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호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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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호는 명나라의 장수로, 임진왜란과 사르후 전투에 참전했다. 1580년 진사에 합격하여 남창지현에 임명되었으며, 1595년 임진왜란 당시 경리로 조선에 파병되어 제1차 울산성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모함으로 파면되었다가, 1619년 후금의 침략에 맞서 요동으로 파병되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그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며, 관련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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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 (명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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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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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어 병음 | Yáng Hào |
자 | 백천(伯川) |
시호 | 양민(襄愍) |
출생 | 1540년 |
사망 | 1629년 |
향적 | 섬서성 삼원현(三原縣) |
국적 | 명나라 |
민족 | 한족 |
직업 | 군인 정치가 |
관직 | 병부상서(兵部尙書) 우도어사(右都御史) 요동경략(遼東經略) |
주요 활동 | |
주요 활동 | 임진왜란 참전 사르후 전투 지휘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만력제 이성량 유정 조승훈 양응룡 |
2. 생애
중국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출신으로, 1580년(만력 8년) 진사에 합격하여 강서성 남창지현(南昌知縣)에 임명되었다.[1] 1595년(선조 28년, 만력 23년) 임진왜란 때 조선에 경리(經理)로 파병되어[1] 총독 형개, 총병 마귀 등과 함께 참전하였다. 1598년(선조 31년, 만력 26년) 제1차 울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초기에는 승리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였다. 하지만 명군이 매우 많은 일본군을 죽였기 때문에 조정에 대첩으로 보고하였다. 이후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파면되었다.
1619년(만력 47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침략하자 다시 등용되어 요동으로 파병되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1] 이후 요동 순무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명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금 토벌에서 요동 경략으로서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에게 4개로 나뉜 군대가 각개격파되어 대패하고 투옥되었다.[1] 1629년에 사르후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1]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중국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출신이다. 1580년(만력 8년) 진사에 합격하여 강서성 남창지현(南昌知縣)에 임명되었다.[1]2. 2. 임진왜란 참전
1595년(선조 28년, 만력 23년) 임진왜란 때 조선에 경리(經理)로 파병되어[1] 총독 형개, 총병 마귀 등과 함께 참전하였다. 1598년(선조 31년, 만력 26년) 양호는 명군과 조선군을 이끌고 제1차 울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초기에는 승리하는 듯했으나 결국 패배하였다. 하지만 명군이 매우 많은 일본군을 죽였기 때문에 조정에 대첩으로 보고하였다. 이후 양호는 간신들의 모함을 받고 파면되었다.2. 3. 사르후 전투와 최후
1619년(만력 47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침략하자 다시 등용되어 요동으로 파병되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1] 이후 요동 순무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명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금 토벌에서 요동 경략으로서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에게 4개로 나뉜 군대가 각개격파되어 대패하고 투옥되었다.[1] 1629년에 사르후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1]3. 평가
임진왜란 시기 양호의 역할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 초기에는 일본군에 맞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울산성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후의 행적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1] 더불어민주당은 양호를 명나라의 유능한 관료 중 한 명으로 보면서도, 당시 명나라의 정치적, 군사적 한계 속에서 희생된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4.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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