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타 히로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타 히로시는 1999년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흉기 난동 사건을 일으켜 2명을 살해하고 6명에게 부상을 입힌 인물이다. 그는 유년 시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도쿄에서 좌절을 경험했으며,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범행 직전, 조타는 직장 동료와의 갈등으로 인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분노를 느껴 범행을 저질렀다. 재판 과정에서 정신분열병을 주장했지만, 2007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살인자 - 베아트리체 첸치
    베아트리체 첸치는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다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살해하고 처형된 16세기 로마의 귀족 여성이다.
  • 살인자 - 압돌말렉 리기
    압돌말렉 리기는 발루치족 출신으로 이란 반정부 무장단체 준달라의 지도자였으나, 이란 정부에 체포되어 국가 반역 혐의로 사형당했다.
  • 일본의 살인자 - 나카무라 사토루
    나카무라 사토루는 북한 출신으로 소년원 수감과 징역형을 거쳐 강도살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수감 중 시를 쓰기도 했고 그의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사형제 논란을 야기했다.
  • 일본의 살인자 - 사가와 잇세이
    사가와 잇세이는 프랑스 유학 중 살인 및 식인 행위로 체포되었으나 심신상실로 처벌받지 않고 일본으로 추방되어 작가로 활동하다 2022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 오카야마현 출신 - 하야미 히로시
    하야미 히로시는 일본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심리학과 철학 분야의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했다.
  • 오카야마현 출신 - 우가키 가즈시게
    우가키 가즈시게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육군대신과 조선총독을 역임했으며, 군사 개혁을 단행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수상 취임에 실패하고 외무대신으로서 중일 전쟁 종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조타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타 히로시
원어명造田 博
로마자 표기Jota Hiroshi
출생일1975년 11월 29일
국적일본
직업살인자

2. 유년기 및 청소년기

조타 히로시는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출신으로, 유년기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버지의 실직과 부채 문제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는 변화를 겪었다.[1] 청소년기에는 히로시마에 있는 형에게 잠시 의탁했다가, 이후 도쿄로 거처를 옮겼다.[1]

2. 1. 유년기

조타는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출신으로, 처음에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라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 빚이 늘어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다. 많은 부채 때문에 채권 추심에 시달리던 조타의 부모는 결국 집을 나가게 되었고, 간혹 밤에 몰래 집에 들러 조타에게 생활비를 건네주는 상황에 이르렀다.[1]

이후 부모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계속되는 채권 추심을 견디다 못한 조타는 1994년 1월경 히로시마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형을 찾아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1]

2. 2. 청소년기

조타는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출신으로, 처음에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대학교 진학을 희망하던 시기에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가계 부채가 늘어나면서 가정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다. 채권 추심을 피해 부모는 집을 나가게 되었고, 간혹 밤에 몰래 찾아와 조타에게 생활비를 건네주는 상황에 처했다.[1]

이후 부모와의 연락이 끊기고 계속되는 채권 추심에 시달리던 조타는 1994년 1월경, 히로시마에서 대학을 다니던 형에게 의탁하여 함께 살기 시작했다. 형의 도움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했지만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여러 일을 전전했다. 결국 1996년 11월 말,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도쿄로 거처를 옮겼다.[1]

3. 도쿄 생활과 좌절

도쿄로 이주한 조타 히로시는 직업 및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좌절감을 느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1]

3. 1. 인정받지 못하는 노력

도쿄로 온 조타는 을 항상 소지하고 다니다가 총도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이후 취직은 했지만 자신이 원하던 일이 아니었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급여 등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운 대우를 받지 못했다.[1]

1997년, 조타는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힘든 삶을 사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별다른 노력 없이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불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형을 비롯해 일본 외무성, 국제 연합 등에 의미를 알기 어려운 내용의 편지를 여러 통 보냈다.[1]

3. 2. 미국 생활 시도와 실패

한편으로 조타는 TV 등에 비춰진 미국의 이미지를 동경하여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1998년 6월 24일에 미국으로 갔지만, 영어를 할 줄 몰랐음은 물론이고,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조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이 다 떨어지고 취직도 하지 못했다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조타는 현지의 일본영사관의 보호를 받게 되고 9월 23일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1]

4. 범행 동기 및 과정

1999년 9월, 조타 히로시는 직장 동료와의 갈등과 의문의 장난 전화로 인해 쌓인 분노를 계기로 무차별 살인을 계획했다.[1] 그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범행을 결심하고, 도큐핸즈 이케부쿠로점에서 식칼과 쇠망치를 구입하는 등 며칠간 범행을 준비했다.[1]

9월 8일, 조타는 이케부쿠로 선샤인시티 지하통로에서 이케부쿠로역 방면으로 이동하며 행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이 범행으로 '''住吉和子jpn'''(당시 66세)와 '''高橋真弥jpn'''(당시 29세) 2명이 사망하고, 스미요시 카즈코의 남편 直|다다시jpn를 포함한 6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타는 현장에서 다른 행인들에게 제압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1]

4. 1. 범행 동기

1999년 4월, 조타는 다시 신문배달원으로 취직했다. 같은 해 9월 1일, 직장에 지각한 것을 계기로 상사의 권유를 받아 휴대전화를 구입했다. 조타는 원래 상사에게만 전화번호를 알려주려 했으나, 평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매우 싫어하던 직장 동료가 끈질기게 물어보는 바람에 마지못해 번호를 알려주게 되었다.[1]

이틀 뒤인 9월 3일, 조타의 휴대전화로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장난 전화가 걸려왔다. 조타는 이 전화가 자신이 싫어하던 동료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크게 분노했으며, 그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1]

4. 2. 범행 과정

1999년 9월 3일, 조타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걸려온 무언 장난전화를 평소 싫어하던 직장 동료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크게 분노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1] 다음 날인 4일 새벽 3시경, 조타는 "내가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취지의 글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는 출근하지 않고 이케부쿠로로 향했다.[1]

같은 날, 조타는 도큐핸즈 이케부쿠로점에서 범행 도구인 식칼과 쇠망치를 구입했다. 이후 7일까지 아카사카와 이케부쿠로를 오가며 범행 장소와 시기를 물색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1]

1999년 9월 8일, 조타는 마침내 무차별 살인을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이케부쿠로 선샤인시티 지하통로에서 준비한 흉기를 꺼내 들었다. 그는 주변의 이케부쿠로역 방향으로 이동하며 행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고, 달아나는 사람을 뒤쫓아가 상해를 입혔다.[1]

조타는 행인들에게 제압되어 출동한 경찰관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住吉和子일본어'''(당시 66세)와 '''高橋真弥일본어'''(당시 29세) 등 2명을 살해했다. 또한 스미요시 카즈코의 남편인 直|다다시일본어를 포함한 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1]

5. 재판 및 처벌

범행 후 체포된 조타 히로시는 여러 차례의 재판을 거쳐 최종적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는 범행 당시 조타의 정신 상태와 책임 능력 여부가 주요 쟁점이 되었으나, 법원은 조타의 책임을 인정하여 극형을 선고했다.[1][2][3]

5. 1. 체포 및 진술

체포된 조타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미웠으며,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조타의 변호인은 조타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중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조타 히로시교의 신이나 교주가 아니라 선교자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없고, 제 이야기를 알아주는 것이 목적인 종교입니다. 오카야마의 제 본가를 조타 히로시교의 예배지로 하겠습니다.' (원문: 私は造田博教の中で、神とか主ではなく、宣教者です。信仰の対象というものは無くて、私の話を知ってもらうというものです。岡山の実家を造田博教の礼拝地にします。|와타시와 조다 히로시쿄노 나카데, 카미토카 슈데와 나쿠, 센쿄샤데스. 신코노 타이쇼토 이우모노와 나쿠테, 와타시노 하나시오 싯테모라우토 이우모노데스. 오카야마노 짓카오 조다 히로시쿄노 레이하이치니 시마스일본어) 와 같이 의미를 알기 어렵고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변호인은 이를 바탕으로 범행 당시 조타가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나타내고 있었고, 따라서 범행 당시 심신상실 상태로 책임능력이 없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인 도쿄 지방법원 형사제1부의 오노 이치타로(大野市太郞) 재판장은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2002년 1월 18일에 조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

이어진 2006년 9월 29일, 2심인 도쿄 고등법원의 하라다 쿠니오(原田国男) 재판장은 조타가 처음부터 범행 도구로 사용할 목적으로 칼과 망치를 구입했고 범행 직전에는 범행을 망설이는 등, 사건 당시 심신상실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1심의 사형 판결을 지지하며 항소를 기각했다.[2]

2007년 4월 19일, 3심인 대법원에서도 닥치는 대로 행인들을 공격한 범행이 매우 악질적이라는 이유로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판결했다. 조타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사형은 2007년 5월 7일자로 확정되었다.[3]

5. 2. 재판 과정

체포된 조타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미웠으며,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조타의 변호인은 조타가 구치소 수감 중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근거로 심신상실을 주장했다. 편지에는 자신을 "조타 히로시교의 신이나 교주가 아니라 선교자"로 칭하며 "오카야마의 제 본가를 조타 히로시교의 예배지로 하겠다"는 등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변호인은 이를 토대로 조타가 범행 당시 정신분열병 증상을 보였고 책임 능력이 없는 심신상실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02년 1월 18일, 1심인 도쿄 지방법원 형사제1부의 오노 이치타로(大野市太郞) 재판장은 변호인의 주장을 기각하고 조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

2006년 9월 29일, 2심인 도쿄 고등법원의 하라다 쿠니오(原田国男) 재판장 역시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조타가 처음부터 범행 도구로 사용할 목적으로 칼과 망치를 구입했고 범행 직전에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 점 등을 근거로, 사건 당시 심신상실 상태라고 볼 수 없다며 1심의 사형 판결을 지지했다.[2]

2007년 4월 19일, 3심인 대법원은 닥치는 대로 행인들을 공격한 범행이 매우 악질적임을 이유로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 판결을 내렸다. 조타는 이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사형은 같은 해 5월 7일자로 확정되었다.[3]

5. 3. 처벌

체포된 조타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미웠으며,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조타의 변호인은 조타가 구치소에 수감 중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조타 히로시교의 신이나 교주가 아니라 선교자입니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없고, 제 이야기를 알아주는 것이 목적인 종교입니다. 오카야마의 제 본가를 조타 히로시교의 예배지로 하겠습니다." (원문: 私は造田博教の中で、神とか主ではなく、宣教者です。信仰の対象というものは無くて、私の話を知ってもらうというものです。岡山の実家を造田博教の礼拝地にします。일본어) 와 같이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는 내용을 근거로, 범행 당시 조타가 정신분열병 증상을 보였고 심신상실 상태로 책임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심급법원재판장판결 일자내용출처
1심도쿄 지방법원 형사제1부오노 이치타로(大野市太郞)2002년 1월 18일변호인의 심신상실 주장 기각, 사형 선고.[1]
2심도쿄 고등법원하라다 쿠니오(原田国男)2006년 9월 29일범행 도구 사전 준비, 범행 직전 망설임 등을 근거로 심신상실 상태 불인정, 항소 기각 (1심 사형 유지).[2]
3심대법원-2007년 4월 19일닥치는 대로 행인을 공격한 범행이 매우 악질적임을 이유로 상고 기각, 사형 판결.[3]



조타는 대법원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2007년 5월 7일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3]

참조

[1] 웹인용 平成11合(わ)387 殺人未遂、銃砲刀剣類所持等取締法違反、傷害、暴行被告 http://www.courts.go[...] 裁判所 2010-04-10
[2] 웹인용 造田被告に2審も死刑 8人殺傷の池袋通り魔事件 http://www.47news.jp[...] 47NEWS 2010-04-10
[3] 웹인용 弁護側「責任能力ない」 池袋通り魔で最高裁弁論 http://www.chibanipp[...] 千葉日報 2010-04-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