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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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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광조는 1482년 한양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굉필의 제자이자 사림파의 영수였다. 그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며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 했으며, 중종의 신임을 받아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그는 소격서 폐지, 현량과 실시, 향약 보급 등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능주로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그는 사후 동방사현으로 추앙받았지만, 개혁의 급진성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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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750년의 조광조 초상
이름조광조
한자 이름趙光祖
로마자 표기Jo Gwang-jo
효직(孝直)
정암(靜庵)
시호문정(文正)
씨족한양 조씨
생애
출생1482년 8월 23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1519년 음력 12월 20일 (향년 37세)
사망지조선 전라도 능성현(현재의 전라남도 화순군)
정치 활동
임기 시작1518년 3월
임기 종료1519년 1월
군주조선 중종
정당사림파
주요 직책사헌부 대사헌
학력 및 사상
학력1515년 알성문과 급제
분야성리학
가족 관계
배우자한산 이씨 부인
조원강
여흥 민씨 부인
자녀조정(장남), 조용(차남)
형제조영조(형), 조숭조(아우)
기타
관련 인물동방 18현
문묘 배향문묘에 배향됨

2. 생애

1482년(성종 13년), 한양(현재의 서울)에서 하급 관료였던 조원강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개국 공신 조온의 5대손이다. 16세 때인 1498년경, 아버지의 임지인 평안도 어천에서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되었던 김굉필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김굉필에게서 도학주의에 입각한 엄격한 실천 교육을 받았다.

1510년(중종 5년) 과거의 사마시(진사시)에 응시하여 장원(수석)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서 깊은 학식과 청렴결백한 인품으로 명성을 얻었고, 많은 유생과 이조 판서 안당(1460년 - 1512년)의 추천으로 조지서 사지에 임명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515년(중종 10년) 증광시(알성별시) 문과에 합격했다. 이후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까지 역임했다.

중종의 신임을 받아 1515년부터 1519년까지 4년 동안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제언하고 실행했다. 1517년(중종 12년), 반정 공신파였던 훈구 세력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1518년(중종 13년), 사헌부 대사헌과 왕세자의 보양관을 겸임하며 개혁 정치를 실천했다. 주자의 주자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그는, 왕에서부터 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해지고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이상적인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519년(중종 14년) 가을, 훈구 세력에 대해 "위훈 삭제" 문제를 제기했다. 남곤, 심정 등 훈구파의 모함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투옥되어 전라남도 능주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향년 38세).[37]

1544년에 특사로 복권되었으며, 1568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69년에는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조광조의 관직 생활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임명/이동 날짜관직
1515년 8월 22일조지서 사지(종6품)
1515년 8월 29일성균관 전적(정6품)
1515년 11월 20일사간원 정언(정6품)
1515년 (월일 미상)사헌부 감찰(정6품), 호조 좌랑(정6품), 예조 좌랑(정6품), 공조 좌랑(정6품)
1516년 3월 28일홍문관 수찬(정6품)
1516년 5월 22일경연청 검토관(정6품) 겸임
1517년 4월 4일경연청 시강관(정4품)
1517년 (월일 미상)춘추관 기주관(5품)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7년 4월 27일홍문관 교리(정5품)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7년 8월 22일홍문관 전한(종3품)
1517년 윤 12월 26일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
1518년 1월 23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1518년 6월 19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8년 12월 18일사헌부 대사헌(종2품)
1518년 (월일 미상)세자시강원 부빈객(종2품) 겸임
1519년 1월 23일성균관 지사(종2품)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4월 22일겸 동지성균관사 겸임
1519년 4월 29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5월 11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7월 21일동지사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10월 15일체포 투옥
1519년 12월 20일사사
1544년특사로 복권
1568년영의정(정1품) 추증
1569년문정공 시호 추증


2. 1. 생애 초기

1482년(성종 13년) 조선 한성부(현재의 서울)에서 하급 관료였던 조원강(趙元綱)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개국의 공신 조온의 5대손이다.

16세 때(1498년경), 아버지의 임지 평안도 어천에 동행하여,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되었던 김굉필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도학주의에 입각한 엄격한 실천 교육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그 재능은 조정에까지 알려졌지만, 굳이 과거 시험을 치르기보다는 청년 시절에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학문에 힘썼다. 스승 김굉필 역시 그의 군자다운 행동과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김굉필1504년 갑자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자,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1510년(중종 5년) 스물아홉 살에 처음으로 과거의 사마시(진사시)에 응시하여 장원(수석)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이 허락되었다. 성균관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광조의 깊은 학식과 청렴결백한 인품은 명성을 얻었고, 이윽고 많은 유생과 이조 판서 (안당 : 1460년 - 1512년)의 천거에 따라 조지서의 사지에 임명되어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515년(중종 10년), 서른네 살에 종6품의 관직에 임용되었지만, 특별 대우를 싫어하여 증광시(알성별시)의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조선 정치는 보수적인 훈구 세력과 김종직 등 사림 학자들의 성리학을 따르는 사림 세력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특징지어졌다. 중종은 훈구 세력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학자들을 조정에 들이기 시작했다.

조광조는 훈구 세력에 속한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사림 세력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에 유배된 사림 학자 김굉필에게 성리학을 배운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이자 "재앙의 근원"으로 불렸다.

2. 1. 1. 출생과 유년기

1482년 한성에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으로, 고조부 조온조선의 개국공신이기도 했다.[31] 그의 가계는 조선의 개국공신의 가문인 훈구 가문이었으나 김굉필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조원강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고서적과 옛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면서 학문의 뜻은 출세에 있는 것은 아니라며 과거보기 위한 글은 하지 않았는데, 부형(父兄)과 친척들로부터 세속과 어긋나게 행동하여 남의 비방을 산다고 꾸짖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욕은 꺾을 수 없었다. 희천의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 조원강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당시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어린 소년이었으나 영특한 재능을 알아본 김굉필은 그에게 말을 걸었고, 이 인연으로 그는 김굉필과 사제지간이 된다.

14세 때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8세 때 아버지가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자 따라가 마침 평안도 희천에 귀양 가 있는 김굉필을 처음 만났다는 설도 있다.[31] 학문은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을 받들어 이를 토대로 하여 경전(經傳) 연구에 응용했으며,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옛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스승 김굉필의 필적 (1499년)


그는 김종직을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김굉필로부터 그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의 한사람이 된다. 그러나 김종직의 제자이자 스승 김굉필의 친구들 중에는 남곤도 있었는데, 남곤은 후에 그를 공격하는 편에 서게 된다. 또한 예의를 갖추어 사람을 대하되 의롭지 못한 자, 불의와 쉽게 타협하는 자들을 멀리하였고, 항상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려고 스스로 노력하였다.

이후 김굉필의 배소가 옮겨지게 되면서 그와 이별, 김굉필1504년 갑자사화로 사사된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이를 실현하려 노력했다. 무오사화갑자사화가 연이어 터진 직후라 김굉필의 제자이고 김종직의 말씀과 성리학에 빠진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기피하였으며,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며 조롱하거나 '화태'(禍胎, 화를 잉태한 이[32])라며 조롱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비난과 비아냥, 조롱에 굴하지 않고 성리학과 사물 연구에 정진하였다. 성리학에 몰두하게 되면서 친구들과도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 행동을 절제하고 인내하려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2. 1. 2. 성리학 수학

1482년 한성에서 태어난 조광조는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조온의 4대손으로, 조선 개국공신 가문 출신이었다.[31] 그러나 김굉필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변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은 조광조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주변의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희천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김굉필을 만나 가르침을 받게 된다.[31]

14세 때부터 김굉필 문하에서 《소학》, 《근사록》 등을 공부하며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31] 김종직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김굉필을 통해 그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곤과 같이 훗날 그를 공격하는 편에 선 인물도 있었지만, 조광조는 예의를 갖추고 의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갑자사화김굉필이 사사된 후에도 조광조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현하려 노력했다. 무오사화갑자사화 이후 김굉필의 제자이자 성리학에 심취한 그를 보고 사람들은 '광인', '화태'(禍胎, 화를 잉태한 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32] 그러나 조광조는 비난과 조롱에 굴하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정진,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2. 2. 청년기

1482년(성종 13년) 한양(현재의 서울)에서 하급 관료였던 조원강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개국 공신 조온의 5대손이다. 16세 때인 1498년경, 아버지의 임지인 평안도 어천에 동행했다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되었던 김굉필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김굉필에게서 도학주의에 입각한 엄격한 실천 교육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조정에까지 알려졌지만, 과거 시험보다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학문에 힘썼다. 스승 김굉필 역시 그의 군자다운 행동과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1510년(중종 5년) 스물아홉 살에 처음으로 과거의 사마시(진사시)에 응시하여 장원(수석)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 입학 후, 깊은 학식과 청렴결백한 인품으로 명성을 얻었고, 많은 유생과 이조 판서 안당(1460년 - 1512년)의 추천으로 조지서 사지에 임명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515년(중종 10년), 서른네 살에 종6품 관직에 임용되었지만, 특별 대우를 싫어하여 증광시(알성별시) 문과에 합격했다.

2. 2. 1. 청소년기

공자, 주자와 포은 정몽주를 인생의 모델로 생각했다. 또한 그들을 세상의 사표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조광조는 사소한 예의라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꾸준히 노력했고, 총명하였으며, 짧은 만남 후 스승 김굉필과 이별한 뒤에도 스승의 가르침을 늘 잊지 않고 가슴속에 새겼다.[33]

모르는 점이 있으면 답을 얻을 때까지 연구·독고,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가서 묻거나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 조광조는 남곤을 포함한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다녔다.[33] 청년기의 남곤은 같은 김종직 학파 사람으로서 조광조와 친분이 있었다. 한번은 산책을 하던 길에 조광조는 지나가던 여인의 모습을 보고 계속 뒤돌아봤고, 남곤은 옆으로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앞서갔다. 조광조는 여인들을 훔쳐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며, 어머니 여흥 민씨에게 이를 자책하였다. 그러자 여흥 민씨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답게 살아야 된다.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젊은 장부의 마음이 어찌 잠잠하겠느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사람이다. 네가 처녀들에게 한 눈 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반드시 있다. 남곤은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처녀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인가?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흘리게 하거나 외면할 것이다. 내가 너를 어찌 그런 사람과 사귀게 하겠는가?중국어

이후 조광조의 어머니 민씨는 아들에게 남곤을 멀리하라고 충고했고, 아들이 남곤과 자주 만나지 못하도록 집도 이사하였다 한다.

1482년(성종 13년), 하급 관료였던 조원강의 아들로, 한양(현재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선 개국의 공신 조온의 5대손에 해당한다.

16세 때(1498년경), 아버지의 임지 평안도 어천에 동행하여,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되었던 김굉필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도학주의에 입각한 엄격한 실천 교육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그 재능은 조정에까지 알려졌지만, 굳이 과거 시험을 치르기보다는 청년 시절에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학문에 힘썼다. 스승 김굉필 역시 그의 군자다운 행동과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2. 2. 2. 남곤과의 인연

조광조는 과거 급제 전 남곤을 포함한 여러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다녔다.[33] 당시 남곤김종직 학파의 일원으로서 조광조와 친분이 있었다. 어느 날, 조광조는 산책길에 마주친 여인을 훔쳐보고 자신의 수양 부족을 한탄했다. 반면 남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를 본 조광조의 어머니 여흥 민씨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살아야 한다. (중략) 네가 처녀에게 한눈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남곤은 마치 나무나 돌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중략)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남곤은 아량이 부족하여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하거나 외면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런 사람과 어울리지 말거라."

이후 여흥 민씨는 아들에게 남곤과 거리를 둘 것을 당부하며, 자주 만나지 못하도록 집을 이사하기까지 했다.

2. 2. 3. 성균관 수학시절

조광조는 1510년(중종 5)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34]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균관에서 경서를 강독할 때 《중용》을 강의하여 이름이 알려졌다.[35] 유숭조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중, 1511년 성균관 사경(司經) 황여헌(黃汝獻)의 천거를 받았다. 이후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관직에 천거하게 되자, 동료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다.[35] 동료들과 유숭조 등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으나, 반대 여론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성균관 유학 시절 조광조는 공자, 주자정몽주를 인생의 모델로 삼았으며, 그들을 세상의 사표로 여겼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답을 얻을 때까지 연구하고, 저명한 학자나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가 묻기도 했다. 과거 급제 전 조광조는 선배 사림들을 찾아다녔는데, 그 중에는 남곤도 있었다.[33]

한번은 조광조가 산책길에 지나가던 여인을 훔쳐본 것을 두고 자신의 수양 부족을 자책하자, 조광조의 어머니 여흥 민씨는 남곤을 멀리하라고 충고하며 집을 이사하기도 했다.

2. 2. 4. 과거 급제

1510년(중종 5년) 스물아홉 살에 처음으로 과거의 사마시(진사시)에 응시하여 장원(수석)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이 허락되었다.[1] 성균관 입학 후, 조광조의 깊은 학식과 청렴결백한 인품은 명성을 얻었고, 많은 유생과 이조 판서 안당(1460년 - 1512년)의 추천으로 조지서 사지에 임명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1]

1515년(중종 10년), 서른네 살에 종6품 관직에 임용되었지만, 특별 대우를 싫어하여 증광시(알성별시) 문과에 합격했다.[1] 이후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 대사헌까지 역임했다.[1]

연도날짜관직
1515년8월 22일조지서 사지(종6품)
1515년8월 29일성균관 전적(정6품)
1515년11월 20일사간원 정언(정6품)
1515년월일 미상사헌부 감찰(정6품)
1515년월일 미상호조 좌랑(정6품)
1515년월일 미상예조 좌랑(정6품)
1515년월일 미상공조 좌랑(정6품)
1516년3월 28일홍문관 수찬(정6품)
1516년5월 22일경연청 검토관(정6품) 겸임
1517년4월 4일경연청 시강관(정4품)
1517년4월 27일홍문관 교리(정5품) 겸대 (불확실)
1517년8월 22일홍문관 전한(종3품)
1517년윤 12월 26일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
1518년1월 23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1518년6월 19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겸대 (불확실)
1518년12월 18일사헌부 대사헌(종2품)
1518년월일 미상세자시강원 부빈객(종2품) 겸대
1519년1월 23일성균관 지사(종2품) 겸대 (불확실)
1519년4월 22일겸 동지성균관사 겸대
1519년4월 29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겸대 (불확실)
1519년5월 11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겸대 (불확실)
1519년7월 21일동지사 겸대 (불확실)


2. 3. 관료 생활과 개혁 정치

중종은 훈구파에 의해 장악된 조정에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였고, 조광조는 후보자들의 도덕성과 학식을 바탕으로 하는 천거를 통한 새로운 인재 등용 제도인 현량과를 도입하여 이에 부응했다. 그는 기존의 문과 시험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문학적 소양에 치우쳐 정부의 실질적인 필요와 동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현량과는 지방 수령들이 추천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왕 앞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를 선발하는 간략한 시험이었다. 이 제도를 통해 조광조는 지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많은 재능 있는 사림 학자들을 등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조광조가 핵심 요직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치하여 파벌을 형성한다는 훈구파의 공격에 노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광조와 그의 지지자들은 향약이라는 지방 자치 제도를 확립하여 지방 자치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 제도에서는 사회적 지위보다 마을 사람들의 연장자를 존중했다. 또한 사림파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고,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와 노비의 수를 제한하는 토지 개혁을 통해 빈부 격차를 줄이려 했다. 이 조치는 훈구파의 토지 및 재산 축적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2]

주자의 주자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그는, 왕에서부터 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해지고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신화 속 중국의 요와 순 임금의 이상적인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림파는 유교 경전을 한국어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배포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유교 서적을 널리 알렸다. 또한 그들은 왕실 도교 사원을 파괴하고 불교 사찰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미신적인 종교로 간주하여 불교와 도교를 탄압했다.

사간원으로서 그는 부패와 뇌물 수수 혐의로 많은 관료들을 탄핵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그러한 엄격한 시행으로 인해 어떤 관료도 뇌물을 받거나 백성을 착취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3] 그는 또한 관료의 수를 줄이고 급여를 삭감하여 정부 규모를 축소하려 했다.

조광조는 또한 노비 등 모든 재능 있는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관료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을 도덕성으로 판단하고, 품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상급 관료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하인에게도 정중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그는 이름조차 없는 최하층 계급의 백정과 우정을 쌓았고, 그의 학문을 매우 칭찬하여 그와 국사를 논하며 그를 조정 관료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백정은 조광조의 제안을 거듭 거절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의 스승을 존경했던 중종의 후계자인 인종은 그의 각별한 존경을 받았던 조광조의 뜻을 기려 그의 미래 내각의 영의정 후보로 그 "백정"을 언급했다고 한다. 유명한 한국 철학자 이이에 따르면, 조광조는 백성들에게 매우 존경받아 그가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 "우리 선생님이 오신다"라고 외쳤다고 한다.[4]

조광조가 가장 중시한 것은 스승 김굉필에게 배운 『소학』과 그 실천으로, 성리학이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비로소 민중의 학문이 되고 생활의 규범이 된다고 주장했다.

「여씨향약」을 본보기로 하여, 지방 자치 조직의 행동 원리로서의 「향약」을 지방에 보급하는 데 힘썼다.

궁정 내의 구습이나 미신 등 전통적인 가치관도 용서 없이 비판하며, 「소격서 폐지」(1518년)를 시작으로 개혁에 착수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재 등용 시스템으로 「현량과」를 실시(1519년)했다.

「왕도 정치」를 제창하며, 왕 자신이 성군으로 나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독려했다.

중종반정」의 공신이 너무 많은 것을 비판하고, 훈구파의 성역에 과감히 뛰어들어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아래는 조광조의 관직 생활을 정리한 표이다.

임명/이동 날짜관직
1515년 8월 22일조지서 사지(종6품 상당)
1515년 8월 29일성균관 전적(정6품 상당)
1515년 11월 20일사간원 정언(정6품 상당)
1515년 (월일 미상)사헌부 감찰(정6품 상당), 호조 좌랑(정6품 상당), 예조 좌랑(정6품 상당), 공조 좌랑(정6품 상당)
1516년 3월 28일홍문관 수찬(정6품 상당)
1516년 5월 22일경연청 검토관(정6품 상당) 겸임
1517년 4월 4일경연청 시강관(정4품 상당)
1517년 (월일 미상)춘추관 기주관(5품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7년 4월 27일홍문관 교리(정5품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7년 8월 22일홍문관 전한(종3품 상당)
1517년 윤 12월 26일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 상당)
1518년 1월 23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상당)
1518년 6월 19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8년 12월 18일사헌부 대사헌(종2품 상당)
1518년 (월일 미상)세자시강원 부빈객(종2품 상당) 겸임
1519년 1월 23일성균관 지사(종2품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4월 22일겸 동지성균관사 겸임
1519년 4월 29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5월 11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7월 21일동지사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10월 15일체포 투옥
1519년 12월 20일사사
1544년특사로 복권
1568년영의정(영의정 정1품 상당) 추증
1569년문정공(문정공) 시호 추증


2. 3. 1. 관료 생활 초기

1515년 8월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 감찰을 거쳐 1515년(중종 10년)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파격적인 상소를 올려 화제가 되었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마자 다음날 정국을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37]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거나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했다. 자신의 주장을 편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되었고, 또 그들을 벌하라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종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37]

이 논란은 3개월이나 계속되어 1516년 2월까지 양사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정암은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라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그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37]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그는 다시 단경왕후의 복권을 주장하였다. 이때 김정, 박상 등이 단경왕후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사간원 대사간 이행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자, 그는 상소를 올린 사람을 벌주는 것은 언로를 탄압하는 것으로, 국가 존망의 위협이 된다 하여 이행을 파직시켰다.

1516년(중종 11) 3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바로 수찬이 되었으며, 그해 5월 검토관(檢討官)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그해 11월 이조예조의 천거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이 되었다. 11월 29일 홍문관에서 계심잠을 지어 올리자 왕명으로 좌찬성 김전·판서 남곤을 감독관으로 하여 특별 고과를 주관하자, 고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털요(毛褥) 1채를 상으로 받았다.

1517년(중종 12) 2월 홍문관 부교리, 경연 시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正言), 호조, 예조, 공조의 좌랑, 호조정랑, 예조정랑을 거쳤다. 이후 홍문관 수찬,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그 뒤 다시 사간원 정언·홍문관의 교리(敎理)·응교(應敎) 등을 거쳐 그해 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할 때 지방 향촌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여씨향약을 조선 8도에 실시할 것을 상소하여 중종이 윤허, 전국에 향약이 실시되었다.

2. 3. 2. 관료 활동

1515년 8월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 감찰을 거쳐 1515년(중종 10년)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파격적인 상소를 올려 주목받았다.[37]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마자,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거나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하며 정국을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37]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되었고, 그들을 벌하라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종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37]

이 논란은 3개월이나 계속되어 1516년 2월까지 양사에서 격렬한 공방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정암은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라 존경을 받았으며,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37]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그는 단경왕후의 복권을 주장하였다. 이때 김정, 박상 등이 단경왕후 복위 상소를 올렸다가 사간원 대사간 이행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자, 조광조는 상소를 올린 사람을 벌주는 것은 언로를 탄압하는 것이며 국가 존망의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며 이행을 파직시켰다.

1516년(중종 11) 3월 홍문관 수찬이 되었고, 그해 5월 검토관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그해 11월 이조예조의 천거로 천문이습관이 되었다. 11월 29일 홍문관에서 계심잠을 지어 올리자 왕명으로 좌찬성 김전·판서 남곤을 감독관으로 하여 특별 고과를 주관하였고, 조광조는 고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털요 1채를 상으로 받았다. 이후 5년 만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에 오르는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37]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 이후 개혁을 꿈꾸던 중종의 특별한 총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37]

1517년(중종 12) 2월 홍문관 부교리, 경연 시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 호조, 예조, 공조의 좌랑, 호조정랑,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그 뒤 다시 사간원 정언·홍문관의 교리·응교 등을 거쳐 그해 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할 때 지방 향촌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여씨향약을 조선 8도에 실시할 것을 상소하여 중종이 윤허, 전국에 향약이 시행되었다. 1517년 8월 전한이 되었다. 양사와 홍문관 등에서 언관으로 활동했다.

삼사의 언관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황해도 관찰사 윤세호는 그에게 아부하여 대사헌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그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해 12월 직제학이 되었는데, 과거 급제 후 30개월도 안 돼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은 의견과 인물의 옳고 그름을 철저히 가리는 태도로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이로 인해 공경 이하 모두가 그를 존경하기도 했지만, 미워하거나 원수처럼 피하는 자도 나타났다.

1518년 1월 시강관을 거쳐 홍문관부제학, 경연 참찬관이 되었다. 그 뒤 월과를 지어 바치지 않아 추고받았다. 그해 5월 승정원 부승지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후 승지를 거쳐 부제학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성리학적 이념에 어긋나는 소격서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소격서 폐지를 주장하였다.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소격서 폐지를 관철시키고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 함으로써,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소격서는 해와 달과 별을 나타내는 상청, 태청, 옥청에 제사 지내는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1518년 음력 1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다섯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수락하지 않았다. 대사헌이 되고 세자부빈객을 겸임했는데, 당시 어진 선비들이 모두 요직에 등용되어 협력하여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니, 과거 성종 때의 법이 차츰 실행되기 시작했다.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게 되자 성균관으로부터 성균관 동지사직에서 해임하지 말 것을 청하기도 했다.

조광조 초상화


중종은 훈구파에 의해 장악된 조정에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였고, 조광조는 후보자들의 도덕성과 학식을 바탕으로 하는 천거를 통한 새로운 인재 등용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이에 부응했다. 그는 기존의 문과 시험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문학적 소양에 치우쳐 정부의 실질적인 필요와 동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조광조가 도입한 보충 시험은 '현량과'라고 불렸다. 이는 지방 수령들이 추천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왕 앞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를 선발하는 간략한 시험이었다. 이 제도를 통해 조광조는 지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많은 재능 있는 사림 학자들을 등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조광조가 핵심 요직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치하여 파벌을 형성한다는 훈구파의 공격에 노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광조와 그의 지지자들은 향약이라는 지방 자치 제도를 확립하여 지방 자치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 제도에서는 사회적 지위보다 마을 사람들의 연장자를 존중했다. 또한 사림파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고,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와 노비의 수를 제한하는 토지 개혁을 통해 빈부 격차를 줄이려 했다. 이 조치는 훈구파의 토지 및 재산 축적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2]

주자의 주자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그는, 왕에서부터 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해지고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신화 속 중국의 요와 순 임금의 이상적인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림파는 유교 경전을 한국어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배포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유교 서적을 널리 알렸다. 또한 그들은 왕실 도교 사원을 파괴하고 불교 사찰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미신적인 종교로 간주하여 불교와 도교를 탄압했다.

사간원으로서 그는 부패와 뇌물 수수 혐의로 많은 관료들을 탄핵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그러한 엄격한 시행으로 인해 어떤 관료도 뇌물을 받거나 백성을 착취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3] 그는 또한 관료의 수를 줄이고 급여를 삭감하여 정부 규모를 축소하려 했다.

조광조는 또한 노비 등 모든 재능 있는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관료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을 도덕성으로 판단하고, 품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상급 관료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하인에게도 정중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그는 이름조차 없는 최하층 계급의 백정(屠夫/백정)과 우정을 쌓았고, 그의 학문을 매우 칭찬하여 그와 국사를 논하며 그를 조정 관료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백정은 조광조의 제안을 거듭 거절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의 스승을 존경했던 중종의 후계자인 인종은 그의 각별한 존경을 받았던 조광조의 뜻을 기려 그의 미래 내각의 영의정 후보로 그 "백정"을 언급했다고 한다.) 유명한 한국 철학자 이이에 따르면, 조광조는 백성들에게 매우 존경받아 그가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 "우리 선생님이 오신다"라고 외쳤다고 한다.[4]

조광조의 관료 활동 기간과 관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기간관직
1515년 8월 22일조지서 사지(종6품)
1515년 8월 29일성균관 전적(정6품)
1515년 11월 20일사간원 정언(정6품)
1515년 (월일 미상)사헌부 감찰(정6품), 호조 좌랑(정6품), 예조 좌랑(정6품), 공조 좌랑(정6품)
1516년 3월 28일홍문관 수찬(정6품)
1516년 5월 22일경연청 검토관(정6품) 겸임
1517년 4월 4일경연청 시강관(정4품)
1517년 (월일 미상)춘추관 기주관(5품), 홍문관 교리(정5품) 겸임
1517년 8월 22일홍문관 전한(종3품)
1517년 윤 12월 26일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
1518년 1월 23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1518년 6월 19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겸임
1518년 12월 18일사헌부 대사헌(종2품)
1518년 (월일 미상)세자시강원 부빈객(종2품) 겸임
1519년 1월 23일성균관 지사(종2품) 겸임
1519년 4월 22일겸 동지성균관사 겸임
1519년 4월 29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겸임
1519년 5월 11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겸임
1519년 7월 21일동지사 겸임
1519년 10월 15일체포 투옥
1519년 12월 20일사사


2. 3. 3. 정치 활동

1515년 8월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 감찰을 거쳐 1515년(중종 10년)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파격적인 상소를 올려 화제가 되었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마자 다음날, 그는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거나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37]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되었고, 또 그들을 벌하라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중종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37]

이 논란은 3개월이나 계속되어 1516년 2월까지 양사에서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후 조광조는 젊은 나이에 사림의 영수로 떠올라 존경을 받았으며, 그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37]

사간원 정언 재직 중 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그는 다시 단경왕후의 복권을 주장하였다. 이때 김정, 박상 등이 단경왕후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사간원 대사간 이행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자, 조광조는 상소를 올린 사람을 벌주는 것은 언로를 탄압하는 것으로, 국가 존망의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며 이행을 파직시켰다.

1516년(중종 11) 3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바로 수찬이 되었으며, 그해 5월 검토관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그해 11월 이조예조의 천거로 천문이습관이 되었다. 11월 29일 홍문관에서 계심잠을 지어 올리자 왕명으로 좌찬성 김전·판서 남곤을 감독관으로 하여 특별 고과를 주관하였고, 조광조는 고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털요 1채를 상으로 받았다. 이후 5년 만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에 오르는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37]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 개혁을 꿈꾸던 중종의 특별한 총애가 있어 가능했다.[37]

1517년(중종 12) 2월 홍문관 부교리, 경연 시독관이 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 호조, 예조, 공조의 좌랑, 호조정랑,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그 뒤 다시 사간원 정언, 홍문관의 교리·응교 등을 거쳐 그해 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할 때 지방 향촌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여씨향약을 조선 8도에 실시할 것을 상소하여 중종이 윤허, 전국에 향약이 실시되었다. 1517년 8월 전한이 되었다. 양사와 홍문관 등에서 언관으로 활동했다.

삼사의 언관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황해도 관찰사 윤세호는 그에게 아부하여 대사헌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이후 조정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해 12월 직제학이 되었는데, 과거 급제 후 30개월도 안 돼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하였다. 그러나 의견이 곧고 인물의 옳고 그름을 철저히 가려,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변화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공경 이하가 모두 그를 존경하기도 했고, 혹은 그를 미워하거나, 삼가 피하기를 원수처럼 하는 자도 나타났다.

1518년 1월 시강관을 거쳐 홍문관부제학, 경연 참찬관이 되었다. 그 뒤 월과를 지어 바치지 않아 추고받았다. 그해 5월 승정원 부승지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이후 승지를 거쳐 부제학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성리학적 이념에 어긋나는 소격서를 미신으로 규정,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소격서 폐지를 관철시키고 유학자 정치를 구현하려 함으로써,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소격서는 해와 달과 별을 나타내는 상청, 태청, 옥청에 제사 지내는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1518년 음력 1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다섯 번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수락하지 않았다. 대사헌이 되고 세자부빈객을 겸임했는데, 당시 어진 선비들이 모두 뽑혀 요직에 앉은 때라 모두 협력하여 오래된 폐단을 개혁하니 과거 성종 때의 법이 차츰 실행되기 시작했다. 성균관 동지사를 겸임하게 되자 성균관으로부터 성균관 동지사직에서 해임하지 말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의 방안을 놓고 조광조는 남곤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조광조가 '문학은 선비의 일이 못 되며, 경전 공부에 전념토록 하자'고 하면, 남곤은 '참된 선비라면 학술과 문예에 모두 능해야 한다'고 했고, 김숙자가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활쏘기를 가르쳤던 점도 지적했다.

인물 천거제를 놓고도 논란이 벌어지자 남곤은 양자를 절충, 과거 제도도 존속시키되 과거제를 보완해 천거로도 일부 관리를 뽑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과거제를 천거제로 대체해나가야 된다고 했다.[42] 남곤의 미온함을 두고 조광조 일파에서 “남곤은 소인이다”라는 비판이 점점 커져 갔다. 조광조 일파의 공격은 그에 대한 남곤의 감정을 악화시킨다.

훈구파들의 비난이 계속된 가운데, 안당정광필도 그가 너무 과격하다고 지적하였으나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은 이를 듣지 않았다.

중종은 훈구파에 의해 장악된 조정에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였고, 조광조는 후보자들의 도덕성과 학식을 바탕으로 하는 천거를 통한 새로운 인재 등용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이에 부응했다. 그는 기존의 문과 시험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문학적 소양에 치우쳐 정부의 실질적인 필요와 동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조광조가 도입한 보충 시험은 '현량과'라고 불렸다. 이는 지방 수령들이 추천한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왕 앞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를 선발하는 간략한 시험이었다. 이 제도를 통해 조광조는 지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많은 재능 있는 사림 학자들을 등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조광조가 핵심 요직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치하여 파벌을 형성한다는 훈구파의 공격에 노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광조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후 향약이라는 지방 자치 제도를 확립하여 지방 자치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 제도에서는 사회적 지위보다 마을 사람들의 연장자를 존중했다. 또한 사림파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고,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와 노비의 수를 제한하는 토지 개혁을 통해 빈부 격차를 줄이려 했다. 이 조치는 훈구파의 토지 및 재산 축적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2]

주자의 주자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그는, 왕에서부터 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해지고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신화 속 중국의 요와 순 임금의 이상적인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림파는 유교 경전을 한국어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배포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유교 서적을 널리 알렸다. 또한 그들은 왕실 도교 사원을 파괴하고 불교 사찰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미신적인 종교로 간주하여 불교와 도교를 탄압했다.

사간원으로서 그는 부패와 뇌물 수수 혐의로 많은 관료들을 탄핵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그러한 엄격한 시행으로 인해 어떤 관료도 뇌물을 받거나 백성을 착취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3] 그는 또한 관료의 수를 줄이고 급여를 삭감하여 정부 규모를 축소하려 했다.

조광조는 또한 노비 등 모든 재능 있는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관료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을 도덕성으로 판단하고, 품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상급 관료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하인에게도 정중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그는 이름조차 없는 최하층 계급의 백정과 우정을 쌓았고, 그의 학문을 매우 칭찬하여 그와 국사를 논하며 그를 조정 관료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백정은 조광조의 제안을 거듭 거절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의 스승을 존경했던 중종의 후계자인 인종은 그의 각별한 존경을 받았던 조광조의 뜻을 기려 그의 미래 내각의 영의정 후보로 그 "백정"을 언급했다고 한다. 유명한 한국 철학자 이이에 따르면, 조광조는 백성들에게 매우 존경받아 그가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 "우리 선생님이 오신다"라고 외쳤다고 한다.[4]

조광조가 가장 중시한 것은 스승 김굉필에게 배운 『소학』과 그 실천으로, 성리학이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 비로소 민중의 학문이 되고 생활의 규범이 된다고 주장했다.

「여씨향약」을 본보기로 하여, 지방 자치 조직의 행동 원리로서의 「향약」을 지방에 보급하는 데 힘썼다.

궁정 내의 구습이나 미신 등 전통적인 가치관도 용서 없이 비판하며, 「소격서 폐지」(1518년)를 시작으로 개혁에 착수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재 등용 시스템으로 「현량과」를 실시(1519년)했다.

「왕도 정치」를 제창하며, 왕 자신이 성군으로 나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독려했다.

중종반정」의 공신이 너무 많은 것을 비판하고, 훈구파의 성역에 과감히 뛰어들어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아래는 조광조의 관직 생활을 정리한 표이다.

임명/이동 날짜관직
1515년 8월 22일조지서 사지(종6품 상당)
1515년 8월 29일성균관 전적(정6품 상당)
1515년 11월 20일사간원 정언(정6품 상당)
1515년사헌부 감찰(정6품 상당)
1515년호조 좌랑(정6품 상당)
1515년예조 좌랑(정6품 상당)
1515년공조 좌랑(정6품 상당)
1516년 3월 28일홍문관 수찬(정6품 상당)
1516년 5월 22일경연청 검토관(정6품 상당) 겸임
1517년 4월 4일경연청 시강관(정4품 상당)
1517년춘추관 기주관(5품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7년 4월 27일홍문관 교리(정5품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7년 8월 22일홍문관 전한(종3품 상당)
1517년 윤 12월 26일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 상당)
1518년 1월 23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상당)
1518년 6월 19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8년 12월 18일사헌부 대사헌(종2품 상당)
1518년세자시강원 부빈객(종2품 상당) 겸임
1519년 1월 23일성균관 지사(종2품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4월 22일겸 동지성균관사 겸임
1519년 4월 29일홍문관 부제학(정3품 당상)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5월 11일경연청 참찬관(정3품 당상 상당)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7월 21일동지사 겸임 (겸대 여부 불명)
1519년 10월 15일체포 투옥
1519년 12월 20일사사
1544년특사로 복권
1568년영의정(영의정 정1품 상당) 추증
1569년문정공(문정공) 시호 추증


2. 3. 4. 학문 활동

관료 생활 중에도 조광조는 학문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성수침, 백인걸, 이연경, 홍섬, 기준, 김명달, 조욱, 양언진, 정환, 나식, 허백기, 홍봉세, 정원, 윤관, 이희민, 이충건, 박세후, 김대유, 윤변, 이기, 안담, 최여주, 홍순복, 민의, 심광언, 박소, 조희윤 등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다.[2]

이 중 이연경은 조광조의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잠시 수학했었던 인물이다.

성수침은 훗날 성혼의 아버지이자 그에게 학문을 전했고, 백인걸의 문하에서는 성혼 등이 수학했으며 금강산 입산 경력으로 공세를 받은 율곡 이이 역시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의 손제자가 되었다. 또한 조광조의 문인 중 한 사람인 윤변의 아들은 오음 윤두수와 월정 윤근수였다. 그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기호학파와 서인을 형성하였다.

조광조의 문하생 중 한 명인 윤관은 남인의 논객 백호 윤휴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주자의 주자학에 깊이 영향을 받은 그는, 왕에서부터 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해지고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신화 속 중국의 요와 순 임금의 이상적인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림파는 유교 경전을 한국어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배포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유교 서적을 널리 알렸다. 또한 그들은 왕실 도교 사원을 파괴하고 불교 사찰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미신적인 종교로 간주하여 불교와 도교를 탄압했다.[2]

조광조는 또한 노비 등 모든 재능 있는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관료로 임명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을 도덕성으로 판단하고, 품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상급 관료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하인에게도 정중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그는 이름조차 없는 최하층 계급의 백정(屠夫)과 우정을 쌓았고, 그의 학문을 매우 칭찬하여 그와 국사를 논하며 그를 조정 관료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백정은 조광조의 제안을 거듭 거절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의 스승을 존경했던 중종의 후계자인 인종은 그의 각별한 존경을 받았던 조광조의 뜻을 기려 그의 미래 내각의 영의정 후보로 그 "백정"을 언급했다고 한다. 유명한 한국 철학자 이이에 따르면, 조광조는 백성들에게 매우 존경받아 그가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여 "우리 선생님이 오신다"라고 외쳤다고 한다.[4]

2. 4. 생애 후기

1517년(중종 12년), 반정 공신파였던 훈구 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1518년에는 사헌부 대사헌과 왕세자 보양관을 겸임하며 개혁 정치를 실천했고, 1519년(중종 14년) 가을에는 훈구 세력의 "위훈 삭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남곤, 심정 등 훈구파의 모함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는 급진적 사림파의 수령으로서 투옥되어 전라남도 능주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향년 38세).[37]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백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어, 백성들은 그를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렀다.[5] 그러나 훈구파는 이러한 개혁에 격렬하게 반대했고, 1519년 초에는 일부 훈구파 관료들이 사림파 관료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되기도 했다.[6]

사후 1544년에 특사로 복권되었으며, 1568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569년에는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조광조의 편지

2. 4. 1. 기묘사화(己卯士禍)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중종과 조광조를 이간질하기 위해 조광조의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하고 민심이 조광조에게 쏠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중종에게 백성들이 조광조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7]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남곤은 조광조를 모함하기 위해 뽕나무 잎에 꿀이나 설탕물을 사용하여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귀를 적어두었고, 궁궐 안의 애벌레들이 그 글귀를 갉아먹게 했다.[8]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는데, 이는 조광조의 성씨였다. 이 잎은 중종에게 조광조가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되었다.

중종은 조광조가 1506년의 반정에 거짓으로 공을 세운 자들의 특권을 폐지할 것을 청하자 의심이 더욱 커졌다. 홍경주는 몰래 궁궐에 들어가 중종에게 조정이 조광조의 지지자들로 가득 차 있으며, 감히 그에게 반대할 사람이 없다고 경고했다. 중종은 홍경주에게 밀서를 보내 조광조가 다음에는 반정에 공헌한 훈구 대신들을 공격하여 반정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중종)에게 반기를 들 것을 두려워한다고 밝혔다.[9]

1519년 11월 15일, 훈구 세력은 야밤에 몰래 궁궐에 들어가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조광조에 대한 탄핵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조광조와 그의 지지자들은 "임금을 속이고, 당을 만들어 자신을 추종하고 상대를 배척하며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10] 대사헌 조광조, 형조판서 김정, 그리고 다른 여섯 명은 즉시 체포되었고, 재판이나 조사도 없이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다.[7]

2. 4. 2. 유배

홍경주는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남곤, 심정 등과 함께, 홍경주는 딸 희빈을 통해, 심정은 경빈 박씨의 궁비를 통해 조광조가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또한 궁 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글을 써 벌레가 파먹게 하여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 했다.[37]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여러 재상들에게 조광조를 죽일 것을 모의하게 했다. 홍경주영중추부사 김전 등과 함께 왕에게 글을 보내려 했으나, 근시(近侍)가 모두 조광조의 심복이므로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밤중에 들어가겠다고 청했다. 남곤은 이 자리에 참석했으나, 사림파 신진 인사들을 구원하지 않고 훈구파 대신들의 사림 제거 음모를 묵인했다.

그날 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에게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주청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켰다. 음력 10월 15일 밤, 홍경주, 김전, 남곤, 이장곤, 고형산, 심정, 홍숙, 손주, 방유령, 윤희인, 김근사, 성운 등은 신무문으로 궐내에 들어가 중종에게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 놓았다고 주청했다.

조광조를 비롯하여 참찬 이자, 형조 판서 김정, 대사성 김식, 부제학 김구, 도승지 유인숙, 승지 박세희, 응교 기준, 수찬 심달원, 공서린, 윤자임, 안정, 이구, 홍언필, 박훈 등이 체포되었다. 홍경주 등은 그날 밤으로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 신임 대사헌 유운, 신임 대사간 윤희인, 전한 정응, 봉교 채세영 등의 반대로 일단 취조를 받게 되었다. 11월 16일 옥에 갇혔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는 옥 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했지만, 왕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했다.[37] 그가 유배되어 생활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에는 1667년 그의 적려유허비가 세워졌고,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은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고, 그들은 그를 "살아있는 부처"라고 불렀다.[5] 그러나 그는 훈구파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1519년 초, 몇몇 훈구파 관료들은 사림파 관료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때마침 발각되었다.[6]

2. 5. 최후

1519년 (중종 14년) 음력 10월 15일 밤, 홍경주, 김전, 남곤, 이장곤, 고형산, 심정, 홍숙(洪淑), 손주(孫澍), 방유령, 윤희인, 김근사, 성운 등은 신무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들어가 중종에게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엎으려 한다고 모함했다. 남곤과 심정은 조광조를 살려둘 경우 후환이 있을거라 생각했고, 결국 중종은 음력 12월 20일 전라남도 화순 능주에 귀양 가 있던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43]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서 조광조는 양팽손의 보살핌을 받았다. 양팽손은 18세 때 경기도 용인에서 조광조를 처음 만났고, 21세 때는 생원시에 장원 급제한 후 조광조와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인물이다.[43] 유배 중에도 조광조에게 글을 배우려는 선비들이 찾아왔으나[43] 얼마 지나지 않아 금부도사가 도착한다.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밀자 한성부를 향해 큰절 세 번을 올린 뒤 절명시(아래 참조)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2. 5. 1. 사망 직후

홍경주남곤, 심정 등과 모의하여, 그의 딸 희빈을 통해 조광조에게 백성들의 마음이 쏠리고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심정은 경빈 박씨의 궁녀를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궁궐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새겨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왕의 의심을 샀다.[44]

1519년 (중종 14년) 음력 10월 15일 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신무문을 통해 궁궐에 들어가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지어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모함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을 투옥시켰다.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이 조광조의 결백을 주장하며 석방을 간청했으나, 중종은 듣지 않았다.[9][11][12][13][14][15]

성균관 유생 150여 명[18]과 이후 240여 명[19]이 조광조의 석방을 요구하며 궐 밖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중종은 조광조를 능주로 유배 보냈다. 유배 한 달 만에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22][23][24] 조광조는 사약을 받기 전 자신의 충심을 담은 시를 남기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사약을 받았다.[25]

조광조가 사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32] 조광조 사후, 그의 시신은 양팽손이 수습하여 가매장했다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안장되었다.[44] 그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 가뭄이 들자, 백성들은 조광조의 죽음 때문이라고 여겼다.[32]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언급을 금지하는 함구령을 내렸다.[32]

1750년 (영조 26년)에 그려진 조광조의 초상화가 전해진다.
조광조의 초상화


1568년 (선조 1년), 조광조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44]

2. 5. 2. 신사무옥

홍경주남곤, 심정 등과 손을 잡고 자신의 딸 희빈을 통해 중종에게 백성의 마음이 모두 조광조에게 쏠렸다고 말했다. 심정 역시 경빈 박씨의 궁녀를 이용하여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고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또한, 궁궐 안 나뭇잎에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하여 이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궁녀를 통해 왕에게 전달되게 하는 등, 중종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했다.[44]

심정은 홍경주에게 밀서를 주어 낙담한 재상들을 찾아가 조광조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게 했다. 홍경주영중추부사 김전 등과 함께 몰래 중종에게 글을 올려 직접 상황을 알리려 했으나, 왕을 모시는 근시들이 모두 조광조의 심복이라 여의치 않아 신무문을 통해 밤중에 들어가 상황을 아뢰겠다고 청했다. 남곤은 이 모의에 참여했지만, 사림파 신진 인사들을 구원하지 않고 훈구파 대신들의 사림 제거 음모를 묵인했다.

그날 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궁궐로 들어가 중종을 만나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라고 상주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켰다. 음력 10월 15일 밤, 홍경주, 김전, 남곤, 이장곤, 고형산, 심정, 홍숙(洪淑), 손주(孫澍), 방유령, 윤희인, 김근사, 성운 등은 신무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들어가 중종에게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엎으려 하니 그 죄를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2. 6. 사후

사사된 조광조의 시신은 학포 양팽손이 수습하여 가매장하였다가 후에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서원말부락의 선영하에 매장되었다.[44] 조광조가 유배된 지 1개월 후에 사사되자, 양팽손은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서원터) 마을에 초가집을 지어 문인 제자들과 함께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44] 이 추모옥은 후일 죽수서원으로 발전한다. 1568년(선조 1년) 조광조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을 논의하였고, 1570년(선조 3년)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 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라는 사액을 받았다.[44]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32] 조광조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큰 가뭄이 들자,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인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말을 일절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32]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이듬해 봄에 선영이 있는 용인의 심곡리로 관을 옮겨 장례를 다시 치렀더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다고 전한다.[32]

그의 영정 초상화는 조선시대에 제작되었으나 대부분 실전되었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 국오(菊塢) 정홍래(鄭弘來)가 그린 영정이 후대에 전한다.

전라남도 화순의 죽수서원
(1519년 학포 양팽손에 의해 건립되었고 후에 죽수의 사액을 받았다.)


이이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불렀다.[32] 그의 제자인 소쇄(瀟灑) 양산보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되자 '개처럼 사느니 흙이 되겠다'며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으로 내려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은거하며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1543년(중종 38년) 6월, 홍문관 부수찬 하서(河西) 김인후가 경연에서 차자를 올려 시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희생자들의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였다. 이는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이듬해 성균관 생원 신백령 등이 사면 상소를 올렸다.

1544년(인종 원년) 인종은 즉위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기묘 명현들의 신원을 복원하였으니, 이는 평소 존경하던 스승 김인후이황 등의 영향과 그를 평소 동정하던 인종의 뜻에 따라 사면·복권되었다. 명종 초에 훈구파인 이기에 의해 계속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1559년(명종 14년)에는 경상도 산음의 유생 배익겸이 정사의 폐단을 논하면서 그의 개혁정치를 언급했다가, 훈구파들로부터 비판 공론이 다시 나타났으나 1560년인순왕후의 외숙인 이량이 그를 두둔하여 무마시켰다. 선조 대에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추증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능주의 죽수서원, 양주의 도봉서원, 희천의 상현사 등에 배향되었다.

1567년(명종 21년) 선조 즉위 후 기대승에 의해 조광조에 대한 복권과 증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려진 이후, 계속된 사림파들의 상소와 주청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의 증직이 내려지고, 시호추증되었다. 1582년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신도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가 썼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되었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동방 5현’이라 일컫기도 한다.

심곡서원 전경


1519년(중종 14년) 학포 양팽손에 의해 건립된 사당에 사액이 내려져 1570년(선조 4년) 능주의 죽수서원이 된 이후, 1576년 희천에 양현사가 세워져 배향되었다. 그밖에 한때 정몽주를 배향한 용인 모현면의 충렬서원에 배향되었다가 1650년(효종 원년)에 그의 묘소 근처에 세워진 심곡서원으로 위패를 옮겨왔다. 묘는 용인시 수지구 상현1동에 있으며 묘소에서 약 550m 거리에 심곡서원이 있다. 그 외 양주의 도봉서원 등에도 배향되었다.

3. 사상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에게 배운 『소학』과 그 실천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성리학이 단순한 이론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실천함으로써 백성의 학문이자 생활 규범이 된다고 주장했다.[37]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지방 자치 조직의 행동 원리인 향약을 여씨향약을 본보기로 삼아 지방에 보급하는 데 힘썼다.

조광조는 궁정 내의 구습이나 미신 등 전통적인 가치관을 비판하며, 1518년 소격서 폐지를 시작으로 개혁에 착수했다. 1519년에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재 등용 제도인 현량과를 실시했다.

그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며 왕 자신이 성군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5] 또한, 중종반정 공신이 너무 많은 것을 비판하고, 훈구파의 성역에 과감히 뛰어들어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조광조의 학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1]

3. 1. 국왕의 솔선수범론

그는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또한 국왕이 성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국왕 교육이 군주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며, 국왕이 먼저 사사로운 욕심과 사심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며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스스로 정체(政體)를 세우고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하여 활용할 것을 비전으로 제시하였다.[1]

「왕도 정치」를 제창하며, 왕 자신이 성군으로 나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독려했다.[5]

3. 2. 소학과 도덕윤리 보급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은 소학과 향약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조광조는 소학과 사서육경을 인쇄하여 보급하는데 개인 비용을 부담하였고, 동료 사림들과 함께 지방 오지에까지 '소학'을 보급하였다. 백성 교화를 목적으로 자치 규약인 향약을 실시하게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향촌에 보급하는 동시에 지방에서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조광조는 사림파가 주도하는 성리학적 질서 확산과 도덕적 이상향 구현에 노력하였다.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는데, 조광조가 보급에 중점을 둔 '소학'은 성리학의 기초 이론을 담은 서적으로 그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김굉필은 소학동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소학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업문(業文: 문장에 힘씀)으로는 천기(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소학 예찬론자였다. 소학이나 사서 육경 외에도 삼강행실, 이륜행실, 주자가례와 같은 책을 널리 인쇄, 간행하여 조선 팔도에 배부, 보급한 것도 유교적 도덕 이념 확산을 위한 노력이었다.

또한 조광조는 소격서(昭格署) 혁파를 추진하였다. 소격서는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 제사를 맡았던 기관이었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려는 조광조는 도교적 제천행사를 용납할 수 없었다.[37] 그는 스승 김굉필에게 배운 『소학』과 그 실천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성리학이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을 통해 비로소 민중의 학문이 되고 생활 규범이 된다고 주장했다.

「여씨향약」을 본보기로 하여, 지방 자치 조직의 행동 원리로서 「향약」을 지방에 보급하는 데 힘썼다.

3. 3. 거병과 군자론

1518년 남도병사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몰래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 잡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저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를 출동해 사로잡으소서."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중종은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李之芳)을 방어사에 제수한 뒤 토포사로 임명하여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함께 속고내를 잡아서 처벌하기로 하였다. 중종은 친히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토포사 이지방에게 어의(御衣)와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공(三公)과 병조(兵曹), 지변재상(知邊宰相)들이 파송식에 참석했다.[6]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이는 군자가 할 짓이 되지 못한다"며 반대하였다.[6] 이에 병조판서 유담년(柳聃年)은 담략을 써서 적을 사로잡는 일이라며 출정을 강행해야 된다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좌우에 입시한 문무대신들은 병가(兵家)에는 정공과 기습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權道)가 있으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며 논의가 이미 합일되었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들고 일어섰다.[6]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에게 회군을 명하니, 좌우에 있던 훈구파 신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6]

3. 4. 학맥

조광조는 사사되었지만 그의 제자인 백인걸과 이연경 등은 명종 때에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백인걸의 문하에서 한때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수학하였다.[1]



그러나 이이는 그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부친조원강
모친여흥 민씨
조영조
동생조숭조
제수이씨
부인한산 이씨
아들조정
아들조용


5. 평가

조광조는 후대의 한국 신유학자들에게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았지만, 개혁 실패로 이어진 실수로 인해 비판도 받았다. 이황이이는 그가 학문이 완성되기 전에 너무 일찍 정치에 입문했고 개혁을 너무 빠르게 추진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이황은 그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 중 한 명으로 칭송하며, 조광조가 모든 선비들이 목표로 삼고 따라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국가 통치의 기초를 밝혔다고 말했다.

실천 철학으로서 신유교 윤리에 대한 조광조의 강조는 이전의 초점이 유교의 보다 문학적인 측면에 맞춰져 있었던 만큼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시대에 유교는 마침내 일반 대중에게 깊이 뿌리내렸다. 조선 건국 이후 유교가 공식 국교였지만, 유교적 관습은 주로 귀족 계층에 국한되었다. 신유교를 조선의 지배적인 철학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은 그가 죽은 지 50년 후인 선조 시대에 곧 실현되었다. 그는 1610년 성균관에 배향되었으며, 이는 조선 왕조가 존경한 18명의 한국 유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이름을 숭배하는 사림은 선조 시대에 정치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개혁을 수행하려 하지 않았고,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신유교의 독단주의가 매우 보수적으로 변하여 한국이 변화와 해외로부터의 새로운 학습에 저항하게 된 것에 대해 조광조를 비난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 개혁의 대명사로 남아 있으며, 개혁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그의 사례가 종종 거론된다.

5. 1. 긍정적 평가

조광조의 사상은 유교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 도학 및 실천 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43]

37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다.[43] 정암은 현실 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43]

조광조는 후대 한국의 신유학자들에게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았지만, 개혁 실패로 이어진 실수로 인해 비판도 받았다. 이황이이(신사임당의 아들)는 종종 조선의 가장 위대한 두 유학자로 여겨지는데, 그는 학문이 완성되기 전에 너무 일찍 정치에 입문했고 개혁을 너무 빠르게 추진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이황은 그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 중 한 명으로 칭송하며, 조광조가 모든 선비들이 목표로 삼고 따라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국가 통치의 기초를 밝혔다고 말했다. 실천 철학으로서의 신유교 윤리에 대한 조광조의 강조는 이전의 초점이 유교의 보다 문학적인 측면에 맞춰져 있었던 만큼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시대에 유교는 마침내 일반 대중에게 깊이 뿌리내렸다. 유교는 조선 건국 이후 공식 국교였지만, 유교적 관습은 주로 귀족 계층에 국한되었다. 신유교를 조선의 지배적인 철학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은 그가 죽은 지 50년 후인 선조 시대에 곧 실현되었다. 그는 1610년 성균관에 배향되었으며, 이는 조선 왕조가 존경한 18명의 한국 유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이름을 숭배하는 사림은 선조 시대에 정치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개혁을 수행하려 하지 않았고,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신유교의 독단주의가 매우 보수적으로 변하여 한국이 변화와 해외로부터의 새로운 학습에 저항하게 된 것에 대해 조광조를 비난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 개혁의 대명사로 남아 있으며, 개혁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그의 사례가 종종 거론된다.

5. 2. 중의적 평가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종교로 신봉하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는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불교, 도교, 도참비기(圖讖秘記) 등을 금할 것을 주장하여, 도교에 대해서는 소격서 혁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무격(巫覡)의 숭신 및 영철야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 중창을 엄금하고 사찰의 노비·전지를 몰수하였다.[1]

조광조는 후대 한국의 신유학자들에게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았지만, 개혁 실패로 이어진 실수로 인해 비판도 받았다. 이황이이(신사임당의 아들)는 종종 조선의 가장 위대한 두 유학자로 여겨지는데, 그는 학문이 완성되기 전에 너무 일찍 정치에 입문했고 개혁을 너무 빠르게 추진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이황은 그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 중 한 명으로 칭송하며, 조광조가 모든 선비들이 목표로 삼고 따라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국가 통치의 기초를 밝혔다고 말했다.[2] 실천 철학으로서의 신유교 윤리에 대한 조광조의 강조는 이전의 초점이 유교의 보다 문학적인 측면에 맞춰져 있었던 만큼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시대에 유교는 마침내 일반 대중에게 깊이 뿌리내렸다. 유교는 조선 건국 이후 공식 국교였지만, 유교적 관습은 주로 귀족 계층에 국한되었다. 신유교를 조선의 지배적인 철학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꿈은 그가 죽은 지 50년 후인 선조 시대에 곧 실현되었다. 그는 1610년 성균관에 배향되었으며, 이는 조선 왕조가 존경한 18명의 한국 유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이름을 숭배하는 사림은 선조 시대에 정치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개혁을 수행하려 하지 않았고,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신유교의 독단주의가 매우 보수적으로 변하여 한국이 변화와 해외로부터의 새로운 학습에 저항하게 된 것에 대해 조광조를 비난한다.[2]

오늘날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 개혁의 대명사로 남아 있으며, 개혁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그의 사례가 종종 거론된다.[2]

5. 3. 부정적 평가

조광조는 민생과 국방에 대한 실무 능력과 감각이 부족하고 급진적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소격서 철폐와 관련하여, 조선 국왕은 제후이므로 천제를 지낼 수 없으며 세종대왕이 소격서를 유지한 것은 잘못이라는 모화사상에 갇힌 주장을 하였다.[32]

선조 때의 성리학자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학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가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했지만, 비방하는 이들이 많아 결국 죽음에 이르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다고 평가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었다고 하였다.[32]

이황은 《퇴계집(退溪集)》에서 조광조의 자질은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부족하여 실행이 지나쳐 실패를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조광조가 학문과 덕을 쌓은 뒤에 정치에 참여했다면 큰 성취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군주의 뜻이 있더라도 때와 힘을 헤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묘사화의 실패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32]

또한 조광조는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43]이라는 점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후대 한국의 신유학자들에게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았지만, 개혁 실패로 이어진 실수 때문에 비판도 받았다. 이황이이(신사임당의 아들)는 그가 학문이 완성되기 전에 너무 일찍 정치에 입문했고 개혁을 너무 급하게 추진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이황은 조광조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 중 한 명으로 칭송하며, 조광조가 모든 선비들이 따라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국가 통치의 기초를 밝혔다고 말했다.[32]

조광조의 신유교 윤리 강조는 유교의 문학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던 이전과는 달리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대에 유교는 일반 대중에게 깊이 뿌리내렸으며, 조선 건국 이후 공식 국교였지만, 유교적 관습은 주로 귀족 계층에 국한되었다. 조광조가 죽은 지 50년 후인 선조 시대에 신유교는 조선의 지배적인 철학이 되었다. 그는 1610년 성균관에 배향되었으며, 조선 왕조가 존경한 18명의 한국 유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32]

그러나 조광조를 숭배하는 사림은 선조 시대에 정치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개혁을 수행하지 않았고,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신유교의 독단주의가 매우 보수적으로 변하여 한국이 변화와 새로운 학습에 저항하게 된 것에 대해 조광조를 비난하기도 한다.[32]

오늘날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 개혁의 대명사로 남아 있으며, 개혁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그의 사례가 종종 언급된다.

6. 기타

조광조를 제거한 남곤과 심정은 백성들에게 '곤쟁이젓갈'(남곤의 '곤', 심정의 '정' 발음에 빗대 둘을 싸잡아 비난한 말로, 이후 곤쟁이젓갈은 젓갈 중 최하등급이라는 인식이 퍼짐)이라 불리며 비난받았다.[32] 김전 역시 조광조의 죽음에 관여하여 배신자나 변절자로 몰려 후배 사림파에게 지탄받았다.

조광조는 사림처럼 지방에 경제적 기반이 있어[47] 생계 걱정 없이 학문과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었다.[47]

6. 1. 조광조를 제거한 곤쟁이 젓갈

백성들은 조광조를 죽인 남곤과 심정을 ‘곤쟁이젓갈’(남곤의 ‘곤’, 심정의 ‘정’ 발음에 빗대 둘을 싸잡아 비난한 말. 이후 ‘곤쟁이젓갈’은 젓갈 중 최하등급이라는 인식이 퍼졌다)이라고 두고두고 욕했다.[32] 조광조가 사사될 당시 그를 제거한 대표적인 인물로 심정과 남곤이 지목되었다. 김전 역시 조광조의 죽음에 관계되었다 하여 배신자나 변절자로 몰려 후배 사림파로부터 지탄받았다.

6. 2. 지방에 있었던 물질적 기반

조선 중기 정계에 진출해 '도학 정치'를 주창했던 사림들처럼 조광조도 지방에 물질적 기반이 있었다.[47] 그 덕분에 생계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학문과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었다.[47]

7. 저서

《정암집》이 있다.

참조

[1]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604-09-15
[2] 뉴스 Jo Gwangjo, Reformer who dreamt ideal neo-Confucianism KBS World 2010-01-23
[3]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20-10
[4]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62-09-21
[5]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20-01-19
[6]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03-02
[7]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44-12-21
[8]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68-09-21
[9]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20-04-13
[10]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5
[11]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6
[12] 서적 Records of Yeonryeoshil
[13]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6
[14]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6
[15]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6
[16]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8
[17]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28-12-30
[18]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6
[19]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7
[20] 웹사이트 Reformer Jo Kwang-jo (in Korean) http://www.ohmynews.[...]
[21]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915-11-16
[22]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2-14
[23]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1-19
[24]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2-14
[25]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19-12-16
[26] 뉴스 Dream of reform cut by the conspiracy http://weekly.donga.[...] Weekly Donga 2009-12-15
[27] 역사기록 Annals 1520-11-16
[28] 웹사이트 Originally consulted from this page in Korean http://news.naver.co[...]
[29] 역사기록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1544-04-07
[30] 기타 이익, 《성호전집》 권68, 빈소선생전. 이황이 지은 조광조의 행장(이황, 《퇴계집》 권48, 정암 조 선생 행장)에 따르면, 조충남은 조용(趙容: 조광조의 둘째 아들)의 5촌 조카라고 한다. 또 이황, 《퇴계집·속집》(1843년 교정본) 권2, 증조충남(贈趙忠男)의 주석에는 “충남은 정암의 종손(형이나 아우의 손자)이다.”[忠男靜庵從孫]” 라고 되어 있다.
[31] 백과사전 양반관료의 대립과 분열
[32] 웹사이트 주초위왕[ 走肖爲王 ]’ 음모에 꺾인 ‘개혁의 꿈’ http://weekly.donga.[...] 주간동아 2009-12
[33] 기타 남곤, 김전 등도 김종직의 문하생들이었다.
[34]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35] 웹사이트 조광조 [趙光祖]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36] 뉴스 조광조의 '알성문과 답안'에서 http://www.jndn.com/[...] 전남매일 2007-04-18
[37] 뉴스 못다 핀 개혁의 꿈, 500년 비문으로 남다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06-05-16
[38]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39]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0]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1]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2] 간행물 <매경포럼> 조광조도 실패한 인재추천 https://www.mk.co.kr[...] 매일경제 2014-03-31
[43] 뉴스 '날개 꺾인 봉황' 조광조가 머문 자리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04-10
[44] 웹사이트 죽수서원 http://www.san.go.kr[...]
[45] 문서 안돈후의 서녀의 아들로 외가를 고발한 공로로 서자에서 면천하여 양반이 되고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46] 서적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7] 뉴스 "부귀를 경계하라"던 퇴계 이황은 어떻게 재산을 늘렸나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8-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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