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베 야스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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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와베 야스아키는 1999년 9월 29일, 렌터카를 몰고 시모노세키역에 돌진하여 2명을 사망하게 하고, 흉기로 7명을 찔러 3명을 추가 사망하게 한 사건의 범인이다. 대인공포증과 불우한 개인사, 잇따른 불행으로 범행을 결심했으며, 2002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와 상고를 거쳐 2008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2012년 3월 2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의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관련 법률 개정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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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베 야스아키 | |
|---|---|
| 사건 개요 | |
| 명칭 | 시모노세키역 칼부림 살인사건 |
| 일본어 명칭 | 시모노세키 토리마 사츠진 지켄 (下関通り魔殺人事件) |
| 발생 위치 |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
| 표적 | 민간인 |
| 발생 날짜 | 1999년 9월 29일 |
| 사용 수단 | 자동차, 칼 |
| 사망자 | 5명 |
| 부상자 | 10명 |
| 동기 | 사회에 대한 증오 |
| 결과 | 사형 (집행 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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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정보 | |
| 날짜 | 1999년 9월 29일 |
| 시간 | 오후 4시 25분 |
| 시간대 | JST |
| 유형 | 대량 살인, 칼부림, 차량 돌진 공격 |
| 가해자 | |
| 인물 | 우와베 야스아키 |
| 무기 | |
| 종류 | 자동차, 칼 |
2. 인물
우와베 야스아키는 1964년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서 태어났다. 규슈 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건축 관련 경력을 쌓았으나, 대인공포증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혼과 이혼, 사업 실패, 태풍으로 인한 트럭 침수 등 개인적인 문제도 겹치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
2. 1. 성장 배경 및 학력
우와베 야스아키는 1964년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교외에서 아버지 우와베 마사카즈와 어머니 우와베 게이코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모두 교사였다.[25] 고등학교까지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으나, 대학교 입학 시험에 처음에는 실패하고 재수하여 규슈 대학 공학부에 입학했다. 우와베는 강한 대인공포증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2]
2. 2. 경력 및 개인사
1989년 규슈 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후쿠오카에 있는 작은 건축사무소에 취직했으나, 1991년에 퇴직하고 1급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25] 이후 다른 건축사무소에 취직했지만, 대인공포증으로 인해 퇴직했다.[25]1993년 결혼 후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개업했지만, 대인공포증으로 인한 영업 실패로 1997년 폐업했다.[2] 대출을 받아 트럭을 구입하여 택배업을 시작했고, 비교적 순조롭게 운영되었다.[2] 그러나 1999년 6월 이혼을 겪었고, 9월 24일 태풍으로 인해 트럭이 침수되어 폐차되면서 빚만 남게 되었다.[25]
신혼여행으로 방문했던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으나, 이혼과 트럭 상실로 인해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25] 1999년 9월 27일 부모에게 자금 지원과 대출금 상환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25]
3. 범행 동기 및 사건 발생
우와베 야스아키는 1987년 규슈 대학 공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급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설계 사무소를 운영했지만 경영난으로 폐업했다.[11][13][14] 이후 운송업에 종사하며 뉴질랜드 이민을 계획했으나, 태풍으로 인해 트럭이 침수되고 아내와의 이혼 문제까지 겹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11][13][14]
1999년 9월 29일, 우와베는 아버지에게 침수된 트럭의 폐차를 부탁했지만 거절당했고,[11][13][14] 같은 날 아버지로부터 트럭 폐차 절차를 직접 하라는 전화를 받고 분노하여 범행 당일 실행을 결심하게 되었다.[15] 그는 "무엇을 해도 잘 풀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부모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11][13][14] 당초 10월 3일에 범행을 계획했으나[15], 아버지와의 통화로 인해 당일 범행을 결심하고 렌터카를 빌려 범행을 저질렀다.[15] 범행 전에는 수면제를 복용하기도 했다.[13]
우와베는 이케부쿠로 묻지마 살인 사건에 영향을 받아 차량을 이용한 범행을 계획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이케부쿠로 사건처럼 칼만으로는 많은 사람을 살해할 수 없어 차를 사용했다"고 밝혔다.[11]
3. 1. 사건 발생
9월 29일 16시 25분경, 우와베 야스아키는 시모노세키역 근처 렌터카 업체에서 빌린 승용차를 몰고 시모노세키 역 동쪽 입구로 돌진했다.[3][4] 그는 역 구내를 약 60m 폭주하며 7명을 쳤고,[9] 이 중 '''에토 가즈유키'''(衛藤和行|에토 가즈유키일본어), '''마쓰오 미즈요'''(松尾瑞代|마쓰오 미즈요일본어), '''다카하시 미에'''(高橋美恵|다카하시 미에일본어), '''다카하시 하루에'''(高橋治恵|다카하시 하루에일본어) 등 2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26][3][4]차가 멈추자 우와베는 차에서 내려 부엌칼을 들고 개찰구를 지나 2층 승강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1명을 찌르고, 승강장에서 추가로 7명을 찔렀다.[8][11][4] 이로 인해 현장에서 2명이 추가로 사망하고, 나중에 1명이 사망하여 총 5명이 사망했다.[26]
우와베는 승강장에서 역무원들에게 제압되었고, 야마구치현 경찰 철도 경찰대에 의해 살인미수 혐의로 현행범 체포되었다.[8][12][26] 이 사건으로 총 5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11][26]
4. 형사 재판 및 처벌
우와베 야스아키는 형사 재판 과정에서 여러 차례 정신 감정을 받았다. 변호인 측은 우와베가 편집성 성격 장애와 피해망상증을 앓고 있어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하며 감형 또는 무죄를 주장했다. 반면 검찰 측은 우와베에게 범행에 대한 완전한 책임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1심, 2심, 3심 재판부는 모두 우와베의 책임 능력을 인정했다. 특히 2심 재판부는 "범행 당시 완전 책임 능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라며 1심의 사형 판결을 지지했다.[17]
2012년 3월 29일, 우와베는 히로시마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5]
4. 1. 1심 (야마구치 지방 법원 시모노세키 지원)
1999년 12월 22일 야마구치 지방 법원 시모노세키 지원에서 열린 1심 공판에서 우와베는 혐의를 대체로 인정했고, 변호인은 심신미약 상태를 주장했다.[27] 법원은 변호인 측 주장을 받아들여 7차 공판에서 조치 대학 명예교수 후쿠시마 아키라(福島章|후쿠시마 아키라일본어)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했고, 피해망상증이 의심된다는 결과가 나왔다.[27]2000년 1월 19일 2차 공판에서 우와베는 방청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26] 3월 8일 4차 공판에서 우와베는 약 3주 전 조타 히로시의 범행(이케부쿠로 도리마 사건)을 보고 '칼만 가지고는 많은 사람을 살상할 수 없다'는 생각에 차로 돌진했다고 진술했다.[26],[28] 3월 29일 5차 공판에서 우와베는 '신의 지시로 범행을 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27]
2001년 6월 27일 14차 공판에서 변호인과 검찰 양측 모두 재차 정신감정을 요청했다. 게이오 대학 명예교수 호사키 히데오(保崎秀夫|호사키 히데오일본어)는 두 번째 정신감정에서 심신미약을 부정했다. 변호인은 범행 당시 정신병에 의한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상태를 주장하며 감형을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책임능력이 있음을 인정, 2002년 9월 20일 선고공판에서 사형을 판결했다.[27]
4. 2. 2심 (히로시마 고등 법원)
2003년 7월 18일 히로시마 고등법원에서 시작된 2심 재판 첫 공판에서 변호인 측은 무죄를 주장하며 새로운 정신감정을 요구했다.[27] 2004년 1월 5일 열린 2차 공판에서 정신감정인으로 선정된 나카무라 사다오(仲村禎夫|나카무라 사다오일본어) 와세다 대학 교수는 2005년 1월 13일 5차 공판에서 우와베가 피해망상증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 정도는 경미하다고 감정 결과를 제출했고, 이 결과가 재판부에 의해 증거로 채택되었다. 최종적으로 6월 28일,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우와베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한 1심 판결을 지지했다.[27],[28]4. 3. 3심 (일본 최고 재판소)
2008년 6월 13일 대법원 상고심 공판에서 변호인 측은 우와베가 사회로부터 박해받고 있다는 망상에 지배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러 자기 제어 능력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사형 판결 파기를 요구했다. 검찰 측은 생활고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행으로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사형 판결 유지를 주장했다.[29] 7월 11일, 대법원은 우와베의 상고를 기각했고,[18] 우와베는 이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8월 27일 기각되어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19][30]5. 사형 집행
2012년 3월 27일, 오가와 토시오 법무대신이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하여, 이틀 뒤인 3월 29일 히로시마 구치소에서 우와베 야스아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5][20] 같은 날 요코하마 전처 일가 살인 사건, 미야자키 연쇄 강도 살인 사건의 각 사형수(모두 2007년에 사형 판결 확정)에 대해서도 사형이 집행되었다.[21][22] 이는 1년 8개월 만의 사형 집행이었다.
6. 민사 재판
2000년 5월 11일, 피해자 및 유족들은 우와베와 그의 부모를 상대로 손해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조정신청을 시모노세키 간이재판소에 제출했으나, 우와베의 부모 측은 사과 의사가 없어 조정은 결렬되었다.[27]
사건 발생 2년 후인 2001년 9월 29일, 피해자 및 유족들은 JR서일본, 우와베, 그리고 우와베의 부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우와베에게 거액의 배상 책임을 판결했지만, JR서일본과 우와베 부모에 대한 청구는 기각했다. 원고 측은 이에 항소했으나,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대체로 유지하며 우와베의 배상 책임액만 소폭 늘렸다.[27]
6. 1. 1심 (야마구치 지방 법원 시모노세키 지원)
2000년 5월 11일, 피해자와 유족들은 우와베와 그의 부모를 상대로 손해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조정신청을 시모노세키 간이재판소에 제출했다. 그러나 우와베의 부모 측은 사과 의사가 없어 조정은 결렬되었다.[27]사건 발생 2년 후인 2001년 9월 29일, 피해자 및 유족 4명(이하 제1진)은 JR서일본과 우와베, 그리고 우와베의 부모를 상대로 총액 1.85억엔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야마구치 지방법원 시모노세키 지원에 제기했다. 이듬해인 2002년 9월 26일에는 또 다른 피해자 5명(이하 제2진)이 제1진과 같은 피고를 상대로 총액 1700만엔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0월 29일 변론에서 JR서일본은 '역은 공공시설이며, 모든 위험을 예상해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제출했다. 우와베와 우와베의 부모는 청구 기각을 요구했고, 재판부는 제1진과 제2진의 사건을 병합하기로 결정했다.[27]
2004년 11월 1일 재판부는 우와베에게 약 1.62억엔의 배상을 명령했다. 그러나 JR서일본과 우와베 부모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기각했다. 이에 원고들은 우와베에게 지불 능력이 없는 만큼, JR서일본과 우와베의 부모에게도 연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항소했다.[27]
6. 2. 2심 (히로시마 고등 법원)
원고 측은 우와베에게 지불 능력이 없는 만큼, JR서일본과 우와베의 부모에게도 연대 책임이 있음을 주장하며 항소했다.[27]2006년 3월 13일,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JR과 우와베의 부모에게 특별히 큰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려움을 근거로 우와베에게만 배상 책임을 지운 1심 판결을 확정짓는 대신, 우와베의 손해배상 책임액을 1000만 엔 늘어난 약 1.72억엔으로 높였다.[27]
7. 사회적 영향 및 논란
우와베의 공격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자동차 돌진 피해자와 칼에 찔린 피해자 간의 보상금 차이는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제기했다.[23][24]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 개선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우와베가 범행에 사용한 시모노세키역 동쪽 출구는 사건으로 손상되었고, 곧 수리되었으나 2006년 1월 7일 시모노세키역 방화 사건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이후 역 주변 재개발과 함께 개찰구 위치와 형태가 크게 바뀌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묻지마 범죄' 예방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강화와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특히, 피해 유형에 따른 차별 없는 지원 체계 구축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7. 1.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 논란
우와베의 공격은 일본의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차량 돌진 공격의 생존자와 사망자 유족은 렌터카 보험으로부터 자동차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칼 공격 피해자는 그렇지 못했고,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정부의 피해자 보상 제도에서만 지급을 받을 수 있었다.[23]자동차에 의한 피해는 가해자의 고의에 의한 것이라도 자동차 손해배상 책임 보험(자배책 보험)의 보상 대상이 되므로, 자동차에 치여 사상한 피해자에게는 자배책에 의한 지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칼에 찔려 사상한 사람들에게는 범죄 피해자 등 급부금만 지급되었기 때문에, 같은 사건임에도 공적 보상액이 불평등하다는 지적이 있었다.[24]
이를 계기로 2001년에 범죄 피해자 등 급부금의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상 범위 확대와 지급액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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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下関駅東口는 로터리交差点의 周囲에 歩道가 있고, 歩道의 더욱 外側에 駅舎의 入り口가 되는 押し開き式의 유리扉가 設置되어 있었다。유리扉는 歩行者와 自転車程度가 通行가능한 幅밖에 없고、破壊力으로부터 推測되는 상당한 스피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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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は1階に有人改札が設置されていたが、その後、中2階に自動改札機が設け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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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式会社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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犯罪被害者等給付金の最高額は当時1,079万円であった。なお、自賠責保険の給付金最高額は当時3,000万円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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犯罪被害者損害賠償補償法の制定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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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주오 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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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베 야스아키) 사건의 경과
http://www2.tip.ne.j[...]
요미우리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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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베 야스아키 관련) 재판의 상황
http://www2.tip.ne.j[...]
시모노세키 주오 법률사무소
200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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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의 '아키하바라 사건'> 시모노세키 살인 사건 (도리마 사건): 상부에서 피고 사형 확정
http://matinoakari.n[...]
마치노아카리
200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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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역 살상, 상부에서 피고 사형 확정
http://sankei.jp.msn[...]
MSN 산케이 뉴스
200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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