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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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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시마국은 과거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쓰시마시에 해당한다. 삼국지 위지왜인전에 등장하는 '대마국'에서 유래되었으며, 야요이 시대부터 고분 시대에 걸쳐 한반도 및 규슈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율령제 하에서 사이카이도에 속한 영제국으로, 다자이후의 관할을 받았다. 신라 해적의 침입, 몽골의 침입, 왜구의 근거지로서의 역할 등 잦은 외침을 겪었으며,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세에는 쓰시마 후추 번이 설치되었고, 메이지 시대 이후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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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국
지도 정보
1868년 일본의 주 지도, 쓰시마국 강조 표시
1868년 일본의 주 지도 (쓰시마국 강조 표시)
기본 정보
일본어 명칭(쓰시마노쿠니)
다른 이름(다이슈)
유형구니 (일본) (구 일본 행정 구역)
국가일본
존속 기간7세기 - 1871년
수도시모아가타군
위치쓰시마시 (나가사키현)
역사
시작 연도7세기
종료 연도1871년
이전시모아가타 구니노미야쓰코
이전가미아가타 구니노미야쓰코
이후이즈하라현
행정 구역
소속사이카이도
등급하국 (下国)
거리원국 (遠国)
2군 9향
현재 행정 구역나가사키현쓰시마시(쓰시마섬)
시설
국부나가사키현 쓰시마시
국분사(추정)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국분니사(미상)
이치노미야해신 신사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이치노미야이즈하라 하치만궁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2. 역사

쓰시마 국은 삼국지 위지왜인전에 나오는 '''대마국'''(對馬國, 판본에 따라 '''대해국'''(對海國))에서 처음 나타난다. 7세기에 율령제 하에서 쓰시마 국이 설치되면서 쓰시마(対馬일본어)로 표기하게 되었다.

쓰시마는 5세기 경 야마토 조정의 지방으로 인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율령제 하에서 정식 지방이 되었다. 쓰시마국은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한 국방과 한국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이 당나라에게 패한 후, 이 섬에 가네다 성이 건설되었다.

헤이안 시대까지 쿠니노미야츠코가 쓰시마 국을 지배했으나, 이후 아비루 씨족으로 대체되었다. 13세기 중반 경 소 씨족이 세력을 키워 15세기 후반에 섬 전체를 장악했다. 에도 시대 동안 쓰시마국은 소 씨족의 쓰시마 후추 번(이즈하라 번)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이들은 외교와 한국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했다.

폐번치현으로 1871년 쓰시마 후추 번은 이즈하라 현이 되었고, 같은 해 이마리 현(이후 사가현으로 개명)에 병합되었다. 1872년 쓰시마는 나가사키현으로 이관되었다.

2. 1. 선사 시대와 고대 국가

위지 왜인전에는 "대마국"이 왜국의 한 나라이며, 야마타이국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지 왜인전에서는 "대마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야요이 시대 쓰시마 북부 탑의 수 유적(쓰시마 시 가미쓰시마 정)에서는 석관 안팎으로 한반도중국계 유물(방격규구문경·구리 팔찌·도질토기 등)과 기타큐슈계 유물(넓은 날 동모·곡옥 등)이 함께 묻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삼국지』에서 말한 "남북을 오가며 곡식을 사들여 온다"는 기술을 뒷받침한다.[3]

4세기에는 쓰시마에도 본격적인 고분 시대가 시작되었다. 4세기 후반 이후 쓰시마 동쪽 해안 게치우라(鶏知浦) 주변에 일본 기나이형(畿内型) 전기 고분으로 섬 안에서 가장 큰 데이즈카 고분(쓰시마 시 미쓰시마 정)이 등장했고, 전방후원분을 포함하는 네소 고분군(쓰시마 시 미쓰시마 정)이 만들어졌다. 이는 5세기에서 6세기 후반에 해당한다.[4] 4세기 후반대에는 북부에 다이쇼군야마 고분(쓰시마 시 가미아가타 정)이 조성되는 등, 이들 고분의 분포를 통해 기존 아소만 주변 사회집단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야마토 왕권과 연락이 편리한 동부 해안 게치우라 부근에 왕권과 직접적 연관을 맺는 수장층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4]

2. 2. 율령 국가 시대 (아스카 ~ 헤이안 시대)

645년 다이카 개신 이후 율령제가 시행되면서 쓰시마는 사이카이도에 속한 영제국(令制国), 즉 '''쓰시마국'''('''対馬国''')이 되었고, 지금의 이즈하라고쿠후(国府)가 설치되어 다자이후의 관할에 들게 되었다. 스이코 천황 8년(600년)과 15년(607년)에 중국에 파견된 견수사(遣隋使)나 조메이 2년(630년) 이누카미노 미타스키 등을 비롯한 초기 견당사도 모두 이키와 쓰시마를 거쳐 중국으로 갔다.

백제 멸망 후 야마토 조정에서 백제에 파병했던 원군은 덴지 2년(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야마토 조정은 당나라신라가 합세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듬해인 덴지 3년(664년) 도고쿠(東國)에서 징발한 사키모리(防人)를 쓰시마에 두고, 도부히(烽, 봉수대) 8곳을 설치하였다. 덴지 6년(667년)에는 항복해 온 백제 유민들을 시켜 아소 만 남쪽 바닷가에 조선식 산성인 가네다 성을 쌓게 하였다. 덴무 3년(하쿠호 2년, 674년)에는 이즈하라에 정식으로 고쿠후를 세울 땅을 정하였다. 같은 해, 쓰시마노카미 오시미노 미야쓰코노 오쿠니(忍海造大国)가 쓰시마에서 을 캐어 조정에 바쳤는데, 이는 일본에서 최초로 은이 채굴된 사례였다. 몬무 천황 5년(701년)에는 쓰시마에서 채굴한 것으로 알려진 이 조정에 헌상되어 일본 조정은 연호를 「다이호」(大寶)로 바꾸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재 이는 조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다이호 율령이 제정되었는데, 쓰시마 국은 다이호 율령에서 「対馬島」로 표기되었다.[23] 사키모리 제도는 3년마다 도고쿠에서 파견된 병사 2천 명으로 이루어졌으나, 덴표 9년(737년)에 폐지되었다. 대신 규슈 본토의 지쿠시 국(筑紫国) 사람을 이키・쓰시마에 보내는 것으로 부활하였고, 덴표호지 원년(757년) 다시 폐지되어 사이카이도 7개 구니(지쿠젠국, 지쿠고국, 히젠국, 히고국, 분젠국, 분고국, 휴가국)의 병사(兵) 1,000명을 교대로 배치하였다.[24] 덴표 13년(741년) 쇼무 천황이 불교 사상에 기반한 「진호국가」(鎭護國家)를 표방하며 고쿠분지(国分寺) 건립을 명하자, 쓰시마에도 고쿠후가 있는 이즈하라 땅에 도분지(島分寺)가 세워졌으나 강사(講師)는 일단 폐지되었다.

덴표호지 3년(759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신라 정벌 계획을 세워 준비하던 중, 도고쿠의 선단 편성에 히젠 국 2,400명, 쓰시마 섬 200명의 수수(水手)가 포함되었다.[24] 간무 천황 때 사키모리 제도는 폐지되고 군단 제도도 바뀌었지만, 이키・쓰시마 두 구니에는 예외적으로 사키모리 제도가 유지되었다.[24] 9세기부터 신라구(新羅寇)라 불리는 신라 해적들이 쓰시마 섬을 중심으로 규슈 연안을 약탈하자, 고닌(弘仁) 4년(813년) 신라 해적들이 쓰시마 본토를 침공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쓰시마에서는 신라말 통역을 배치하였다. 조와 8년(841년)에는 다자이후의 속관인 조(曹) 104명이 쓰시마에 사키모리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헤이안 시대에 전국적으로 율령제가 이완되었지만, 쓰시마에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문덕실록》(文徳実録) 덴난(天安) 원년(857년) 6월조에 쓰시마노카미 다테노노 마사즈미(立野正岑)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그 해에 가미아가타 군주(上県郡主)인 의주장(擬主帳) 우라베노 가와치마로(卜部川知麻呂), 시모아카타 군(下県郡)의 의대령(擬大領) 나오노 우라누시(直浦主) 등이 이끄는 300여 명의 섬 사람에게 습격당해 자신의 저택에서 살해당했다.[25] 조간 12년(870년)에 쓰시마에 선사(選士) 50인이 배치되고, 조간 16년(874년)에는 신라인이 쓰시마에 떠내려왔다가 귀국했다. 간표(寛平) 6년(894년), 대소 100척의 배에 탄 2,500명 가량의 신라 해적들이 쓰시마의 사쓰우라(佐須浦)에 나타나, 쓰시마노카미 훈야노 요시토모(文屋善友)가 이끈 일본 관군과 싸웠다(《부상략기》).

한반도에 고려가 통일 국가를 세운 쇼헤이(承平) 6년(936년) 이후 신라구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 해에 쓰시마에 고려 남원부(南原府) 사람 함길긍(咸吉兢)이 표류해 오거나, 10월 15일에 김해부(金海府) 사람 이순달(李純達)이 다자이후에 소식을 전했지만 양국 간 국교 수립에는 이르지 못했다.[26]

간닌(寛仁) 3년(1019년),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선 50척이 쓰시마를 습격했다. 일본 측 기록만 보아도 365명이 살해되고 1,289명이 잡혀갔으며, 덴무 천황 이래로 이름 높던 쓰시마 은광도 불타버렸다. 이는 노예를 노린 것으로 피해는 쓰시마, 이키, 기타큐슈까지 미쳤다. 훗날 이들 도적은 도이(刀伊, 여진족)으로 밝혀졌고, 이 사건을 일본 역사에서는 「도이의 입구」라 부른다. 여진족은 이때 쓰시마의 한간다이(判官代) 나가스미 모로치카(長岑諸近)와 그 일족을 잡아갔고, 간신히 탈출한 모로치카는 자신의 처자를 찾기 위해 고려를 돌면서 일본인 포로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귀국하였다.[27]

쓰시마 국은 고대 후반부터 아비루 씨(阿比留氏) 등 재청관인(在庁官人)에 의한 현지지배가 이루어졌다. 가호(嘉保) 2년(1094년) 5월 25일, 전임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 정2위 행곤노주나곤(行権中納言) 후지와라노 고레후사(藤原伊房)가 전임 쓰시마노카미 후지와라노 아쓰스케(藤原敦輔)와 함께 사무역을 한 것이 적발되어 관위를 강등당하고 위계를 삭탈당했다.[28]

고와(康和) 3년(1101년) 7월 7일, 쓰시마노카미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가 부임지에서 다자이후의 명을 어기고 관물을 횡령하며 백성을 약탈한다는 보고가 다자이노곤노소치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로부터 조정에 들어왔다. 요시치카 토벌을 명하는 관부(官符)가 내려졌고, 천하 제일의 무용(武勇)으로 이름 높던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도료(棟梁)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郎義家)의 둘째 아들로 겐지의 적통이던 요시치카가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에게 토벌당했다. 이후 겐지 적통은 세력이 크게 꺾였고, 요시치카 토벌에 공을 세운 헤이시(平氏)가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29]

2. 3. 중세 (가마쿠라 ~ 무로마치 시대)

1274년(분에이 11년)과 1281년(고안 4년), 두 차례에 걸쳐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있었다. 이때 쓰시마에서 소 스케쿠니가 맞아 싸우다 죽고, 쓰시마는 몽골군에 점령당했다. 《하치만 구도훈》에 따르면 섬의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하고 여자는 손바닥에 구멍을 뚫려 가죽끈으로 꿰인 채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쓰시마는 한반도 및 중국 해안에 출몰해 약탈을 일삼던 왜구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1389년(창왕 원년) 박위가 이끄는 정벌군을 보내 쓰시마를 공격했고, 조선태조 5년(1396년)에 이어 세종 원년(1419년) 다시 이종무 등이 이끄는 대규모 선단으로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한국 역사에서 쓰시마 정벌이 있었던 세종 원년의 간지를 따서 기해동정(己亥東征), 일본 역사에서는 이 해의 연호를 따서 오에이 외구(応永の外寇)라 부른다. 이 사건에서 조선군은 쓰시마 도주(島主)인 소 씨가 거느린 일본 무사단과 한 달간 교전 후 쓰시마에서 철수하였다. 조선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원정 이후 왜구의 침공은 크게 줄었고, 소 씨도 1443년에 조선과 계해약조(일본에서는 가키쓰 조약이라 부름)를 맺어 조선과 일본 양국의 창구 역할을 하였다.

1470년(분메이 2년, 조선 성종 원년) 조선에서는 쓰시마의 슈고였던 소 씨를 통해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간 조선인들을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30] 1509년(에이세이 6년, 조선 중종 4년) 4월, 쓰시마 도주 소 무라모리(宗材盛)에게 체재 기한을 넘기고도 조선에 머무르고 있는 왜인, 즉 항구왜(恒久倭)의 귀국을 요구하는 사절을 막부에 파견하겠다고 예고하였으나, 무라모리가 급서하여 사신 파견은 연기되었다.[31] 이듬해에는 조선 내 일본인 거주가 허용된 삼포 (부산포, 염포, 제포)에 거주하던 쓰시마 사람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켰다. 소 씨가 구원군을 보내 진압을 도왔지만, 조선은 거주하던 일본인을 추방했고 쓰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1512년(에이세이 9년, 조선 중종 12년) 쓰시마 도주가 삼포왜변 주동자의 목을 바치고 조선 조정에서 쓰시마와 임신약조를 맺을 때까지 단절되었다.

이 무렵 쇼니 씨가 오우치 씨에게 다자이후를 잃고 쫓겨나면서, 소 사다모리규슈에 병사를 보내 오우치 씨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쇼니 씨는 결국 멸망하고 소 씨도 군세를 돌려야 했다.

2. 4. 근세 (아즈치모모야마 ~ 에도 시대)

1592년(분로쿠 원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을 침공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무역 수입이 줄어들 것을 걱정한 소 씨는 전쟁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부산나고야성 사이에서 양국 간 중개에 힘썼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西軍)에 가담했으나 서군이 패하면서 영지를 잃었다.[1]

에도 막부가 수립되고 바쿠한 체제 아래에서 소 씨는 쓰시마 후추 번 10만 석의 영주로 막부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쓰시마 후추 번은 막부의 명령에 따라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해 힘썼고, 막부와 조선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양국 간에 오가는 국서를 위조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막부의 유력 가신인 야나기하라 씨(柳川氏)에게 고발당해 야나가와 사건으로 번졌다.[1]

에도 시대 쇄국 정책 아래에서도 조선과의 국교는 유지되었고, 쓰시마 번은 조선 통신사의 선도역을 맡아 훗날 부산에 왜관을 설치하여 교역하기도 하였다.[1]

2. 5. 근대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쓰시마에 이즈하라현(厳原県)이 세워졌는데, 이즈하라 현은 이후 이바리 현(伊万里県), 사가현(佐賀県), 미즈마 현(三潴県)을 거쳐 1876년(메이지 9년)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다.[1]

폐번치현 결과 쓰시마 후추 번은 1871년 이즈하라 현이 되었다. 같은 해 이즈하라 현은 사가 현으로 개명된 이마리 현에 병합되었다. 쓰시마는 1872년에 나가사키 현으로 이관되었다.[2] 이와 동시에 쓰시마는 1894년 일본과 미국 간의 조약 및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는 등 일부 목적을 위해 존속했다.[2]

3. 지리 및 행정 구역

역사적으로 쓰시마국은 가미아가타군(上県郡)과 시모아가타군(下県郡) 두 개의 군(郡)으로 구성되었다. 쓰시마국의 국청은 이즈하라에 위치해 있었다. 현대의 지방 자치 단체 체제에서는 가미아가타군과 시모아가타군으로 나뉘었으며, 이후 오늘날의 쓰시마시로 통합되었다.

가미아가타군이나 향(伊奈郷), 구스 향(久須郷), 무카히 향(向日郷), 미네 향(三根郷), 사호 향(佐護郷)
시모아가타군쓰쓰 향(豆酘郷), 지게 향(鶏知郷), 가시 향(賀志郷), 요라 향(与良郷), 타마시 향(玉調郷)



가미아가타군도요자키(豊崎) 향, 사고(佐護) 향, 이나(伊奈) 향, 미네(三根) 향
시모아가타군니이(仁位) 향, 사스(佐須) 향, 요라(与良) 향, 즈쓰(豆酘) 향


4. 한국과의 관계

간무 천황에 의해 사키모리 제도는 폐지되고 군단 제도도 바뀌었지만, 이키쓰시마 두 섬에는 예외적으로 사키모리 제도가 존속하였다.[24] 9세기부터 신라구(新羅寇)라 불리는 신라 해적들의 일본 해안 약탈이 쓰시마 섬을 중심으로 규슈 연안에서 빈발하였는데, 813년에는 신라 해적들이 쓰시마 본토를 침공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쓰시마에서는 신라말 통역을 배치하였다. 841년에는 다자이후의 속관인 조(曹) 104인이 쓰시마에 사키모리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헤이안 시대의 전국적인 율령제 이완 현상은 쓰시마에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문덕실록857년 6월조에는 쓰시마노카미 다테노노 마사즈미(立野正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다테노노 마사즈미는 그 해에 가미아가타 군주(上県郡主)인 의주장(擬主帳) 우라베노 가와치마로(卜部川知麻呂), 시로아카타 군(下県郡)의 의대령(擬大領) 나오노 우라누시(直浦主) 등이 이끄는 300여 명의 섬 사람의 습격으로 자신의 저택에서 피살당했다.[25] 870년에 쓰시마에 선사(選士) 50인이 배치되고, 874년에는 신라인이 쓰시마에 떠내려왔다가 귀국당하기도 하였다. 894년에는 대소 합쳐 100척의 선단에 타고 온 2,500인 가량의 신라 해적들이 쓰시마의 사쓰우라(佐須浦)에 출몰해, 쓰시마노카미 훈야노 요시토모(文屋善友)가 이끈 일본 관군과 격투를 벌였다.

한반도에 고려에 의해 통일 국가가 성립된 936년 이후 신라구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 해에 쓰시마에 고려 남원부(南原府) 사람 함길긍(咸吉兢)이 표류해 오거나, 10월 15일에 김해부(金海府) 사람 이순달(李純達)이 다자이후에 와서 소식을 전했지만 양국간 국교 수립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26]

1019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선 50척이 쓰시마를 습격했다. 일본측 기록만 보아도 살해된 자는 365명에 잡혀간 자는 1,289명이었고 덴무 천황 이래로 이름 높던 쓰시마 은광도 함께 불타버렸다. 이는 노예를 노린 것으로 피해는 쓰시마 및 이키・기타큐슈에 걸쳤다. 훗날 이들 도적의 정체는 도이(刀伊, 여진족)으로 밝혀졌고, 이 사건을 일본 역사에서는 「도이의 입구」라 부르고 있다. 여진족은 이 때 쓰시마의 한간다이(判官代) 나가스미 모로치카(長岑諸近)와 그 일족을 잡아갔고, 가까스로 탈출한 모로치카는 자신의 처자를 찾기 위해 고려를 돌면서 일본인 포로의 비참한 모습을 목도하고서 귀국하였다고 한다.[27]

쓰시마 국은 고대 후반 이래로 아비루 씨(阿比留氏) 등의 재청관인(在庁官人)에 의한 현지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094년 음력 5월 25일에 전임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 정2위 행곤노주나곤(行権中納言) 후지와라노 이보(藤原伊房)가 전임 쓰시마노카미 후지와라노 아쓰스케(藤原敦輔)와 함께 사무역을 한 것이 적발되어 관위를 강등당하고 위계를 삭탈당했다고 한다.[28]

1101년 7월 7일, 쓰시마노카미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가 부임지에서 다자이후의 명을 어기고 관물을 횡령, 인민을 약탈하고 있다는 보고가 다자이노곤노소치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로부터 조정에 보고되었다. 요시지카 토벌을 명하는 관부(官符)가 내려지고, 천하 제일의 무용(武勇)을 지닌 용사로써 이름 높던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도료(棟梁)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郎義家)의 둘째 아들로써 겐지의 적통이던 요시지카가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에게 토벌당한 뒤 겐지 적통은 세력이 크게 꺾였고, 거꾸로 요시지카 토벌에 공을 세운 헤이시(平氏)가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29]

1274년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 당시 쓰시마에서 소 스케쿠니(宗助国)가 맞아 싸우다 죽고, 쓰시마는 몽골군에 점령당했다. 섬의 남자는 모조리 살해당하고 여자는 손바닥에 구멍이 뚫려 가죽끈으로 꿰인 채 포로가 되었다고 《하치만 구도훈》는 전하고 있다.

이후 쓰시마는 한반도 및 중국 해안에 출몰해 약탈을 일삼던 왜구의 근거지가 되었다. 왜구를 토벌하고자 고려1389년 박위가 이끄는 정벌군이 쓰시마를 공격하기도 하였고, 조선 1396년(태조 5년)에 이어 1419년(세종 원년) 다시 이종무 등이 이끄는 대규모 선단이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한국 역사에서 쓰시마 정벌이 있었던 세종 원년의 간지를 따서 기해동정(己亥東征), 일본 역사에서는 이 해의 연호를 따서 오에이 외구(応永の外寇)라 부르는 이 사건에서 조선군은 쓰시마 도주(島主)인 소 씨가 거느린 일본 무사단과 한 달간의 교전을 벌이고 조선군은 쓰시마에서 철수하였다. 기본적으로 조선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원정 이후 왜구의 침공은 크게 줄었고, 소씨도 1443년에 조선과 계해약조(일본에서는 가키쓰약조嘉吉条約라 부름)를 맺어 조선과 일본 양국의 창구 역할을 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1470년(조선 성종 원년) 조선에서는 쓰시마의 슈고(守護)였던 소 씨를 통해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간 조선인들을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30] 1509년(조선 중종 4년) 4월에 다시 쓰시마 도주 소 무라모리(宗材盛)에게 체재 기한을 넘기고도 조선에 머무르고 있는 왜인 즉 항구왜(恒久倭)의 귀국을 요구하는 사절을 막부에 파견하겠다고 예고하였으나, 무라모리가 급서하는 바람에 사신 파견은 연기되었다고 한다.[31] 이듬해에는 조선 내의 일본인 거주가 허용된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의 세 포구)에 거주하던 쓰시마 사람들이 삼포왜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소 씨가 나서서 구원군을 보내가며 진압을 도왔지만, 조선은 거주하던 일본인을 추방해 버렸고 쓰시마와 조선의 관계는 1512년(조선 중종 12년) 쓰시마 도주가 삼포왜변 주동자의 목을 바치고 조선 조정에서 쓰시마와 임신약조(壬申約條)를 맺을 때까지 단절되었다.

또한 이 무렵 쇼니 씨(少弐氏)가 오우치 씨(大内氏)에게 다자이후를 잃고 쫓겨나면서,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규슈에 병사를 보내 오우치 씨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쇼니 씨는 결국 멸망하고 소 씨도 군세를 돌려야 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으로 7년의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무역 수입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소 씨는 어떻게든 양국간의 전쟁을 막고자 애썼지만 실패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부산나고야성(名護屋城) 사이에서 양국간 중개에 힘쓰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西軍)에 가담하였으나 서군이 패한 뒤 영토를 잃었다.

에도 막부가 세워지고 바쿠한 체제 아래에서 소 씨는 쓰시마 후추 번 10만 석의 영주로써 막부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후추 번은 막부의 명령에 따라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위해 힘썼고, 막부와 조선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양국간에 오가는 국서를 교묘하게 위조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막부의 유력 가신인 야나기하라 씨(柳川氏)에 고발당했고 이는 야나가와 사건으로 불리는 일대 사건으로 번졌다.

한편 에도 시대의 쇄국 정책 아래에서도 조선과의 국교는 유지되었고, 쓰시마 번은 조선 통신사의 선도역을 맡아 훗날 부산시에 왜관(倭館)을 두고 교역하기도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쓰시마에는 이즈하라현(厳原県)이 세워졌는데, 이즈하라 현은 이후 이바리 현(伊万里県), 사가현(佐賀県), 미즈마 현(三潴県)을 거쳐 1876년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다.

5. 주요 인물


  • 오시미노 오쿠니 - 덴무 천황 3년(674년) 3월 7일에 등장.
  • 다테노 마사즈미(立野正岑) - 857년에 군지(郡司) ・ 백성들에게 참살됨.
  • 훈야노 요시토모(文屋善友) - 간표 6년(894년) 사쓰우라(佐須浦)에 출몰한 신라구와 교전해 격파함.
  • 사카노우에노 쓰네쿠니(坂上經國) - 엔초(延長) 7년(929년) 1월 탐라(耽羅)와 해조류를 교류하다 풍랑을 만나 시모아가타 군(下縣郡)에 표류한 후백제 상선을 전주(全州)까지 송환함.[38]
  • 다카하시노 나카타마(高橋仲堪) - 조토쿠(長德) 3년(997년) 6월 이전 쓰시마노카미.
  • 다이라노 나카카타(平中方) - 다자이노다이칸(大宰大監)으로써 다카하시노 나카타마를 대신해 조토쿠(長德) 3년(997년) 쓰시마노카미가 됨. 고려의 첩장을 접한 일본 정부가 고려에 대한 경계를 보이는 과정에서 나온 것임.
  • 오에노 요시토키(大江嘉言) - 문장생(文章生), 탄정소충(彈正少忠)으로 간고(寬弘) 6년(1009년)에 쓰시마노카미가 되었다가 7년 뒤 부임지에서 사망. 헤이안 중고기 36가선의 한 사람으로 꼽힘.
  • 후지와라노 마사노리(藤原政則) - 조와 2년(1013년)에 쓰시마노카미가 됨. 간닌 3년(1019년) 도이의 입구 때 다자이노곤노소치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를 도와 진압에 활약함.
  •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 - 다자이후(太宰府)의 명을 거스르고 관물 횡령 및 주민 핍박 등의 죄로 다이라노 마사모리에게 추토됨. 이후 한동안 겐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됨.
  • 후지와라노 아쓰스케(藤原敦輔) - 가호 2년(1094년) 전임 다자이노곤노소치 후지와라노 고레후사(藤原伊房)와 함께 사무역을 한 것이 적발되어 관위를 강등당하고 위계를 삭탈당함.
  • 후지와라 지카미쓰(藤原親光)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외척으로써 헤이케에게 추토당해 고려로 도망쳤다가 단노우라 전투로 헤이케가 멸망한 뒤에 일본으로 돌아옴(《아즈마카가미》)[39].
  • 가와치 요시나가(河内義長) : 분지(文治) 원년(1185년) - ?
  • 쇼니 스케요시(少弐資能) : 간기(寛喜) 2년(1230년 - ?
  • 쇼니 사다쓰네(少弐貞経) : 겐코(元亨) 3년(1323년) - ?
  •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 1344년 -?
  • 소 스미모치(宗澄茂) : 1378년 -?
  • 소 요리모치(宗頼茂) : 메이토쿠 3년(1392년) - 오에이 5년(1398년)
  • 소 사다모치(宗貞茂) : 오에이 7년(1400년) - 오에이 10년(1403년)
  • 소 사다모리(宗貞盛) : 오에이 21년(1414년) - 교토쿠 원년(1452년)
  • 소 시게모토(宗成職) : 오닌 2년(1468년)
  • 소 사다쿠니(宗貞国) : 1468년 - 메이오 원년(1492년)
  • 소 기모리(宗材盛) : 1492년 - 에이쇼 5년(1508년)
  • 소 요시모리(宗義盛) : 에이쇼 7년(1510년) - 에이쇼 17년(1520년)
  • 소 모리나가(宗盛長) : 1520년 - 다이에이 원년(1521년)
  • 소 하루야스(宗晴康) : 덴분 11년(1542년) - 덴분 23년(1554년)
  • 소 요시시게(宗義調) : 고지 원년(1555년) - 에이로쿠 3년(1560년)
  • 소 씨(宗氏)
  • 마쓰다이라 다다사토(松平忠郷) : 에도 중기의 인물로 마쓰다이라 쓰시마노카미로 불림.
  • 마쓰다이라 지카사다(松平近貞) : 분고 후나이 번(豊後府内藩) 제4대 번주.
  •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 덴쇼 13년(1585년) - 게이초 8년(1603년)
  •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 : 안세이(安政) 3년(1856년) 12월 1일에 임명.
  • 이도 사토히로(井戸覚弘)
  • 나가즈미 모로치카(長岑諸近) - 도이의 입구 당시 쓰시마의 한간다이(判官代)
  • 소 스케쿠니(宗助国) - 몽골의 일본 원정 당시 쓰시마의 슈고다이(守護代)
  • 소 요시토시(宗義智)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로써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종전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서계 위조까지 해가며 다시금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이끌어낸 인물. 쓰시마 후추 번(対馬府中藩)의 초대 번주.
  • 소 요시나오(宗義真) - 호학(好学)의 번주.
  • 스야마 돈오(陶山鈍翁) - 쓰시마 번의 군봉행(郡奉行)
  • 가시마 효스케(賀島兵介) - 쓰시마 번사로써 히젠국(肥前国) 다시로(田代)의 부대관(副代官)
  • 나카니와 부잔(中庭茂山) - 쓰시마의 도자기 장인
  • 히라야마 도잔(平山東山) - 《쓰시마기사》(津島紀事)의 저자
  • 오시마 도모노조(大島友之允) - 막부 말기의 외교관. 메이지 유신 뒤 왕정복고를 알리는 사절로써 조선에 보내짐.
  •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 - 소설가.
  • 무토 스케요리(武藤資頼)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부터 쓰시마의 슈고로 임명됨.
  • 시마 기요오키(島清興) -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무장. 쓰시마에 무덤이 있음.
  •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 쓰시마 후추 번의 유강(儒講)으로 조선 통신사의 접대 및 교섭, 통역을 맡아 활약함. 이즈하라 조쥬인(長寿院)에 묘소가 있음.
  • 아사미 사다노리(浅見貞則) -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가신으로 아들 지로(次郞)과 대를 이어 아사미 쓰시마노카미(浅見対馬守)를 자칭(세이신지 문서浄信寺文書).
  • 이데우라 모리키요(出浦盛清) - 시나노 마쓰시로번(信濃松代藩)의 닌자 두령으로써 이데우라 쓰시마노카미(出浦対馬守)를 자칭.
  • 이마가와 료슌 ? 규슈 탄다이
  • 데이우라 모리키요 - 사나다씨 가신
  • 마에다 나가타네 - 가가 팔가
  • 마쓰다 쓰시마노카미 - 단고 국인(간무 헤이씨 계) - 무로마치 막부 봉행중
  • 쓰시마 후추번 번주 소 가문
  • * 소 요시나리
  • * 소 요시자네
  • * 소 요시미치
  • * 소 요시마사
  • * 소 요시노부
  • * 소 요시유키
  • * 소 요시시게
  • * 소 요시히로
  • * 소 요시토시
  • * 소 요시카타
  • * 소 요시아키
  • * 소 요시카즈
  • * 소 요시타츠
  • 도사번 번주 야마우치 가문 (칭호, 마쓰다이라)
  • * 야마우치 타다요시
  • * 야마우치 타다토요
  • * 야마우치 토요히로
  • 토바번 번주 이나가키 가문
  • * 이나가키 아키히사
  • * 이나가키 나가츠구
  • * 이나가키 나가타케
  • * 이나가키 나가타카
  • 기타
  • * 호리 나오토모 - 하타모토, 야마다 봉행

근대 이후는 쓰시마시#출신 관련 저명인사를 참조.

  • 나가미네 모로치카 - 도이의 침입 당시 쓰시마 판관대
  • 소 요시쿠니 - 몽골의 침입 당시 쓰시마 수호 대리
  • 오시마 토모노신 - 외교관

참조

[1] 서적 "Provinces and prefectures" in Japan Encyclopedia, p. 780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005
[2] 간행물 A digest of international law as embodied in diplomatic discussions, treaties and other international agreements https://books.google[...] US Department of State 1906
[3] 문서 1998
[4] 문서 1998
[5] 서적 クロニック 日本全史 講談社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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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사이트 防人の島-壱岐・対馬の歴史 http://members.jcom.[...]
[8] 서적 クロニック 日本全史 講談社 1995
[9] 문서 1974
[10] 서적 クロニック 日本全史 講談社 1995
[11] 서적 クロニック 日本全史 講談社 1995
[12] 서적 クロニック 戦国全史 講談社 1995
[13] 서적 クロニック 戦国全史 講談社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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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対馬鶴翼山西山寺 http://www.tsushima-[...]
[16] 웹사이트 対馬宗家文書の世界「西山寺」 http://www.kyuhaku-d[...] 九州国立博物館
[17] 웹사이트 対馬国分寺 http://www.hinocatv.[...]
[18] 웹사이트 対馬宗家文書の世界「国分寺」 http://www.kyuhaku-d[...] 九州国立博物館
[19] 문서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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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크로니클 일본전사 고단샤 1995
[27] 문서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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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서 1998
[33] 웹사이트 쓰시마 학익산(鶴翼山) 사이산지 http://www.tsushima-[...]
[34] 웹사이트 쓰시마 소 씨 집안 소장 문서의 세계(対馬宗家文書の世界) 중 「사이산지」 http://www.kyuhaku-d[...] 규슈국립박물관
[35] 웹인용 対馬国分寺 https://web.archive.[...] 2010-05-30
[36] 웹사이트 소 씨 집안 소장 문서의 세계 중 「고쿠분지」 http://www.kyuhaku-d[...] 2010-06-09
[37] 서적
[38] 서적 진훤이라 불러다오 푸른역사
[3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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