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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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봉춘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영화 배우이자 영화 감독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 운동 참여 혐의로 투옥되었고, 이후 대한독립군 활동으로 다시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1927년 영화 배우로 데뷔하여, 1930년에는 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단체 가입을 거부하고 활동을 중단했다가 광복 후 영화 활동을 재개, 《윤봉길 의사》, 《유관순》 등 다수의 영화를 연출했다. 1963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냈으며, 1975년 사망했다. 1993년에는 나운규와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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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영화감독이자 배우, 각본가로, 영화 《아리랑》을 통해 조선인의 저항 의식을 고취하며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으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중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건강 악화로 요절한 독립운동가이다.
윤봉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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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윤봉춘 |
한자 표기 | 尹逢春 |
출생일 | 1902년 3월 23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함경북도 회령군 |
사망일 | 1975년 10월 21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활동 기간 | 1927년 ~ 1975년 |
직업 | 영화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영화연출가 영화 기획가 영화 촬영감독 영화 편집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각색가 |
학력 | 경성 연희전문학교 중퇴 |
수상 |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자녀 | 윤태옥(장녀) 윤태심(차녀) 윤삼륙(장남) 윤소정(삼녀) 윤태희(사녀) 윤태병(차남) |
친척 | Charly Juratovav(사위) 류우현(사위) 임성자(며느리) 윤대근(친손자) 윤소영(친손녀) 김승용(손녀사위) 윤경아(친손녀) 오현경(사위) Larry Bush(사위) 이옥진(며느리) 윤형(친손자) 윤민희(친손녀) |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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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02년 3월 23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1918년 회령신흥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그는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서 징역 6개월을 복역하였다.
1921년에는 북간도 명동중학을 졸업했으나 1923년 대한독립군 활동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1927년 나운규의 영화 《들쥐》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으며, 1930년에는 《도적놈》을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고, 1941년까지 영화 배우를 겸업했다.
1942년까지 작품 활동을 해 왔던 그는 친일 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의 가입 제의를 받자, 이를 거부하고 1945년에 해방될 때까지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1945년 광복 후 활동을 재개한 그는 《윤봉길 의사》, 《유관순》, 《고향의 노래》, 《다정도 병이런가》, 《영원한 내 사랑》, 《인생대학 일년생》 등의 영화를 연출하였으며, 1963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5년에 노환으로 숨졌다.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생전 죽마고우였던 나운규와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1. 독립운동 투신과 투옥 (1919년 ~ 1923년)
1902년 3월 23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1918년 회령신흥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그는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서 징역 6개월을 복역하였다.1921년에는 북간도 명동중학을 졸업했으나 1923년 대한독립군 활동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2. 2. 영화계 데뷔와 활동 (1927년 ~ 1942년)
1902년 3월 23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21년 북간도 명동중학을 졸업했으나 1923년 대한독립군 활동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했다. 1927년 나운규의 영화 《들쥐》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으며, 1930년에는 《도적놈》을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고, 1941년까지 영화 배우를 겸업했다. 1942년까지 작품 활동을 했다.2. 3. 일제 협력 거부와 광복 (1942년 ~ 1945년)
1942년까지 작품 활동을 해 왔던 그는 친일 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의 가입 제의를 거부하고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2. 4. 광복 이후 활동과 사망 (1945년 ~ 1975년)
1945년 광복 후 활동을 재개한 그는 《윤봉길 의사》, 《유관순》, 《고향의 노래》, 《다정도 병이런가》, 《영원한 내 사랑》, 《인생대학 일년생》 등의 영화를 연출하였으며, 1963년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1975년 노환으로 숨졌다.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생전 죽마고우였던 나운규와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3. 가족 및 친인척 관계
윤봉춘은 슬하에 2남 4녀(6남매)를 두었다. 장남(첫째아들)은 영화 감독 겸 영화 각본가 윤삼륙이고, 3녀(셋째딸)는 배우 윤소정이다. 그의 차녀(둘째딸) 윤태옥(Carol Juratovac)은 네덜란드 남성과 결혼하여 네덜란드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4녀(넷째딸) 윤태희(Yoon Bush)는 미국 남성 Larry Bush와 결혼하여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셋째사위는 배우 오현경이다.
4. 학력
함경북도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회령 신흥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중국 만주 룽징 시에 있는 명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경성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5. 주요 작품
- 감독 작품
윤봉춘은 영화 배우로 데뷔하여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1927년 영화 《들쥐》를 통해 배우로 데뷔하였고, 같은 해 《잘 있거라》, 《금붕어》에 출연하였다. 1928년에는 《사랑을 찾아서》, 《옥녀 (玉女)》, 1929년에는 《사나이》, 《벙어리 삼룡》에 출연했다. 1930년에는 《승방비곡》, 《도적놈》에 출연하였으며, 《도적놈》은 윤봉춘의 감독 데뷔작이다.
이후 1931년 《큰 무덤》, 1937년 《오몽녀》, 1938년 《도생록 (圖生錄)》, 1942년 《신개지 (新開地)》, 1947년 《삼일혁명기》, 《윤봉길 의사》, 《유관순》, 1949년 《애국자의 아들》, 《백범 국민장 실기》, 1954년 《고향의 노래》, 1956년 《처녀별》, 《논개》, 1957년 《다정도 병이런가》, 1958년 《영원한 내 사랑》, 1959년 《인생대학 일년생》,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1960년 《진주탑》, 1961년 《황진이의 일생》, 1962년 《여인천하》를 감독했다.
- 배우 출연 작품
들쥐(1927년)를 통해 영화 배우로 데뷔하였다. 이후, 《잘 있거라》, 《금붕어》 (1927년), 《사랑을 찾아서》, 《옥녀 (玉女)》 (1928년), 《사나이》, 《벙어리 삼룡》 (1929년), 《승방비곡》, 《도적놈》 (1930년), 《큰 무덤》 (1931년), 《오몽녀》 (1937년), 《도생록 (圖生錄)》 (1938년), 《신개지 (新開地)》 (1942년), 《삼일혁명기》, 《윤봉길 의사》, 《유관순》 (1947년), 《애국자의 아들》, 《백범 국민장 실기》 (1949년), 《고향의 노래》 (1954년), 《처녀별》, 《논개》 (1956년), 《다정도 병이런가》 (1957년), 《영원한 내 사랑》 (1958년), 《인생대학 일년생》,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1959년), 《진주탑》 (1960년), 《황진이의 일생》 (1961년), 《여인천하》 (1962년)에 출연하였다.
5. 1. 감독 작품
윤봉춘은 영화 배우로 데뷔하여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1927년 영화 《들쥐》를 통해 배우로 데뷔하였고, 같은 해 《잘 있거라》, 《금붕어》에 출연하였다. 1928년에는 《사랑을 찾아서》, 《옥녀 (玉女)》, 1929년에는 《사나이》, 《벙어리 삼룡》에 출연했다. 1930년에는 《승방비곡》, 《도적놈》에 출연하였으며, 《도적놈》은 윤봉춘의 감독 데뷔작이다.이후 1931년 《큰 무덤》, 1937년 《오몽녀》, 1938년 《도생록 (圖生錄)》, 1942년 《신개지 (新開地)》, 1947년 《삼일혁명기》, 《윤봉길 의사》, 《유관순》, 1949년 《애국자의 아들》, 《백범 국민장 실기》, 1954년 《고향의 노래》, 1956년 《처녀별》, 《논개》, 1957년 《다정도 병이런가》, 1958년 《영원한 내 사랑》, 1959년 《인생대학 일년생》,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1960년 《진주탑》, 1961년 《황진이의 일생》, 1962년 《여인천하》를 감독했다.
5. 2. 배우 출연 작품
들쥐(1927년)를 통해 영화 배우로 데뷔하였다. 이후, 《잘 있거라》, 《금붕어》 (1927년), 《사랑을 찾아서》, 《옥녀 (玉女)》 (1928년), 《사나이》, 《벙어리 삼룡》 (1929년), 《승방비곡》, 《도적놈》 (1930년), 《큰 무덤》 (1931년), 《오몽녀》 (1937년), 《도생록 (圖生錄)》 (1938년), 《신개지 (新開地)》 (1942년), 《삼일혁명기》, 《윤봉길 의사》, 《유관순》 (1947년), 《애국자의 아들》, 《백범 국민장 실기》 (1949년), 《고향의 노래》 (1954년), 《처녀별》, 《논개》 (1956년), 《다정도 병이런가》 (1957년), 《영원한 내 사랑》 (1958년), 《인생대학 일년생》,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1959년), 《진주탑》 (1960년), 《황진이의 일생》 (1961년), 《여인천하》 (1962년)에 출연하였다.6. 소속
-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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