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랑 (신)
1. 개요
왕랑은 신나라 말기, 하북 지역에서 스스로를 전한 성제의 사생아 유자여라고 칭하며 황제를 사칭한 인물이다. 점복과 천문, 역법에 능통했던 그는 하북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믿고 유림, 이육, 장참 등의 지지를 받아 24년 1월에 한단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유수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같은 해 5월 한단이 함락되자 도주했으나 붙잡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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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사망 -
남해 차차웅
남해 차차웅은 신라의 2대 왕으로,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무당을 뜻하는 왕호 '차차웅'을 사용, 외침에 시달리면서도 민생 안정에 힘써 신라 초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
24년 사망 -
스트라본
스트라본은 폰토스 출신의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 역사가, 철학자이며,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로마 제국을 지지했고, 17권의 《지리학》과 47권의 《역사》를 저술했다. -
중국의 황제 -
한림아
한림아는 유복통에 의해 소명왕으로 추대되어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주원장에게 살해된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일원이다. -
중국의 황제 -
진우량
진우량은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에 가담하여 서수휘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대한을 건국했으나 주원장과의 파양호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한 인물이다. -
신나라의 반란자 -
후한 광무제
후한 광무제는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신나라 멸망 후 후한을 건국하여 중국을 통일했으며, 검소한 통치와 유교 진흥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주변 국가들과 관계를 맺었다. -
신나라의 반란자 -
여모
2. 생애
왕랑은 천문학과 역법에 정통한 점술가로, 하북 지역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보았다.
왕망이 신(新)을 세우기 전, 장안에는 한나라 성제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유자여(劉子輿)가 있었으나 왕망에게 살해당했다. 왕랑은 자신이 진짜 유자여라 하며, 조묘왕의 아들 劉林 (東漢)중국어과 함께 조비연에게 핍박받아 사천으로 도망쳤다고 주장했다. 유림은 이육(李育), 장참(張参)과 함께 왕랑을 황제로 세우려 했다.
경시제는 23년 11월, 유수에게 하북 평정을 명했다. 유수는 한단에서 유림을 만났으나, 유림의 적미군 수몰 제안을 거절하고 真定国중국어으로 향했다.
24년 1월, 유림은 수백 기병을 이끌고 한단에 입성, 왕랑을 황제로 추대했다. 왕랑은 유림을 재상, 이육을 병부상서, 장참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기(冀)와 유(幽) 지역을 점령했다. 또한 왕망에게 반대했던 翟義중국어가 살아있다는 주장을 통해 한나라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24년 초, 유수는 劉植 (漢朝)중국어, 耿純중국어 등의 지원으로 세력을 강화했다. 상곡과 어양군 태수의 지원까지 받은 유수는 왕랑을 상대로 연승, 24년 5월, 한단을 함락시켰다. 왕랑은 도주 중 王霸 (漢朝)중국어에게 살해되었다.
2.1. 초기 활동과 배경
왕랑은 점복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천문과 역법에 통달했다. 그는 자신의 점괘에 따라 하북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망이 신을 건국했을 때, 장안에서는 전한 성제의 사생아인 유자여를 자칭하고 참살당한 자가 있었다. 왕랑은 이 사건을 이용해 자신이 바로 진짜 유자여라고 사칭했다. 왕랑은 평소 친교가 있었던 劉林 (東漢)중국어에게 자신은 성제의 사생아인 유자여이며, 어릴 적에는 촉 땅에 숨어 있었지만, 천기(天機)가 있어 연·조에 왔다고 말했다. 유림은 이를 믿고, 조(趙)의 호족(「대호」)인 이육·장참과 함께 왕랑을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적미군이 황하를 건너 북진해 온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경시 원년(23년) 10월, 경시제(유현)의 명을 받아 하북 평정에 나선 경시 정권의 파로장군·행대사마사 유수(후의 광무제)가 한단을 방문하여 유림과 면회했다. 유림은 둑을 터뜨려 적미군을 섬멸하는 계책을 유수에게 제안했으나, 유수는 답변하지 않고 한단을 떠나 더 북방의 진정으로 진군했다.
유림은 왕랑 옹립을 최종적으로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유림 등은 적미군이 온다는 소문을 더욱 부추기며 왕랑을 옹립하는 정통성으로 삼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었다.
2.2. 황제 즉위와 세력 확장
왕랑은 원래 점복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천문과 역법에 통달했다. 자신의 점괘에 따라 하북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망이 신을 건국했을 때, 장안에서는 전한 성제의 사생아인 자여를 자칭하는 자가 참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왕랑은 이를 이용해 자신이 진짜 자여라고 사칭했다. 왕랑은 평소 친분이 있던 劉林중국어에게 자신은 성제의 사생아 유자여이며, 어릴 적에는 촉 땅에 숨어 있었지만 천기(天機)가 있어 연(燕)·조(趙)에 왔다고 말했다. 유림은 이를 믿고 조(趙)의 호족 이육·장참과 함께 왕랑을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적미군이 황하를 건너 북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경시 원년(23년) 10월, 경시제(유현)의 명을 받아 하북 평정에 나선 경시 정권의 파로장군·행대사마사 유수(후의 광무제)가 한단을 방문하여 유림과 만났다. 유림은 둑을 터뜨려 적미군을 섬멸하는 계책을 유수에게 제안했으나, 유수는 답하지 않고 한단을 떠나 북쪽의 진정으로 진군했다.
이에 유림은 왕랑 옹립을 결단한 것으로 보인다. 유림 등은 적미군이 온다는 소문을 부추겨 왕랑 옹립의 정통성으로 삼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었다. 경시 원년(23년) 12월, 유림 등은 수백 명의 수레를 이끌고 한단에 입성하여 옛 조왕의 궁궐에서 왕랑을 천자로 즉위시켰다. 왕랑은 유림을 승상, 이육을 대사마, 장참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또한 군대를 파견하여 기주·유주를 제압했다. 민중들이 여전히 한나라를 그리워하는 것을 감안하여, 한나라에 충성하다 죽은 적의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조서로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명성을 얻었다. 이로 인해 조국 이북·요동 이서 지역은 왕랑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리고 유수의 수급에 100의 현상금을 걸고 그를 잡으려 했다.
2.3. 광무제와의 대립과 몰락
왕망이 신(新) 왕조를 세우기 전, 장안에는 한나라 성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유자여(劉子輿)라는 남자가 있었다. 유자여가 신 왕조 황제 왕망의 명령으로 살해되자, 왕랑은 이를 틈타 자신이 진짜 유자여인 척했다. 그는 조묘왕의 아들인 劉林중국어과 함께 조비연 황후의 박해를 피해 사천으로 도망쳤으며, 하북이 천자의 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림은 이육(李育)과 장참(張参)의 지원을 받아 왕랑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당시 적미 군대가 북쪽으로 향하며 황하를 건너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경시제는 서기 23년 11월, 장군 유수와 임시 병부상서를 시켜 하북을 평정하도록 했다. 유수는 한단을 방문하여 유림을 만났고, 유림은 댐을 열어 하북의 적미군을 수몰시키자고 제안했다. 유수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真定国중국어으로 향했다.
서기 24년 1월, 유림은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한단으로 진입하여 조묘왕의 궁전에 도착했고, 왕랑은 그 자리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왕랑은 유림을 재상, 이육을 병부상서, 장참을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왕랑의 군대는 기(冀)와 유(幽)의 군을 점령했고, 신 왕조가 세워지기 전에 왕망에 반대했던 장군 翟義중국어가 아직 죽지 않고 그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한나라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왕랑은 조를 북쪽에서, 요동반도를 동쪽 끝에서 통제했으며, 유수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10개의 후작급 청동 그릇을 상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서기 24년 초, 유수는 병력을 모으고 劉植중국어와 耿純중국어이 2천 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그를 지원하면서 세력을 강화했다. 상곡의 태수인 경황(耿況)과 어양군의 태수인 彭宠중국어이 기병을 보내 유수를 지원했다.
이후, 왕랑은 하북 각지에서 연전연패하고, 같은 해 4월에는 한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왕랑은 1만 호의 열후에 봉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항복을 신청했으나, 유수는 목숨만 건지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답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유수에게 모든 병력이 모이자, 왕랑은 하북에서 일련의 패배를 겪었다. 서기 24년 5월, 유수는 한단으로 진군했고, 5월 27일, 한단은 함락되었다. 왕랑은 한단에서 탈출했지만, 도주 중에 사망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그는 유수의 장군 중 한 명인 王霸중국어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