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 (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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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수(劉遂)는 전한 시대의 조왕으로, 조유왕 유우의 아들이다. 고황후 사후 조나라 왕이 되었으나, 경제 시대에 상산군을 삭감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했다.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여 자살했고, 조나라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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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수 (조왕) | |
|---|---|
| 기본 정보 | |
| 휘호 | 효경원왕(孝景 Yuan Wang) |
| 성 | 류(劉) |
| 이름 | 수(遂) |
| 시호 | 효(孝) |
| 작위 | 조왕(趙王) |
| 봉국 | 조나라 |
| 생몰년 | ? ~ 기원전 154년 |
| 시대 | 전한 |
| 자녀 | 류자(劉茲), 류창(劉昌), 류무(劉毋) |
| 가계 | |
| 아버지 | 조 은왕 유우 |
| 어머니 | 미상 |
| 형제 | 조 공왕 유비, 대 효왕 유발 |
| 생애 | |
| 즉위 | 조 공왕 유비 사후 조왕에 봉해짐. |
| 주요 활동 |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여 반란을 일으킴. |
| 최후 | 한나라 군대에 패배 후 자결함. |
| 기타 | |
| 관련 인물 | 유비, 유무, 유앙, 유현, 유벽강, 유차, 유웅거, 유비, 경제 |
2. 생애
유수(劉遂)는 조유왕 유우의 아들이다. 아버지 유우는 태황태후 여씨에게 감금되어 굶어 죽었고, 조나라 왕위는 공왕을 거쳐 여씨 일족인 여록에게 넘어갔다.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 사후 여씨 일족이 몰락하고 문제가 즉위하면서 여록을 대신해 조왕이 되었다.[4][5]
경제 즉위 후, 조정에서 조조, 원앙 등을 중심으로 제후왕들의 봉국을 깎아내는 정책을 추진하자 이에 불만을 품었다.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상산군을 삭감당하자 오왕 유비가 봉토 삭감에 반발하여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려 했다. 상 건덕(建德)[6], 내사 왕한(王悍)이 반대하자 이들을 불태워 죽이고 거병하여 흉노와 연계하고 오·초와 함께 진격하려 했다.[4][5]
조정은 곡주후 역기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했고, 유수는 한단성에 포위되어 7개월간 항전했다. 흉노는 조왕이 포위되고 초와 오가 격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나라와 연합하여 한나라 변경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중단했다. 역기가 성을 함락하지 못하는 사이, 제나라를 구원하고 온 난포가 한단으로 와 수공으로 성을 함락시켰다. 결국 유수는 자살했고, 조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되었다.[4][5][7][8][9]
2. 1. 초기 생애
조유왕 유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우는 태황태후 여씨에게 감금되어 굶어 죽었고, 조나라 왕 자리도 공왕을 거쳐 여씨 일족인 여록에게 넘어갔다.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고 여씨 일족이 몰락한 후 문제가 황제가 되면서, 여록을 대신해 조나라 왕이 되었다.[4][5]2. 2. 조왕 즉위
조유왕 유우의 아들로, 아버지는 태황태후 여씨에게 감금되어 굶어 죽었고, 조나라 왕 자리도 공왕을 거쳐 여씨 일족인 여록에게 넘어갔다.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에 고황후가 죽고 여씨 일족이 몰락한 후, 문제가 황제가 되면서 여록을 대신해 조나라 왕이 되었다.[4][5]2. 3. 오초칠국의 난 가담
경제 즉위 후, 조조, 원앙 등을 중심으로 한 조정의 제후왕 봉국 삭감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상산군이 삭감되자 이에 반발하여 오왕 유비가 일으킨 반란(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고자 했다.[4][5] 상 건덕(建德)[6], 내사 왕한(王悍)이 반대하자 둘을 살해하고 거병해 흉노와 연계하며 오나라와 초나라와 함께 진격하고자 했다.[4][5]2. 4. 최후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조왕은 조정에서 제후왕들의 봉국을 깎아내는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마침 오왕 유비가 봉토 삭감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오초칠국의 난)에 함께 모의하고자 했다. 상 건덕(建德)[6], 내사 왕한(王悍)이 반대하자 둘을 불태워 죽이고 거병해 흉노와 연계하며 오나라와 초나라와 함께 진격하고자 했다.[4][5]조정에서는 곡주후 역기를 보내 조나라를 공격했고, 조왕은 한단에서 포위되어 일곱 달을 항전했다. 흉노는 조왕이 포위되었고 초나라와 오나라가 격파당했다는 말을 듣자 조나라와 연합해 한나라 변경으로 쳐들어가려던 계획을 중단했다. 역기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제나라를 구원하러 간 난포가 임무를 마치고 한단으로 와 수공으로 성을 함몰시켰다. 조왕은 자살했고, 조나라는 폐해져 한나라의 군으로 들어갔다.[4][5][7][8][9]
3. 평가
유수는 경제의 중앙 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인물로 평가된다. 오초칠국의 난은 결과적으로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한나라의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4][5]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ttp://zh.wikisource[...]
2011-07-12
[2]
서적
Book of Han
http://zh.wikisource[...]
2011-07-12
[3]
서적
Book of Han
http://zh.wikisource[...]
2011-06-16
[4]
위키문헌
반고: 《한서》 권14 제후왕표제2
:zh:漢書/卷014
[5]
위키문헌
위와 같음, 권38 고오왕전제8
:zh:漢書/卷038
[6]
문서
성은 미상이다.
[7]
위키문헌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zh:漢書/卷035
[8]
위키문헌
위와 같음, 권94상 흉노전제64상
:zh:漢書/卷094上
[9]
위키문헌
위와 같음, 권41 번역등관부근주전제11
:zh:漢書/卷041
[10]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이 봉해진 진류군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11]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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