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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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이첨은 연산군을 섬겼던 이극돈의 5대손으로, 광해군 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김개시와 손을 잡고 권력을 잡았으나,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서인의 반감을 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사림에게 비판받았으나,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그의 행위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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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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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이이첨 |
한자 이름 | 李爾瞻 |
로마자 표기 | I I-cheom |
자 | 득여(得與) |
호 | 관송(觀松), 쌍리(雙里) |
생애 | |
출생 | 1560년, 조선, 충청도 음성군 |
사망 | 1623년 3월 14일(64세), 조선 한성부 |
학력 | |
과거 급제 | 1594년 별시문과 을과 급제 |
중시 급제 | 1608년 문과 중시(重試) 장원 급제 |
관직 | |
주요 직책 | 예조판서 |
작위 | 광창부원군 |
가족 | |
자녀 | 원엽(元燁), 홍엽(弘燁), 대엽(大燁) |
기타 정보 | |
본관 | 광주 이씨(廣州) |
종교 | 유교(성리학) |
소속 정당 | 북인 대북파 |
2. 생애
이이첨은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극돈의 5대손으로, 역적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충청도 음성군(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서 태어났으며, 5대조 이극돈이 무오사화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남명 조식의 제자였던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1582년(선조 15년) 생원·진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광릉참봉으로 재직 중 일본군이 광릉에 방화했을 때 세조의 어진과 위패를 구해 선조의 총애를 얻었다. 159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평강현감, 사간원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수찬 등을 역임했다. 1599년(선조 32)에는 이조 정랑을 거쳐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 급제했다.
이후 광해군의 측근 김개시와 손을 잡고 소북파 유영경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찜질형으로 살해하고, 인조의 친동생 능창대군을 자살로 몰았으며, 인목왕후를 유폐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여 서인의 분노를 샀다.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이이첨은 참수형을 당했고, 김개시도 함께 처형되었다.[1]
2. 1. 생애 초기
충청도(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서 태어났다. 이집과 이지직의 후손으로, 연산군 조의 문신 이극돈의 5대손이며 이극돈의 차남 이세경의 4대손(이이첨의 고조부)이다. 아버지는 이우선(李友善)이고 어머니는 진주인 류유일(柳惟一)의 딸이다. 5대조가 무오사화에 원인을 제공하였다 하여 어려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 이극돈의 동생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비판하던 좌의정 이극균 등이 처형당하고, 무오사화 때 살아남은 사림파는 계속 이극돈을 비난했다. 그러나 고조부는 사헌부장령을 지냈고 증조부 이수훈은 교리를 역임하고 증직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이후 가세는 점점 몰락하여 한성에서 충청도 음성군으로 이주해 생활하였다. 오랫동안 가난한 환경에서 학문에 매진하던 그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자 남명 조식의 학맥을 계승한 정인홍의 제자가 되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82년(선조 15년)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1593년(선조 26)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지냈으며, 어머니에게 효도하여 고향에 효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광릉참봉으로 재직 중일 때 일본군이 광릉에 방화하자 세조의 어진과 위패를 불길로부터 구해냈다.[1] 1593년 3월 이이첨이 세조의 어진과 위패를 들고 행재소를 찾아오자 선조는 직접 신하들을 거느리고 마중나왔다. 이로서 선조의 총애를 얻어 현감에 제수되었다.
1594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이 된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때 아버지와 계조모가 연이어 사망하자 그는 혼절할 정도로 곡을 하고, 의례에 맞춰 장례를 치렀으며, 효행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도 장례를 극진히 하여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공로로 1604년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597년(선조 30)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나갔다. 1598년(선조 31) 사간원정언, 황해·평안 순검 해운 어사(黃海平安巡檢海運御史)를 역임했다. 세자시강원에 들어가 사서로서 광해군을 만났으며,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헌납, 부교리, 수찬 등을 지냈다.
1599년(선조 32) 이조 정랑이 되었고, 성균관 전적, 문학, 체찰사 종사관, 이조정랑을 거쳤다.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 합격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충청도(지금의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서 태어났다. 둔촌 이집과 이지직의 후손으로, 연산군 조의 문신 이극돈의 5대손이며 이극돈의 차남 이세경의 4대손(이이첨의 고조부)으로, 아버지는 이우선(李友善)이고 어머니는 진주인 류유일(柳惟一)의 딸이다. 그의 5대조가 무오사화에 원인을 제공하였다 하여 어려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사후에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안부원군(廣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 이극돈의 동생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비판하던 좌의정 이극균 등이 처형당하고, 무오사화 때 살아남은 사림파는 계속 이극돈을 비난했다. 그러나 고조부는 사헌부장령을 지냈고 증조부 이수훈은 교리를 역임하고 증직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이후 가세는 점점 몰락하여, 그의 집안은 어렵게 생활하여 한성에서 충청도 음성군으로 이주해 생활하였다. 오랫동안 가난한 환경에서 학문에 매진하던 그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자 남명 조식의 학맥을 계승한 정인홍의 제자가 되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의 가정은 꽤 어려웠고 그의 아내는 배고픔에 실성해 벽지의 풀을 먹었다는 설도 있다.
1582년(선조 15년)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1593년(선조 26)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지냈으며, 어머니에게 효도하여 고향에 효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2. 1. 2. 임진왜란 전후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광릉참봉으로 재직 중일 때 일본군이 광릉에 방화하였다. 세조의 어진과 위패를 불길로부터 구해냈다.[1] 처음부터 피난하지 않고 의병을 모아 늘 군막에 있었던 그는 일본군이 광릉에 불을 지르자 직접 달려가 세조의 영정(影幀)과 세조의 위패를 품에 안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1593년 3월 이이첨이 세조의 어진과 위패를 들고 행재소를 찾아오자 선조는 직접 신하들을 거느리고 마중나왔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약탈, 방화 외에도 백성들이 불을 질러서 조선 역대 국왕의 어진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때 집경전참봉 홍여율이 태조의 어진을 직접 구해냈고, 이어 광릉 참봉 이이첨이 세조의 영정을 구해냈기에 선조는 직접 그를 영접했다. 이로서 선조의 총애를 얻어 현감에 제수되었다.이후 현감(縣監)으로 재직 중 1594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이 되었다. 곧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때 아버지와 계조모가 연이어 사망하자 그는 혼절할 정도로 곡을 하고, 의례에 맞춰 장례를 치렀으며, 효행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도 장례를 극진히 하여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운 공로로 후일 1604년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2. 1. 3. 관료 생활 초반
1597년(선조 30)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나갔다. 그 해에 명나라 사신 정응태를 만나 일본과의 화의를 의논한 백유함(白惟咸)을 규탄하여 유배시켰다.1598년(선조 31) 사간원정언을 거쳐 황해·평안 순검 해운 어사(黃海平安巡檢海運御史)로서 쇄마 폐단을 일으켰다는 이유를 들어 의주 부윤 황진을 탄핵하였다. 다시 돌아와 세자시강원에 들어가 사서로서 광해군을 만났다. 그해에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 부교리, 수찬 등을 지냈다.
1599년(선조 32) 이조 정랑이 되었고, 성균관 전적, 문학, 체찰사 종사관, 이조정랑을 거쳤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 합격했으며,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2. 2. 정치 활동
연산군 때 이극돈의 5대손으로 태어난 이이첨은 역적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배경은 그에게 복수심과 권력욕을 심어주었다. 광해군의 측근인 김개시와 손을 잡고 정적인 소북파 유영경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찜질형으로 살해했으며, 인조의 친동생 능창대군을 자살로 몰아넣고, 인목왕후를 유폐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이 과정에서 서인 세력의 분노를 사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참수형을 당했고, 김개시도 함께 처형되었다.[1] 그의 딸은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괄의 세자빈이었다.2. 2. 1. 권력 장악 과정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은 이이첨은 남명의 제자였던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그와 뜻을 같이하여 현실 정치에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1608년 선조의 후계자 문제로 대북파와 소북파가 대립할 때, 대북파의 지도자로서 광해군을 지지하였다.[2]선조는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만년에 인목왕후와 재혼하여 영창대군을 얻었다. 선조가 광해군을 폐세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할 때, 소북의 영의정 유영경이 이에 찬성하자, 이이첨은 정인홍과 함께 유영경을 탄핵하고 광해군이 세자로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선조의 노여움을 사 갑산부로 유배되었다.[2] 선조는 이이첨을 정인홍과 함께 귀양 보내라는 명을 내렸으나, 그해 2월 선조가 갑자기 사망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죄가 풀렸다. 광해군 즉위 후, 선조 사후 인목왕후에게 영창대군 즉위 및 섭정을 종용했던 유영경이 처형되고 소북 세력은 큰 피해를 입었다.
선조가 음식을 먹다 갑자기 사망할 당시, 상궁 김개시 등이 수라를 올리는 데 참여했는데, 이 때문에 이이첨이 상궁 김개시 등과 함께 선조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조 반정 직후 서인 측에서 광해군의 죄목에 선조 독살을 추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서인 내부에서도 근거가 부족하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여관(궁녀)인 김개시(金介屎, 키무 게시)와 손을 잡고, 정적이던 소북파의 류영경(柳永慶, 류영경)을 몰아내 처형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
2. 2. 2. 광해군 등극 이후
연산군 때 이극돈의 5대손으로 태어나 역적의 후손으로 차별받았다. 광해군의 여관 김개시와 손을 잡고 정적인 소북파 류영경을 몰아내 처형하는 등 권력을 잡았다.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찜질형으로 죽이고, 인조의 친동생 능창대군을 자살로 몰았으며, 인목왕후를 유폐해 서인의 분노를 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참수형에 처해졌고, 김개시도 함께 참수되었다.[1]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괄의 세자빈 박씨는 그의 딸이었다.2. 2. 3. 인목왕후 유폐와 문묘 종사 논란
1616년부터 정인홍과 함께 폐모론을 주장하여, 1617년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발의하고 폐모 논의를 주도하였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허균은 이이첨, 정인홍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섰다.[1]1618년 조정의 논의 끝에 인목왕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1] 이 무렵 이이첨의 전횡을 비판하는 성균관 유생들과 지방 유림들의 상소, 인목대비 폐비 반대 여론이 빗발쳤다.[1] 한편 이이첨의 심복 백대형(白大珩)이 서궁으로 몰래 들어가 인목대비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도주했다.[1] 일각에서는 이이첨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1]
1620년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1] 그러나 이황,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두고, 사상적으로 남명학파인 그가 정인홍과 함께 반대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1] 1621년부터 이황,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것과 폐모론을 주동한 것에 대한 사림의 상소와 유배, 탄핵 등이 계속되었으며, 사후에도 영남 사림을 중심으로 근세에 이르기까지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1]
2. 2. 4. 허균과의 갈등 및 제거
1617년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허균이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했다. 1618년 1월 기준격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고, 같은 해 1월 좌참찬이 된 허균은 자신이 역모와 무관하다며 해명했다. 허균은 소북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이첨, 정인홍보다도 더 인목대비 폐모론에 앞장섰는데, 이 때문에 북인 내에서도 폐모에 반대하는 기자헌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6] 이 일로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졌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고 길주로 유배되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은 허균이 배후 조종한 것으로 의심,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났다. 바로 허균도 상소를 올려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음을 변명하였다.결국 1618년 2월 우의정 한효순 등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이끌고 허균과 기자헌을 추국하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청했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상소를 올렸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졌다.[6] 광해군이 세자빈을 간택하려 할 때 허균도 자신의 딸을 세자빈으로 만들려 했고 이때부터 허균과의 사이가 틀어졌다. 이 무렵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은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되었다.[6] 허균의 딸은 소훈이 되어 입궐하였다. 허균에 대한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고, 그를 제거하기로 했다.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에 1618년 8월 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8월 남대문 격문은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허균을 비롯한 허균의 심복들을 잡아다가 국문 끝에 처형했다.
2. 3. 인조 반정과 최후
1623년 (광해군 15년) 3월 13일 서인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이 능양군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고 대궐을 습격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이이첨은 인조 반정의 성공으로 실각하였고, 가족들을 이끌고 이천을 거쳐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 이보현(利甫峴)에서 관군에 체포되었다.[7] 그는 정조, 윤인, 이위경, 이대엽, 이홍엽, 이원엽 등과 함께 철물전(鐵物廛) 앞길에서 참형(사형) 되었다.[7] 향년 64세였다.이이첨의 심복으로 알려진 이위경(李偉卿), 정조(鄭造) 3형제, 채겸길(蔡謙吉), 백대형(白大珩), 이정원(李挺元), 박종주(朴宗胄) 등은 모두 붙잡혀 처형당하였고, 심복으로 지목된 16명은 거열, 64명은 복주(伏誅)되었다. 그밖에 측근으로 지목된 인물들은 의금부와 형조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이괄의 난 당시 모두 처형된다.[8] 아들 이원엽, 이홍엽, 이대엽, 사위 박자흥 등도 모두 처형당하여 선대 둔촌 이집으로부터 그의 아들 대까지 10代 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연이어 대과에 급제한 내력의 가문은 이때 멸문지화를 당했다.
3. 평가
정인홍이 처형되어 대북파는 몰락했고, 그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악의 화신으로 지탄받았다. 그의 저서와 작품, 문집들은 서인과 남인 계열에 의해 인멸, 유실되거나 소각되었다. 1908년(융희 2년) 그의 스승 정인홍이 복권되면서 재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
인조반정 이전에는 사림으로부터 명나라만 섬기지 않고 청나라와 등거리 외교를 한 점, 폐모론을 주도한 점, 광해군으로 하여금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을 사사하게 한 점, 이황,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 정인홍과 함께 반대한 점 등으로 부정적인 여론과 비판을 받았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역적으로 매도당했으나, 1908년 스승 정인홍이 복권되고, 1980년대 이후 폭군으로 매도되었던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행적 또한 재평가되고 있다. 일방적인 간신, 악당, 악인으로 매도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전란 수습을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현실정치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행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이범(李範) | |
아버지 | 이우선(李友善) | |
어머니 | 진주 류씨 | 류유일(柳惟一)의 딸 |
부인 | 전주이씨 | 이극유(李克維)의 딸 |
아들 | 이원엽(李元燁) | 1582년 ~ 1623년 |
아들 | 이대엽(李大燁) | 1587년 ~ 1623년 |
며느리 | 평산 신씨 | 신립의 딸 |
아들 | 이홍엽(李弘燁) | 1592년 ~ 1623년 |
며느리 | 해주 정씨 | 오정 정용의 딸 |
아들 | 이익엽(李益燁) | 1594년 ~ 1623년 |
며느리 | 여주 이씨 | 이지완(李志完)의 딸, 소릉 이상의의 손녀 |
딸 | 이씨 | |
사위 | 이상항(李商恒) | |
딸 | 이씨 | |
사위 | 박자흥(朴自興) | |
외손녀 | 폐빈 박씨 |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질의 처 |
외할아버지 | 류유일(柳惟一) | |
사돈 | 이창후(李昌後) | 사위 이상항의 아버지 |
이정립과 남인 계열로 간 이덕형은 이이첨의 12촌 아우였다. 며느리 여주 이씨는 이지완의 딸로, 성호 이익의 당고모이자, 반계 유형원의 이모가 된다.
5. 관련 작품
- 서인석: 《궁중여관 김상궁》 (1995년, KBS)
- 선동혁: 《허균: 조선왕조를 흔든 사나이》 (2000년, KBS)
- 정은표: 《화정 (드라마)》 (2015년, MBC)
- 이재용: 《보쌈-운명을 훔치다》 (2021년, MBN)
5. 1. 드라마
6. 기타
이이첨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나 남인에게 일방적인 악인으로 매도되었지만,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편향된 시각을 가졌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南統判赴龍川送別詩|남 통판 부용천 송별시중국어
: 내 성품은 편벽됨이 많은데,|중국어
: 그대의 재질은 유독 높이 뛰어났네|중국어
: 성(城)을 지킴에는 큰 절개를 함께 기약하였기로.|중국어
: 부를 나누는 데는 번거로움을 덜었네|중국어
: 후일을 기다려 서주가 감화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니|중국어
: 어찌 북쪽 오랑캐의 교만을 근심하리요. ...이하 중략...|중국어
의주부윤 재직 중 의주판관에서 용천으로 전근 가는 남이흥에게 써준 시는 남이흥이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전하였다.
6. 1. 이덕형과의 관계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은 이이첨의 친족으로, 이덕형은 이극균의 5대손이고 이이첨은 이극돈의 5대손이다.[9] 이극돈은 이극균의 친형으로, 이들 형제는 이인손의 넷째 아들과 다섯째 아들이었다.6. 2. 신경진과의 관계
인조반정의 공신 신경진은 이이첨의 사돈이자, 처남 매부 간이었다. 이이첨은 아들 이대엽을 신립의 딸과 혼인시켜 신경진, 신경희 형제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1]참조
[1]
문서
세조 어진 모사본
[2]
웹사이트
이이첨 [李爾瞻]
https://terms.naver.[...]
[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44권, 광해 3년 8월 2일 기사
http://sillok.histor[...]
[4]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44권, 광해 3년 8월 23일 경인 기사
http://sillok.histor[...]
[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49권, 광해 4년 1월 15일 경술 기사
http://sillok.histor[...]
[6]
뉴스
정말 율도국(栗島國)을 세우려 했는가
http://www.hani.co.k[...]
한겨레
2007-05-17
[7]
웹사이트
이이첨 등을 처형할 것을 청하는 의금부 등의 계
https://db.itkc.or.k[...]
[8]
문서
기자헌 투옥 및 처형
[9]
문서
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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