1508년, 막시밀리안 1세는 로마로 간다는 핑계로 베네치아를 공격했으나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에 패배했다. 이후에도 막시밀리안 1세는 계속 패배하여 결국 베네치아와 강화를 맺어야 했다.[109]
2. 1. 교황령의 확장과 베네치아의 부상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대한 교황령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로마냐를 장악하려 했다.[101]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군 기수로서 봉건 영지로 통치하던 벤티볼리오 가문을 볼로냐에서 추방했고, 알렉산데르 6세가 1503년 8월 18일에 사망했을 때 그는 이 지역에 영구적인 보르자 국가를 세우려는 과정에 있었다.[102] 체사레는 교황청 재산의 잔여분을 자신의 용도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교황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로마로 집결하면서 로마 자체를 장악하지 못했다. 교황 비오 3세 (곧 사망하여 교황 율리우스 2세로 교체됨)의 선출로 체사레는 그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무장 부대 지휘관으로 전락했다.[103] 로마냐의 몰락한 영주들은 체사레의 약점을 감지하고,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는 데 도움을 주는 대가로 베네치아 공화국에 복종할 것을 제안했다. 베네치아 원로원은 이를 수락했고, 1503년 말까지 리미니, 파엔차, 그리고 다른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다.[104]율리우스 2세는 체사레를 볼로냐와 라벤나에서 체포하여 투옥함으로써 교황군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한 후, 베네치아가 점령한 도시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함으로써 로마냐에 대한 교황령의 지배를 재확립하려 했다.[10]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위치한 이 항구 도시들에 대한 교황의 주권을 인정하고 율리우스 2세에게 연간 조공을 지불할 의향이 있었지만, 도시 자체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105] 이에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에 대항하여 프랑스 및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사망 (1504년 11월 26일)과 그로 인한 당사자 간의 관계 붕괴로 인해 동맹은 곧 해체되었지만 (블루아 조약 (1504년), 1499-1504년 이탈리아 전쟁을 종식시킨 조약은 '사문화'되었다.), 베네치아는 리미니, 파엔차, 체르비아의 세 핵심 도시를 제외한 여러 도시를 포기하도록 설득되었다.[12]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소득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공화국과 싸울 충분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다음 2년 동안 교황령과 베네치아 영토 사이에 위치하여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된 볼로냐와 페루자를 재정복하는 데 전념했다.[106][107]
1507년,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의 손에 있는 도시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 원로원에 의해 다시 거부당하자, 그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공화국을 공격하도록 장려했다.[109] 막시밀리안 1세는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로 가는 여정을 구실로 삼아 1508년 2월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베네치아 영토로 진입하여 비첸차로 진격했지만,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카도레 전투, 1508년 3월 2일).[15] 몇 주 후 티롤 백국 군대의 두 번째 공격은 훨씬 더 큰 실패였다. 알비아노는 제국군을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고리치아 백국, 오스트리아 이스트리아 (파진 백국)뿐만 아니라 트리에스테, 피우메, 카르니올라의 최서단 지역을 점령하여 막시밀리안 1세가 베네치아와 휴전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16]
2. 2. 율리오 2세의 등장과 국제 정세
제1차 이탈리아 전쟁 (1494–1498)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로마냐 지방을 장악하여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교황령의 지배를 강화하려 했다.[101]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군 기수로서 볼로냐를 통치하던 벤티볼리오 가문을 추방하고, 1503년 8월 18일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했을 때 이 지역에 영구적인 보르자 가문의 영지를 만들려 했다.[102]체사레는 교황청 재산의 잔여분을 확보했지만, 교황 선거를 위해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로마로 몰려들면서 로마를 장악하지 못했다. 교황 비오 3세가 선출되었으나 곧 사망하고 교황 율리우스 2세로 교체되면서 체사레는 지위를 박탈당하고 무장 부대 지휘관으로 전락했다.[103] 로마냐의 몰락한 영주들은 체사레의 약점을 이용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에 복종하는 대가로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고자 했다. 베네치아 원로원은 이를 수락했고, 1503년 말까지 리미니, 파엔차 등을 점령했다.[104]
율리우스 2세는 체사레를 볼로냐와 라벤나에서 체포하여 투옥함으로써 교황군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한 후, 베네치아에 점령한 도시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로마냐에 대한 교황령의 지배를 재확립하려 했다.[105]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 해안의 항구 도시들에 대한 교황의 주권을 인정하고 율리우스 2세에게 연간 조공을 바치려 했지만, 도시 자체를 넘겨주는 것은 거부했다.[104]
이에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 및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어 베네치아를 압박했다.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사망(1504년 11월 26일)과 그로 인한 관계 붕괴로 동맹은 곧 해체되었지만, 베네치아는 리미니, 파엔차, 체르비아를 제외한 여러 도시를 포기해야 했다.[105] 율리우스 2세는 만족하지 못하고 1506년 군대를 직접 이끌고 페루자와 볼로냐를 정복했다.[106][107] 이 두 지역은 교황령과 베네치아 사이에서 준 독립 상태였다. 볼로냐를 정복한 교황은 통치자였던 조반니 2세를 파문하고,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청동상 제작을 주문하여[106] 산 페트로니아 성당 정문 위에 세웠다.[108]
1507년,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가 점령하고 있는 도시들에 대해 반환을 요구했으나 베네치아 의회가 거부하자,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공화국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109] 1508년 2월, 막시밀리안 1세는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로 간다는 핑계로 군대를 이끌고 베네치아 영토에 진입하여 비첸차로 향했으나,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에 격퇴당했다. 2주 뒤 티롤군의 2차 공격은 실패했고, 달비아노는 황제군을 격퇴하고 트리에스테와 피우메를 점령하여 막시밀리안 1세에게 베네치아와 강화를 맺도록 했다.[109]
3. 캉브레 동맹 전쟁의 전개
1508년 교황율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루이 12세, 신성 로마 황제막시밀리안 1세, 아라곤 국왕페르난도 2세와 함께 캉브레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초반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1510년 율리우스 2세와 루이 12세의 대립으로 인해 동맹이 붕괴되었고, 교황은 이후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었다.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베네치아는 이후 파도바 포위전에서 승리하는 등 반격에 나섰지만, 전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1510년 2월, 베네치아는 교황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합류했다.
베네치아와 교황 간의 동맹은 이후 신성 동맹으로 발전하여, 1512년에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토 분할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베네치아가 동맹을 이탈하여 프랑스 측으로 돌아섰다. 1512년 4월 11일 라벤나 전투 (1512년)에서 프랑스-페라라 연합군은 교황군에게 승리했지만, 프랑스군의 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했다.
루이 12세의 뒤를 이은 프랑수아 1세의 지휘하에 프랑스-베네치아 동맹은 1515년의 마리냐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양국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이듬해 누아용과 브뤼셀에서 맺어진 종전 조약에 의해,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반도는 1508년 개전 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508년 봄,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석이 된 비첸차 주교에 자체 후보를 임명함으로써 교황 율리우스를 자극했다.[17] 1508년 12월 10일, 교황청,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의 대표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항하는 캉브레 동맹을 맺었다.[18] 이 협약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영토를 완전히 분할하고 서명국 간에 분배할 것을 규정했다. 막시밀리안은 고리치아 백국, 트리에스테, 메라니아 공국, 동부 이스트리아를 되찾는 것 외에도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프리울리를 받게 될 것이었다. 프랑스는 브레시아, 크레마, 베르가모, 크레모나를 밀라노 영토에 합병할 것이었다. 페르디난드는 오트란토를 점령할 것이며, 리미니와 라벤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교황령에 추가될 것이었다.[19]
1509년 5월 9일, 루이 12세는 약 4만 명의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아다 강을 건너 베네치아 영토로 빠르게 진격했다.[21] 이에 맞서 베네치아는 콘도티에로 군대를 오르시니 가문 사촌인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와 니콜로 디 피티글리아노의 지휘하에 고용했지만,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는 최선의 방법에 대한 그들의 의견 불일치를 고려하지 못했다.[22] 5월 14일, 알비아노는 아냐델로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맞붙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그는 증원을 요청했지만, 사촌은 전투를 중단하라는 명령으로 답했고 계속 길을 갔다.[23] 알비아노는 새로운 명령을 무시하고 교전을 계속했다. 그의 군대는 결국 포위되어 궤멸되었다.[24] 피티글리아노는 루이와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용병 부대는 알비아노의 패배 소식을 듣고 다음날 아침 대거 탈영하여, 베네치아 군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트레비소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25]
1509년 9월 15–30일에는 파도바 포위전이 벌어져 캉브레 동맹에 대한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났다. 1509년 11월 26–29일에는 비첸차 요새 전투가 벌어져 제국군(캉브레 동맹)에 대한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났다. 1509년 12월 22일에는 폴레셀라 전투가 벌어져 페라라군(캉브레 동맹)의 베네치아 승리로 끝났다.
1510년 2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캉브레 동맹을 떠나 베네치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510년 7월, 교황과 베네치아는 동맹을 맺고 반격에 나섰다. 캉브레 동맹은 무너지고 프랑스와 페라라만이 베네치아와 교황과 전쟁을 벌였다.
1511년 10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교황령, 베네치아,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 스위스 연방을 포함한 프랑스에 대항하는 새로운 신성 동맹을 선포했다. 1512년 4월 11일에는 라벤나 전투 (1512)가 벌어져 교황에 대한 프랑스-페라라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프랑스 측 지휘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했다.
1513년 3월 23일, 베네치아와 프랑스는 북부 이탈리아를 분할하기 위해 동맹을 체결했다. 1513년 6월 6일, 노바라 전투 (1513)가 벌어져 프랑스에 대한 밀라노–스위스의 승리로 끝났다.
1515년 9월 13–14일, 마리냐노 전투가 벌어져 스위스 및 밀라노에 대한 프랑스-베네치아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1515년 10월 4일, 프랑스군은 밀라노를 점령하고 스포르차를 폐위시켰다.
3. 1. 캉브레 동맹의 결성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이탈리아 원정이 실패하자, 프랑스의 루이 12세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루이 12세는 제2차 이탈리아 전쟁 이후 획득한 밀라노 공국 외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1508년 5월, 베네치아 공화국이 공석이 된 비첸차 주교 자리에 관례를 따라 자체 후보를 임명하자, 율리오 2세는 이를 도발로 간주하고 베네치아 공격의 명분으로 삼았다. 교황은 모든 가톨릭 국가에 베네치아 정벌을 위한 원정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고,[110] 1508년 12월 10일, 교황령,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이 참여하는 캉브레 동맹이 결성되었다.[111] 동맹 조약에 따라 베네치아 영토는 가맹국들에 의해 분할될 예정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이스트리아와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프리울리를, 프랑스는 브레시아, 크레마, 베르가모, 크레모나를, 페르난도 2세는 오트란토를 차지하고, 리미니와 라벤나를 포함한 나머지 영토는 교황령에 병합될 예정이었다.[111]3. 2. 베네치아의 위기와 반격 (1509년)
1509년 4월 15일, 루이 12세는 밀라노 공국을 떠나 프랑스군을 이끌고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향했다. 베네치아는 오르시니 가문의 친척들(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와 니콜로 디 피틸리아노)이 이끄는 용병부대를 고용했으나, 전략에 대한 불협화음으로 인해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112] 그 결과 루이 12세는 5월 초에 아다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달비아노의 군대는 루이 12세를 맞서 싸우러 갔고, 전면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한 피틸리아노의 군대는 남쪽으로 이동했다. 5월 14일, 달비아노는 아냐델로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격돌했으나 전멸하고 말았다.[112] 달비아노의 패배 소식을 접한 피틸리아노의 용병들이 대거 탈영하자 피틸리아노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13]베네치아 군이 붕괴되면서 그동안 베네치아가 점령했던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모든 영토는 빼았겼다.[114] 루이 12세는 가장 동쪽인 브레시아까지 별다른 저항 없이 베네치아의 영토를 차지했다. 프랑스군에 점령되지 않은 주요 도시들(파도바, 베로나, 비첸차)은 피틸리아노의 철수로 무방비 상태에 놓이며, 베네토에 도착한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한편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의 모든 시민들에게 파문을 선언하였고, 로마냐 지역을 침공하였다. 교황은 페라라 공작(알폰소 1세 데스테)의 도움으로 라벤나를 점령했고, 페라라 공작은 폴레시네를 차지했다.[115]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가 패배하며 세력이 급속히 약해지자 든든한 우방을 잃어버린 피사 공화국은 1509년 6월 피렌체 공화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116] 1494년에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 때 피렌체로부터 독립하였으나 16세기 초부터 다시 시작된 피렌체와 전쟁에서 더 이상 베네치아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황제가 임명한 새로운 총독들은 민심을 얻지 못하였으며 7월 중순경 파도바에서는 시민들이 안드레아 그리티가 이끄는 베네치아 기병대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117] 파도바의 란츠크네히트[118] 수비대는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숫자가 너무나 적었고, 파도바는 1509년 7월 17일 베네치아의 소유로 다시 돌아왔다.[119] 8월 초에 프랑스, 스페인과 연합한 황제군이 트렌트에서 베네토로 향했다. 파도바 공성전이 1509년 9월 15일에 시작되었고, 프랑스와 황제군은 공성 병기를 이용하여 파도바 성벽을 붕괴시키기는 했으나, 수비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도시 장악에 실패한 황제군은 9월 30일에 티롤로 철수하였다.[120]

11월 중순에 베네치아의 피틸리아노는 공세로 바꾸어, 잔여 황제군들을 쉽게 격퇴시켰고 비첸차, 에스테, 펠트레, 벨루노를 탈환했다. 이후 벌어진 베로나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피틸리아노는 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가 이끄는 교황군을 전멸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프랑스군의 진격으로 피틸리아노는 다시 파도바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안젤로 트레비산이 이끄는 베네치아 갤리선 함대가 강을 따라 페라라를 공격한 폴레셀라 전투(12월 22일)는 포 강에 닻을 내린 베네치아 함선들이 페라라 공성 무기에 침몰당하며 실패하고 말았다.[121]
3. 3. 베네치아-교황령 동맹 (1510년)
병력과 자금난에 봉착한 베네치아 의회는 교황 율리오 2세와 협상을 시도했다. 교황은 다소 지나친 요구를 하였는데, 베네치아내의 성직자 임명권, 베네치아내 교황령 사람에 대한 사법권 포기, 전쟁을 촉발한 로마냐 도시들의 반환, 전쟁배상금 등이었다. 의회는 두 달 동안 격론을 벌였지만, 결국 1510년 2월 24일 교황의 요구를 수용하였다.[122]베네치아가 교황과 화해를 하였지만 3월에 베네토로 진격해오는 프랑스군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1월에 피틸리아노의 사망으로 안드레아 그리티 지휘하의 베네치아군만 남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 군을 지원하지 못했지만, 프랑스군은 그럼에도 5월에 베네치아를 비첸차에서 몰아냈다. 그리티는 황제-프랑스 연합군이 파도바를 공격할거라 예상하고 이에 대비했지만 루이 12세는 그의 고문이었던 당부아즈 추기경이 사망하자 파도바 공격 계획을 포기했다.[123]
1510년 7월, 새롭게 성립된 베네치아-교황 동맹은 프랑스 및 그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첫 공격이었던 제노바 해방은 실패로 끝났지만, 8월 초 루치오 말베초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비첸차 탈환에 성공했고, 8월 17일에는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이끄는 동맹군이 모데나를 함락시켰다.[50] 율리우스 2세는 알폰소 1세 데스테를 파문한다고 선언하고, 페라라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초반의 우세와 승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교황은 최전선에 가까운 볼로냐까지 직접 나섰다.
그러나 교황이 파견한 스위스 용병은 루이 12세의 뇌물로 인해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거부했기 때문에, 프랑스 군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이탈리아 중부까지 남진할 수 있었다. 8월 초 샤를 2세 드 암부아즈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볼로냐로 진군하기 시작했고, 18일에는 도시에서 불과 수 마일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 율리우스 2세는 이제, 볼로냐 시민들이 교황의 통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며, 프랑스군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믿었던 스위스 용병의 배신을 당했고, 동맹국인 베네치아군 또한 시내에는 소수의 기병대밖에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이 할 수 있는 일은 암부아즈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암부아즈는 교황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은 피해야 한다는 잉글랜드 대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페라라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12월에는 새롭게 편성된 교황군이 콩코르디아를 정복하고,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미란돌라에 대한 포위전을 시작했다. 암부아즈는 구원을 위해 향했지만, 진군 도중 병에 걸려 사망했고, 동요한 프랑스군은 짧은 시간 안에 철수해 버렸다. 교황이 직접 지휘했던 미란돌라는 1511년 1월 함락되었지만, 교황군이 일단 카잘레키오로 병력을 물린 사이에, 암부아즈의 후임인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가 공세를 취해 콩코르디아와 카스텔프랑코를 탈환했다. 한편, 포 강에서의 전투에서 베네치아군에게 대패한 알폰소 데스테는, 교황을 고립시키기 위해 다시 볼로냐로 군대를 돌렸다.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 측의 협공을 두려워하여 라벤나로 떠났고, 도시 방어에는 알리도지 추기경을 남겨두었지만, 알리도지는 인기 없는 교황보다도 더욱 도시 시민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볼로냐 시민들은 트리불치오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1511년 5월 23일 도시에 도착하자 즉시 문을 열어 항복했다.[57] 율리우스 2세는 이 패배의 책임을 우르비노 공작 로베레에게 돌리며 격분했고, 로베레는 알리도지를 교황 근위병 앞에서 처형했다.[58]
3. 4. 프랑스의 반격과 신성 동맹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베네치아가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베네치아가 지나치게 약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세력이 약화되는 동안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의 세력이 커지자, 교황은 이를 심각한 위험 요소로 판단했다. 그래서 베네치아와 새로운 동맹을 체결한 후 프랑스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124] 교황은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여 밀라노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공격하게 하였고, 프랑스의 동맹인 페라라 공국을 침공하여 교황령에 편입하려고 시도하였다.[125][126]
그런데 샤를 2세 당부아즈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가 남하하여 10월 18일에 볼로냐로부터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착했다. 롬바르디아로 진군했던 스위스 용병들은 루이 12세에게 매수되어 프랑스군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황에게는 소수의 베네치아 기병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볼로냐 지역의 거주민들은 교황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오히려 프랑스군에게 우호적이었다. 다행히도 샤를 2세 당부아즈는 교황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잉글랜드 특사의 설득에 따라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페라라로 퇴각하였다. 아무튼 교황은 이 일로 인해 샤를 2세 당부아즈를 파문하였다.[131]
이후 교황군은 각지에서 패배를 거듭하여, 1511년 6월까지 로마냐 지방의 대부분이 트리불치오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지배하에 놓였다. 율리오 2세는 열세를 뒤집기 위해 새롭게 신성 동맹을 제창하여,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더 나아가 북 프랑스에 영토적 야심을 품고 있던 헨리 8세 치하의 잉글랜드가 참가하는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1511년 10월, 율리오 2세는 프랑스를 상대로 신성 동맹을 선포했다.[59] 이 새로운 동맹에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포함되었는데, 그는 이 기회를 북부 프랑스에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는 구실로 삼기로 결정하고 11월 17일 페르디난트와 프랑스에 대한 상호 원조를 약속하는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체결했다.[60]
3. 5. 라벤나 전투와 프랑스의 쇠퇴 (1512년)
1510년 7월, 베네치아-교황령 동맹군은 공세를 펼쳤다. 제노바 공격에는 실패했지만, 루체 말베초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은 8월 초 비첸차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우르비노 공작이 이끄는 교황군과 합류하여 8월 17일 모데나를 점령했다. 율리오 2세는 알폰소 1세 데스테[126]를 파문하여 페라라 공격을 정당화했다.[127]프랑스 루이 12세는 이에 즉각 반발하며 1510년 9월, 투르에서 시노드(지역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황에 대한 순명 거부를 결의하고, 1511년 9월 피사 공의회 개최를 선포했다.[128][129][130]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남하하여 10월 18일 볼로냐 근처에 도착했다. 스위스 용병들이 루이 12세에게 매수되어 프랑스군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황은 소수의 베네치아 기병대밖에 없어 당황했지만, 샤를 2세 당부아즈는 잉글랜드 특사의 설득으로 페라라로 퇴각했다. 교황은 샤를 2세 당부아즈를 파문했다.[131]
12월, 교황군은 콘코르디아를 점령하고, 미란돌라를 포위했다. 샤를 2세 당부아즈가 지원하러 왔으나 병으로 사망하여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132] 교황이 직접 공격 지휘를 내리며 1511년 1월 미란돌라는 함락됐지만, 당부아즈를 대신한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133]는 콘코르디아와 카스텔프란코를 지켰다. 교황군은 카살레키오로 퇴각했다.
1511년 10월, 율리오 2세는 프랑스를 상대로 신성 동맹을 선포했다.[59] 이 동맹에는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포함되었다. 헨리 8세는 이를 북부 프랑스에서 영토를 확장하는 구실로 삼아, 11월 17일 페르디난트와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체결했다.[60]

루이 12세는 조카 가스통 드 푸아를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61] 푸아는 라몬 데 카르도나의 스페인 군의 볼로냐 진격을 막고, 브레시아로 돌아갔다.[62] 푸아와 알폰소 데스테는 라벤나를 포위하여 신성 동맹을 결정적인 전투로 유도하려 했다.[63] 카르도나는 1512년 4월 초 라벤나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푸아가 사망하면서 프랑스군은 자크 드 라 팔리스가 지휘하게 되었고, 그는 라벤나 약탈에 만족했다.[64]
1512년 5월, 프랑스의 입지는 악화되었다.[65] 율리우스 2세는 스위스 용병 군대를 고용했고, 그들은 막시밀리안 스포르차와 함께 밀라노로 내려와 공국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다.[66] 프랑스 수비대는 로마냐를 포기하고 롬바르디아로 후퇴했다.[67] 8월까지 스위스군은 베네치아 군과 합류하여 트리불지오를 밀라노에서 몰아냈고, 스포르차는 공작으로 선포되었다. 라 팔리스는 알프스를 넘어 철수했다.[68]

1512년 8월 말, 동맹국들은 만토바에서 만나 이탈리아 상황과 프랑스 영토 분할에 대해 논의했다.[70] 피렌체에 대해서는 교황의 요청대로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통치자로 임명했다.[71] 그러나 영토 문제에서는 의견 불일치가 발생했다.[72] 율리우스 2세와 베네치아는 막시밀리안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국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막시밀리안과 페르디난드는 친족을 공작으로 임명하려 했다.[73] 교황은 페라라의 교황령 병합을 요구했지만, 페르디난드는 반대했다.[74] 황제는 베네토 대부분을 포함하는 제국 영토 양도를 거부하고, 베네치아를 분할에서 배제하는 데 동의했다. 율리우스 2세는 캉브레 동맹 재건을 위협했고, 베네치아는 루이에게 의존했다. 1513년 3월 23일, 북부 이탈리아 전체를 프랑스와 공화국 사이에 분할하는 조약이 블루아에서 체결되었다.[76] 한편, 율리우스 2세는 2월에 사망했고, 교황 레오 10세가 선출되었다.
1511년 6월까지 로마냐 지방 대부분이 프랑스군 지배하에 놓였다. 율리우스 2세는 신성 동맹을 제창하여,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잉글랜드가 참가하는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1512년 2월, 루이 12세는 가스통 드 푸아를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푸아는 브레시아를 함락시켰다(브레시아 약탈). 푸아와 알폰소 데스테는 라벤나에 대한 포위전을 시작했다. 신성 동맹은 라벤나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푸아가 전사했고, 자크 드 라 팔리스가 후임이 되었다.
5월, 프랑스군은 열세에 몰렸다. 스위스 용병은 밀라노를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로마냐 지방에서 철수하고, 롬바르디아로 물러섰다. 8월에 밀라노가 함락되자, 스포르차가 밀라노 공으로 즉위하고, 여러 도시가 프랑스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라 팔리스는 알프스 서쪽으로 철수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권익을 잃었다.
신성 동맹은 만토바에서 회합을 열었다. 피렌체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새 지배자로 앉혔다.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참가국의 주장이 대립했다. 율리우스 2세와 베네치아는 밀라노 공국을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에게 지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막시밀리안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일족을 밀라노 공으로 앉히려 했다. 교황은 페라라 공국의 교황령 병합을 요구했지만, 페르난도 2세는 반대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베네치아령을 제국령이라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황제는 교황에게 접근했고, 율리우스 2세는 베네치아를 신성 동맹에서 추방하고 캉브레 동맹을 다시 결성했다. 베네치아는 루이 12세와 손을 잡기로 결정했고, 북 이탈리아를 양국에 의해 분할하는 조약을 1513년 3월 23일에 블루아에서 맺었다.
3. 6. 프랑스-베네치아 동맹과 종전 (1513년 ~ 1516년)
1513년 5월 말, 루이 드 라 트레무아유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로 진격했고, 동시에 바르톨로메오 달비아노 휘하의 베네치아군은 파도바에서 서쪽으로 진군했다.[77]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는 밀라노인들에게 스위스 용병의 꼭두각시로 여겨져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롬바르디아를 거의 저항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트레모이유는 밀라노를 점령한 후, 노바라에 남아있는 스위스군을 포위했다.[78] 그러나 6월 6일, 노바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스위스 구원군에게 공격받아, 병력 수에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주했다.[79] 스위스군은 도주하는 프랑스군을 알프스 너머로 추격하여 디종까지 도달했지만, 매수되어 철수했다.[80]노바라에서의 패배 이후, 프랑스 동맹은 계속해서 패배했다. 헨리 8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테루안을 포위하고, 구이네가테 전투에서 라 팔리스를 격파하고 투르네를 점령했다.[81] 나바르에서는 페르난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무너졌고, 그는 신속하게 해당 지역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기옌에서 또 다른 잉글랜드군의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였다.[82]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루이의 요청에 따라 잉글랜드를 침략했다.[83] 그러나 그는 헨리의 관심을 프랑스에서 돌리지 못했고, 1513년 9월 9일 플로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대패하고 제임스 4세가 전사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전쟁 참여는 짧게 끝났다.[84]

한편,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달비아노는 베네토로 후퇴했고,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그를 바싹 뒤쫓았다. 스페인군은 베네치아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여 파도바를 점령하지 못했지만, 베네치아 영토 깊숙이 진입하여 9월 말에는 베네치아 자체를 시야에 넣었다.[85] 카르도나는 도시에 대한 포격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런 다음, 베네치아 석호를 건널 배가 없었기에 롬바르디아로 방향을 돌렸다.[86] 알비아노는 베네치아 귀족 출신 수백 명의 지원군을 받아 카르도나를 추격하여 10월 7일 비첸차 외곽에서 그와 대치했다. 그 결과 라 모타 전투에서 베네치아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으며, 많은 저명한 귀족들이 도시 성벽 밖에서 도주를 시도하다 쓰러졌다.[87] 카르도나와 알비아노는 1513년과 1514년 남은 기간 동안 프리울리에서 계속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88]
1515년 1월 1일 루이 12세의 사망으로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와 함께 밀라노 공작의 칭호를 얻었고, 즉시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움직였다.[89] 7월까지 프랑수아는 도피네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스위스-교황군 연합은 그를 막기 위해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알프스 고개를 향해 이동했지만, 프랑수아는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의 조언에 따라 주요 고개를 피하고 대신 스투라 계곡을 통해 행진했다.[90] 프랑스 선봉대는 빌라프란카에서 밀라노 기병대를 기습하여 프로스페로 콜론나를 포획했다.[91] 한편, 프랑수아와 프랑스군의 주력은 9월 13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과 대치했다.[92] 스위스군의 진격은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프랑수아의 기병대와 포병의 우세, 그리고 9월 14일 아침 베로나에서 카르도나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피한 알비아노의 적시 도착으로 인해 프랑수아와 베네치아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3]

마리냐노에서의 패배 이후, 신성 동맹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프랑수아 1세는 10월 4일 밀라노를 점령하고 스포르차가(家)를 몰아냈다. 12월 19일에는 교황 레오 10세를 볼로냐에서 만났으며,[166][167] 교황은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프랑스에, 모데나를 페라라 공작에게 넘겨주었다.[168] 그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국에 대한 교황령 군의 공격에 대해 프랑스가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았다.[169] 1516년 8월에는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170] 사이에 체결된 누아용 조약으로 밀라노에 대한 프랑스 권리와 나폴리에 대한 스페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전쟁에서 스페인이 빠질 것임이 재확인되었다.
4. 전쟁의 결과 및 영향
1510년 미란돌라 공성전에서 교황군이 승리하였으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에 불과했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승리하면서 신성 동맹은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잃었다.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를 점령하고 스포르차가(家)를 몰아냈으며, 교황 레오 10세는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166][167][168]
1516년 누아용 조약을 통해 밀라노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와 나폴리에 대한 스페인의 권리가 인정되면서 스페인은 전쟁에서 빠졌다. 막시밀리안 1세는 롬바르디아 침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516년 브뤼셀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밀라노 점령을 인정하고 크레모나를 제외한 롬바르디아 지역에 대한 베네치아의 권리를 인정하였다.[171]
이로써 8년간 이어진 캉브레 동맹 전쟁은 종결되었고, 서유럽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 평화는 1519년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깨지고, 프랑수아 1세가 제4차 이탈리아 전쟁 (1521년-1526년)을 일으키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172]
4. 1.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

마리냐노 전투 승리 후,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로 진격하여 10월 4일에 도시를 점령하고 스포르차를 왕위에서 몰아냈다.[94] 12월에 그는 볼로냐에서 레오 10세와 만났다. 스위스 용병의 잔여 병력이 그를 저버리자, 교황은 파르마와 피아첸차는 프랑수아 1세에게, 모데나는 페라라 공작에게 넘겨주었다.[95] 그 대가로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작령 공격에 대한 프랑스의 불간섭을 보장받았다.[96] 1516년 8월,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가 서명한 누아용 조약은 프랑스의 밀라노에 대한 권리와 스페인의 나폴리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여 스페인을 전쟁에서 배제했다.[97]
막시밀리안 1세는 롬바르디아를 침공하려 했지만, 그의 군대는 밀라노에 도달하기 전에 되돌아갔고, 1516년 12월 프랑수아 1세와 협상에 들어갔다.[98] 그 결과인 브뤼셀 조약은 프랑스의 밀라노 점령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의 롬바르디 내 제국 소유지(크레모나 제외)에 대한 권리를 확인하여 1508년의 현상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99] 그러나 평화는 4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발루아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경쟁 심화와 1519년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황제 선출은 곧 1521-1526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100]
4. 2. 군사 기술의 발전
주어진 섹션 제목은 "군사 기술의 발전"이지만, 제공된 원본 소스는 전쟁의 결과와 정치적 상황 변화에 대한 내용만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맞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원본 소스에 군사 기술 관련 내용이 없기 때문에 빈 문자열을 반환합니다.4. 3. 외교 전략의 변화
1511년 로마냐 대부분이 프랑스 수중에 떨어지자,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신성 동맹을 선언했다. 1511년 11월 17일에 결성된 이 동맹에는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베네치아, 잉글랜드가 합류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프랑스 북부 지역 영토 확장을 위해 참전했다. (잉글랜드의 활약은 스퍼스 전투 참고)마리냐노 전투 승리 후,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로 진격하여 10월 4일에 도시를 점령하고 스포르차를 권좌에서 몰아냈다.[94] 12월에 그는 볼로냐에서 레오 10세와 만났다. 교황은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프랑수아 1세에게, 모데나를 페라라 공작에게 넘겨주었다.[95] 그 대가로 레오 10세는 우르비노 공작령 공격에 대한 프랑스의 불간섭을 보장받았다.[96] 1516년 8월,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가 서명한 누아용 조약은 프랑스의 밀라노에 대한 권리와 스페인의 나폴리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여 스페인을 전쟁에서 배제했다.[97]
막시밀리안 1세는 롬바르디 침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516년 12월 프랑수아 1세와 협상에 들어갔다.[98] 브뤼셀 조약은 프랑스의 밀라노 점령을 인정하고 베네치아의 롬바르디 내 제국 소유지(크레모나 제외)에 대한 권리를 확인했다.[99] 그러나 평화는 4년만 지속되었고, 발루아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경쟁 심화와 1519년 카를 5세의 신성 로마 황제 선출은 곧 1521-1526년 이탈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100]
4. 4. 종교적 권위의 쇠퇴
1511년, 교황이 볼로냐를 떠나자 교회 세력을 반대하고 벤티볼리오 가문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성난 시민들은 산 페트로니아 성당 정문 위에 위치한 거대한 교황 동상[135](미켈란젤로 작품)을 쓰러뜨려 파괴했다.[136] 볼로냐의 책임자였던 알리도시 추기경은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도망쳤고, 우르비노 공작[137]도 볼로냐를 탈출했다. 1511년 5월 23일 프랑스군이 볼로냐에 도착하자 볼로냐인들은 항복했다.[138]이 사건에 대해 교황은 우르비노 공작을 심하게 책망했다. 이에 격분한 우르비노 공작은 알리도시 추기경을 백주대낮에 대로에서 살해했다.[139] 한편, 캉브레 동맹 전쟁 내내 정치적인 중립을 지키던 피렌체는 프랑스군이 볼로냐를 점령하면서 유리한 위치에 서자 어쩔 수 없이 루이 12세가 요청한 피사 공의회 개최를 수용하였다.[140] 이 소식을 접한 교황 율리오 2세는 분노하며 피렌체에 대해 성무 정지를 명하고 추후 응징할 것을 결심했다.
5. 한국사와의 관련성
캉브레 동맹 전쟁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벌어진 유럽의 전쟁으로, 한국사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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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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