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경
1. 개요
유일경은 명나라 말기의 문신으로, 이궁안을 주도하고 위충현과 대립한 인물이다. 1595년 진사가 된 후, 동각대학사를 거쳐 고명대신으로 발탁되었다. 태창제 사후, 황태자를 자경궁으로 옮기는 이궁안을 통해 천계제 즉위에 기여하고 수보대학사가 되었으나, 위충현과 갈등을 겪다 파직되었다. 숭정 연간에 복귀하여 소부, 태자태부 등을 역임했으며, 사후 문단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이름 | 유일경(劉一燝) |
|---|---|
| 본명 | 유일경(劉一燝) |
| 직책 |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
| 국가 | 명(明) |
| 관직 | 특진광록대부주국소부겸태자태부이부상서중극전대학사(特進光祿大夫柱國少傅兼太子太傅吏部尙書中極殿大學士) |
| 출신지 | 강서(江西) 남창부(南昌府) 남창현(南昌縣) |
| 자 | 계회(季晦) |
| 시호 | 문단(文端) (홍광 연간 추숭) |
| 출생일 | 융경(隆慶) 원년(1567) |
| 사망일 | 숭정(崇禎) 8년(1635) |
| 부친 | 유왈재(劉曰材) |
| 형제 | 형 유일곤(劉一焜), 유일욱(劉一煜) |
| 자녀 | 유사기(劉斯埼), 유사위(劉斯㙔), 유사준(劉斯埈), 유사숙(劉斯埱) |
| 과거 | 만력(萬曆) 23년 을미과 동진사 출신(萬曆二十三年乙未科同進士出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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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성 출신 -
장쉰
장쉰은 청나라 말기 및 중화민국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청나라 복벽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은퇴하여 사업가로 활동했다. -
장시성 출신 -
우관정
우관정은 중국 공산당 고위 관료로서, 칭화대학교 졸업 후 우한 시장, 장시성 성장 및 당서기, 산둥성 당서기를 거쳐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 및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반부패 활동을 주도했고, 장쩌민과 후진타오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 균형을 이루었다. -
난창시 출신 -
리친청
리친청은 중국 장시성 난창시 출신의 프로 바둑 기사로, 중신은행배,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 아함·기요야마배 일중결전 등에서 우승했으며 중국 바둑 갑급 리그에서 MVP를 수상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중국 바둑계의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 -
난창시 출신 -
팔대산인
명나라 황족 후손으로 몰락한 왕족의 고뇌와 은둔 생활, 독특한 화풍으로 유명한 팔대산인은 중국 청나라 초기의 예술가로서 화훼, 산수, 새, 물고기 등을 소재로 한 수묵화에서 대담하고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하며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슬픔과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작품을 남겼다. -
명나라의 학자 -
양호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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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학자 -
서광계
서광계는 명나라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로서, 마테오 리치와 교류하며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고 《기하원본》을 번역했으며, 농업, 천문학,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고 《농정전서》를 편찬하여 중국 농학 발전에 기여했다.
2. 생애
명대의 관리이다. 아버지 유왈재(劉曰材)는 가정 연간에 진사가 되어 섬서좌포정사(陝西左布政使)까지 지냈다. 유일경은 만력 16년(1588) 형 유일곤(劉一焜), 동생 유일욱(劉一煜)과 함께 향시에 합격했고, 만력 23년(1595)에는 동생과 함께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서길사(庶吉士)를 거쳐 검토(檢討) 벼슬을 지냈다.
태창제가 즉위하자 예부상서겸동각대학사(禮部尙書兼東閣大學士)로 발탁되어 방종철, 한광과 함께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되었다. 태창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발생한 [[이궁안]](移宮案) 당시, 이선시와 위충현 세력이 어린 황장자(천계제)를 장악하려 하자, 영국공(英國公) 장유현, 주가모, 양련 등과 함께 이를 저지하고 황장자를 자경궁(慈慶宮)으로 옮겨 황제(천계제)로 즉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천계제 즉위 후에는 수보대학사(首輔大學士)가 되어 조정 정치를 이끌었다. 초기에는 국정을 안정시키고 인재를 등용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점차 세력을 키운 환관 위충현 일파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천계 2년(1622), 위충현 세력의 탄핵을 받아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숭정 초, 위충현의 엄당(閹黨) 세력이 숙청되자 다시 대학사로 복귀하였다. 이후 소부(少傅), 태자태부(太子太傅), 이부상서(吏部尙書), 중극전대학사(中極殿大學士) 등의 관직이 더해졌다. 숭정 8년(1635)에 사망하였고, 사후 소사(少師)가 추증되었으며, 남명(南明) 홍광(弘光) 연간에 문단(文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유일경은 관리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 유왈재(劉曰材)는 가정 32년(1553)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섬서좌포정사(陝西左布政使)까지 지낸 인물이다. 만력 16년(1588), 유일경은 형 유일곤(劉一焜), 동생 유일욱(劉一煜)과 함께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만력 23년(1595)에는 동생 유일욱과 함께 을미과(乙未科)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서길사(庶吉士)를 거쳐 검토(檢討) 벼슬에 임명되었다.
2.2. 이궁안과 천계제 즉위
태창제가 즉위하자 예부상서겸동각대학사(禮部尙書兼東閣大學士)로 발탁되어 방종철, 한광과 함께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되었다. 그러나 태창제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태창제가 붕어하자 이선시와 당시 이진충(李進忠)으로 불렸던 위충현 등이 어린 황태자(천계제)를 건청궁으로 데려가 외부와의 접촉을 막고 권력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이에 유일경은 영국공(英國公) 장유현, 주가모, 양련 등 다른 신료들과 함께 즉시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군신들을 이끌고 건청궁으로 가서 황장자를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며, "乾淸不可居, 殿下宜暫居慈慶중국어(건청궁은 거처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전하께서는 잠시 자경궁(慈慶宮)에 머무르셔야 합니다)"이라고 주장하며 황장자를 자경궁으로 옮겨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동시에 이선시를 압박하여 홰란궁(噦鸞宮)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만들었다. 이 사건을 [[이궁안]]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을 통해 황장자 주유교(朱由校)는 무사히 황제(천계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천계제가 즉위한 후, 기존의 수보대학사였던 방종철이 탄핵으로 물러나자 유일경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수보대학사(首輔大學士)로서 조정의 정치를 이끌게 되었다. 유일경은 정사를 처리하고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능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發內帑, 抑近侍, 搜遺逸, 舊德宿齒佈滿九列, 中外欣欣望治焉중국어(나라의 재정(내탕금)을 풀어 백성을 돕고, 황제 측근 세력(근시)의 발호를 억제하며, 숨어있는 인재(유일)를 찾아 등용하고, 덕망 높은 원로 대신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히니, 조정 안팎이 모두 기뻐하며 좋은 정치를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천계제는 나이가 어렸고,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 세력은 교묘한 말과 아첨으로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어진 신하들을 배척하며 점차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유일경은 이러한 위충현 일파의 행태에 분노하여 그들과 격렬하게 대립하며 투쟁을 벌였다. 결국 천계 2년(1622), 위충현은 후진양, 진구주 등을 사주하여 유일경이 환관 왕안과 결탁했다는 구실로 탄핵하게 했다. 유일경은 네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청했다. 당시 대학사였던 섭향고는 유일경이 "보좌한 공(翼衛功)이 있으니 파직할 수 없다(有翼衛功, 不可去중국어)"고 주장했고, 천계제 역시 유일경을 위로하며 자리에 머물도록 했으나, 유일경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堅臥不起중국어)"며 사직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천계 2년 정월, 다시 열두 차례의 상소를 통해 사직을 간청하자 천계제는 마지못해 이를 허락했고, 유일경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2.3. 수보대학사 시절과 위충현과의 갈등
천계제 등극 후 방종철이 탄핵되면서, 이궁안 당시 황장자(주유교) 옹립에 공을 세운 유일경이 수보대학사(首輔大學士)가 되어 조정 정치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정사를 잘 처리하고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으며, "내탕금을 내고 근시들을 억제하고 달아난 백성들을 모으며, 덕망있는 원로 대신들이 고위직에 올랐으니 중외가 기뻐하며 정치를 우러렀다(發內帑, 抑近侍, 搜遺逸, 舊德宿齒佈滿九列, 中外欣欣望治焉)"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황제는 나이가 어려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 세력이 교묘한 말로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현명한 신하들을 배척하며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유일경은 이러한 환관들의 행태에 분노하여 그들과 치열하게 대립했다. 결국 천계(天啓) 2년(1622), 위충현은 후진양(侯震暘), 진구주(陳九疇) 등을 부추겨 유일경이 왕안(王安)과 결탁했다고 탄핵하게 했다. 이에 유일경은 네 차례 상소를 올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파직을 요청했다. 섭향고는 유일경이 황제 즉위에 공이 크다며 파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천계제 역시 그를 위로하며 자리에 머물도록 했으나, 유일경은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다(堅臥不起)". 결국 같은 해 정월, 다시 열두 차례 상소를 올려 파직을 청하자 천계제는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고, 유일경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