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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스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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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아스카르는 잉카 제국의 사파 잉카(황제)로, 이복형제 아타우알파와의 내전과 스페인의 침략으로 인해 생애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아버지 우아이나 카팍의 사후 황위에 올랐으나, 아타우알파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이 우아스카르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울 것을 우려하여 그를 암살했다. 우아스카르는 폭정을 일삼았다는 평가와 스페인 측 기록의 편향성으로 인해 엇갈린 평가를 받으며, 잉카 제국의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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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스카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와스카르 초상화
'고대 페루의 황혼: Lieselotte와 Theo Engl(1969)의 잉카 제국의 영광과 쇠퇴, Museum für Völkerkunde Berlin-Dahlem에 있는 원본 초상화의 사진'
직위사파 잉카
통치 기간1527년–1532년
로마자 표기Waskhar
통치
선임자우아이나 카팍
니난 쿠요치(단 며칠)
후임자아타우알파
개인 정보
배우자추키 우이파
자녀레오노르 쿠리쿠이요르
왕조아난 쿠스쿠
아버지우아이나 카팍
출생일1527년 이전
출생지우아스카르파타, 잉카 제국, 현재의 페루
사망일1532년
사망지쿠스코, 잉카 제국, 현재의 페루

2. 생애

우아스카르의 일생은 전반적으로 안개에 싸여 있다. 당시 잉카 제국의 혼란스러웠던 잉카 내전 상황과 이후 이어진 스페인 침략자들의 극심한 잉카 문명 파괴 및 문화 탄압으로 인해 그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기록된 스페인 측 자료들은 주로 그의 폭정과 탄압을 묘사한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 Juan de Betanzos|후안 데 베탄소스es는 우아스카르가 귀족들의 아내를 빼앗고 역대 사파 잉카(황제)들의 땅과 태양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땅까지 강제로 몰수했다고 기록했다.[6] 또한 아랫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즉시 처형했다는 기록도 있다.[13]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스페인 침략자들의 관점에서 쓰였으며, 특히 베탄소스의 기록은 그의 아내가 아타우알파의 전 부인이었다는 점에서 우아스카르에게 매우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6] 따라서 스페인 측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아버지 우아이나 카팍이 사망한 후, 우아스카르는 쿠스코를 기반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북부 지역의 지지를 받던 이복형제 아타우알파와 계승권을 두고 잉카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4][5] 우아스카르는 아타우알파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나,[2] 친보라소 전투와 키파이판 전투 등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결국 아타우알파의 군대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7]

이러한 잉카인들 간의 내전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침략자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작용했다. 스페인 군대가 도착했을 때 잉카 군대는 이미 오랜 내전으로 인해 크게 약화된 상태였고, 우아스카르 지지 세력과 아타우알파 지지 세력 간의 내부 분열도 심각했다.[8]

스페인 군대가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잡고 제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우아스카르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울 것을 우려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비밀리에 부하를 보내 우아스카르를 암살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8]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14]

> "내 형제 우아스카르가 당신들에게 얼마나 많은 금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두 배를 줄 수 있다. 그를 죽이고 나를 황제로 남겨두어라."[9][10]

2. 1. 이름의 유래

우아스카르의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 가지 설은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만든 거대한 황금 사슬 혹은 목걸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케추아어로 '우아스카'(Huasca|우아스카qu)는 '목걸이' 또는 '사슬'을 의미한다. 그의 아버지였던 우아이나 카팍은 이 이름이 왕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이름 끝에 car|카르qu를 덧붙여 Huáscar|우아스카르qu가 되었다고 한다.[3] 다른 설로는 그가 태어난 곳인 Huascarpata|와스카르파타qu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주장도 있다.[3]

2. 2. 초기 생애와 통치

우아스카르(Huáscares)의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우아스'(huascaqu)는 케추아어로 '사슬' 또는 '목걸이'를 의미하는데,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만든 거대한 황금 사슬(목걸이)에서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 우아이나 카팍이 '사슬'이라는 단어가 왕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 이름 끝에 '카르'(qarqu)를 붙여 '우아스카르'가 되었다고 한다.[3] 또 다른 설은 그가 태어난 곳인 와스카르파타(Huascarpataes)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것이다.

우아스카르의 생애는 전반적으로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이는 당시 잉카 제국의 혼란스러웠던 잉카 내전 상황과 이후 이어진 스페인 침략자들의 극심한 잉카 문명 파괴 및 문화 탄압으로 인해 그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계승 과정 역시 확실하지 않다. 당시 상반된 세력들의 주장과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이 내전 승자인 아타우알파 측의 관점에서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실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여러 다른 버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 우아이나 카팍이 첫 후계자로 갓난아기였던 니난 쿠요치(Ninan Cuyochies)를 지명했지만, 그가 일찍 사망했거나, 점괘가 좋지 않아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나, 혹은 우아이나 카팍이 단순히 지명을 잊었다는 등 다양한 설명이 있다. 이후 두 번째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도 아타우알파를 지명했으나 그가 거절했는지, 우아스카르 본인을 직접 지명했는지, 아니면 귀족들이 우아스카르를 추대했는지에 대해 기록이 엇갈린다.[4] 어떤 경위였든, 우아스카르의 즉위와 그를 둘러싼 분쟁은 결국 쿠스코를 기반으로 한 세력의 지지를 받은 우아스카르와, 우아이나 카팍과 함께 북부에 기반을 둔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은 이복형제 아타우알파 사이의 잉카 내전으로 이어졌다.[5]

우아스카르에 대해 기록된 스페인 측 자료들은 주로 그의 폭정과 탄압을 묘사한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 후안 데 베탄소스(Juan de Betanzoses)는 우아스카르가 마음에 드는 귀족들의 아내를 빼앗고, 심지어 역대 사파 잉카(황제)들의 땅과 태양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땅까지 강제로 몰수했다고 기록했다. 잉카 사회에서 사망한 황제의 땅은 그의 사후 숭배를 위해 가문에 남겨지고, 태양신을 위한 땅 역시 신성하게 관리되었으므로, 이러한 몰수 행위는 우아스카르가 잉카 종교와 조상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다.[6] 또한 아랫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즉시 처형하는 등 잔인한 통치를 했다고도 전해진다.[13]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스페인 침략자들의 관점에서 쓰였으며, 특히 베탄소스의 기록은 그의 아내가 아타우알파의 전 부인이었다는 점에서 우아스카르에게 매우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6] 따라서 스페인 측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우아스카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후, 경쟁자였던 아타우알파에게 전쟁을 선포하며 내전을 시작했다.[2] 베탄소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의 장군 키스키스(Quizquizes)가 이끄는 6만 명의 군대가 우아스카르를 지지하는 6만 명의 군대와 맞섰다고 한다.[6] 그러나 우아스카르 군대의 주요 장군들이 아타우알파에게 넘어가고 민심이 흔들리면서 전세는 불리해졌다. 결국 친보라소 전투(Battle of Chimborazo영어)와 키파이판 전투(Battle of Quipaipán영어)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우아스카르는 포로로 잡혔고, 아타우알파의 장군들인 키스키스와 찰쿠치마크(Chalkuchimaces)가 수도 쿠스코를 점령했다.[7]

이러한 잉카인들 간의 내전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침략자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작용했다. 스페인 군대가 도착했을 때 잉카 군대는 이미 오랜 내전으로 인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원래 우아스카르를 지지했던 쿠스코의 권력층들이 겉으로는 아타우알파에게 복종했지만 속으로는 반감을 품고 있어 내부적인 분열도 심각했다.

스페인 군대가 아타우알파를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포로로 잡고 제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우아스카르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울 것을 우려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비밀리에 부하를 보내 우아스카르를 암살하도록 지시했다.[8]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14]

> "내 형제 우아스카르가 당신들에게 얼마나 많은 금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두 배를 줄 수 있다. 그를 죽이고 나를 황제로 남겨두어라."[9][10]

2. 3. 잉카 내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인 우아스카르와 이복형제 아타우알파 사이의 계승 분쟁은 결국 잉카 내전으로 번졌다.[4][5] 쿠스코를 기반으로 한 세력의 지지를 받은 우아스카르가 먼저 황위에 올랐으나, 북부 지역의 지지를 받는 아타우알파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 후안 데 베탄소스(Juan de Betanzos)는 우아스카르의 폭정을 기록했지만, 그의 아내가 아타우알파의 전처였기 때문에 이 기록은 매우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6] 베탄소스에 따르면 우아스카르는 귀족들의 아내를 빼앗고, 역대 사파 잉카들의 토지와 태양신에게 바쳐진 토지를 몰수하여 잉카의 종교와 전통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6]

결국 우아스카르는 아타우알파에게 전쟁을 선포했다.[2] 초기에는 우아스카르가 우세했으나, 아타우알파의 군대에 연이어 패배하며[7] 결국 아타우알파의 장군 키스키스(Quizquiz)와 찰쿠치마크(Chalcuchímac)에게 사로잡히고 수도 쿠스코는 점령당했다.[7] 베탄소스는 이 전쟁 과정에서 아타우알파 측이 보인 잔혹성에 대해서도 기록했다.[6]

이러한 잉카인들 사이의 내전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에게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내전으로 인해 잉카 군대는 이미 지쳐 있었고,[8] 우아스카르를 지지했던 쿠스코 세력과 아타우알파 세력 간의 내부 분열도 심각했다.

스페인군이 아타우알파를 카하마르카 전투에서 포로로 잡자, 아타우알파는 스페인군이 자신 대신 우아스카르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울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비밀리에 우아스카르의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8]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9][10][14]

''"내 형제(우아스카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많은 금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 2배를 줄 수 있다. 그를 죽여버리고, 나를 황제의 자리에 남겨두어라"''

2. 3. 1. 내전의 원인

와이나 카팍 황제는 자신의 어머니 출신지인 키토를 아껴 제국의 제2 수도로 삼았다. 이 때문에 그의 말년에는 잉카 귀족들이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키토를 중심으로 한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와이나 카팍은 아들 와스카르에게 수도 쿠스코를 포함한 제국 대부분(코야 수유, 안티 수유, 쿤티 수유)을 맡겨 사파 잉카(황제)로 삼고, 그의 이복형제인 아타왈파에게는 제2 수도 키토를 포함한 북부(친차 수유) 지역의 총독 자리를 주려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기록은 아타왈파 측의 입장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와이나 카팍과 황태자 니난 쿠요치가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누가 황위를 계승할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 되었고, 결국 와스카르와 아타왈파 사이에 계승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페인 측의 설명은 현재까지 연구된 잉카의 계승 방식과는 잘 맞지 않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잉카 황제의 계승에는 스페인 왕위 계승처럼 명확한 순위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때로는 실력 행사가 따르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장 유력한 황자가 황위를 잇는 방식이었다. 이는 9대 황제 파차쿠텍이 침무 왕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분할 상속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제도에 따르면, 아무리 강력한 통치자의 유산이라도 자녀들과 배우자에게 나누어 상속되었지만, 황제의 칭호 자체는 한 명의 후계자에게만 주어졌다. 이러한 방식은 와스카르와 아타왈파 사이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내전을 막기 위한 장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3. 2. 내전의 경과

아버지 와이나 카팍 사망 당시 우아스카르는 수도 쿠스코에 머물고 있었다. 이는 현재의 에콰도르 지역에 있던 이복형제 아타우알파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군대를 조직할 수 있게 해주었고, 내전 초기 우아스카르가 우세를 점하는 배경이 되었다. 제국 대부분을 장악한 우아스카르는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초기 전투에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았다. 이로 인해 내전이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아타우알파는 한 소녀의 도움으로 감금 상태에서 탈출했고, 다시 군대를 모아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결국 우아스카르에게 승리했다. 아타우알파는 황제 즉위를 위해 제국 북부에서 쿠스코로 향하던 중, 카하마르카에서 야영하다가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고 그들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아스카르는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아타우알파가 우아스카르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처형했다. 하지만 아타우알파가 실제로 우아스카르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3. 스페인의 침략과 우아스카르의 죽음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사이의 잉카 내전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결정적인 이점을 제공했다. 스페인 군대가 도착했을 당시 잉카 제국은 극심한 내전으로 군사력이 소진되었고,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구 지배층과 아타우알파 지지 세력 간의 정치적 분열 또한 깊었다.

스페인 군대가 아타우알파를 카하마르카에서 사로잡은 후,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이 자신을 제거하고 우아스카르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울 가능성을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측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포로 상태에서 우아스카르의 암살을 지시했는데, 이는 우아스카르가 스페인 측에 더 많은 금을 제안하며 협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8][14] 아타우알파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내 형제가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그를 죽이고 나를 주님으로 남겨둔다면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의 두 배를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9][10]

3. 1. 스페인의 침략

와이나 카팍 사망 당시 쿠스코에 있던 우아스카르는 현재의 에콰도르 지역에 있던 아타우알파보다 먼저 수도에서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기에 내전 초기에는 우세했다. 제국 대부분을 장악한 우아스카르는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한때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는 감금 상태에서 탈출하여 군대를 재정비했고, 3년에 걸친 내전 끝에 결국 승리했다.

아타우알파가 제국의 북부에서 쿠스코로 향하던 중, 카하마르카에 머물렀을 때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과 마주쳤고, 이 과정에서 아타우알파는 스페인 군에게 사로잡혔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아스카르는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스페인인들은 아타우알파가 우아스카르의 살해를 지시했다는 명목으로 그를 처형했다. 하지만 아타우알파가 실제로 형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3. 2. 우아스카르의 암살

잉카 내전에서 승리한 아타우알파는 즉위를 위해 제국 북부에서 쿠스코로 향하던 중, 카하마르카에서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인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마주쳤고 그의 군대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배한 우아스카르는 자신의 신하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스페인인들은 아타우알파가 우아스카르의 살해를 지시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가 실제로 우아스카르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4. 역사적 평가와 의의

우아스카르의 통치와 생애는 잉카 제국 말기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전개되었기에,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제한적이고 상반된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긴 기록은 승자의 관점에서 서술되었거나, 우아스카르의 정적이었던 아타우알파 측에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6] 이러한 기록들은 우아스카르의 폭정과 종교적 불경함을 강조하지만[6], 이는 정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나 아타우알파에게 유리한 서술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간의 잉카 내전이 제국의 힘을 극도로 소진시켰다는 점이다. 이 내부 분열은 피사로가 이끄는 소수의 스페인 군대가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8] 제국은 외부의 위협 앞에서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내전으로 인한 상처와 불신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이용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 군대에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아스카르의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8][9][10], 이는 권력 투쟁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우아스카르의 시대는 내부 분열이 어떻게 외부 세력의 개입을 불러오고 국가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외부의 도전과 위협에 직면했을 때 내부적인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교훈을 남긴다. 잉카 제국의 비극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내부 분열이 가져올 수 있는 파멸적인 결과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1. 엇갈리는 평가

우아스카르에 대한 평가는 그에 대한 기록 자체가 매우 부족하고 편향되어 있어 명확하게 내리기 어렵다. 당시 잉카 제국의 내전과 이어진 스페인 정복자들의 극심한 문화 탄압으로 인해 우아스카르를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유물이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대부분 스페인 정복자들의 시각에서 작성된 것으로, 우아스카르의 폭정과 탐욕을 주로 강조한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우아스카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아랫사람들을 즉시 처형하고, 선대 황제들의 땅과 신에게 바쳐진 토지까지 강제로 빼앗아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조상과 신에 대한 공경심도 부족하여 백성들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13]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스페인 측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특히 우아스카르 전기를 쓴 스페인 작가의 아내가 그의 정적이었던 아타우알파의 전 부인이었다는 사실은 기록의 편향성에 대한 의심을 더한다. 즉, 아타우알파에게 유리하고 우아스카르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잉카 내전 당시 우아스카르 휘하의 장군들이 아타우알파에게 투항하고 민심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전적으로 우아스카르 개인의 폭정 때문인지, 아니면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와 전쟁 상황 때문인지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결국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내전은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었으며, 분열된 잉카 제국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 군대에 포로로 잡힌 후, 스페인인들이 자신 대신 우아스카르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울 것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우아스카르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에게 "우아스카르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많은 금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 2배를 줄 수 있다. 그를 죽여버리고, 나를 황제의 자리에 남겨두어라"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14] 이는 당시 잉카 지배층 내부의 극심한 갈등과 함께, 정복자들의 기록에 나타난 우아스카르의 부정적인 모습이 경쟁자였던 아타우알파 측의 입장을 반영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4. 2. 잉카 제국 몰락에 미친 영향

우아이나 카팍 사후 잉카 제국의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우아스카르와 그의 이복형제 아타우알파 사이에 잉카 내전이 발발했다.[4][5] 와이나 카팍과 유력한 후계자였던 니난 쿠요치가 명확한 후계 지명 없이 급사하면서[4], 수도 쿠스코를 기반으로 한 우아스카르와 북부의 키토를 기반으로 한 아타우알파 세력 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수도 쿠스코를 장악하고 있던 우아스카르가 우세하여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기도 했으나, 아타우알파는 탈출 후 군대를 재정비하여 반격에 나섰다. 결국 우아스카르는 친보라소 전투와 결정적인 키파이판 전투에서 아타우알파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7]

이 길고 잔혹한 내전은 잉카 제국의 국력을 극도로 소진시켰다. 제국 군대는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사회는 우아스카르 지지 세력과 아타우알파 지지 세력으로 깊게 분열되었다.[8] 특히 우아스카르의 기반이었던 쿠스코의 귀족들은 아타우알파에게 겉으로는 복종했지만, 속으로는 강한 반감을 품고 있어 제국의 통합을 저해했다.

이러한 내부 혼란 속에서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소수의 스페인 콘키스타도르들이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내전으로 약화된 잉카 제국의 상황은 정복 활동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8] 스페인 군대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아 제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동안, 아타우알파는 스페인 세력이 자신을 폐위하고 우아스카르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울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아타우알파는 비밀리에 부하를 시켜 감금되어 있던 우아스카르를 암살하도록 지시했다.[8]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인들에게 "내 형제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 두 배를 줄 수 있다. 그를 죽이고 나를 황제로 남겨두어라"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9][10] (다만, 일부 기록에서는 아타우알파가 우아스카르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 간의 파괴적인 내전은 잉카 제국의 군사력과 사회적 결속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이는 스페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잉카 제국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참조

[1] 서적 Huáscar https://www.collinsd[...] 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2] 서적 History of the Incas Lexington 2015
[3] 서적 The Last of the Incas Longmans 1963
[4] 서적 The Shape of Inca History: Narrative and Architecture in an Andean Empir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Iowa Press 1999
[5] 서적 The Incas: New Perspectives https://books.google[...] ABC-CLIO 2006
[6] 서적 Narrative of the Incas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6
[7] 서적 The History of the Conquest of Peru Digireads.com Publishing 2011
[8] 서적 Relation of the Discovery and Conquest of the Kingdoms of Peru Cortes Society, RareBooksClub.com 1571
[9] 웹사이트 Narrative of the Proceedings of Pedrarias Davila https://en.wikisourc[...] The Hakluyt Society 2019-06-21
[10] 서적 Viages menores, y los de Vespucio; Poblaciones en el Darien, suplemento al tomo II https://books.google[...] 1829
[11] 서적 大航海時代叢書 新大陸自然文化史 下 岩波書店 1966
[12] 서적 History of the Incas 2015
[13] 서적 Narratives of the Incas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6
[14] 서적 Coleccion de los viajes y descubrimientos que hicieron por mar los españoles desde fines del siglo XV : con varios documentos inéditos concernientes á la historia de la marina castellana y de los establecimientos españoles en Indias http://worldcat.org/[...] Impr. Nacional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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