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여 (사람)
1. 개요
유여는 전한 경제의 아들로, 회양왕과 노왕을 역임했다. 그는 오초칠국의 난 이후 노나라로 봉해졌으며, 궁실 건축과 사냥을 즐겼다. 공자의 옛집을 허물다 고문경전을 발견했으며, 원광 6년(기원전 129년)에 사망하여 아들 유광이 뒤를 이었다. 유여의 후손으로는 유표, 유언, 유장 등이 있다.
| full_name: '가문 이름: 류(劉) , 주어진 이름: 여(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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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회양왕(淮陽王) (초기) , 노왕(魯王) (이후) |
|---|---|
| 봉지 | 회양, 노 |
| 왕조 | 한나라 |
| 출생 | 알 수 없음 |
|---|---|
| 사망 | 기원전 128년 |
| 아버지 | 한경제 |
| 어머니 | 성희 (程姬) |
| 회양왕 | 기원전 155년 ~ 기원전 154년 |
|---|---|
| 노왕 | 기원전 154년 ~ 기원전 128년 |
| 시대 | 중국 한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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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애인 -
하후돈
하후돈은 후한 말기부터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조조의 사촌이자 그의 거병 때부터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연주 전투에서 왼쪽 눈을 잃어 "애꾸눈 하후"라는 별명을 얻었고, 군사적 능력과 청렴한 성품으로 조조의 신임을 받아 사후 조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중국의 장애인 -
손빈
손빈은 중국 전국 시대 제나라의 군사 전략가로, 손무의 후손이며, 방연의 모함으로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으나 제나라로 망명하여 계릉 전투와 마릉 전투에서 뛰어난 지략을 발휘,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고 그의 군사 사상은 《손빈병법》에 담겨 중국 병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기원전 129년 사망 -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스키피오 가문에 입적되어 제3차 포에니 전쟁과 누만티아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으며, 감찰관으로 사회 풍기를 바로잡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에 반대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활동했다. -
기원전 129년 사망 -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는 형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의 뒤를 이어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이 되었으며, 트리폰을 제거하고 하스몬 왕조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파르티아 원정 중 사망했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경제 전2년 회양나라의 왕으로 봉해졌다가, 이듬해 오초칠국의 난이 진압된 후 노나라로 옮겨 봉해졌다. 유여는 궁실과 원유(苑囿)를 짓고 개와 말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말년에는 음악을 좋아했다. 말더듬이라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사냥을 즐겼고,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았다가 재상 전숙의 지적으로 배상하기도 했다.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의 옛 집을 허물다가 벽 안에서 고문경전을 발견했다.
원광 6년(기원전 129년)에 죽었고, 공왕(恭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유광이 왕위를 계승했다.
2.1. 초기 생애와 즉위
경제 전2년(기원전 155년)에 회양나라의 왕으로 봉해졌다가, 이듬해 오초칠국의 난이 진압된 후 반란의 주역인 초나라의 영토를 분할하여 만들어진 노나라로 옮겨 봉해졌다. 노공왕은 궁실과 원유(苑囿)를 짓고 개와 말을 키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말년에는 음악을 좋아했다. 말더듬이였다.
2.2. 통치와 성향
유여는 궁실과 원유(苑囿)를 짓고 개와 말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말년에는 음악을 좋아했다. 말더듬이였다. 사냥 다니는 것도 좋아했고,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았다가 재상 전숙의 지적으로 배상한 적이 있었다.
2.3. 고문경전 발견
유여는 자기 궁실을 넓히고자 공자의 옛 집을 허물다가 벽 안에서 고문경전을 발견했다.
3. 가계
劉餘중국어는 전한 경제와 정희(程姬)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들로는 노안왕 유광이 있었으며, 그 밑으로 광척절후 유장(廣戚節侯 劉將), 영양절후 유염(領陽節侯 劉恬), 하구절후 유정(瑕丘節侯 劉定), 공구이후 유순(公丘夷侯 劉順), 욱랑후 유교(郁 Lang 侯 劉交), 서창후 유경(西昌侯 劉敬)이 있었다.
광척절후는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10월 정유일에, 영양정후 이하는 원삭 3년(기원전 126년) 3월 을묘일에 봉해졌다.
劉餘중국어의 후손으로는 삼국 시대의 군벌 유표와 유언, 유표의 아들 유기와 유총, 그리고 유언의 아들 유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