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석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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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석연은 연필화를 통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대한민국의 화가이다. 1922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1945년 미 공보원 전시회를 통해 데뷔했다. 그는 연필을 이용해 정밀하고 섬세한 묘사로 극사실적인 작품을 선보였으며, 특히 개미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개미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평생 국전 출품을 거부하고 개인전을 고집했으며, 2003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2000년대 이후 연필화의 가치를 재조명받으며, 독립적인 미술 장르로 승격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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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연 (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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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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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원경재 (元敬載) |
호 | 석연(石淵) |
출생 | 1922년 12월 15일 |
사망 | 2003년 11월 6일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화가 |
학력 | |
최종 학력 | 무사시노 미술대학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원미회 회장 |
수상 | |
주요 수상 |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 |
2. 생애
원석연은 1922년 황해도 신천에서 8남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황해도 미술대회에서 특선을 받았다. 서예가였던 아버지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석고 데생을 거부하며, 사물의 이면, 곧 생명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해방 직전 귀국하여 태극기를 그려 나눠주다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1945년 미 공보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당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46년 미국 공보원에 채용되었으나, 1950년 피난 당시 그림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이후 60여 년 동안 연필화를 주로 그려 '시대의 이단아'로 불렸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평생 연필화 작가로 유명하였다.[3]
미 공보원 퇴직 후 개인 화가로 활동하며 정물, 청계천 판자촌, 굴비, 개미, 마늘 등을 흑백으로 그렸다.[3] 연필 밑그림의 매력에 빠진 그는 연필화가 유화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4] 특히 개미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많이 그려 '개미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연필만으로도 사물을 정밀하게 묘사하여 극사실화임에도 불구하고 선(禪)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느낌을 주었다.[5] “내 그림을 평가할 만한 사람은 없다”라는 고집으로 국전이나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고 개인전만 가졌다.[5] 부인 윤성희는 그가 “누가 나를 심사하겠느냐”며 타협 없이 평생 그림만 그렸다고 회고했다.[7]
1959년에는 석굴암 문수보살상을 연필로 그렸는데, 이는 점묘법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는 경주의 석굴암에서 3개월간 체류하며 문수보살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지우개를 사용하지 않고 연필 하나로 일곱 가지 색상을 표현했다.
2001년 전시회를 열었고, 2002년 팔순전에서는 개미 그림, 청계천변 판자촌 그림, 농촌 풍경 등을 담은 연필화를 발표했다.[3] 작품으로는 '고통과 환희의 이중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8], '병아리와 거미', '성난 파도' 등이 있다.
2003년 11월 5일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81세였다. 장례식은 벽제화장장에서 거행되었다.[9]
2. 1. 유년 시절과 일본 유학
1922년 황해도 신천에서 8남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원석연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황해도에서 열린 미술대회에서 특선을 받았다. 서예가였던 아버지의 후원과 격려로 일본 유학을 떠나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학창 시절, 그는 석고 데생을 그리라는 교사의 지시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속이 텅 비어있고 생명력이 없는 석고를 그려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카메라가 하는 것이고 화가는 연필로 사물의 이면, 곧 생명을 그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연필 선에는 리듬과 마무리가 있어 생명이 존재하며, 시와 철학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1945년 초 해방 직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몰래 태극기를 그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다 체포되어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다.2. 2. 데뷔와 작품 활동
1945년 미 공보원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당시 돈이 없어 액자 없이 종이만 벽에 붙여 전시하였는데, 평가가 좋아 박득수, 이수근 등 선배들이 "드디어 한국에 연필화가 생겼다"고 반겼다고 한다. 1946년 미국 공보원에 채용되어 그림을 계속 그렸으나, 1950년 피난 당시 그림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1945년 미국 공보원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60여 년 동안 연필화를 주로 그려 미술계에서 '시대의 이단아'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 국내에서 그에 필적할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평생 연필화 작가로 유명하였다.[3]미 공보원 퇴직 후에는 개인 화가로 서양화, 정물화, 연필화를 그렸다. 그는 주로 연필화를 많이 남겼는데, 일반적으로 연필은 그림을 그리기 전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를 모르는 일반인이나 미학자들은 단순히 연필로 그렸다는 것만으로 그의 작품을 폄하하였다. 2004년 10월 관훈동 갤러리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피난 이후의 작품들이다. 원석연의 책상에는 수천 개의 몽당연필이 가득 있었다고 한다. 정물, 청계천 판자촌, 줄에 매달린 굴비, 개미, 마늘, 호비 철조망, 엿가위, 석쇠 등을 흑백으로 그렸다.[3]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다가 그 매력에 빠졌다는 그는 “연필로 선을 잘못 그리는 경우가 있으면 그 종이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유화보다 더 어려운 게 연필화”라고 한다.[4]
그는 일생 동안 수많은 개미와 개미 떼를 묘사한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로써 '개미 화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53년 작품 '개미'를 비롯해 1950년대에 그린 여러 편의 개미 그림이 있다. 그 중 한 개미 작품은 타이어 자국과 고무신 자국 등이 새겨진 땅 위에 수천 마리의 개미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종이의 변색과 훼손이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 복원했다. 그는 개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접 개미들을 관찰하였고, 한번은 유리관에 개미를 넣어 길러 관찰했다고 한다.
2. 3. 예술 철학과 국전 거부
원석연은 연필만으로도 굴비, 호미, 낫, 가위, 철망과 같은 사물을 정밀하게 묘사했는데, 이는 극사실화임에도 불구하고 선(禪)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느낌을 준다.[5] 그는 “내 그림을 평가할 만한 사람은 없다”라는 고집으로 평생 국전이나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고 37회의 개인전만을 가졌으며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도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5]스물여덟의 나이에 ‘소묘가로서 일가를 이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6] 그러나 그는 고독했고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6] 부인 윤성희에 의하면 원 화백은 “누가 나를 심사하겠느냐”며 공모전 출품도 마다한 채 “내 일을 할뿐”이라며 타협이라곤 모르고 평생 그림만 그리던 분이라고 한다.[7]
2. 4. 말년과 사망
그는 생전에 '개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죽는 순간까지 놓지 않는다. 일개미는 일만 하고 병정개미는 일개미를 지켜준다. 인간 역시 평생 자신의 소임에 충실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다. 1959년 석굴암의 문수보살상을 연필로 그린 작품은 연필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일일이 수천 개의 점을 찍어 제작한 것이라 한다. 석굴암 문수보살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직접 경주의 석굴암을 방문, 3개월간 석굴암에서 체류하며 생활했다 한다. 석굴암 문수보살에서 그는 문수보살상의 세워 든 오른팔, 보살상 손에 든 잔,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 등의 결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절대 지우개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주로 흑백화가 많지만 연필 하나로 일곱 가지 색상을 그려낸다고 한다.2001년 전시회를 하였다. 2002년 10월의 팔순전에서는 세밀한 묘사의 개미 그림을 비롯해 청계천변 판자촌 그림과 농촌 풍경 및 낫, 갈퀴 등 철물을 그린 연필화를 발표했다.[3] 그는 작품 대부분 연필로 그린 흑백 연필화를 많이 그렸으며 서양화, 정물화 등도 있다. 작품으로는 정물, '고통과 환희의 이중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8], 동물, 마을 풍경, 솔방울, 마늘 시리즈, 굴비, 명태, 꽁치, ‘병아리와 거미’, ‘둥지’, ‘성난 파도’, ‘석쇠와 생선’, 부산 피난지에서 그린 개미(1953), 마늘(1997), 임종 직전에 그린 문수보살상 등이 있다.
2003년 11월 5일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에서 발인 후 장례식은 벽제화장장에서 거행되었다.[9]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81세였다.
3. 작품 세계
원석연은 밑그림 정도로 인식되던 연필화를 당당한 미술 장르로 끌어올리고자 예술적 승부를 걸었다. 이는 서구문화에 아부하는 기존 화단의 풍토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10] 전쟁의 상흔과 격동기의 인간 군상을 은유한 정교한 개미 군상의 그림을 비롯, 무채색의 종이와 연필 소재로 강하면서도 선(禪)적인 이미지를 표출시켰다.[7]
3. 1. 연필화의 특징
원석연은 서구 문화에 아부하는 기존 화단의 풍토에 대한 비판으로, 밑그림 정도로 인식되던 연필화를 당당한 미술 장르로 끌어올렸다.[10] 전쟁의 상흔과 격동기의 인간 군상을 은유한 정교한 개미 군상 그림을 비롯, 무채색의 종이와 연필 소재로 강하면서도 선(禪)적인 이미지를 표출시켰다.[7]그는 "연필화가 유화보다 쉽다는 선입견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10] 그림에 대한 집념이 철저하여 지우개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연필로 선을 잘못 그리면 종이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연필화가 유화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다. 작가 노트를 통해서는 연필 선에는 '음(音)'과 '색(色)'이 있다고 주장했다. 평소에도 연필로 일곱 가지 색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3. 2. 주요 소재
원석연은 일생 동안 수많은 개미와 개미 떼를 묘사한 그림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다. 이로써 그에게는 '개미 화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53년 작품 '개미'를 비롯해 1950년대에 그린 여러 편의 개미 그림이 있다. 그 중 한 개미 작품은 타이어 자국과 고무신 자국 등이 새겨진 땅 위에 수천 마리의 개미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종이의 변색과 훼손이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 복원했다. 그는 개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접 개미들을 관찰하였고, 한번은 유리관에 개미를 넣고 기르며 관찰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개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는다. 일개미는 일만 하고 병정개미는 일개미를 지켜준다. 인간 역시 평생 자신의 소임에 충실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다.[4]1959년 석굴암의 문수보살상을 연필로 그린 석굴암 문수보살은 연필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일일이 수천 개의 점을 찍어 제작한 것이라 한다. 석굴암 문수보살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직접 경주의 석굴암을 방문, 3개월간 석굴암에서 체류하며 생활했다 한다. 석굴암 문수보살에서 그는 문수보살상의 세워 든 오른팔, 보살상 손에 든 잔,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 등의 결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절대 지우개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주로 흑백화가 많지만 연필 하나로 일곱 가지 색상을 그려낸다고 한다.
2001년 전시회를 하였다. 2002년 10월의 팔순전에서는 세밀한 묘사의 개미 그림을 비롯해 청계천변 판자촌 그림과 농촌 풍경 및 낫, 갈퀴 등 철물을 그린 연필화를 발표했다.[3] 그는 작품 대부분 연필로 그린 흑백 연필화를 많이 그렸으며 서양화, 정물화 등도 있다. 작품으로는 정물, '고통과 환희의 이중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8], 동물, 마을 풍경, 솔방울, 마늘 시리즈, 굴비, 명태, 꽁치, ‘병아리와 거미’, ‘둥지’, ‘성난 파도’, ‘석쇠와 생선’, 부산 피난지에서 그린 개미(1953년), 마늘(1997년), 임종 직전에 그린 문수보살상 등이 있다.
3. 3. 대표작
1959년 석굴암의 문수보살상을 연필로 그린 석굴암 문수보살은 연필로 그린 것이 아니라 일일이 수천 개의 점을 찍어 제작한 것이라 한다. 그는 석굴암 문수보살을 완성하기 위해 직접 경주의 석굴암을 방문, 3개월간 석굴암에서 체류하며 생활했다 한다. 석굴암 문수보살에서 그는 문수보살상의 세워 든 오른팔, 보살상 손에 든 잔,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 등의 결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절대 지우개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주로 흑백화가 많지만 연필 하나로 일곱 가지 색상을 그려낸다고 한다.2002년 10월의 팔순전에서는 세밀한 묘사의 개미 그림을 비롯해 청계천변 판자촌 그림과 농촌 풍경 및 낫, 갈퀴 등 철물을 그린 연필화를 발표했다.[3] 그는 작품 대부분 연필로 그린 흑백 연필화를 많이 그렸으며 서양화, 정물화 등도 있다. 작품으로는 정물, '고통과 환희의 이중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8], 동물, 마을 풍경, 솔방울, 마늘 시리즈, 굴비, 명태, 꽁치, ‘병아리와 거미’, ‘둥지’, ‘성난 파도’, ‘석쇠와 생선’, 부산 피난지에서 그린 개미(1953), 마늘(1997), 임종 직전에 그린 문수보살상 등이 있다.
4. 평가와 영향
일반인이나 미학자들은 연필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밑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된다는 인식 때문에, 단순히 연필로 그렸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을 폄하하였다.[5]
4. 1. 당대의 평가
2000년대에 들어서 연필화도 일종의 작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원석연은 자신만의 조형언어와 작품세계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연필화'를 데생과는 차별되는 하나의 독립적 미술 장르로 승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5] 연필화라는 이유만으로 작품을 폄훼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그는 연필화를 데생과는 차별되는 독립적 미술 장르로 승격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조형언어와 작품세계를 인정받는다.[5]미술평론가 윤범모는 그의 작품 경향에 대해 “오랜 관찰과 내밀한 형상화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원석연 화백의 그림은 그 작업과정을 통해 자기를 관조하는 행위와 같다”면서 “비록 사물의 형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형상 그 너머의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설명했다.[5]
4. 2. 후대의 재평가
2000년대에 와서 연필화도 일종의 작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그는 자신만의 조형언어와 작품세계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연필화'를 데생과는 차별되는 하나의 독립적 미술장르로 승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5] 연필화라는 이유만으로 작품을 폄훼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그는 연필화를 데생과는 차별되는 독립적 미술 장르로 승격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조형언어와 작품세계를 인정받는다.미술평론가 윤범모는 그의 작품경향에 대해 “오랜 관찰과 내밀한 형상화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원석연 화백의 그림은 그 작업과정을 통해 자기를 관조하는 행위와 같다”면서 “비록 사물의 형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형상 그 너머의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설명했다.[5]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부인 | 윤성희 | 1929년 | ||
장인 | 윤광선 | 1898년 11월 17일 | ? | 6·25 전쟁 중 납북, 샌들러(Candller)[11] |
장모 | 남궁자경 | 남궁억의 딸 | ||
처조부 | 윤치호 | 1864년 음력 12월 26일 | 1945년 양력 12월 9일 | |
처숙부 | 윤영선 |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 | 알렌(Allen)[11] |
처고모부 | 현영학 | 1921년 | 2004년 1월 14일 | 기독교 민중신학자,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장[12][13][14] |
처당숙 | 윤보선 | 1897년 | 1990년 | 제4대 대통령 |
처외조부 | 남궁억 |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 |
사돈 | 방응모 | 1883년 9월 29일 | 1950년 8월? |
6. 기타
그의 개미 그림들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근면함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개미 그림에 나오는 개미들 중 머리와 다리가 끊어진 개미들은 짓밟힌 약자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참조
[1]
뉴스
'연필화가' 원석연씨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3-11-06
[2]
뉴스
'부고' 연필화 화가 원석연씨 별세
http://economy.hanko[...]
한국경제
2003-11-06
[3]
뉴스
‘연필그림’ 원석연 화백 별세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3-11-07
[4]
뉴스
연필화가 원석연 개인전, 극사실 작품 60여점 선보여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1-10-11
[5]
뉴스
미술계 기인 ‘연필화가’ 원석연씨 별세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3-11-06 # 추정 날짜. 기사 내용으로 판단.
[6]
뉴스
'개미화가' 고 원석연 추모전, 연필 하나로 담아낸 일곱색깔 울림 60여년
http://sportsworldi.[...]
스포츠월드
2008-11-02
[7]
뉴스
線으로 그린 禪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8-10-29
[8]
뉴스
원석연 화백 추모전‥연필로 그린 우리시대 초상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08-11-06
[9]
뉴스
'연필화가' 원석연씨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03-11-06 # 추정 날짜. 기사 내용으로 판단.
[10]
뉴스
연필화가 원석연씨, 10년만에 개인전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1-10-14
[11]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12]
뉴스
민중신학자 이화여대 현영학 교수 별세
https://www.christia[...]
크리스천투데이
2012-07-11 # 추정 날짜. 기사 내용으로 판단.
[13]
뉴스
민중신학 개척 현영학씨 별세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12-07-11
[14]
웹인용
교수신문
http://www.kyosu.net[...]
20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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