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양 (진정왕)
1. 개요
유양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왕망이 신나라를 세운 후에는 진정공으로 폄작되었으나, 왕망의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왕랑에게 귀부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후 후한 광무제에게 귀순하여 곽황후와의 혼인을 통해 관계를 강화하고 왕랑 토벌에 참여했다. 진정왕으로 복위한 후에는 참언을 퍼뜨리고 도적과 결탁하여 광무제의 의심을 샀으며, 결국 광무제에게 속아 죽임을 당했다. 광무제는 유양의 아들 유득을 진정왕으로 삼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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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사망 -
만수 (후한)
만수는 후한 시대의 인물로, 광무제를 지지하여 하북 평정에 공을 세우고 우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남양 평정 중 병으로 사망했다. -
후한의 제후왕 -
조조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시인이었던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으로 인해 후대 평가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
후한의 제후왕 -
조비
조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로, 조조 사후 위왕과 승상 자리를 이어받아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는 등 내정을 정비했으나 오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요절했으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문장경국 사상을 내세우기도 했다. -
암살된 사람 -
제임스 쿡
제임스 쿡은 18세기 영국의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로서, 세 차례의 태평양 탐험을 통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등 지리적 발견에 기여했으며 남극권에 진입하고 하와이 제도를 기록했으나, 하와이에서 원주민과의 충돌로 사망했다. -
암살된 사람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2. 전한 시대
아버지 진정공왕 유보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원시 5년(5년), 신창(信昌)에 작은아버지 유광이 봉해져 진정국에서 떨어져 나갔다.
시건국 원년(9년)에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
2.1. 진정왕 즉위
아버지 진정공왕 유보가 수화 2년(기원전 7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원시 5년(5년), 신창(信昌)에 작은아버지 유광이 봉해져 진정국에서 떨어져 나갔다.
시건국 원년(9년)에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낮춰졌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락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
2.2. 왕망의 난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
3. 후한 시대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원시 5년(5년), 신창(信昌)에 작은아버지 유광이 봉해져 진정국에서 이탈했다.
이후 진정왕으로 있다가, “붉은 것 아홉 뒤에는, 혹 난 양(揚)이 주가 된다.[赤九之後, 癭揚為主.]”라는 참언을 지어내 혹을 앓는 자신에게 끼워맞춰 대중을 선동하고 영내의 도적 면만적과 통했다. 광무제는 건무 2년(26년)에 기도위 진부와 유격장군 등륭을 보내 유양을 불렀으나 유양은 문을 걸어닫고 만나지 않았다. 광무제는 장군 경순을 보내 기주와 유주에 사면령을 내리고 왕후들을 위문하게 하면서, 비밀리에 유양을 사로잡게 했다. 경순은 진부와 등륭을 만나 전사에 머물렀고, 유양은 경순이 자기 일족의 여자의 소생이기에 경계를 풀고 아우 임읍후 유양(劉讓), 종형 유세(劉細)와 함께 각각 1만여 병사를 거느리고 경순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경순의 속임수였고, 유양 등은 경순에게 주살되었다. 광무제는 유양 등이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유양의 아들 유득을 진정왕으로 삼았다.
3.1. 왕랑에 협력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시건국 원년(9년)에 유양은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유양은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劉植)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
3.2. 광무제 귀순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시건국 원년(9년)에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
3.3. 왕랑 토벌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유양은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10년)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유양은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劉植)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
3.4. 모반과 죽음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진정왕으로 있다가, “붉은 것 아홉 뒤에는, 혹 난 양(揚)이 주가 된다.[赤九之後, 癭揚為主.]”라는 참언을 지어내 혹을 앓는 자신에게 끼워맞춰 대중을 선동하고 영내의 도적 면만적과 통했다. 광무제는 건무 2년(26년)에 기도위 진부와 유격장군 등륭을 보내 유양을 불렀으나 유양은 문을 걸어닫고 만나지 않았다. 광무제는 장군 경순을 보내 기주와 유주에 사면령을 내리고 왕후들을 위문하게 하면서, 비밀리에 유양을 사로잡게 했다. 경순은 진부와 등륭을 만나 전사에 머물렀고, 유양은 경순이 자기 일족의 여자의 소생이기에 경계를 풀고 아우 임읍후 유양(劉讓), 종형 유세(劉細)와 함께 각각 1만여 병사를 거느리고 경순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경순의 속임수였고, 유양 등은 경순에게 주살되었다. 광무제는 유양 등이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유양의 아들 유득을 진정왕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