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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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희경은 조선 시대의 인물로, 효성이 지극하고 예학에 밝았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했다. 원래 노비 신분이었으나, 효행과 학문적 성과로 명성을 얻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고, 인조반정 이후 가선대부, 가의대부 품계를 받았다. 조광조를 흠모하여 도봉서원 건립에 기여했으며, 문집으로 《촌은집》이 전한다. 아들 유일민은 영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사후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당시 사신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유희경이 계책을 내놓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2]
박순에게 당시(唐詩)를 배웠다.[5] 같은 천인 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6]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허균이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유희경을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4]
유희경의 할아버지는 유도치(劉道致)이다.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3] 아우는 유희운이다.[2]
2. 생애
광해군 때 이이첨이 인목대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려 하자, 유희경은 상소(上疏)를 올리라는 협박을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인조 즉위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2]
평소 조광조를 흠모했던 유희경은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창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실질적으로 서원을 운영하였다. 사람들은 유희경이 도봉의 산수를 사랑하여 노년을 마칠 계획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유희경은 죽은 뒤 도봉서원 아래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아들 유일민이 영국원종공신이 되면서 사후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추증되었다.[2]
2. 1. 출신과 효행
할아버지는 유도치(劉道致)이고,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다.[3] 허균의 《성수시화》를 보면 그가 원래 노비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4]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어린 나이로 홀로 흙을 날라 장사 지내고 묘를 지켰다. 마침 이 곳을 지나가던 남언경이 유희경의 효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상히 여겨 피륙을 보내주었다. 남언경은 서경덕의 문인이었다. 이 인연으로 유희경은 남언경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우게 되었다. 이어 《의례경전》 등 선유들의 저서들을 두루 읽어 예학에 밝은 것으로 이름이 났다.[2] 국상이나 사대부가에서 상을 당하면 으레 유희경을 불렀는데, 당시 “양예수가 뒷문으로 나가면, 유희경이 앞문으로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1]
2. 2.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2] 당시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유희경이 계책을 내놓아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2]
2. 3. 인목대비 폐비 반대
광해군 때 이이첨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려고 유희경에게 상소(上疏)를 올리라고 협박했으나, 유희경은 이를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2]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러한 절의가 높이 평가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2]
2. 4. 도봉서원과의 인연
평소 조광조를 흠모했던 유희경은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창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실질적으로 서원을 운영하였는데, 사람들은 유희경이 도봉의 산수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노년을 마칠 계획을 마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는 죽은 뒤 도봉서원 아래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2]
3. 작품 세계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 3권이 전한다.
4. 가계
현손자: 유석겸(劉錫謙)
4. 1. 부모
아버지는 1557년에 사망한 유업동(劉業仝)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3]
4. 2. 형제자매
아우는 유희운이다.[2]
4. 3. 배우자와 자녀
정부인 허씨(1563년~1658년)와 혼인하여 5남을 두었다.[2]
5. 평가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유희경을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으며,[4]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다.[4] 그는 박순에게 당시를 배웠고,[5] 같은 천인 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6]
6. 추증
아들 유일민이 영국원종공신이 되면서 사후 자헌대부 한성판윤에 추증되었다.[2]
참조
[1]
서적
행록
촌은집 권2, 부록
[2]
서적
유 촌은 묘지명
유하집 권10
[3]
서적
유 촌은 묘표
삼연집 권30
[4]
서적
성수시화, 賤隷劉希慶能詩
성소부부고 권25, 〈설부〉4
[5]
서적
유희경전
어우집 권6
[6]
서적
촌은 유희경의 시집에 쓴 짧은 글
택당집 권9
[7]
서적
선고 사헌부 장령 부군 행장
남계집 권80
1637
[8]
간행물
水軍僉使 劉自勗墓表
[9]
간행물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291책, 숙종 8년(1682년) 6월 6일(임오) 12번째 기사
1682-06-06
[10]
간행물
촌은집 서문
농암집 권22
[11]
간행물
유촌은집 중간 발문
근재집 권22
[12]
문서
유몽인의 이 전(傳)은 유희경의 생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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