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총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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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 총재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계승하여 1918년 12월에 설립된 최고 행정 기구이다. 독일의 지원을 받던 파울로 스코로파드스키 정권이 붕괴된 후, 디렉토리야는 볼로디미르 빈니첸코를 집정관으로, 시몬 페트류라를 군사 부문 수장으로 출범했다.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재건을 목표로 볼셰비키, 백군, 흑군 등과 전투를 벌였으며, 1919년 시몬 페트류라가 의장직을 맡아 권력을 강화했다. 폴란드와의 협력을 통해 키예프를 탈환하기도 했으나,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1920년 망명 정부로 전환되었다. 이후 폴란드, 소련과의 조약 체결로 독립을 잃고, 페트류라는 암살당하며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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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총재정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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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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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
형성일 | 1918년 11월 13일 |
해산일 | 1920년 11월 10일 |
후임 정부 | 크리스티안 라콥스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정부 수반 | |
국가 원수 | 볼로디미르 빈니첸코 (1919년까지) 시몬 페틀류라 (1919년부터) |
정치 | |
정당 |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독립당 무소속 우크라이나 국민민주연합 우크라이나 민주당 |
이전 형성 | Gerbel 정부 |
이후 형성 | 국가 폐지됨 제2차 라콥스키 정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2. 역사
1918년 12월, 우크라이나 헤트만 파울로 스코로파드스키의 우크라이나국이 붕괴되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새로운 정부 형태인 디렉토리야(총재정부)가 수립되었다.[8][9][10]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독일군의 지원을 받던 스코로파드스키의 권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의 잔당은 1918년 12월 14일, 우크라이나국에 대항하여 중앙 라다를 계승하는 디렉토리야를 창설했다. 볼로디미르 빈니첸코가 집정관(총리)에 취임했고, 시몬 페트류라는 군사 부문의 수장이 되었다. 디렉토리야 군은 약화된 우크라이나국군을 격파하고 키예프를 장악, 12월 18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부활을 선언했다.
디렉토리야는 볼셰비키, 남러시아군(백군), 우크라이나 혁명 반란군(흑군) 등과 싸웠으나, 조직력이 약하고 끊임없는 전투로 혼란을 겪었다. 프랑스 등 서방 연합군의 지원도 얻지 못했다.
1919년 말, 디렉토리야는 키예프에서 쫓겨나 폴란드로 철수했다. 시몬 페트류라는 볼셰비키 격퇴를 위해 폴란드와 협력하기로 결정, 1920년 3월 루블린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디렉토리야는 폴란드의 할리치나 지방 영유를 인정하는 대신, 폴란드는 디렉토리야를 우크라이나의 유일한 정부로 승인하고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의 연합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1920년 봄, 폴란드-디렉토리야 연합군은 키예프 공세를 통해 일시적으로 키예프를 탈환했으나, 곧 소련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1921년 3월 18일, 폴란드는 리가 평화 조약을 통해 디렉토리야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우크라이나-소비에트 공화국 정부를 인정했다. 이로써 우크라이나 독립은 좌절되고, 소비에트 세력이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게 되었다.
시몬 페트류라는 망명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를 운영하며 저항을 계속했으나, 1923년 폴란드의 압력으로 국외로 추방되었고, 1926년 파리에서 암살당했다.
2. 1. 우크라이나국 붕괴와 집행부의 등장 (1918년)
1918년 12월, 우크라이나 헤트만 파울로 스코로파드스키의 우크라이나국은 디렉토리야(집행부)가 수립된 후 붕괴되었다.[8][9][10]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앙 열강이 패배하면서, 스코로파드스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다. 1918년 11월 13일, 스코로파드스키의 반대자들은 시치 사수대의 지휘를 받는 디렉토리야라는 경쟁 기구를 설립했다. 한 달 동안 이어진 우크라이나 내전 동안 스코로파드스키 군대의 대부분은 디렉토리야에 합류했다. 이후 스코로파드스키는 안톤 데니킨과 함께 싸우고 있던 일부 러시아 장교들에게 의존하여 특별 군단을 편성했지만, 이 군대는 디렉토리야 군대에 대항할 수 없었다. 1918년 12월 19일, 디렉토리야 군대는 키이우를 점령하고 스코로파드스키 정권을 전복시켰다.디렉토리야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UNR)을 재건했다. 새 정권은 농민-민주당을 포함한 친민족주의 세력과 러시아와의 연방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중앙 라다를 재건하고 모든 법적 행위를 회복하려는 계획은 결국 보류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보존되었다. 1918년 12월 26일, 디렉토리야는 헤트만 정권을 제거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집행부는 새 의회가 선출될 때까지 전문적인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와 브세볼로드 홀루보비치 등 사회주의 혁명당 중앙파가 지지했던 중앙 라다의 기능을 복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새 의회인 노동자 회의는 집행부를 공화국을 보호하는 특별 정부 기구로 임명했다. 노동자 회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국가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법률 제정을 위임받았으며, 인민 장관 회의는 행정 권한을 부여받았다. 집행부는 다양한 정당 및 대표 그룹에서 온 5명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1918년 말, 디렉토리야는 우크라이나 군사 지도자 시몬 페트류라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했다.
2. 2. 내우외환과 페트류라의 부상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앙 열강이 패배하면서,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국가 원수) 파울로 스코로파드스키는 더 이상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1918년 11월 13일, 스코로파드스키의 반대자들은 시치 사수대의 지휘를 받는 디렉토리(Directorate)를 설립했다. 한 달 동안 이어진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스코로파드스키 군대의 대부분은 디렉토리에 합류했다. 안톤 데니킨과 함께 싸우던 일부 러시아 장교들에게 의존하여 특별 군단을 편성했지만, 이 군대는 디렉토리 군대에 맞설 수 없었다. 1918년 12월 19일, 디렉토리 군대는 키이우를 점령하고 스코로파드스키 정권을 전복시켰다.[1]디렉토리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UNR)을 재건했다. 새 정권은 농민-민주당을 포함한 친민족주의 세력과 러시아와의 연방을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결국 중앙 라다를 재건하고 모든 법적 행위를 회복하려는 생각은 제쳐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보존되었다. 1918년 12월 26일, 디렉토리는 헤트만 정권을 제거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1]
1918년 말까지 디렉토리는 우크라이나 군사 지도자 시몬 페트류라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했다.[1]
모든 방향에서 많은 적들과 마주한 UNR의 군대는 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북동쪽에는 볼셰비키가, 남동쪽에는 러시아 백군이, 남서쪽에는 부코비나와 할리치나의 영토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루마니아가 있었고, 프랑스 개입군은 1918년 12월 오데사를 점령하여 철수하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남긴 권력 공백을 채웠다. 프랑스 및 루마니아와 빠르게 합의에 도달한 UNR 군대는 다른 전선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1] 소련-우크라이나 전쟁 참고.
1919년 1월에 주요 전투가 벌어지면서 우크라이나군은 밀려났고, 1919년 2월에 키예프가 함락되었다. 정부는 1919년 2월 5일에 빈니차로 이전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권력 교체를 보여주고, 연합국과의 수용을 얻기 위해 디렉토리가 볼로디미르 빈니첸코의 사임을 시도하는 정치적 술책이 있었다. 시몬 페트류라는 당을 떠났고, 빈니첸코의 자리를 대신했다. 페트류라는 1919년 2월 11일, 정부가 포돌리아로 이전한 지 일주일 만에 디렉토리 의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1] 1919년 5월까지 디렉토리의 군대는 브로디 주변의 좁은 땅으로 밀려났다. 그 후 디렉토리는 우크라이나를 뒤에서 공격하고 있던 폴란드 정부와 협상했고, 이 휴전으로 우크라이나군은 반격하여 포돌리아를 되찾고 카미야네츠-포돌스키에 새로운 수도를 세울 수 있었다.[1] 7월에는 UNR의 군대에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군대가 합류했는데, 이들은 폴란드에 의해 갈리치아 (중앙 유럽)에서 쫓겨났다. 그 무렵(1919년 5월), 데니킨과 그의 백군은 그 해 여름과 가을에 붉은 군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백위병 부대는 붉은 군대를 중앙 및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몰아냈고, 따라서 디렉토리에게 키예프를 되찾을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적위병의 반격과 치명적인 발진티푸스 유행으로 페트류라 군대는 우크라이나에서 완전히 폴란드의 안정된 영토로 밀려났다.[1] 디렉토리 내부에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는데, 이 위기의 구성원들은 인민 장관 평의회의 일에 심하게 간섭했다. 그 때문에 슈베츠와 마카렌코는 국사 문제로 해외로 보내졌다. 나중에 1920년 5월, 페트류라의 귀국 요청에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고 해임되었다.[1]
2. 3. 폴란드와의 협력과 독립의 좌절 (1920년)
1920년, 폴란드군은 데니킨 군대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두 개의 새로운 우크라이나 사단의 도움을 받아 재편성되었다. 1920년 4월 UNR-폴란드 조약은 폴란드 지휘 하에 두 군대 간의 합동 작전을 규정하는 동시에 전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영토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을 인정했고, 국경은 즈브루치 강을 따라 지나갔다. 1920년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나란히 진격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UNR)은 키예프를 탈환했을 때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한 달도 채 안 되어, 소련의 여름 반격으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후퇴하게 되었고, 1920년 말에 휴전이 체결되었다. 이 큰 실망으로, UNR군은 폴란드 영토에서 붉은 군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신속하게 격퇴되어 갈리치아로 다시 밀려났다. 1920년 폴란드는 리가 조약을 통해 소련과의 국경 분쟁을 종결했고, 바르샤바 조약을 무효화했다. 리가 조약은 서우크라이나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로 분할했고, 소련에게 현재 우크라이나의 나머지 지역(우크라이나 SSR이 됨)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했다.1919년 말, 키예프에서 쫓겨난 우크라이나 총재정부(디렉토리야)는 폴란드로 철수하여 태세를 정비하고 반격의 기회를 엿봤다. 디렉토리야를 이끌었던 페트류라는 볼셰비키를 격퇴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민족의 적"으로 간주되어 온 폴란드의 힘을 빌리기로 결심했다. 1920년 3월, 루블린에서 교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디렉토리야가 폴란드의 리비우 등 할리치나 지방의 영유를 인정하는 대신, 폴란드는 디렉토리야를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로 승인하고, 침략자를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배제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폴란드와의 협력은, 우호 관계에 있던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의 연합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영역을 침략하는 폴란드를 국가 존망의 최대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군사 조직인 우크라이나 할리치나군은 폴란드를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 적군과 합동한다는, 디렉토리야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1920년 봄, 신식 장비를 갖춘 폴란드 제2공화국 군과 연합한 디렉토리야 군은 키예프 공세에서 일시적으로 키예프를 탈환했다. 그러나 적군은 반격으로 돌입했고, 폴란드군과 디렉토리야 군은 키예프를 포기하고 비스와 강을 거쳐 바르샤바로 철수했다.
이 패배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좌절되었다. 1921년3월 18일, 폴란드는 서구 제국의 압력을 받아 디렉토리야와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우크라이나-소비에트 공화국 정부를 우크라이나 대표 정부로 인정하는 리가 평화 조약을 러시아-소비에트 정부 및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정부와 체결했다. 소비에트 세력은 우크라이나를 장악했고, 폴란드는 할리치나 등 서우크라이나를 차지했다.
2. 4. 망명과 종말
1919년 1월, 주요 전투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밀려나고 2월에 키예프가 함락되었다. 정부는 1919년 2월 5일 빈니차로 이전했다. 볼로디미르 빈니첸코가 사임하고 시몬 페트류라가 1919년 2월 11일 디렉토리 의장직을 맡았다. 1919년 5월, 디렉토리 군대는 브로디 주변의 좁은 땅으로 밀려났으나, 폴란드와의 휴전으로 반격하여 포돌리아를 되찾고 카미야네츠-포돌스키에 새 수도를 세웠다. 7월에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군대가 합류했다.1919년 5월, 백위병 부대가 붉은 군대를 몰아내면서 디렉토리는 키예프를 되찾을 기회를 얻었으나, 붉은 군대의 반격과 발진티푸스 유행으로 폴란드 영토로 밀려났다. 1920년 4월, UNR-폴란드 조약을 통해 폴란드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고, 두 군대는 1920년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함께 진격하여 키예프를 탈환했다. 그러나 소련의 반격으로 후퇴했고, 1920년 말 휴전이 체결되었다. UNR군은 폴란드 영토에서 붉은 군대를 공격했지만 격퇴당하고 갈리치아로 밀려났다.
1920년 폴란드는 리가 조약을 통해 소련과의 국경 분쟁을 종결하고 바르샤바 조약을 무효화했다. 리가 조약은 서우크라이나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로 분할했고, 소련에게 나머지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 SSR)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했다.
1921년 3월 18일, 폴란드는 디렉토리야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리가 평화 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세력이 우크라이나를 장악했다. 페트류라는 망명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를 운영하며 게릴라 활동을 지원했으나, 1923년 폴란드의 압력으로 국외 추방되었다. 페트류라는 1924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다 1926년 3월 25일 암살되었다.
3. 구성원
볼로디미르 비니첸코

시몬 페트류라

페디르 슈베츠

안드리 마카렌코|Макаренко Андрій Гавриловичuk

예브헨 페트루셰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