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록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여록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고황후의 작은오라버니 여석지의 아들이자 여칙, 여종의 동생이다. 혜제 사후 고황후가 섭정하면서 여태, 여산과 함께 남북군을 통제하며 여씨 일족의 권력 장악에 기여했다. 고황후 원년에 호릉후에 봉해졌으며, 이후 조왕으로 임명되었다. 고황후 사후 상장군이 되어 북군을 장악했으나, 제애왕의 반란과 주발, 진평 등의 반격으로 군권을 잃고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고황후의 조카이자 여석지의 아들로, 여칙, 여종의 아우이다.[3] 전한 혜제 7년(기원전 188년) 혜제가 죽고 고황후가 태황태후로 임조칭제하면서 여태, 여산과 함께 남북군을 통제해 여씨 일족의 전횡에 기여했다.[4]
2010년 중국 드라마 미인심계에 등장한다.
2. 일대기
고황후 원년(기원전 187년), 태황태후가 여씨들을 왕과 제후로 세우려 하면서 여록도 주허후 유장을 사위로 삼고 제후로 봉해졌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사기》에서는 형 여칙이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다가 죄를 짓고 폐해지면서 5월 병인일에 대신 호릉후에 봉해졌다고 한다.[4][5] 반면, 《한서》에서는 여칙이 폐해진 것은 같으나 여종이 4월 을유일에 여칙을 대신하여 봉해졌고 여록은 9월 병인일에 한양후에 봉해졌다고 한다.[3]
고황후 7년(기원전 181년) 가을, 태황태후가 조왕 유회의 후사를 끊고 대왕 유항으로 대신하려 했으나 유항이 고사하면서, 여산·진평의 추천으로 후임 조왕이 되었다.[4]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태황태후가 병에 들자 태황태후의 명으로 상장군이 되어 북군을 통솔해, 남군을 통솔하는 여왕 여산과 함께 중앙군을 장악했다. 태황태후가 죽자 여산과 함께 경계를 받았다. 또 딸을 전한 소제의 황후로 들였다.[4] 이후 여산과 함께 장안에 있으면서 대신들을 군으로 위협했다.[4][6]
그런데 여록의 사위인 주허후 유장이 장안에 있으면서 형 제애왕과 조정 중신들과 함께 여씨 일족을 타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제애왕이 여씨 타도를 명분으로 거병하자 여산 등은 관영을 보내 제애왕을 치게 했으나, 관영은 형양에 도착하자 제애왕과 모의하고 양측 모두 진격하지 않았다. 여산과 여록은 태위 주발과 유장, 제, 초 등을 꺼려 함부로 결단하지 못했고, 여산과 여록이 중앙군을 쥐고 있었기에 주발의 행동도 제약되었다.
그러나 주발과 승상 진평이 모의하여 여록의 친구 역기의 아버지 역상을 협박했고, 역기는 여록에게 장안을 떠나 봉국으로 가도록 권했다. 여록은 이 말을 좋게 여겨 군권을 주발에게 넘겨주려고 했고, 여산과 다른 여씨들에게도 말했다. 한편 여록은 역기를 신뢰해 자주 사냥을 나갔다. 8월, 여산이 역기의 말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측근의 말을 듣고 급히 입궁하자 이를 알아챈 주발이 역기와 유갈을 시켜 황명을 사칭해 북군을 주발에게 넘기고 봉국으로 가라고 했다. 여록은 이 말을 듣고 북군을 주발에게 넘겨주고 떠났고, 결국 궁궐을 대신들이 장악했으며 여산은 유장에게 살해당했다. 대신들은 여산이 죽자 여씨 남녀를 모조리 잡아들였고, 여록도 사로잡혀 참수당했다.[4]
2. 1. 초기 생애
고황후의 작은오라버니 여석지의 아들이며, 여칙, 여종의 아우이다.[3] 아버지 여석지는 유방을 따라 유방이 한왕이 되자 봉읍으로 돌아가 유태공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여석지는 고조 6년(기원전 201년)에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고, 9년 뒤 사망했다. 건성후는 아들 여칙이 이었다. 여칙은 죄가 있어 면직되었고, 그의 동생 여종이 이었다.[1]
여록은 딸을 제왕 유양의 동생인 주허후 유장에게 시집보냈다.
2. 2. 여씨 정권의 핵심 인물
여석지의 아들이며 여칙, 여종의 아우이다.[3] 전한 혜제 7년(기원전 188년) 혜제가 죽자, 여후는 진평 등 공신들을 두려워하여 불안해했다. 진평 등은 여태, 여산, 여록 등 여씨에게 남북군의 군권을 넘겨 여후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라고 진언했다.
고후 원년(기원전 187년), 여록은 호릉후(胡陵侯)에 봉해졌다.[4]
고후 7년(기원전 181년), 여후는 승상 진평 등의 청원에 의해 조공왕(趙共王) 유회의 후임으로 여록을 조왕(趙王)으로 삼고, 여석지를 조소왕(趙昭王)으로 추존했다.[4]
2. 3. 여씨의 난과 죽음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의 병세가 악화되자 여록은 상장군이 되어 북군(北軍)을 장악했다.[4] 고황후가 사망하자, 여록은 자신의 딸을 소제 홍(少帝 弘)의 황후로 삼았다.[4]
제왕 유양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산은 관영을 보내 진압하게 했지만, 관영은 형양(滎陽)에서 진군하지 않았다.[4] 진평의 명을 받은 역기는 친구인 여록에게 군권을 반납하고 봉국으로 돌아가면 대신과 제후들의 의심이 풀릴 것이라고 설득했고, 여록은 여산에게 그렇게 진언했다.[4] 그러나 제나라의 낭중령(郎中令) 가수(賈壽)가 반대하며 여산에게 빨리 궁궐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4]
그 사이에 여록은 다시 역기와 전객(典客) 유갈(劉揭)의 설득으로 북군의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지휘권을 주발에게 빼앗겼다.[4] 여산도 위위(衛尉)에게 궁궐로 들어가는 것을 제지당했다. 여산은 여갱시와 함께 주허후 유장에게 살해되었다.[4] 여산을 잃은 여씨 일족은 일시에 전멸되었고, 여록도 연왕(燕王) 여통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4] 소제 홍도 폐위되어 하후영 등에 의해 끌려나가 독살되었고, 대왕 유항(劉恆, 훗날의 문제)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3. 가계
4. 여록이 등장하는 작품
4. 1. 텔레비전 드라마
미인심계 (2010년, 중국)
참조
[1]
서적
漢書
[2]
서적
漢書
[3]
서적
한서
https://zh.wikisourc[...]
[4]
서적
사기
https://zh.wikisourc[...]
[5]
서적
사기
https://zh.wikisourc[...]
[6]
서적
상게서
https://zh.wikisourc[...]
[7]
문서
[8]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