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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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가 조약은 1921년 3월 18일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간의 국경을 확정했다. 이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의 독립과 러시아 내전을 배경으로, 폴란드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회복을, 소련은 서유럽으로의 혁명 확산을 목표로 하면서 발생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결과였다. 리가 조약은 폴란드에 상당한 영토를 할양했지만,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독립 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폴란드 내 소수 민족 문제를 야기했다. 조약 체결 당시에는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 의해 인정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의 침공으로 무효화되었고, 전쟁 이후 폴란드의 국경이 변경되는 등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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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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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조약명 | 리가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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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일 | 1921년 3월 18일 |
서명 장소 | 리가, 라트비아 |
효력 만료일 | 1939년 9월 17일 |
서명국 | 폴란드 소비에트 러시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
비준국 | 세임 러시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
개요 | |
내용 |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의 강화 조약 |
관련 조약 | |
관련 조약 |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 |
조약 명칭 (언어별) | |
폴란드어 | Traktat ryski |
러시아어 | Риж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
우크라이나어 | Ризький мир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전역의 기존 국가 경계가 사라졌다. 러시아 혁명 이후 차르의 폴란드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포기되었고,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은 중앙 연합국의 붕괴로 끝났다. 베르사유 조약은 1세기 반 동안 세 제국에 분할되었던 폴란드의 독립을 재확립했다.
러시아 내전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지도 아래 폴란드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중 폴란드 분할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던 지역을 회복할 기회를 제공했다. 1920년 피우수트키의 우크라이나 진공 작전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으나,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독립 우크라이나 수립을 목표로 했기에 소비에트의 반격에 직면했다. 혁명을 서쪽으로 확장하려던 소비에트는 폴란드를 서유럽으로 가는 육로로 간주했다.
2. 1.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주도 하에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회복을 목표로 동진했다. 소비에트는 혁명의 서방 확산을 위해 폴란드를 교두보로 삼고자 했다. 양측은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을 벌였고, 폴란드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3] 이후 계속된 군사적 패배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평화 조약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3]러시아 내전 동안, 폴란드 국민은 역사적으로 적대해 온 러시아로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전체를 회복하고자 했다. 당시 소비에트는 자국의 혁명을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서유럽에 수출하려 했다. 만약 볼셰비키가 폴란드를 점령한다면, 그들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독일에서의 소비에트 혁명의 성공을 확실히 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역사가 J.F.C. 풀러는 바르샤바 전투를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는 적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고, 소비에트는 평화 조약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30]
2. 2. 평화 협상 추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가 바르샤바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후 계속된 전투에서도 소련이 패배하면서 평화 협상의 필요성이 커졌다.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폴란드 역시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4]1920년 8월 17일 민스크에서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리가로 옮겨져 9월 21일에 재개되었다. 소비에트 측은 9월 21일과 9월 28일에 두 차례 해결책을 제시했고, 폴란드 대표단은 10월 2일에 반대 제안을 했다. 사흘 후 소비에트 측은 수정안을 제시했고, 폴란드는 이를 수락했다. 10월 12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0월 18일에 발효되었다.[5] 주요 협상 대표는 폴란드 측의 얀 돤브스키와[6]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측의 아돌프 요페였다.[4] 소비에트 측은 비공산주의 우크라이나 대표들을 협상에서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4]
소비에트군의 패배로 소비에트 대표단은 분쟁 지역에서 폴란드에 상당한 영토 양보를 제안했다. 그러나 많은 관찰자들은 폴란드 측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회담을 진행했다고 평가했다. 폴란드 대표단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정치적 라이벌인 국민민주당원들이 주도했다.[6] 국민민주당은 재건된 폴란드 국가 내 비폴란드 소수 민족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수십만 명의 폴란드계 사람들을 소비에트 측에 남겨두더라도 소비에트 측이 제안한 것보다 서쪽에 있는 폴란드-소비에트 국경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정에는 정치적 목표도 작용했다. 국민민주당의 지지 기반은 중부와 서부 폴란드의 폴란드인들 사이에 있었다. 동부와 분쟁 지역에서는 국민민주당보다 피우수트스키에 대한 지지가 훨씬 컸고, 도시 외곽의 시골 지역에서는 폴란드인보다 우크라이나인이나 벨라루스인이 더 많았다. 따라서 너무 동쪽에 있는 국경은 소수 민족 인구를 최소화하려는 국민민주당의 이념적 목표뿐만 아니라 선거 전망에도 부정적이었다.[7] 전쟁에 지친 폴란드 여론 또한 협상 종결을 지지했고,[4] 양측 모두 국제 연맹의 압력을 받아 합의에 도달해야 했다.
폴란드 세임 의원 6명으로 구성된 특별 의회 대표단은 민스크를 폴란드 측에 남겨둘 소비에트의 광범위한 양보를 수락할지 여부에 대해 투표했다. 국민민주당 이데올로그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의 압력으로 추가 영토 100km가 거부되었는데, 이는 민족주의 이념의 승리이자 피우수트스키의 연방주의의 뼈아픈 패배였다.[4][6]
평화 협상은 소비에트 측의 서명 거부로 수개월 동안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1920년 말 탐보프 반란과 크론슈타트 반란과 같은 내부 불안이 커지면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소비에트 전권 대표들에게 폴란드와의 평화 조약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라고 명령했다.[3]
3. 협상
1920년 8월 17일 민스크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리가로 장소를 옮겨 9월 21일부터 재개되었다. 10월 12일 휴전이 성립되었고 10월 18일부터 적용되었다.[5] 협상 책임자로는 폴란드 측에서 얀 드느스키가, 러시아 측에서는 아돌프 요페가 배석했다.[4]
소비에트 측은 비공산주의 우크라이나 대표들을 협상에서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4]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소비에트군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측 협상은 필수츠키의 정치적 라이벌인 국민민주당원들이 주도했다. 국민민주당은 소수 민족 비율을 최소화하려는 목표 때문에 수십만 명의 폴란드계 사람들을 소비에트 측에 남겨두더라도 서쪽 국경을 수용하려 했다.[6]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의 압력으로 폴란드 세임은 민스크를 폴란드 측에 남겨두는 소비에트의 양보를 거부했다. 이는 민족주의 이념의 승리이자 필수츠키의 연방주의 구상의 패배였다.[4][6]
탐보프 반란, 크론슈타트 반란 등 소비에트 내부 불안이 증가하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평화 조약 체결을 명령했다.[3]
3. 1. 협상 과정
1920년 8월 17일 민스크에서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리가로 장소를 옮겨 9월 21일에 재개되었다.[4] 소비에트 측은 9월 21일 첫 번째, 9월 28일 두 번째 해결책을 제시했다. 폴란드 대표단은 10월 2일에 반대 제안을 했다. 사흘 후 소비에트 측은 폴란드의 제안에 대한 수정안을 제시했고, 폴란드는 이를 수락했다. 10월 12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920년 10월 18일 발효되었다.[5] 주요 협상 대표는 폴란드 측의 얀 돤브스키[6]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측의 아돌프 요페였다.[4] 소비에트 측은 비공산주의 우크라이나 대표들을 협상에서 배제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관철시켰다.[4]소비에트군의 패배로 인해 소비에트 대표단은 분쟁 지역의 국경 지역에서 폴란드에 상당한 영토 양보를 제안했다. 그러나 많은 관찰자들에게 폴란드 측은 전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리가 회담을 진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폴란드 대표단은 필수츠키의 정치적 라이벌인 국민민주당원들이 주도했다.[6] 국민민주당은 재건된 폴란드 국가 내 비폴란드 소수 민족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수십만 명의 폴란드계 사람들을 소비에트 측에 남겨두더라도 소비에트 측이 제안한 것보다 상당히 서쪽에 있는 폴란드-소비에트 국경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결정은 정치적 목표에도 좌우되었다. 국민민주당의 대중적 지지 기반은 중부와 서부 폴란드의 폴란드인들 사이에 있었다. 동부와 분쟁 지역에서는 국민민주당에 대한 지지보다 필수츠키에 대한 지지가 훨씬 컸고, 도시 외곽의 시골 지역에서는 폴란드인보다 우크라이나인이나 벨라루스인이 더 많았다. 따라서 너무 동쪽에 있는 국경은 소수 민족 인구를 최소화하려는 국민민주당의 이념적 목표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거 전망에도 역행하는 것이었다.[7] 전쟁에 지친 폴란드 여론 또한 협상 종결을 지지했고,[4] 양측 모두 국제 연맹의 압력을 받아 합의에 도달해야 했다.
폴란드 세임 의원 6명으로 구성된 특별 의회 대표단은 민스크를 폴란드 측에 남겨둘 소비에트의 광범위한 양보를 수락할지 여부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민주당 이데올로그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의 압력으로 추가 영토 100km가 거부되었는데, 이는 민족주의 이념의 승리이자 필수츠키의 연방주의의 뼈아픈 패배였다.[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측의 서명 거부로 인해 평화 협상은 수개월 동안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1920년 말 탐보프 반란과 이후 소비에트 당국에 대한 크론슈타트 반란과 같은 내부 불안이 증가함에 따라 소비에트 지도부에게는 문제가 더욱 시급해졌다. 그 결과 블라디미르 레닌은 소비에트 전권 대표들에게 폴란드와의 평화 조약을 최종화하라고 명령했다.[3]
3. 2. 협상 쟁점과 갈등
1920년 8월 17일 민스크에서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리가로 옮겨져 9월 21일에 재개되었다.[4] 소비에트 측은 9월 21일과 9월 28일에 두 차례 해결책을 제시했고, 폴란드 대표단은 10월 2일에 반대 제안을 했다. 사흘 후 소비에트 측은 폴란드의 제안에 대한 수정안을 제시했고, 폴란드는 이를 수락했다. 10월 12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920년 10월 18일 발효되었다.[5] 폴란드 측의 얀 돤브스키[6]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측의 아돌프 요페가[4] 주요 협상 대표였다. 소비에트 측은 비공산주의 우크라이나 대표들을 협상에서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4]소비에트군의 패배로 소비에트 대표단은 분쟁 지역 국경에서 폴란드에 상당한 영토 양보를 제안했다. 그러나 많은 관찰자들은 폴란드 측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처럼 리가 회담을 진행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평가했다. 폴란드 대표단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정치적 라이벌인 국민민주당원들이 주도했다.[6] 국민민주당은 재건된 폴란드 국가 내 비폴란드 소수 민족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수십만 명의 폴란드계 사람들을 소비에트 측에 남겨두더라도 소비에트 측이 제안한 것보다 상당히 서쪽에 있는 폴란드-소비에트 국경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정치적 목표에도 영향을 받았다. 국민민주당의 대중적 지지 기반은 중부와 서부 폴란드의 폴란드인들 사이에 있었다. 동부와 분쟁 지역에서는 국민민주당에 대한 지지보다 피우수트스키에 대한 지지가 훨씬 컸고, 도시 외곽의 시골 지역에서는 폴란드인보다 우크라이나인이나 벨라루스인이 더 많았다. 따라서 너무 동쪽에 있는 국경은 소수 민족 인구를 최소화하려는 국민민주당의 이념적 목표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거 전망에도 역행하는 것이었다.[7] 전쟁에 지친 폴란드 여론 또한 협상 종결을 지지했고,[4] 양측 모두 국제 연맹의 압력을 받아 합의에 도달해야 했다.
폴란드 세임 의원 6명으로 구성된 특별 의회 대표단은 민스크를 폴란드 측에 남겨둘 소비에트의 광범위한 양보를 수락할지 여부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민주당 이데올로그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의 압력으로 추가 영토 100km가 거부되었는데, 이는 민족주의 이념의 승리이자 피우수트스키의 연방주의의 뼈아픈 패배였다.[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측의 서명 거부로 인해 평화 협상은 수개월 동안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1920년 말 탐보프 반란과 이후 소비에트 당국에 대한 크론슈타트 반란과 같은 내부 불안이 증가함에 따라 소비에트 지도부에게는 문제가 더욱 시급해졌다. 그 결과 블라디미르 레닌은 소비에트 전권 대표들에게 폴란드와의 평화 조약을 최종화하라고 명령했다.[3]
4. 조약 내용
리가 조약은 26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8]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영토 조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조약 제2조에 명시된 국경 서쪽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와 청구를 포기했고, 폴란드는 이 국경 동쪽에 위치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와 청구를 포기했다.[10]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국경 문제는 양국이 해결하도록 규정했다.[8]
- 경제 및 문화 조항: 폴란드는 폴란드 분할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에 대한 경제적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금 3,000만 루블을 받았다.[9] 14조에 따라 2,900만 루블 상당의 철도 자재(기관차, 차량 등)도 받았다.[9] 러시아는 1772년 이후 폴란드 영토에서 획득한 야기엘론 대성당 태피스트리와 자우우스키 도서관(Biblioteka Załuskichpl) 소장품 등 예술 작품 및 기타 폴란드 국보를 반환하기로 했다.[9] 양측은 전쟁 배상금 청구를 포기했다.[8]
- 기타 조항: 조약 4조에 따라 각 체약국은 상호 간에 상대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선동이나 선전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10] 6조는 새로운 국경 양측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선택할 권리를 부여했다.[8] 7조는 모든 국민에게 자유로운 지적 발전, 모국어 사용, 종교 행사의 자유를 보장했다.[8] 이 조약에서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의 연합을 거부하기로 합의했다.[11]
4. 1. 영토 조항
리가 조약 제3조에 따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조약 제2조에 명시된 국경 서쪽에 위치한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와 청구를 포기했다. 반면 폴란드는 이 국경 동쪽에 위치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와 청구를 포기했다.[10]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국경 문제는 양국이 해결하도록 규정했다.[8]4. 2. 경제 및 문화 조항
폴란드는 폴란드 분할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에 대한 경제적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금 30000000RUB을 받았다.[9] 또한 14조에 따라 29000000RUB 상당의 철도 자재(기관차, 차량 등)를 받았다.[9]러시아는 1772년 이후 폴란드 영토에서 획득한 야기엘론 대성당 태피스트리와 자우우스키 도서관(Biblioteka Załuskichpl) 소장품 등 예술 작품 및 기타 폴란드 국보를 반환하기로 했다.[9] 양측은 전쟁 배상금 청구를 포기했다.[8]
4. 3. 기타 조항
조약 4조에 따르면, 각 체약국은 상호 간에 상대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선동이나 선전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10] 조약 6조는 새로운 국경 양측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선택할 권리를 부여했다.[8] 조약 7조는 모든 국민에게 자유로운 지적 발전, 모국어 사용, 종교 행사의 자유를 보장했다.[8] 이 조약에서 폴란드는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의 연합을 거부하기로 합의했다.[11]5. 조약의 여파와 영향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들은 리가 조약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약 체결 이후, 폴란드 국내에서는 조약이 근시안적이며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얻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협상 참관인이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리가 조약을 전쟁 동맹이었던 우크라이나를 저버린 몰염치한 협상이라고 비판했다.[4] 반면, 소련의 레닌 또한 소비에트 혁명을 서방으로 전파할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3]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은 리가 조약으로 인해 후퇴했다. 폴란드에 할양된 지역에는 많은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이 살고 있었다. 리가 조약은 시몬 페틀류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폴란드 간의 군사 동맹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페틀류라의 지지자들은 리가 조약을 동맹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국민주의자 기구의 확대와 이후 볼히니아와 동갈리치아에서 벌어진 우크라이나 반역군의 폴란드인 학살의 원인이 되었다.[3] 1921년 말, 폴란드와 동맹이었던 우크라이나군, 벨라루스군, 백러시아군은 소련에 의해 격퇴되거나 폴란드 국경을 넘어 무장 해제되었다.
폴란드는 폴란드 분할 기간 중 러시아 제국에 대한 경제적 투자에 대한 배상금으로 3000만러시아 루블을 받았다. 러시아는 1772년에 약탈한 자우스크 도서관과 같은 그림과 다른 폴란드의 국유 재산을 반환했다. 양 진영은 전쟁 자체에 대한 배상 청구를 포기하기로 선언했다.
5. 1. 국제 사회의 반응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은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가 조약을 즉시 인정하지 않았다.[8] 전후 회담에서 연합국은 커존 라인을 폴란드-러시아 국경으로 지지했고, 조약에 따른 폴란드의 영토 확장은 그 선에서 약 250km 동쪽에 있었다.[12][13] 1923년 3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이 조약을 인정했고, 이어서 4월에는 미국이 조약을 인정했다.[8]5. 2. 폴란드 국내의 반응과 영향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리가 조약 협상에 참관인으로만 참여했고, 그 결과로 나온 조약을 "비겁한 행위"라고 비난했다.[14] 피우수트스키는 이 합의가 수치스럽고 근시안적인 정치적 계산이며,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동맹국을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4] 1921년 5월 15일, 그는 칼리시 수용소 방문 중 우크라이나 병사들에게 사과했다.[15][16][17] 이 조약으로 인해 폴란드가 주도하는 인터마리움 동유럽 연방 건설 계획은 좌절되었다.[7]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독립 운동은 이 조약을 좌절로 여겼다.[18] 폴란드에 할양된 지역에는 4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과 100만 명이 넘는 벨라루스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 중 민족적으로 폴란드인은 15%에 불과했다.[19][20] 시몬 페틀류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바르샤바 조약에 따라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지만, 리가 조약으로 인해 이 동맹은 파기되었다. 이는 별도의 평화를 금지한 폴란드-우크라이나 군사 동맹을 위반한 것이었다. 페틀류라 지지자들은 우크라이나가 폴란드 동맹국에 배신당했다고 느꼈고,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에 의해 이용되어 1930년대와 1940년대의 긴장 고조와 반폴란드 학살에 기여했다. 1921년 말, 대부분의 폴란드 동맹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및 백러시아 군대는 소비에트군에 의해 전멸하거나 폴란드 국경을 넘어 무장 해제되었다.
벨라루스 역사가 앤드류 사브첸코에 따르면, 폴란드의 새로운 동쪽 국경은 "군사적으로 방어할 수 없고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없었으며", 폴란드 내 소수 민족 문제는 커져만 갔다.[6]
5. 3. 소련 국내의 반응과 영향
레닌은 리가 조약이 소비에트 혁명을 서방으로 수출하려던 자신의 계획을 무산시켰기 때문에 이 조약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했다.[3] 그는 혁명을 서방으로 확대하려는 구상을 일시적으로 포기해야 했다.[30]소련 내 폴란드인들은 재산(토지와 숲) 몰수, 종교적 박해를 당했다. 1923년에는 Jan Cieplak|얀 체플락pl 주교가 체포되었고,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많은 폴란드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다.[30]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이어진 NKVD 작전에서는 소련 내 폴란드인 최소 11만 1천 명이 즉결 처형되었다.
5. 4.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 미친 영향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운동은 리가 조약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18] 폴란드령이 된 지역에는 약 4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과 100만 명이 넘는 벨라루스인이 살고 있었다.[19][20] 리가 조약은 시몬 페틀류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의 동맹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 조약은 별도의 평화 협상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와 페틀류라를 지지하던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페틀류라의 지지자들은 이 조약을 동맹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3] 결국 1921년 말, 폴란드와 동맹을 맺었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백러시아 군대는 소련군에 의해 격퇴되거나 폴란드 국경에서 무장 해제되었다.[18]
벨라루스 역사가 앤드류 사브첸코에 따르면, 폴란드의 새로운 동쪽 국경은 "군사적으로 방어할 수 없고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없었으며", 폴란드 내 소수 민족이 너무 커서 무시하거나 동화할 수 없고, 원하는 자치권을 얻기에는 너무 작아서 민족적 긴장의 원인이 되었다.[6]
6. 조약의 장기적 결과
리가 조약은 폴란드에 상당한 소수 민족을 편입시켜 여러 문제를 야기했다. 일부 외국 관찰자들은 폴란드 내 소수 민족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지적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와 같은 조직들은 다민족 지역에서 테러와 파괴 행위를 벌여 지역 갈등을 악화시켰다.[8][12][21] 그러나 1926년 피우수트스키의 집권 이후, 많은 소수 민족 대표 단체들은 폴란드 정부에서 역할을 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22]
6. 1.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의 폴란드 침공으로 리가 조약으로 확립된 폴란드-소련 관계는 20년간 유지되었으나 파기되었다.[8][12][21] 이후 전쟁 연합국들의 결정에 따라 조약은 무효화되었고, 폴란드의 국경이 다시 변경되고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새로운 폴란드-소련 국경에 의해 폴란드에서 분리된 인구는 다른 시민들과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소련 영토 내에 남은 폴란드인들은 차별과 재산 몰수를 당했다.[23] 1937/38년 NKVD 작전에서 최소 11만 1천 명이 즉결 처형되었고,[24][25][26]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행된 다른 민족 탄압 캠페인에 앞서 다른 이들은 소련의 다른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스스로 국가를 건설하는 데 실패하고 소련의 탄압을 받았으며, 처형된 르네상스나 탄압받은 코브자르와 반두리스트와 같은 사례가 있다.[27] 폴란드 쪽 국경에 살고 있는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폴란드화를 당했고,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의 부상과 우크라이나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전술 채택에 기여했다.[28][29]
소련은 1921년에는 좌절되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영향력권이 확장되었다. 소련이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장악한 후, 폴란드-소련 국경은 1945년 서쪽으로 이동하여 커존 라인과 거의 일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루어져 새 국경 동쪽에 살던 폴란드인들이 추방되었고, 폴란드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소수 민족도 보상으로 폴란드에 할양된 독일의 옛 동부 영토로 이동했다. 통합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영토는 완전히 소련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989년 폴란드는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 붕괴와 함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
6. 2. 현대의 독립 국가
1989년 폴란드는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 붕괴와 함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2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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