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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알리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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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는 15-16세기 이탈리아의 추기경으로, 율리오 2세 교황의 비서관이자 측근으로 활동했다. 카스텔델리오 출신으로, 1494년 율리오 2세와 함께 프랑스로 갔으며, 이후 교황의 측근으로 교황 궁내관, 재무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교황 율리오 2세 사이를 중재하고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화 계약에 관여했으며,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를 후원하는 등 예술 후원가로도 활동했다. 잔혹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던 그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으나 교황의 비호로 풀려났고, 1511년 라벤나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시신은 라벤나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이몰라 대성당에는 그의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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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알리도시
기본 정보
프란체스코 알리도시
프란체스코 알리도시
출생1450년경
사망1511년 5월 24일
사망 장소라벤나
국적이탈리아
교회 경력
서임추기경
임명1505년
교구볼로냐
파비아
직위볼로냐 교구장
파비아 교구장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성당의 추기경
산타 체칠리아 성당의 추기경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기타 정보
활동 시기르네상스
기타 직업콘도티에로

2. 생애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는 카스텔델리오의 영주 조반니 알리도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94년, 훗날 교황 율리오 2세가 되는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와 함께 프랑스로 갔다. 이후 알리도시는 율리오 2세의 비서관이자 핵심 협력자가 되었다. 1504년 밀레토 주교로 임명되었고, 1506년에는 파비아 교구로 옮겨 1511년 사망할 때까지 교구장직을 맡았다.

1505년, 알리도시는 많은 추기경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티 네레오 에드 아킬레오의 사제 추기경이 되었고, 1506년에는 성 세실리아 성당 직위를 선택했다. 그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교황 율리오 2세 사이에서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화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중개자 역할을 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호국 추기경,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의 보호자, 그리고 예술 후원가였다.

알리도시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1508년 볼로냐 점령 후, 벤티볼리오 가문을 지원하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여러 사람을 교살하고, 30명이 넘는 벤티볼리오 가문 지지자들을 처형하여 볼로냐인들의 분노를 샀다. 피에트로 벰보는 알리도시를 "신앙, 종교, 신뢰, 부끄러움, 신성함이 없는 자"라고 묘사했다.

1508년 페라라의 추기경 이폴리토 데스테에게 볼로냐 관구직을 넘겼으나, 다음 해 교황은 알리도시를 다시 불러들였다. 1509년 로마냐마르케 특사, 프랑스 왕의 외교 사절로 활동했다. 1510년 볼로냐인들의 불만을 해명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 베네치아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1510년 알리도시의 볼로냐 관구직 재임명에 볼로냐 인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는 알리도시를 반역죄로 체포, 볼로냐로 압송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알리도시에게 변호 기회를 주고 무죄를 선언했지만, 알리도시는 다시 반역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511년 5월, 교황은 프랑스군에 의한 볼로냐 고립 위험에 라벤나로 피신했다. 교황이 떠난 후, 벤티볼리오 가문 지지자들과 반교황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알리도시는 카스텔델리오로 도망쳤다. 5월 23일, 프랑스군 지휘관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가 벤티볼리오 가문과 함께 볼로냐에 입성했다.

교황은 우르비노 공작을 반역자로 몰았고, 우르비노 공작은 알리도시를 반역 혐의로 맞고소했다. 1511년 5월 24일, 교황과 접견 후 쫓겨난 우르비노 공작은 알리도시의 거처로 갔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교황에게 가던 알리도시는 우르비노 공작 일행에게 살해당했다.[15]

알리도시의 시신은 라벤나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고, 그곳에 안치되었다. 1745년 대성당 철거 후 유골은 여러 곳을 거쳐 이몰라 대성당에 기념비와 함께 안치되었다.[16]

2. 1. 초기 생애

카스텔델리오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의 영주 조반니 알리도시의 셋째 아들이었다. 1494년에 장차 교황 율리오 2세가 되는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와 함께 프랑스에 갔다. 델라 로베레가 1503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알리도시는 그의 비서이자 주요 협력자가 되었으며, 교황 궁내관, 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1] 1504년에 밀레토 주교 직에 선출됐으며, 1506년 3월 26일 파비아 교구로 옮겼다. 그는 1511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교구에 있었다.

2. 2. 율리오 2세와의 관계

율리오 2세는 1494년에 카스텔델리오 출신의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를 프랑스에 동행시켰고, 이후 알리도시는 율리오 2세의 비서관이자 핵심 협력자가 되었다. 알리도시는 1504년 밀레토 주교, 1506년 파비아 교구 주교를 거쳐 1511년 사망할 때까지 교구장직을 맡았다.[9][10]

많은 추기경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리도시는 1505년 산티 네레오 에드 아킬레오의 사제 추기경이 되었고, 1506년 성 세실리아 성당의 직위를 택했다. 그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교황 율리오 2세 사이에서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화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중개자 역할을 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호국 추기경이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의 보호자, 예술 후원가였다.

알리도시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1508년 볼로냐를 점령한 후, 벤티볼리오 가문을 지원하고 교황에 맞서 베네치아 공화국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여러 인물들을 교살하고, 30명이 넘는 벤티볼리오 가문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이러한 행위는 볼로냐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추기경 피에트로 벰보는 알리도시를 "신앙, 종교, 신뢰, 부끄러움, 신성함이 없는 자"라고 묘사했다.

1508년 알리도시는 페라라의 추기경 이폴리토 데스테에게 볼로냐 관구직을 넘겼으나, 다음 해 교황은 알리도시를 다시 불러들였다. 1509년 로마냐마르케 특사로 임명된 그는 라벤나를 점령하고, 프랑스 왕의 외교 사절로 활동했다. 1510년 볼로냐인들의 불만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고, 베네치아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1510년 4월, 볼로냐의 저명 인사들은 알리도시의 볼로냐 관구직 재임명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1510년 10월,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는 알리도시를 포로로 잡아 볼로냐로 압송하여 반역죄로 고소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알리도시에게 변호 기회를 주고 무죄를 선언, 볼로냐 교구 임시 관리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알리도시는 다시 반역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511년 5월, 교황은 프랑스군에 의해 볼로냐가 고립될 위험에 처하자 라벤나로 피신했다.[11] 교황이 떠난 후, 벤티볼리오 가문 지지자들과 교황 권력 반대자들은 반란을 일으켰고,[12] 알리도시는 카스텔델리오로 도망쳤다.[13] 5월 23일, 프랑스군 지휘관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가 벤티볼리오 가문과 함께 볼로냐에 입성했다.[14]

교황은 우르비노 공작을 반역자로 몰았고, 우르비노 공작은 알리도시를 반역 혐의로 맞고소했다. 1511년 5월 24일, 교황과 접견 후 쫓겨난 우르비노 공작은 알리도시의 거처로 갔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교황에게 가던 알리도시는 우르비노 공작 일행에게 살해당했다.[15]

알리도시의 시신은 라벤나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고, 그곳에 안치되었다. 1745년 대성당 철거 후 유골은 여러 곳을 거쳐 이몰라 대성당에 기념비와 함께 안치되었다.[16]

2. 3. 추기경 서임과 예술 후원

라파엘의 초상화


1505년, 알리도시는 산티 네레오 에 아킬레오(Santi Nereo e Achilleo)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되었으나, 많은 추기경들이 그의 승진에 반대했다. 1506년 8월 11일, 그는 S. 체칠리아(S. Cecilia) 직함을 선택했다.[1]

알리도시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교황 율리오 2세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했다. 1506년, 그는 교황을 대신하여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화 계약에 서명했고, 이후 볼로냐에 세워질 교황의 동상 제작에도 관여했다.[9][10]

그는 잉글랜드 수호 추기경으로도 활동했으며,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의 후원자이자 예술 애호가였다.[1]

2. 4. 볼로냐 교황 대리 시절

알리도시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1508년 6월 27일, 볼로냐 교황 대리직을 맡은 그는 알베르토 카스텔리, 인노첸초 린기에리, 살루스티오 구이도티, 바르톨로메오 마냐니를 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벤티볼리오 가문을 옹호하는 음모를 지원"하고 교황에 대항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 30명이 넘는 벤티볼리오 가문 지지자들 역시 처형당했다. 이러한 행위는 볼로냐인들 사이에 큰 분노를 일으켰다. 추기경 피에트로 벰보는 그에 대해 "신앙은 그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종교도, 신뢰감도, 부끄러움 역시도 그러며, 그에게 신성함이란 없다."라고 묘사했다.[1]

1508년 9월 22일, 알리도시는 비테르보에서 교황을 만나 볼로냐 교황 대리직을 페라라의 추기경 이폴리토 데스테에게 넘겼다. 다음 해, 교황은 알리도시를 교황 대리직에서 소환했다. 1509년 초, 로마냐마르케의 특사로 임명된 그는 1509년 5월 29일 라벤나를 점령하고 그의 형제 오비초를 관리자로 임명했다. 그는 프랑스 왕에게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1509년 6월 19일 만토바에서 추기경 프랑수아 기욤 드 카스텔노클레르몽뤼데브와 함께 프랑스 왕을 만났다. 프랑스 왕은 교황의 허가 없이 그를 크레모나 주교로 임명했다. 1510년 1월 4일, 알리도시는 볼로냐인들의 불만에 대해 교황 율리오 2세에게 해명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1]

일부에서는 교황이 베네치아와의 평화 협상에서 그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해 그를 소환했다는 이론도 있다. 평화 협상은 1510년 2월 24일에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은 외국 세력으로부터 이탈리아의 자유와 가톨릭 교회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 페라라 공작에게 좀 더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다.[1]

1510년 4월, 많은 볼로냐의 저명 인사들은 교황이 알리도시를 다시 볼로냐 교황 대리로 임명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볼로냐인들은 그가 베네치아인들과 싸우는 동안 프랑스인들과 거래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510년 10월 7일, 모데나 인근 교황군 전장에서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알리도시를 체포하여 수갑을 채우고 150명의 기병 호위를 받으며 볼로냐로 압송했다. 산 펠리체 성문 밖에서 20명의 발레스트리에리(balestrieri)들이 수갑을 풀어주고 그를 광장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대반역죄로 기소되었다.[1]

우르비노 공작과 볼로냐 시민들은 그가 처벌받기를 바랐지만, 교황 율리오 2세는 그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고, 고소가 정당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렸다. 알리도시는 1510년 10월 18일 볼로냐 교구의 임시 관리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이 직위는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1510년 10월 28일, 알리도시는 반역 혐의로 우르비노 공작에게 다시 체포되었으나, 교황은 즉시 그를 석방하고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주었다.[1]

2. 5. 프랑스와의 외교 활동

교황 율리오 2세의 비서관이자 핵심 협력자였던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는 프랑스와의 외교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509년 프랑스 왕에게 사절로 파견되어 만토바에 도착했으며, 프랑스 왕은 교황의 승인 없이 그를 크레모나 주교로 임명하기도 했다.[1]

1510년 1월, 알리도시는 볼로냐 시민들의 불만을 교황에게 해명하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 일각에서는 교황이 베네치아와의 평화 협상에서 그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해 그를 소환했다는 추측도 제기되었다. 1510년 2월 24일 평화 협상이 타결된 후, 교황은 프랑스루이 12세 등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다.[1]

1510년 4월, 볼로냐의 저명 인사들은 교황이 알리도시를 볼로냐 교구장 대리로 재임명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볼로냐인들은 알리도시가 베네치아와의 전쟁 중에 프랑스와 거래를 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2. 6. 반역 혐의와 체포

1510년 4월, 많은 볼로냐의 명사들은 교황이 볼로냐의 교황 대사직을 추기경 알리도시에게 다시 맡긴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알리도시가 베네치아와의 전쟁 중에 프랑스와 거래를 했다고 의심했다.[1] 1510년 10월 7일, 모데나 근처 교황령에서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는 추기경을 체포하여 수갑을 채운 채 150명의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볼로냐로 압송했다. 산 펠리체 문 밖에서 12명의 발레스트리에리(balestrieri)가 수갑을 풀고 그를 공공 광장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다.[1]

우르비노 공작과 볼로냐 시민들은 알리도시가 처벌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교황 율리오 2세는 그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고, 혐의가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추기경 알리도시는 1510년 10월 18일 볼로냐 교구의 교황청 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1510년 10월 28일, 추기경 알리도시는 우르비노 공작에 의해 다시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교황은 즉시 그를 석방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1]

1511년 5월 14일, 교황은 안전을 위해 볼로냐를 떠나 라벤나로 거처를 옮겨 산 비탈레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머물렀다. 벤티볼리오 가문 지지자들과 교황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5월 20일 오후 10시경, 변장한 추기경 알리도시는[13] 챙길 수 있는 모든 귀중품을 가지고 카스텔 델 리오로 도망쳤다. 이 행동으로 인해 도시 성문 밖에 있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는 모든 포병, 거의 모든 식량, 수많은 깃발을 버리고 현장을 포기했다. 5월 23일 프랑스 군대의 수장인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14] 벤티볼리오 가문과 함께 볼로냐에 입성했다.[1]

교황은 추기경들에게 도시 상실을 알리고 우르비노 공작과 시민들을 반역죄로 고발했다. 교황은 공작의 처형을 요구했지만, 프란체스코 마리아는 알리도시를 반역죄로 고발하며 대응했다. 카스텔 델 리오에 있던 추기경은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라벤나로 갔다. 그는 그의 처남 귀도 바이니와 1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경비대를 동반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우르비노 공작이 반역자라고 확신했다.[1]

2. 7. 율리오 2세의 비호와 석방

율리오 2세는 1510년 2월 24일에 베네치아와의 평화 협상을 진행했는데, 일부에서는 교황이 알리도시를 불러들인 것이 이 협상에서 그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평화 협상 이후, 교황은 외국으로부터 이탈리아와 가톨릭 교회의 독립을 추구하며, 프랑스루이 1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페라라 공작에게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해야 했다.

1510년 4월, 많은 볼로냐의 명사들은 교황이 알리도시를 볼로냐의 교황 대사로 재임명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알리도시가 베네치아와의 전쟁 중에 프랑스와 거래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같은 해 10월 7일, 모데나 인근 교황군 주둔지에서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는 알리도시를 체포하여 수갑을 채운 채 150명의 기병 호위를 받으며 볼로냐로 압송했다. 산 펠리체 성문 밖에서 20명의 석궁병들이 그의 수갑을 풀고 그를 광장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다.[1]

우르비노 공작과 볼로냐 시민들은 알리도시가 처벌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율리오 2세는 알리도시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고, 혐의가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알리도시는 1510년 10월 18일에 볼로냐 교구의 임시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1510년 10월 28일, 알리도시는 우르비노 공작에 의해 다시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교황은 즉시 그를 석방하고 모든 권한을 회복시켜 주었다.[1]

2. 8. 볼로냐에서의 탈출과 죽음

1511년 5월 14일, 교황은 프랑스군에 의해 볼로냐가 고립될 위험에 처하자 안전을 위해 볼로냐를 떠나 라벤나로 피신했다.[11] 라벤나에서 그는 산비탈레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머물렀다. 교황이 떠나자 벤티볼리오 가문[12] 지지자들과 교황 권위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5월 20일 밤 10시경, 변장한 추기경 알리도시[13]는 자신이 챙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카스텔델리오로 도망쳤다.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는 이 광경을 성문에서 지켜본 후, 모든 대포와 식량, 군수품을 버리고 도주했다. 5월 23일, 프랑스군 사령관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14]가 벤티볼리오 가문과 함께 볼로냐에 입성했다.

교황은 볼로냐 함락 소식을 추기경들에게 알리고, 우르비노 공작과 볼로냐 시민들을 반역죄로 고발했다. 교황은 우르비노 공작의 처형을 원했지만, 대신 우르비노 공작은 알리도시 추기경을 반역죄로 고발했다. 카스텔델리오에 있던 추기경은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기 위해 라벤나로 갔다. 그는 그의 매부 구이도 바이니와 100명의 교황 호위병을 대동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우르비노 공작이 반역자라고 확신했다. 1511년 5월 24일, 공작은 교황과 면담을 가졌다. 그는 심하게 질책을 받고, 8명의 충복과 함께 쫓겨났다. 그는 산 비탈레 성당 근처에 있는 마르코 비제로 추기경과 함께 머물고 있던 알리도시 추기경의 숙소로 향했다. 그 당시 호위병과 함께 있던 추기경은 저녁 식사에 초대한 교황의 거처로 가고 있었다. 추기경은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고, 공작 일행의 한 젊은이가 격분하여 말에서 내려 추기경에게 다가갔다. 그는 노새를 타고 있던 추기경의 고삐를 잡고 옆구리를 찔렀다. 추기경이 노새에서 떨어지자, 한 대장이 단검으로 그의 뺨과 귀를 잘라냈고, 필리포 도리아는 그의 머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총신은 친구가 없다' - 특히 알리도시와 같은 유형의 총신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교황 특사의 하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대낮 길거리에서 벌어진 이 인기 없는 성직자의 살인 사건을 무관심하게 지켜보았다."[15]

추기경의 시신은 교황이 라벤나 대성당에서 엄숙한 장례를 치렀고, 그곳에 묻혔다. 1745년에 오래된 대성당이 철거되었을 때, 의사 가스파레 데시데리오 마르티네티는 추기경의 두개골을 산 비탈레의 베네딕토회에 주어 다른 유골과 섞이지 않게 했다. 베네딕토회에서 그의 유골은 클라센세 도서관으로 옮겨져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이후 추기경 아고스티노 리바롤라가 그 유골을 회수하여 매장했다. 1968년 6월 20일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두개골에 있는 쪼개진 흔적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몰라 대성당에는 추기경의 조상이 있는 기념비가 있고, 그 아래에는 그와 그의 다른 가문 출신들을 기리는 대리석 판이 있다.[16]

2. 9. 사후

1511년 5월 24일, 우르비노 공작은 교황과의 면담 후, 마르코 비제로 추기경과 함께 머물던 알리도시 추기경의 숙소로 향했다. 같은 시각, 알리도시 추기경은 교황의 초대로 저녁 식사에 가던 중이었다. 알리도시 추기경이 인사를 건네자, 우르비노 공작의 수행원이 그를 공격하여 살해했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이 사건은 대낮에 벌어졌음에도 많은 이들이 무관심하게 지켜봤다고 한다.[15]

율리오 2세는 알리도시 추기경의 장례를 라벤나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치렀고, 그의 유해는 그곳에 매장되었다. 1745년 대성당 철거 당시, 그의 두개골은 산 비탈레의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에게 전달되었다가 클라센세 도서관에 공개되기도 했다. 이후 아고스티노 리바롤라 추기경이 유골을 수습하여 다시 매장했다. 1968년 확인 결과, 두개골에는 여전히 공격받은 흔적이 남아있었다.[16] 이몰라 대성당에는 알리도시 추기경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3. 성격 및 평가

피에트로 벰보 추기경은 알리도시를 "수치스럽고 범죄적인 삶을 사는 자이며, 정직함도 종교심도 없으며, 그에게는 어떤 것도 침해되지 않은 것이 없고, 순결한 것도, 거룩한 것도 없었다"라고 묘사했다.[4]

4. 대중 문화에서의 묘사

프란체스코 알리도시는 2011년 드라마 《보르자》와 텔레비전 시리즈 《보르지아》의 등장인물이다. 맷 디 앤젤로가 연기하였고, 델라 로베레 추기경의 연인으로 묘사된다.[17][5] 이 소문은 그의 생애에서부터 시작되었다.[6]

참조

[1] 웹사이트 Alidosi, Francesco, detto il Cardinal di Pavia http://www.treccani.[...] Treccani 2020-07-06
[2] 서적 The Medici Popes (Leo X and Clement VII) https://archive.org/[...] Methuen & Co.
[3] 웹사이트 ALIDOSI, Francesco (ca. 1455/1460-1511) https://cardinals.fi[...]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4] 서적 History of Venice, Volume 3: Books IX-XII Harvard University Press
[5] 기타 Borgia Season 2, episode 11: "The Seven Sorrows"
[6] 서적 The House of Medici: Its Rise and Fall HarperCollins 2012-07-17
[7] 서적 교황 연대기 바다출판
[8] 서적 교황 연대기 바다출판
[9] 서적 옥스포드 교황사전
[10]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서적 The Medici Popes (Leo X and Clement VII) https://archive.org/[...] Methuen & Co.
[16] 웹사이트 The Cardinals of the Holy Roman Church – Biographical Dictionary – Consistory of December 1, 1505 http://www.fiu.edu/~[...]
[17] 기타 Borgia Season 2, episode 11: "The Seven So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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