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곤 (1919년)
1. 개요
이곤은 1919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흥영군 이우의 동생이다. 1951년 사기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국회 수위로 근무했으며, 1969년 홍릉 내 거주지 철거 과정에서 문화재 관리 직원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1974년 국회 경비직에서 퇴직 후, 198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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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
이석 (1941년)
대한제국 의친왕 이강의 아들인 이석은 가수로 활동하며 '비둘기 집' 등의 노래로 인기를 얻었고, 베트남 전쟁 참전 후 미국 이민을 거쳐 귀국하여 황실 문화 알리기에 힘쓰며 전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의친왕 -
김성범 (1899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성범은 3·1 운동 후 천마별영에서 독립운동을 시작, 평안북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순국,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1984년 사망 -
미셸 푸코
미셸 푸코는 프랑스의 철학자, 역사가, 사회학자로서 권력, 지식, 담론 등을 탐구하며 서양 사상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84년 사망 -
유옥우
유옥우는 자유당에서 정계 입문 후 야당에서 활동하며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고, 한일협정 반대 운동 중 옥고를 치렀으며 정치 테러를 당하기도 했으나, 국가보위입법회의 참여 경력으로 비판받기도 한 정치인이다. -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
전영택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전영택은 1919년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화수분〉, 〈소〉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개신교 관련 간행물 발행, 중앙신학교 및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
피에르 퀴리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는 압전 효과 발견, 자기장 연구, 아내 마리 퀴리와 함께 방사능 연구를 통해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으며, 그의 업적은 핵물리학 및 화학 발전에 기여했고 사후에도 그의 이름이 기려지고 있다.
2. 생애
1919년 한성부(현재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준용의 양자가 된 흥영군 이우는 그의 친형이다.
1952년부터 구황실재산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얻어 1962년까지 덕수궁에서 거주했다. 1951년 토건업자 등과 공모해 인장을 위조, 명동 소재 옛 이왕실 소유 토지와 주택을 7에 매각했다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나 6.25 전쟁 전까지 국가에서 지급한 보조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964년 황호현 국회의원의 주선으로 국회 수위로 취직했다. 그전에는 문교부 과학기술과 촉탁, 석탄공사 청량리지사 경비원 등 말단직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칠궁(궁정동 1-1)에 거주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피난 갔다 돌아와 1954년부터 덕수궁에 거주했다. 1962년 덕수궁 개축 때 집이 헐려 서울 청량2동 205번지 홍릉 내 마굿간을 개조해 2250KRW을 내고 살았으나, 영휘원 정비 계획에 따라 퇴거 요구를 받았다.
이 와중에 문화재 관리국 산림보호직원 한경숙과 다툼이 벌어졌다. 이곤은 한경숙이 “왕족이면 다냐, 나가라”라는 폭언과 집안 기물을 부숴 다투다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고소했고, 한경숙도 이곤으로부터 폭행당해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맞고소를 제기했다. 결국 둘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쌍방 입건되었다.
1969년 4월 23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홍릉 내 이곤의 집을 철거 조치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철거 전 7번이나 경고장을 보냈으나 이곤은 이사 자금이 없다며 불응해 왔다. 철거 후 홍릉 내에 천막을 치고 거주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974년 국회사무처 경비직에서 퇴직했다.
2.1. 생애 초반
1919년 한성부(현재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준용의 양자가 된 흥영군 이우는 그의 친형이다.
1952년부터 구황실재산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얻어 1962년까지 덕수궁에서 거주했다.
1951년 토건업자 등과 공모해 인장을 위조, 명동 소재 옛 이왕실 소유 토지와 주택을 7에 매각했다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나 6.25 사변 전까지 국가에서 지급한 보조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2.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2년부터 구황실재산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의 허가를 얻어 1962년까지 덕수궁에서 거주했다.
1951년 토건업자 등과 공모해 인장을 위조, 명동 소재 옛 이왕실 소유 토지와 주택을 7에 매각했다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 징역 3년을 구형받았으나 6.25 전쟁 전까지 국가에서 지급한 보조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2.3. 공무원 생활과 말년
1964년 황호현 국회의원의 주선으로 국회 수위로 취직했다. 그전에는 문교부 과학기술과 촉탁, 석탄공사 청량리지사 경비원 등 말단직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칠궁(궁정동 1-1)에 거주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피난 갔다 돌아와 1954년부터 덕수궁에 거주했다. 1962년 덕수궁 개축 때 집이 헐려 서울 청량2동 205번지 홍릉 내 마굿간을 개조해 2250KRW을 내고 살았으나, 영휘원 정비 계획에 따라 퇴거 요구를 받았다.
이 와중에 문화재 관리국 산림보호직원 한경숙과 다툼이 벌어졌다. 이곤은 한경숙이 “왕족이면 다냐, 나가라”라는 폭언과 집안 기물을 부숴 다투다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고소했고, 한경숙도 이곤으로부터 폭행당해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맞고소를 제기했다. 결국 둘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쌍방 입건되었다.
1969년 4월 23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홍릉 내 이곤의 집을 철거 조치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철거 전 7번이나 경고장을 보냈으나 이곤은 이사 자금이 없다며 불응해 왔다. 철거 후 홍릉 내에 천막을 치고 거주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974년 국회사무처 경비직에서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