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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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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치아는 동유럽의 역사적 지역으로, 현재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 걸쳐 있다. 이름은 슬라브어 '할리치'에서 유래되었으며, 13세기 갈리치아 공국을 시작으로 폴란드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을 거치며 역사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1772년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형성했고, 이후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존재했다.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며 폴란드어, 루테니아어, 유대어 등 여러 언어가 사용되었으며, 로마 가톨릭, 그리스 가톨릭,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주요 도시로는 리비우,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등이 있으며, 석유 산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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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치아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일반 정보
이름갈리치아
원어 이름 (폴란드어)Galicja (갈리차)
원어 이름 (우크라이나어)Галичина (할리치나)
원어 이름 (이디시어)גאַליציע (Galitsye, 갈리치예)
지리
위치중앙 유럽
해당 국가폴란드
우크라이나
면적78,497 제곱킬로미터
주요 도시크라쿠프
리비우
역사
형성 시기1206년
주요 사건1206년: 문헌에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왕' 칭호 등장
관련 국가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폴란드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속서우크라이나
인구
인구 통칭갈리치아인
시간대
시간대동유럽 표준시 (EET)
동유럽 하계시 (EEST)
UTC 오프셋+2
+3
시간대중앙 유럽 표준시 (CET)
UTC 오프셋+1
+2

2. 명칭의 기원과 변천

13세기 갈리치아 공국 지도. 이후 갈리치아가 된 지역의 핵심을 형성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의 일환으로 폴란드 왕국에 의한 루테니아 왕국 합병


갈리치아는 여러 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불린다.

  • Галичина|Halychynauk (우크라이나어)
  • Galicjapl (폴란드어)
  • Галичина|Halyčynarue (루신어)
  • Галиция|Galitsiyaru (러시아어)
  • 체코어 및 Haličsk (슬로바키아어)
  • Galiziende (독일어)
  • Galícia/Gácsország/Halicshu (헝가리어)
  • Galiția/Haliciaro (루마니아어)
  • גאַליציע|Galitsyeyi (이디시어)


갈리치아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트라키아인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한다.[11] 켈트족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갈리치아"라는 이름이 갈리아, 갈라티아 등 유럽과 소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11] 반면, 슬라브어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벌거벗은 (목재가 없는) 언덕"을 의미하는 ''할리차'' 또는 "갈까마귀"를 의미하는 ''할카''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12] 갈까마귀는 도시의 문장[13]과 이후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문장에도 등장했다.[14] 하지만 지명은 문장보다 먼저 사용되었으므로, 이는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이거나 민간 어원일 가능성이 있다.

1221년까지 루테니아인들은 할리치-볼히니아에서 헝가리인들을 몰아냈지만, 헝가리 왕들은 계속해서 공식 칭호에 ''Galicia et Lodomeriala''를 추가했다.

1349년,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 과정에서 폴란드 국왕 카시미르 3세는 갈리치아의 주요 부분을 정복하고 이 영토의 독립을 종식시켰다. 정복 후 카시미르는 다음과 같은 칭호를 채택했다.

> 신(神)의 은총으로 폴란드와 루스(루테니아)의 왕이자, 크라쿠프, 산도미에르, 시에라츠, 웽치차, 쿠야비, 포메라니아(포메렐리아)의 영주이자 상속자인 카시미르. Kazimirus, Dei gratia rex Polonie et Rusie, nec non-Cracovie, Sandomirie, Siradie, Lancicie, Cuiavie, et Pomeranieque Terrarum et Ducatuum Dominus et Heresla.

야기에우워 왕조 (1386년~1572년) 치하에서 폴란드 왕국은 영토를 재건하고 재편했다. 역사적인 갈리치아 대신 루테니아 보이보드십이 설치되었다.

1526년 헝가리의 루이 2세가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가는 헝가리 왕관과 함께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에 대한 헝가리의 권리 주장도 상속받았다. 1772년,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러한 역사적 주장을 폴란드 분할 참여의 명분으로 삼았다.

오스트리아가 획득한 영토는 이전의 할리치-볼히니아 영토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러시아 제국은 북동쪽의 볼히니아와 볼로디미르-볼린스키이 시(Włodzimierz Wołyńskipl)를 포함한 지역을 차지했고, 이 지역은 이후 로도메리아로 불리게 되었다. 반면, 소폴란드의 상당 지역( 노비 송치pl, 프셰미실pl (1772년~1918년), 자모시치pl (1772년~1809년), 루블린pl (1795년~1809년), 크라쿠프pl (1846년~1918년))은 오스트리아 갈리치아에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주장이 역사적인 헝가리 왕관에서 비롯되었음에도,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는 공식적으로 헝가리에 귀속되지 않았고, 1867년 타협(Ausgleich) 이후 시슬레이타니아,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오스트리아 관할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새로운 오스트리아 영토의 공식 명칭은 아우슈비츠de 및 자토르 공국 공작령을 포함한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이었다. 1846년 크라쿠프 자유시가 편입되면서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자토르 공작령을 포함한 크라쿠프 대공국'' (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mit dem Großherzogtum Krakau und den Herzogtümern Auschwitz und Zatord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들 지역은 형식적으로 분리되어 오스트리아 황제의 칭호에 각각 등재되었고, 고유한 문장과 깃발도 보유했다. 그러나 행정상으로는 단일 지방을 형성했다. 아우슈비츠 (오슈비엥침pl)와 자토르 공작령은 프로이센 실레지아와의 경계에 있는 크라쿠프pl 서쪽의 작은 역사적 공국이었다. 로도메리아는 볼히니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 볼히니아현 참조)

2. 1. 명칭의 기원

이 지역의 현지 이름은 다음과 같다.

  • Галичина|Halychynauk
  • Galicjapl
  • Галичина|Halyčynarue
  • Галиция|Galitsiyaru
  • 체코어 및 Haličsk
  • Galiziende
  • Galícia/Gácsország/Halicshu
  • Galiția/Haliciaro
  • גאַליציע|Galitsyeyi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이름이 트라키아인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다.[11] 이들은 철기 시대 유럽 동안 다키아가 로마에 정복된 후 이 지역으로 이동하여 베네디 사람들과 함께 리피치아 문화를 형성했을 수 있다.[11] 리피치아 문화는 기존의 트라키아 할슈타트 및 비소츠케 문화를 대체한 것으로 추정된다.[11] 켈트족과의 관련성은 "갈리치아"라는 이름이 갈리아 등 유럽과 소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지명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1] 다른 학자들은 ''할리치''라는 이름이 슬라브 기원이며, "벌거벗은 (목재가 없는) 언덕"을 의미하는 ''할리차'' 또는 "갈까마귀"를 의미하는 ''할카''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12] 갈까마귀는 도시 및 이후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문장에도 등장했다.[14] 그러나 이름은 문장보다 먼저 사용되었으며, 이는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 또는 민간 어원을 나타낼 수 있다.

1349년,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 과정에서 폴란드 국왕 카시미르 3세는 갈리치아의 주요 부분을 정복하고 이 영토의 독립을 종식시켰다. 정복 후 카시미르는 다음과 같은 칭호를 채택했다.

: 신(神)의 은총으로 폴란드와 루스(루테니아)의 왕이자, 크라쿠프, 산도미에르, 시에라츠, 웽치차, 쿠야비, 포메라니아(포메렐리아)의 영주이자 상속자인 카시미르. .

야기에우워 왕조 아래에서 폴란드 왕국은 영토를 부활시키고 재구성했다. 역사적인 갈리치아 대신에 루테니아 보이보드십이 나타났다.

1526년 헝가리의 루이 2세가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가는 헝가리 왕관과 함께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의 칭호에 대한 헝가리의 주장을 상속받았다. 1772년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러한 역사적 주장을 이용하여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새로운 오스트리아 영토의 전체 공식 명칭은 아우슈비츠de 및 자토르 공국 공작령이 있는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이었다. 1846년 크라쿠프 자유시가 편입된 후,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자토르 공작령이 있는 크라쿠프 대공국''으로 확대되었다(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mit dem Großherzogtum Krakau und den Herzogtümern Auschwitz und Zatorde).

2. 2. 명칭의 변천

현지 언어에서 이 지역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Галичина|Halychynauk
  • Galicjapl
  • Галичина|Halyčynarue
  • Галиция|Galitsiyaru
  • 체코어 및 Haličsk
  • Galiziende
  • Galícia/Gácsország/Halicshu
  • Galiția/Haliciaro
  • גאַליציע|Galitsyeyi


일부 역사가들은[11] 이 이름이 트라키아인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다.[11] 켈트족과의 관련성은 "갈리치아"라는 이름이 고대 갈리아la, 갈라티아 등 유럽과 소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지명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1] 다른 학자들은 '할리치'라는 이름이 슬라브 기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벌거벗은 (목재가 없는) 언덕"을 의미하는 '할리차' 또는 "갈까마귀"를 의미하는 '할카'에서 유래했다.[12] 갈까마귀는 도시의 문장[13]과 이후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문장에도 등장했다.[14]

1349년, 갈리치아-볼히니아 전쟁 과정에서 폴란드 국왕 카시미르 3세는 갈리치아의 주요 부분을 정복하고 이 영토의 독립을 종식시켰다. 정복 후 카시미르는 다음과 같은 칭호를 채택했다.

> 신(神)의 은총으로 폴란드와 루스(루테니아)의 왕이자, 크라쿠프, 산도미에르, 시에라츠, 웽치차, 쿠야비, 포메라니아(포메렐리아)의 영주이자 상속자인 카시미르. Kazimirus, Dei gratia rex Polonie et Rusie, nec non-Cracovie, Sandomirie, Siradie, Lancicie, Cuiavie, et Pomeranieque Terrarum et Ducatuum Dominus et Heresla.

야기에우워 왕조 아래에서 폴란드 왕국은 영토를 부활시키고 재구성했다. 역사적인 갈리치아 대신에 루테니아 보이보드십이 나타났다.

1526년 헝가리의 루이 2세가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가는 헝가리 왕관과 함께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의 칭호에 대한 헝가리의 주장을 상속받았다. 1772년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러한 역사적 주장을 이용하여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새로운 오스트리아 영토의 전체 공식 명칭은 아우슈비츠de 및 자토르 공국 공작령이 있는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이었다. 1846년 크라쿠프 자유시가 편입된 후,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자토르 공작령이 있는 크라쿠프 대공국'으로 확대되었다(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mit dem Großherzogtum Krakau und den Herzogtümern Auschwitz und Zatorde).

3. 역사

리비우에 위치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의회 건물.


로마 시대에 갈리치아 지역은 켈트족, 루기족, 코티니족, 반달족, 고트족 등 켈트-게르만 혼혈 부족들이 거주했다. 민족 대이동 시기에는 다양한 유목민 집단이 이 지역을 침략했다.[15][16] 6세기부터는 백크로아티아인과 티베르치족 등 동슬라브 부족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으나, 10세기 키예프 루스에 병합되었다.[17]

비엘스코-비아와에 있는 오스트리아 갈리치아와 오스트리아 실레지아 사이의 역사적 국경 (1772–1918) 재현.


이후 갈리치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915년 프셰미실 포위전


3. 1. 키예프 루스와 할리치-볼히니아 공국 (981년 ~ 1349년)

981년 블라디미르 1세가 키예프 대공국에 편입했다.[17] 12세기에 갈리치아 공국이 형성되었고, 그해 말 인접한 볼히니아 공국과 합병되어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이 되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원래 키예프 왕조의 젊은 구성원에게 교대로 할당된 두 개의 분리된 루리크 왕조 공국이었다. 볼로디미르의 로만 대공 계통은 볼히니아 공국을 소유했고, 야로슬라프 오스모미슬 계통은 갈리치아 공국을 소유했다.

갈리치아-볼히니아는 1198년[18] 또는 1199년 (그리고 부계 혈통에 후계자가 없었던) 갈리치아의 마지막 공작 블라디미르 2세 야로슬라비치의 사망 이후에 생성되었다. 로만은 갈리치아 공국을 획득하고 자신의 영토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했다. 로만의 후계자들은 대부분 할리치(갈리치아)를 그들의 결합된 왕국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로만의 시대에 갈리치아-볼히니아의 주요 도시는 할리치와 볼로디미르였다. 1204년, 로만은 폴란드와 동맹하여 키예프를 점령하고, 헝가리 왕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비잔틴 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19]

1205년, 로만은 폴란드 동맹에 대항하여 레셰크 1세 및 마조비아의 콘라드와 갈등을 일으켰다. 로만은 자비호스트 전투 (1205)에서 사망했고, 갈리치아-볼히니아는 반란과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어 폴란드와 헝가리의 경쟁 무대가 되었다. 헝가리의 앤드루 2세는 ''rex Galiciæ et Lodomeriæla''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블라디미르 왕"을 의미하는 라틴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 칭호는 후에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채택되었다. 1214년 헝가리와 폴란드 사이의 타협 합의에서 갈리치아-볼히니아의 왕위는 앤드루의 아들인 로도메리아의 콜로만에게 주어졌다.

키예프 대공국의 붕괴 후, 루스의 땅에는 류리크 왕조의 혈연 관계에 따른 많은 공국이 난립하여 패권을 다투었다. 그 가운데 '''할리치-볼히니아 공국'''은 드네스트르강 연안의 도시 할리치를 중심으로 번영했다. 그 영토가 된 일대를 가리키는 '갈리치아'라는 지명은 헝가리언드라시 2세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한 라틴어 명칭이라고 한다. 13세기 당시 할리치-볼히니아 공국은 헝가리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 후, 중심 도시는 헬름, 리비우로 옮겨갔고, 할리치는 쇠퇴해갔다.

3. 2. 폴란드-리투아니아 시대 (1349년 ~ 1772년)

1352년, 갈리치아 공국은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분할되었고, 그 영토는 폴란드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20] 1349년의 할리치-볼히니아 전쟁에서 카지미에시 3세가 이끄는 폴란드 왕국에 갈리치아와 할리치는 함께 편입되었고, 리투아니아는 볼히니아를 획득했다.

이후,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합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형성했는데, 이 연방은 200년 동안 지속되다가 1772년 폴란드 분할에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정복되고 분할되었다.[20] 이로 인해 지역의 정치 정세가 안정되고, 300년 이상에 걸친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다. 특히 16세기에는 "귀족의 천국, 유대인의 낙원, 농민의 지옥"이라고도 칭해지는 상황이 나타났다.[54]

17세기 중반, (주로 기후 변화에 의한 흉작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이 지역의 경제 상태가 악화되고, 농지의 과점화가 진행되어 대지주와 소지주 사이에 대규모 토지 분쟁이 시작되었다. 1648년1655년에는 리비우가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에 의해 공격받았고, 그 과정에서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포그롬이 발생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세력은 눈에 띄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1700년에 시작된 대북방 전쟁에서는 스웨덴군이 리비우를 점령하고, 약탈과 그 후의 역병 유행으로 인해 번영을 잃어갔다. 또한, 유대인의 궁핍화도 진행되었다.[55]

3.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 (1772년 ~ 1918년)

1772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이때 획득한 지역을 갈리치아라고 칭했다. 합스부르크 측에서 분할 협의를 주도한 재상 카우니츠는 소극적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분할 지역의 획득 및 계승의 정당성에 대해 조사했다[56]。그래서 역사의 기억에서 부상한 것이 '''할리치-볼히니아 대공국'''이다. 과거 헝가리 왕국이 그 영유권을 주장했던 것을 끌어들여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다[56]

이렇게 군주국 내의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창설되었다. 1772년에 리비우(르부프)가 주도가 되었고, 다음 해인 1773년에는 요제프 2세가 '''갈리치아 순행'''을 행했다[57]1795년의 제3차 폴란드 분할에 의해 갈리치아의 영역은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1846년, 폴란드 귀족의 일부가 왕국 재건을 목표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났다. 이후 기본적으로 빈 정부에 대한 충성을 보이며, 자치 획득을 목표로 하는 노선으로 전환해 갔다[57]1848년 5월 2일에는 갈리치아에서 최초의 우크라이나 정치 조직인 루신 라다가 설립되었다.

1867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아우스글라이히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지만, 갈리치아는 계속 오스트리아령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제국 의회에서 폴란드계 의원은 정부 지지파로서 독일계 의원과 함께 존재감을 발휘했다. 이후 과거 헝가리의 지배하에 놓였던 갈리치아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3. 4.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14년 ~ 1945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갈리치아는 러시아 제국과 중앙 동맹국 군대 사이에 동부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장소였다. 러시아군은 1914년에 이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지만,[21] 1915년 봄과 여름에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공세에 의해 밀려났다.

1918년, 서갈리치아는 복원된 제2 폴란드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렘코 공화국을 흡수했다. 현지 우크라이나인들은 동갈리치아의 독립을 단명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동안 소비에트는 동갈리치아에 괴뢰 국가인 갈리치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려 했지만, 그 영토는 폴란드에 의해 정복되었다.

1921년 리가 조약은 갈리치아의 지위를 제2 폴란드 공화국의 일부로 확인했다. 비록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1923년 3월 14일 대사 회의에서 비준되었고,[22][23] 1923년 5월 15일에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24]

동갈리치아와 인접한 볼히니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폴란드 공화국 인구의 약 12%를 차지했으며, 가장 큰 소수 민족이었다. 폴란드 정부 정책이 소수 민족에 차별적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와 우크라이나 인구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결국 무장 지하 조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이 등장했다.

3. 5. 현대 (1945년 ~ 현재)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갈리치아는 러시아 제국과 중앙 동맹국 군대 간의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러시아군은 1914년에 이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지만,[21] 1915년 봄과 여름에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 공세에 의해 밀려났다.

1918년, 서갈리치아는 복원된 제2 폴란드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렘코 공화국을 흡수했다. 현지 우크라이나인들은 동갈리치아의 독립을 단명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동안 소비에트는 동갈리치아에 괴뢰 국가인 갈리치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려 했지만, 그 영토는 폴란드에 의해 정복되었다.

1921년 리가 조약은 갈리치아의 지위를 제2 폴란드 공화국의 일부로 확인했다. 비록 일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1923년 3월 14일 대사 회의에서 비준되었고[22][23], 1923년 5월 15일에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24]

동갈리치아와 인접한 볼히니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폴란드 공화국 인구의 약 12%를 차지했으며, 가장 큰 소수 민족이었다. 폴란드 정부 정책이 소수 민족에 차별적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와 우크라이나 인구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결국 무장 지하 조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이 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 폴란드는 분할되어 Західна_Україна|서우크라이나uk는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전후 서우크라이나는 일괄적으로 소련령이 되었고, 갈리치아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후에는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민족과 문화

갈리시아는 오스트리아 군주국 내에서 가장 민족적으로 다양한 지역이었다.[25] 1910년 기준으로 갈리시아 전체 인구는 폴란드인 45.4%, 루테니아인(우크라이나인과 루신인) 42.9%, 유대인 10.9%, 독일인 0.8% 등으로 구성되었다.[26] 이들은 주로 서부에는 폴란드인, 동부에는 루테니아인이 거주하는 등 지역별로 분포에 차이를 보였다.[27][28]

갈리시아의 농부와 유대인, c. 1886


20세기 초, 서부 갈리시아 인구의 88%는 폴란드인, 7.5%는 유대인이었다. 동부 갈리시아는 루테니아인 64.5%, 폴란드인 22.0%, 유대인 12%였다.[27][28] 오스트리아 동부 갈리시아의 44개 행정 구역 중 리비우(Lwówpl, Lembergde)는 폴란드인이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지역이었다.[29]

마리안나 두샤르는 이러한 다양성이 이 지역에서 독특한 음식 문화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30]

갈리시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언어는 폴란드어였지만, 동부 지역에서는 루테니아어가 우세했다.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갈리시아 인구의 58.6%가 폴란드어를 모국어로 사용했고, 40.2%가 루테니아어를 사용했다.[31] 유대인에게는 이디시어를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어 사용자의 수가 부풀려졌을 수 있다.[32]

갈리시아 유대인은 중세 시대에 독일에서 이주해 왔다.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식별이 덜 문제가 되었고, 광범위한 다국어 사용은 민족적 분열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교가 주류였으며, 폴란드인은 로마 가톨릭, 우크라이나인은 그리스 가톨릭 교회를 믿었다. 다른 기독교인들은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속했다. 홀로코스트 이전까지 유대교가 널리 퍼져 있었고, 갈리시아는 하시디즘의 중심지였다.

갈리시아의 민족 집단은 다음과 같다.

  • 산악 거주민: ''지브차키'', ''바비오고르치'', 랍카-즈루이의 고랄인, 클리슈차키, 포드할레의 고랄인, 노비 타르크의 고랄인, 구랄레 피에닌스키, ''구랄레 샨데츠키'', 스피시의 고랄인, 쿠르타치, 보이코인, 투홀치, 후출인.
  • 계곡 거주민: 크라코비아크인, 마주르인, 젱보비아키, 구호니엠치, 베우자니, 부잔, 오폴라니, 워위니아키, 포베레지.[45]


5. 경제

새로운 국경선으로 인해 갈리치아는 폴란드 영향권의 전통적인 무역로와 시장에서 단절되었고, 이는 경제 생활의 정체와 갈리치아 도시들의 쇠퇴를 초래했다. 리비우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었다.[33][34] 오스트리아 정부는 제한적인 투자 이후 갈리치아를 재정적으로 착취하고, 제국군 징집을 통해 지역 노동력을 고갈시켰다.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를 산업적으로 발전시키는 대신, 다른 합스부르크 영토에 식량과 원자재를 공급하는 농업 지역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고 투자가 억제되면서 도시들은 방치되었다.[33][34][35] 그 결과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의 빈곤이 심화되었다.[35][36]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이었으며,[37][38] 노먼 데이비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이라고 평가했다.[36]

5.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의 경제

새로운 국경선은 갈리치아를 폴란드 영향권의 전통적인 무역로와 시장에서 단절시켰고, 그 결과 경제 생활의 정체와 갈리치아 도시의 쇠퇴를 초래했다. 리비우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었다.[33][34] 제한적인 투자가 이루어진 짧은 기간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갈리치아를 재정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고, 제국군으로의 징집을 통해 지역의 노동력을 고갈시켰다.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를 산업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다른 합스부르크 영토에 식량과 원자재를 공급하는 농업 지역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었고, 투자는 억제되었으며, 도시들은 방치되었다.[33][34][35] 그 결과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의 빈곤이 심화되었다.[35][36]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이었으며,[37][38] 노먼 데이비스에 따르면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36]

5. 2. 석유 및 천연 가스 산업

드로호비치보리슬라프 인근에서 19세기 중반과 20세기 초에 상당한 석유 매장량이 발견되어 개발되었다.[39][40] 1854년 서부 갈리치아의 보브르카에서 유럽 최초로 석유 시추가 시도되었다.[39][40] 1867년까지 서부 갈리치아의 클레차니에서는 증기를 사용하여 약 200미터 깊이의 유정을 시추했다.[39][40] 1872년 12월 31일, 보리슬라프(현재 보리슬라프)와 인근 도시 드로호비치(현재 드로호비치)를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 개통되었다.

1882년, 영국 엔지니어 존 시미언 버그하임과 캐나다인 윌리엄 헨리 맥가비가 갈리치아에 왔다.[41] 1883년, 그들의 회사는 700~1,000미터 깊이의 구멍을 뚫어 대규모 석유 매장지를 발견했다.[39] 1885년, 그들은 석유 개발 기업의 이름을 갈리시아-카르파티아 석유 회사(Galizisch-Karpathische Petroleum Aktien-Gesellschaftde)로 변경하고 본사를 비엔나에 두었으며, 맥가비는 최고 관리자, 버그하임은 현장 엔지니어를 맡았다. 그리고 고를리체 인근 마리암폴레에 거대한 정유 공장을 건설했다.[41]

이후, 영국, 벨기에, 독일의 투자자들이 갈리치아에서 석유 및 천연 가스 산업을 개발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39] 자본 유입으로 인해 석유 기업의 수는 1884년까지 900개에서 484개로 감소했고, 1890년까지 3,700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는 285개 회사로 줄었다.[39] 반면 석유 정유소의 수는 1880년 31개에서 1904년 54개로 증가했다.[39] 1904년까지 보리슬라프에는 1,000미터가 넘는 시추공이 30개 있었다.[39]

1905년에서 1906년 사이에 생산량이 50% 증가했고, 예상치 못한 대규모 석유 매장량 발견으로 인해 1906년에서 1909년 사이에는 생산량이 세 배로 증가했다.[42] 1909년 생산량은 2,076,000톤으로 정점에 달했으며, 이는 전 세계 생산량의 4%를 차지했다.[39][40] "폴란드 바쿠"라고 불리는 보리슬라프와 인근 투스타노비체 유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석유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했다.[39][42][43] 세기가 바뀌면서 갈리치아는 세계 4위의 석유 생산국으로 꼽혔다.[39] 석유 생산량 급증은 석유 가격 하락을 초래했다.[42] 갈리치아의 석유 생산량은 1912-1913년 발칸 전쟁 직전에 급격히 감소했다.

갈리치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중앙 열강의 유일한 주요 국내 석유 공급원이었다.[42]

6. 주요 도시

리비우

이바노프란키우스크

테르노필

프셰미실

제슈프

비엘스코-비아와

노비 송치

7. 주변의 역사적 지역

8. 갈리치아에서 유래한 것들


  • 할리치나 - 나치 독일 시대에 우크라이나인들이 조직한 무장친위대인 제14SS무장척탄병사단 '제1우크라이나'의 별칭이다.
  • BG-55 할리치나 - 우크라이나 국가 국경청이 보유했던 해상 경비함이다.
  • 할리치나 - 우크라이나 해군의 미사일 순양함이다.

9. 문장

고대 및 현대 우크라이나어에서 "할리치나"와 "할카"(갈까마귀)의 발음이 유사하여 이 새를 문장의 모티브로 삼았다.[1] 14세기에 갈리치아의 수도는 할리치에서 리비우로 이전되었다.[1] 우크라이나어에서 리비우는 "레브의 도시"(사자의 도시)라는 의미로, 갈리치아의 문장은 갈까마귀에서 사자로 바뀌었다고 생각된다.[1] 19세기의 갈리치아는 "갈리치아-로도메리아(할리치-볼히니아) 왕국"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왕국 문장"을 받았다.[1] 이 문장은 중세 시대 할리치나의 "갈까마귀"와 폴란드의 최남부 문장인 "세 개의 왕관"을 합쳐 만든 것이다.[1] 현재 우크라이나 리비우주의 주장은 약간 변경된 중세 시대 할리치나의 국장이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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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문서 '{{harvnb|목승숙|2022|p=177-178|ref=목승숙2022a}}: "갈리치아는 합스부르크 제국 시기에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1772-1918)1)으로 불렸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황실직할지였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해체와 더불어 지도상에서 사라졌고, 오늘날 서부 지역은 폴란드, 동부 지역은 우크라이나 영토가 되었다"'
[59] 문서 '{{harvnb|하명해|2014|p=291|ref=하명해2014a}}: "따라서 본고는 상호정체성을 모토로 하는 새로운 여행묘사의 패러다임의 형 성 과정을 오늘날 세계시민적 고향으로 회자되는 갈리치아 여행문학 작품들을 통해, 상호문화적 정체성 발견이라는 주제로 수렴되는 낯선 여행체험 내용들을 분석함으로써 입증하고자 한다"'
[60] 문서 '{{harvnb|하명해|2014|p=301|ref=하명해2014a}}: "하나의 문화권에 속해 있는 인간은 경계 짓기를 함으로써 정체성을 구축한다. 그러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대 기행 문학 작가들은 여행지인 타국에서의 경계 허물기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국의 다민족, 다문화 사회의 평화적 공존의 산실로서 상호문화적 융합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땅, 갈리치아에서 그들은 독일에서 깨닫지 못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61] 문서 '{{harvnb|하명해|2014|p=305|ref=하명해2014a}}: "갈리치아 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은 여행 보도 기사와 기행문에서 탈경 계인으로서 정체성, 코스모폴리타니즘, 즉 세계동포주의와 트랜스내셔널리즘을 낯선 문화와의 여행 체험의 결과물로서 주제화시켰다"'
[62] 문서 '{{harvnb|하명해|2014|p=304|ref=하명해2014a}}: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갈리치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63] 문서 '{{harvnb|하명해|2014|p=305|ref=하명해2014a}}: "다민족, 다문화 사회가 평화를 유지하면서 하나의 국가에 소속되어 살아가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왕국 시대였다. 합스부르크 왕국의 멸망, 세계 1차 대전 종전 이후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던 코스모폴리탄적인 지식인들과 작가들은 이곳으로 고향찾기 여행을 감행하였다"'
[64] 문서 '{{harvnb|목승숙|2022|p=178|ref=목승숙2022a}}: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1920년대에 갈리치아를 재방문한 그의 주관적이고 문학적인 여행글에서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작가적 갈망과 동경이 갈리치아의 역사적 현실을 신화적으로 몰고”(하명해 2014, 308) 갔고, 그 결과 갈리치아는 “그가 역사를 신화화하도록 유발하는 후행적 유토피아 die zurückgewandte Utopie, die ihn dazu veranlasst, die Geschichte zu mythologisieren”(Cybenko 2013, 40)가 되어버렸다.3)"'
[65] 문서 '{{harvnb|하명해|2014|p=305|ref=하명해2014a}}: "현재는 여행 산업의 마케팅과는 거리가 먼 미지의 세계로서 오지 탐험 여행지로 언급될 정도인 이곳이 기행 문학사에서 상호문화적 평화 공존의 전설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데에는 전통적인 기행 문학과 기행 저널리즘이 기여한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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