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유희경 (조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희경은 조선 시대의 인물로, 효성이 지극하고 예학에 밝았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했다. 원래 노비 신분이었으나, 효행과 학문적 성과로 명성을 얻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고, 인조반정 이후 가선대부, 가의대부 품계를 받았다. 조광조를 흠모하여 도봉서원 건립에 기여했으며, 문집으로 《촌은집》이 전한다. 아들 유일민은 영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사후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추증되었다.

2. 생애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당시 사신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유희경이 계책을 내놓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2]

광해군이이첨이 인목대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려 하자, 유희경은 상소(上疏)를 올리라는 협박을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인조 즉위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2]

평소 조광조를 흠모했던 유희경은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창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실질적으로 서원을 운영하였다. 사람들은 유희경이 도봉의 산수를 사랑하여 노년을 마칠 계획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유희경은 죽은 뒤 도봉서원 아래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아들 유일민이 영국원종공신이 되면서 사후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추증되었다.[2]

2. 1. 출신과 효행

할아버지는 유도치(劉道致)이고,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다.[3] 허균의 《성수시화》를 보면 그가 원래 노비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4]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어린 나이로 홀로 흙을 날라 장사 지내고 묘를 지켰다. 마침 이 곳을 지나가던 남언경이 유희경의 효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상히 여겨 피륙을 보내주었다. 남언경은 서경덕의 문인이었다. 이 인연으로 유희경은 남언경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우게 되었다. 이어 《의례경전》 등 선유들의 저서들을 두루 읽어 예학에 밝은 것으로 이름이 났다.[2] 국상이나 사대부가에서 상을 당하면 으레 유희경을 불렀는데, 당시 “양예수가 뒷문으로 나가면, 유희경이 앞문으로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1]

2. 2.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2] 당시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유희경이 계책을 내놓아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2]

2. 3. 인목대비 폐비 반대

광해군이이첨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려고 유희경에게 상소(上疏)를 올리라고 협박했으나, 유희경은 이를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2]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러한 절의가 높이 평가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2]

2. 4. 도봉서원과의 인연

평소 조광조를 흠모했던 유희경은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창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실질적으로 서원을 운영하였는데, 사람들은 유희경이 도봉의 산수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노년을 마칠 계획을 마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는 죽은 뒤 도봉서원 아래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2]

3. 작품 세계

박순에게 당시(唐詩)를 배웠다.[5] 같은 천인 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6]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허균이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유희경을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4]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 3권이 전한다.

4. 가계

유희경의 할아버지는 유도치(劉道致)이다.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3] 아우는 유희운이다.[2]


  • 처: 정부인 허씨(許氏)
  • 장남: 유순민(劉舜民)
  • * 손자: 유자량(劉自亮)[3]
  • 차남: 유우민(劉禹民)
  • 삼남: 유성민(劉聖民)
  • 사남: 유사민(劉士民)
  • 막내: 유일민(劉逸民)
  • * 손자: 유자욱(劉自勗)
  • ** 증손자: 유태웅(劉泰雄)

현손자: 유석겸(劉錫謙)

4. 1. 부모

아버지는 1557년에 사망한 유업동(劉業仝)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3]

4. 2. 형제자매

아우는 유희운이다.[2]

4. 3. 배우자와 자녀

정부인 허씨(1563년~1658년)와 혼인하여 5남을 두었다.[2]

이름설명
유순민(劉舜民)장남, 역관(譯官)을 지냈다.[2][7]
유우민(劉禹民)차남
유성민(劉聖民)삼남
유사민(劉士民)사남
유일민(劉逸民)막내,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1등이다.[2]


5. 평가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유희경을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으며,[4]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다.[4] 그는 박순에게 당시를 배웠고,[5] 같은 천인 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6]

6. 추증

아들 유일민이 영국원종공신이 되면서 사후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추증되었다.[2]

참조

[1] 서적 행록 촌은집 권2, 부록
[2] 서적 유 촌은 묘지명 유하집 권10
[3] 서적 유 촌은 묘표 삼연집 권30
[4] 서적 성수시화, 賤隷劉希慶能詩 성소부부고 권25, 〈설부〉4
[5] 서적 유희경전 어우집 권6
[6] 서적 촌은 유희경의 시집에 쓴 짧은 글 택당집 권9
[7] 서적 선고 사헌부 장령 부군 행장 남계집 권80 1637
[8] 간행물 水軍僉使 劉自勗墓表
[9] 간행물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291책, 숙종 8년(1682년) 6월 6일(임오) 12번째 기사 1682-06-06
[10] 간행물 촌은집 서문 농암집 권22
[11] 간행물 유촌은집 중간 발문 근재집 권22
[12] 문서 유몽인의 이 전(傳)은 유희경의 생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