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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18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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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준용은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로, 1870년에 태어나 1917년에 사망했다. 그는 고종의 폐위와 자신의 왕위 등극을 시도하며 정치적 야심을 드러냈으나, 여러 차례 실패했다. 1886년에는 청나라 공사 위안스카이가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을 옹립하려 했으나 이홍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894년에는 명성황후 폐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갑오경장 이후 친일파 암살 혐의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이후 일본 유학, 영선군 봉작 등을 거치며 대한제국 시기 육군 소장까지 올랐으나, 결국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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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187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준용 (1918년)
한글 이름이준용
한자 이름李埈鎔
로마자 표기I Junyong
작위영선군
일본식 이름李埈
경극(景極)
석정(石坡), 송정(松亭)
출생1870년 7월 23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운현궁
사망1917년 3월 22일
사망 장소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운현궁
능묘흥원(興園)
종교유교(성리학)
신분
작위영선군 (永宣君)
왕공족공(公)
가족 관계
아버지흥친왕 이희
어머니풍산 홍씨 부인 (생모), 여주 이씨 부인 (계모)
배우자초배 남양 홍씨 부인, 계배 광산 김씨 부인, 첩실 이옥경, 첩실 전순혁
친인척당조카 이우, 이진완
경력
관직형조참의, 승정원도승지, 성균관대사성
품계보국숭록대부, 상보국숭록대부
작위공(1912~1917)
군사 경력
소속대한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7년 8월 14일 - 1910년 10월
최종 계급육군 참장
작위 계승
영선군1907년 ~ 1910년
공(公), 운현궁1912년 ~ 1917년
공(公), 운현궁 전임이재면
공(公), 운현궁 후임이우

2. 생애

이준용은 1870년 흥친왕의 아들이자 고종의 친형으로 태어났다. 188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고,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주한 청나라 공사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이홍장의 반대로 실패했다.[1]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이준용은 일본의 영향으로 석방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이준용은 한국에 머물렀다.[2] 그는 정부 전복 시도로 투옥되었지만, 황제의 특별 사면을 받았다. 석방 후 유럽을 여행하고 1899년 1월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900년 6월 안경수의 쿠데타 시도에 연루되었다.[4]

1907년 11월 27일, 이준용은 대한제국군 소장으로 임명되었다.[5]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에는 왕족의 대우를 받았으나 체념한 채 술로 세월을 보냈다. 일제로부터 168000KRW을 받았으며,[78] 1910년 8월 중추원 고문직을 받았고, 12월 28일 일본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1912년 9월 9일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하자, 9월 20일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아버지의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 공'''(李埈 公)이라는 호칭을 받았다.[82]

만년에는 병석에 누워 지내다가 1917년 3월 22일에 47세로 사망했다.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삼았다.[83]

2. 1. 생애 초기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은 1870년 한성부 종로방 운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자 이재면과 풍산 홍씨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9월 20일 개명 전까지 사용한 자(字)는 경극(景極)이고, 아호는 석정(石庭)과 송정(松亭)이다. 고종은 그의 숙부였다. 동생 이문용은 20세에 요절하였다.

임오군란 이전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에게 글을 배웠다.[13][14] 허욱임오군란 때 병사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켰다가 군란 진압 후 죽임을 당하였다.[13]

소년기 이준용은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파락호 생활, 배신, 음모를 접하며 야심은 있었지만 쉽게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고,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1880년 관례를 올려 성인이 되었다.

2. 1. 1. 출생과 가계

1870년 7월 23일(음력 6월 25일) 한성부 종로방 운니동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자 흥친왕 이재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경극(景極)이고, 아호는 석정(石庭)과 송정(松亭)이다. 고종은 그의 숙부였다.[1]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미성년자였던 숙부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했으며, 적극적이고 야심만만하였다. 김윤식의 신도비명에는 '이준용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리하고 행동거지가 신중하여 대원군이 매우 총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5]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그의 영특함을 눈여겨보고, 아버지 이재면보다 실질적인 가장이자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소년기 이준용은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880년 4월 7일 관례를 올려 성인이 되었고, 그해 6월 23일(음력 5월 16일) 판서를 지낸 홍종석(洪鍾奭)의 장녀 남양 홍씨와 혼례를 올렸다.

2. 1. 2. 고종의 대안으로 지목되다

흥선대원군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왕후를 폐위하고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13] 배다른 삼촌 이재선이 처형되고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 조차 유약한 성격이라, 대원군은 이후 이준용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준용을 조선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섭정 자리를 차지하려 했으나, 정변은 번번히 실패하였다.[13] 이 외에도 고종 정부에 반대하는 국내외 여러 정치 세력들이 고종이나 순종의 대안으로 이준용을 주목하였다.[16] 이준용은 15세부터 30대 중반까지 반정부 세력들로부터 고종과 순종을 대신할 왕으로 주목받았다.[17]

이 때문에 이준용은 숱한 암살 위협과 친고종, 친민씨계 언관들의 탄핵,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민첩한 행동으로 암살 위협을 피했다. 초기에는 추대되는 입장이었지만, 점차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의 야망은 고종과 민씨에게도 전해졌다.

1886년, 주한 청나라 공사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이홍장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1]

2. 2. 관료 생활

1880년대 초 음직으로 교관에 제수되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개화파에 의해 세자익위사 세마(洗馬)에 올랐으나,[17] 갑신정변 진압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책임을 추궁당하지는 않았다. 1885년 8월 동몽교관에 제수되었고, 1886년 충량과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었다.[18]

1885년 8월 27일 동몽교관, 1886년 3월 29일 고종이 명나라 숭정제의 기일을 기념하여 친히 주관한 충량과 문과에 합격하여 무공랑으로 승진, 홍문관 정자로 발탁되었다. 이후 삼사의 청요직을 거쳐 1887년 부사용(副司勇)에 임명되고, 그해 예문관 검열(檢閱), 세자시강원 설서(設書)를 지냈으며, 6월 무관의 품계인 선략장군에 제수되었다가, 6월 11일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홍문관 부응교로 발탁됐다. 그해 여름에 홍문관 부응교, 전보국 주사(電報局主事)를 거쳐 다시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

2. 3. 군주의 대안자

흥선대원군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 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다. 대원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종과 왕후를 폐위하고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13] 이준용은 발언을 삼가고 은인자중하였다. 배다른 삼촌 이재선이 처형되고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 조차 유유한 성격이라 대원군은 이후 이준용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섭정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도로 정변을 기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13] 고종 정부에 반대하는 국내외 여러 정치 세력들 또한 고종이나 순종의 대안으로 이준용을 주목하였다.[16] 이준용은 15세부터 30대 중반까지 끊임없이 반정부 세력들로부터 고종과 태자를 대신할 왕으로 주목받았다.[17] 이 때문에 그는 숱한 자객과 피습, 폭탄 테러의 위협과 친고종, 친민씨계 언관들의 주된 탄핵,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날렵하고 민첩한 행동으로 테러와 암살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초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추대되었지만 점차 자신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나라고 못할 것은 무엇이냐"며 공공연히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의 총명함과 야심은 소문이 되어 고종과 왕비 민씨의 귀에도 전해졌다.

1886년, 주한 청나라 공사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이홍장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1]

2. 3. 1. 1차 추대 시도

갑오경장 초기에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은 고종 폐위의 사전 작업으로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려 하였다.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폐위의 뜻을 담은 문서를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제시했다.[23] 그러나 일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준용은 직접 사람을 보내 일본 공사관 측과 교섭하며 지지를 구했다.

이준용은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일본 공사 오토리를 설득하고자 일본공사관을 두 번 방문했다. 하지만 스기무라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23] 흥선대원군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24] 7월 초 고종은 갑오경장을 실시했다. 이때에도 이준용은 계속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 폐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7월 12일 예조참판(禮曺參判)에 임명되었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를 공격, 폐서인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일본 공사관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하였다.

7월 15일 이준용은 종정경, 친군통위사 겸 정부당상, 내무아문협판에 임명되었다.[24] 대원군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감시하는 역할을 큰아들 이재면에게 맡기는 한편, 손자 이준용을 종정경, 친군위통위사 겸 정부 당상, 내무아문 협판으로 임명했다.[25] 이 중 종정경은 종친의 지도자라는 상징적인 관직이었고, 통위사는 수도의 가장 강력한 군영 중 하나인 통위영을 통솔하는 책임자였으며,[24] 내무아문협판은 내무부 차관으로서 전국 지방관을 다스리는 권한과 한성부경찰권을 통솔하는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24] 7월 17일 군국기무처는 이준용을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추천할 것[24]을 고종에게 건의했다.[26] 이 무렵 내무대신이 자주 교체되었기 때문에, 이준용은 내무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사실상 내무대신(장관급)의 역할까지 대신 수행했다.

그러나 이준용의 권한 확대를 경계한 고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26] 곧이어 이준용은 일본주차 전권공사(日本駐箚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을 거부했다. 이에 대원군은 7월 19일 이준용을 내무대신서리에 임명하여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했다. 이 무렵 내무대신이 자주 교체되었으므로, 이준용은 내무대신(장관급)의 역할까지 대신 수행하게 되었다.[26][27] 고종과 민씨 세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준용은 비밀리에 동학 농민군 측에 사람을 보내 정보를 주고받았다.

2. 3. 2. 명성황후 폐위 기도와 실패

1894년 갑오경장 초,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은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측의 미온적인 태도로 실패하였다.[13] 이준용은 직접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으나,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이준용은 종정경, 친군통위사 겸 정부당상, 내무아문협판 등에 임명되어 내정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고종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안경수와 권형진을 조사하여 처형하는 과정에서 1894년 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러한 역모 사건은 결국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52] 고종은 이준용 역시 을미사변의 주요 배후 중 한 사람으로 의심했다. 명성황후 폐출과 제거 음모에 꾸준히 가담한 점과 명성황후 계열에 의해 암살 미수가 있었던 점 등을 감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을미사변에 직접 협력했거나 가담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2. 3. 3. 2차 추대 시도

흥선대원군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 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다. 대원군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종과 왕후를 폐위하고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13] 배다른 삼촌 이재선이 처형되고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 조차 유유한 성격이라 대원군은 이후 이준용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준용을 조선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섭정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여러 번 정변을 기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13] 고종 정부에 반대하는 국내외 여러 정치 세력들 또한 고종이나 순종의 대안으로 이준용을 주목하였다.[16] 이준용은 15세부터 30대 중반까지 끊임없이 반정부 세력들로부터 고종과 태자를 대신할 왕으로 주목받았다.[17]

이 때문에 이준용은 숱한 자객과 피습, 폭탄 테러의 위협과 친고종, 친민씨계 언관들의 주된 탄핵,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날렵하고 민첩한 행동으로 테러와 암살 위협, 자객을 피할 수 있었다. 초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추대되는 입장이었지만 점차 자신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나라고 못할 것은 무엇이냐"며 공공연히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의 총명함과 야심, 욕망은 소문이 되어 퍼졌고, 이는 고종과 왕비 민씨의 귀에도 전해졌다.

1886년, 주한 청나라 공사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이홍장의 반대로 위안스카이는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1] 1900년 6월, 이준용은 안경수의 쿠데타 시도에 연루되었다.[4]

2. 3. 4. 수감과 고문

1895년 동학 농민 운동과 관련하여 역모 혐의로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된 뒤 20여 일 간 혹독한 심문을 당했다.[13] 황현매천야록에서 심문관 중 한 명인 박영효명성황후의 사주를 받고 그를 죽이려 했다고 기록했다. 황현에 의하면 '박영효는 중궁(명성황후)의 교지를 받아 이준용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고문을 가하여 감옥을 옮기고, 대원군을 반역죄로 다스리려고 하므로 부대부인(여흥부대부인 민씨)은 운현궁으로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때 박영효 등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사람들의 여론이 두려워 부득이 (이준용의) 형량을 감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른 심문관인 서광범 역시 그에게 고문을 가하였다. 황현에 의하면 '이준용이 국문을 받을 때, 서광범도 그를 심문하였는데, 그에게 온갖 참혹스러운 고문을 가하여 발가락과 손가락이 (몸에서)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때 이준용은 고함을 지르며 말하기를, "나를 빨리 죽여 주시오.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옥졸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팔뚝을 걷어붙였다.'라고 한다.[13] 박영효, 서광범 등은 그에게 고문을 가하며 동학 농민 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을 집중 추궁하였다. 그러나 형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동학 농민 운동과의 연계 의혹을 끝까지 부인하거나 입을 열지 않았다.

개화파 서광범이 주재하는 특별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이준용은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준용 등 6인이 대역모반죄, 김학우 살인죄, 모살죄 등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사형 교살형을 선고받았다.[13] 이준용은 이에 불복했고, 손자의 사형 판결 소식을 접한 흥선대원군은 이준용 구명 운동을 했다. 박영효, 서광범 등의 고문 과정에서의 학대와 악형으로 동정 여론이 조성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전 여항인들과의 친분을 활용, 천하장안과 여항인들을 통해 시장에 사람을 보내 이준용이 억울하게 투옥되었음을 알렸다. 이 무렵 이준용은 사람을 시켜 유길준 등과도 교섭을 시도하였다.

1895년 4월 19일 서광범이 주심이고, 이재정과 조신희를 배석판사, 검사 안녕수, 김기룡의 입회하에 열린 공개특별재판에서 이준용은 2등급 강등되고,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그러나 판결 직후 고종의 특명으로 이준용의 형을 유배형 10년으로 다시 낮추었다. 흥선대원군은 어떤 대가를 주고서라도 손자를 구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와 각국 공사들을 찾아가 절박한 부탁을 하였고[39], 대원군의 부탁을 받은 이노우에와 각국 공사들은 이준용에 대한 온건한 처벌을 호소하였다.[39] 당황한 외교사절단은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이노우에 일본 공사에게 압력을 가하여 이준용을 석방[41] 케 하라고 하였다. 이준용에 대해서는 내무대신 박영효와 법무대신 서광범이 극형설을 주장하였지만 감형설이 통과되어, 사형에서 형이 감량되었다.

1895년 4월 19일 특별법원에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34]다. 이 기간 중 이준용은 재판과 고문에 시달렸다. 흥선대원군은 계속 손자인 그의 석방을 위해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특별법원에서 심리를 받은 이준용은 4월 19일 다음과 같은 죄명을 선고받았다. '즉 동학도를 이용하여 국왕과 왕태자를 죽이고 개화파 각료들을 살해하고 현 정부를 전복시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한 이준용, 박준양, 이태용 등은 역도율모반죄이고, 김학우 암살계획과 실행에 가담한 고종주, 전동석 등은 인명율모살죄에 각각 해당하나 김학우 암살에 있어서는 이준용의 직접적인 관련 증거는 없다고 판결했다.[45]

정부 내에서도 이준용 사건을 두고 의견 대립이 있어[41] 결국 그는 사형을 면하고 유배 10년형으로 결정되었다. 4월 19일 고종의 특별 사면조치로 강화부 교동도에 10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6월 2일 석방되었다.[39] 그러나 다시 투옥되었고 1895년 6월 12일 다시 특별사면되었다.

2. 3. 5. 형집행 감형과 유배

1895년 4월 19일 특별법원에서 종신유형을 선고받았다.[34] 이 기간 중 이준용은 재판과 고문에 시달렸다. 흥선대원군은 손자 이준용의 석방을 위해 계속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특별법원은 이준용에게 '동학도를 이용하여 국왕과 왕태자를 죽이고 개화파 각료들을 살해하고 현 정부를 전복시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한 이준용, 박준양, 이태용 등은 역도율모반죄이고, 김학우 암살계획과 실행에 가담한 고종주, 전동석 등은 인명율모살죄에 각각 해당하나 김학우 암살에 있어서는 이준용의 직접적인 관련 증거는 없다'고 판결했다.[45]

정부 내에서도 이준용 사건을 두고 의견 대립이 있어[41] 사형 대신 유배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4월 19일 고종의 특별 사면 조치로 강화부 교동도에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6월 2일 석방되었다.[39] 그러나 다시 투옥되었고, 1895년 6월 12일 다시 특별 사면되었다. 9월 1일 중추원 1등 의관 칙임관 3등에 임명되었으나 3일 만인 9월 4일 사퇴하였다.

2. 3. 6. 을미사변 전후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일본의 도움으로[22]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이준용에게 명성황후 제거 실패에 대비해 일본으로 도망가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이준용은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강화군 교동도에 머무르다가 한성부로 갔다.

석방과 동시에 한성으로 돌아와 김홍집 내각에 발탁되어 내부 협판, 통위사에 등용되었다. 일본 공사의 강요로 일본으로 유학하고, 주차(駐箚) 일본공사가 되었다.[22] 이때까지는 극렬한 배일주의자였으나 뒤에 친일파로 변절했다고 알려진다.[46]

10월 22일 명성황후 장례식의 지문서사관(誌文書寫官)에 임명됐고, 11월 1일 궁내부특진관 칙임관이 되었다. 그러나 11월 12일 정부의 명으로 영선사장(營繕司長) 박용화(朴鏞和)·주사(主事) 어윤적(魚允迪)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했다. 12월 도쿄에 도착, 이후 도쿄의 일본공사관에서 별다른 활동 없이 주일본 대한제국 공사로만 활동하였다. 그러나 고종 등은 그 역시 을미사변에 관여된 것으로 간주했다.

2. 4. 정치적 몰락

이준용은 1870년 흥친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고종의 친형이었다. 1884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고,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주한 청나라 공사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이홍장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1]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이준용은 일본의 영향으로 석방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그에게 일본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이준용은 한국에 머물렀다.[2]

이준용은 정부 전복 시도로 투옥되었지만, 황제의 특별 사면을 받았다. 석방된 후, 유럽을 여행하고 1899년 1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1900년 6월, 안경수의 쿠데타 시도에 연루되었다.[4] 1907년 11월 27일, 대한제국군 소장으로 임명되었다.[5]

2. 4. 1. 귀국과 작위 수여

1907년 8월 13일 순종의 특명으로 죄명이 삭제되었다.[13] 1907년 8월 14일 종일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자품을 받고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이 되었으며, 9월 12일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졌다. 11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副將)과 일본파견 특별보빙사절단에 임명된 아버지 흥친왕을 수행하여 보빙대사수행원의 직책으로 일본에 다녀왔다.[13] 순종은 그를 복권시켰지만, 내심 그를 경계하였다.[13]

1907년 7월 27일 김옥균에게 충달공의 시호가 내려졌고, 그는 이날 김옥균 시호 추증 기념식에 참석한 내빈[67]의 한사람으로 김옥균 연시연 식장에 참석했다. 김옥균의 복권과 시호 기념식에 일시적으로 참석한 뒤 영구 귀국하게 된다.[13] 그러나 퇴위한 뒤에도 고종은 그를 의심, 경계했고, 잠재적 왕위계승권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려 노력했다.[13]

1907년 귀국 후 대원군의 사당을 배알할 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슬퍼하는 기색도 없어서 주변으로부터 무루공자(武淚公子)라는 조소를 받았다.[66] 쿠데타 실패와 암살 위협, 망명 등으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기에 그는 가족이나 친척들에 대해 원망과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을 털어놓을 때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가족, 친척에 대해 상당히 냉담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66]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64][68]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60] 의화군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69]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69]

영선군 봉군 교지 (1907년 9월 12일)

2. 4. 2. 교육, 계몽 활동

그는 다방면의 책을 읽었고, 개화파를 통해 입수된 서양 서적들을 통해 독일프리드리히 대왕, 프랑스루이 14세, 이탈리아의 통일과 가리발디, 프랑스 대혁명 등을 접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서구 문명의 위력을 인식한 그는 조선도 일본처럼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생각의 틀을 바꾼다면 서양 열강과 같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71]

1908년 그는 정부 고관들이 다수 참여한 대동학회기호흥학회에서 활동하였다. 대동학회에는 창립 회원으로만 참여했으나, 기호흥학회에는 다소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71] 그는 기호흥학회 기관지 창간호에 민영휘, 김윤식, 김가진, 신기선 등과 함께 축사를 실었다. 1908년 10월 아버지와 함께 매년, 매월 50원을 기호흥학회에 보조하기로 하였으며, 이는 1909년 1월부터 기호흥학회월보 발행이 중단된 1909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준용은 기호흥학회월보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범 교육을 권장하는 논설 2편을 기고하였다.[71] 1908년부터 1909년 전국을 다니며 교육과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2. 4. 3. 4차 집권 시도와 좌절

1909년까지도 이준용은 집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일제의 기밀 보고 자료에 따르면, "1909년 2월경에 그는 정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에서 친일파이근호, 이근택 형제와 자주 모의하며 이완용을 대신해서 자신이 수상이 되려는 기대를 품고 미리 일본의 여러 대관들과 면식을 쌓아두기 위해 조만간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72][73] 또한 1909년 7월이지용, 김윤식 등과 정우회 결성을 계획하기도 했다.[72][74]

그가 결성하려던 정우회는 정당의 성격을 표방하며 일본식 이름을 본뜬 단체로서, 통감정치가 강화되면서 기존 질서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 국내 정치세력들이 세력 결집을 통해 권력 질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75]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한국이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통감부 시기에 대다수 한국의 유력 인사들처럼 이준용도 일본의 후원 하에 정권을 장악하여 한국을 통치해 보려는 의욕을 나타냈던 것으로 보인다.[76] 그러나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은 이미 한국의 일본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는 결국 좌절했다.

2. 5. 일제강점기 활동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이준용은 왕족의 대우를 받았으나 체념한 채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일병합 뒤 일제는 그에게 168000KRW을 지불하였다.[78] 1910년 8월 중추원 고문직을 받았고, 12월 28일 일본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1911년 7월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다. 1912년 9월 9일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하자, 9월 20일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아버지의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 공'''(李埈 公)이라는 호칭을 받았다.[82] 일제는 그에게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이라는 훈장을 주었는데, 그는 이를 벽에 걸어놓고 절을 하며 은혜에 감격했다고 한다.[78]

을사늑약 이후 이준용은 정계의 중심인물이 아니었고 형식적이나마 왕족의 예우를 받을 뿐이었다. 의친왕 계열 역시 경계를 받으면서 그 역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망명과 도피생활 등으로 심해진 폐병과 심장 질환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는 실의에 빠졌다.

이준용


만년에 이준용은 병석에 누워서 지냈다. 1915년 5월 20일 다이쇼 천황으로부터 친히 일본군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으나, 9월 11일 병으로 금강산으로 요양을 갔고, 육군 중장직을 사퇴하였다. 그의 부인 김씨 역시 1915년 6월 병을 앓아 조선총독부가 특별히 병원에 입원시키고 일본인 의사와 사토(佐藤)라는 성의 전담 간호사를 배치해주었다.

아들이 없던 그는 1916년 첩인 전순혁(全順爀)이 임신하자 아들을 기대하였으나, 1916년 5월 18일이진완(李辰琬)을 얻었다. 결국 아들이 없어 1917년 사촌 동생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삼았고[83], 1917년 양력 3월 22일(음력 2월 29일)에 47세로 사망했다. 양자 이우가 가계와 세습 공위를 이었다.

양자 이우
(사촌동생 의친왕의 차남)


순종은 한일합방 직후에도 수년간 양반들에게 시호를 내렸고, 시호를 받지 못한 관료나 학자들은 사시(私諡)라는 사적인 시호를 올렸으나 이준용에게는 순종의 시호도, 사시도 추서되지 않았다.

2. 5. 1. 한일합방 직후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이준용은 왕족의 대우를 받았으나 체념한 채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일병합 뒤 일제는 그에게 168000KRW을 지불하였다.[78] 1910년 8월 중추원 고문직을 받았고, 12월 28일 일본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일본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1911년 7월 종척 집사(宗戚執事)에 임명되었다. 1912년 9월 9일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하자, 9월 20일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아버지의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 공'''(李埈 公)이라는 호칭을 받았다.[82] 일제는 그에게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이라는 훈장을 주었는데, 그는 이를 벽에 걸어놓고 절을 하며 은혜에 감격했다고 한다.[78]

2. 5. 2. 쓸쓸한 만년

(사촌동생 의친왕의 차남)]]

만년에는 병석에 누워서 살다시피 했다. 1915년 5월 20일 다이쇼 천황으로부터 친히 일본군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9월 11일 병으로 금강산으로 요양을 갔고, 육군 중장직을 사퇴하였다. 그의 부인 김씨 역시 1915년 6월 병을 앓아 조선총독부가 특별히 병원에 입원하고 일본인 의사와 사토(佐藤)라는 성의 전담 간호사를 배치해주었다.

아들이 없던 그는 1916년 첩인 전순혁(全順爀)이 회임하자 아들을 기대하였으나, 1916년 5월 18일 그에게서 딸 이진완(李辰琬)을 보았다. 결국 아들이 없어 1917년 사촌 동생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삼았고[83], 1917년 양력 3월 22일(음력 2월 29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47세였다. 이에 양자 이우가 가계와 세습 공위를 이었다.

한일합방 직후에도 수년간 순종은 형식적이나마 양반들에게 시호를 내렸고, 시호를 받지 못한 관료나 학자들은 사시(私諡)라고 하는 사적인 시호를 올렸으나 이준용에게는 순종의 시호도, 사시도 일체 아무것도 추서되지 못했다.

3. 사후

1917년 4월 5일 흥선대원군의 묘가 있던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흥친왕릉, 흥선대원군묘 근처로 이장되었다. 2001년 후손들이 유골을 화장하여 흥선대원군 묘 입구에 납골묘로 조성하였다. 이때 경기도 광주군 세촌면 수곡에 안장되었던 본부인 남양홍씨의 묘도 화장되어 같이 안장되었다.[97]

신도비문은 운양 김윤식(金允植)이 짓고, 해평군(海平君) 윤용구(尹用求)가 썼으며, 김성근이 글자를 썼다. 비석은 유실되어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김윤식의 글과 김성근의 글씨체를 본따서 다시 비석을 세웠다.[97]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아버지 이재면과 함께 포함되었다. 그러나 신궁봉경회라는 단체의 간부로만 있었던 점과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하지 않은 점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97]

그의 양자 이우는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피폭을 당해 사망했다. 이우는 이청, 이종의 두 아들을 두어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 이종1966년 미국 유학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이청이 운현궁의 당주로서 가계를 이어가고 있다.[97]

뮈텔에 의하면 그는 20대 때에는 보통 체격이었으나 30대 후반에 귀국했을 때는 뮈텔주교도 그를 몰라 봤을 만큼 비대한 체격으로 변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양(洋)돼지'라고 불렸고, 장정 2명 이상이 끄는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97][98] 이는 한때 민첩하고 날렵함으로 고종의 대안자로 지목되었고, 고종과 민씨 척족계열이 보낸 자객이나 암살의 위협을 모면한 것, 영특했던 소년기와는 대조적으로 변한 그의 모습에 대한 경멸과 조롱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훗날 그의 인척이 되는 윤치호도 그가 양돼지 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기록해 놓았다.[99][100] 윤치호는 그가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가마나 교자 위에 앉아있으면서 아랫사람들에게만 빨리 올라가지 못하느냐고 재촉한다며, 걸어서라도 올라갈 생각은 못한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의 계비 광산 김씨는 뒷날 양자 이우일본인과의 결혼을 피해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는 것을 한때 반대하기도 했다. 이는 박영효가 이준용을 처형하려 했던 점 때문인지, 박영효의 손녀가 적손이 아니라 서손녀라서 반대한 것인가 여부는 불확실하다.[97]

4. 수상 경력

수여 년도훈장 및 기념장
1907년대한제국 대훈위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
1908년대한제국 대훈위서성대수장(瑞星大綬章)
1910년대한제국 대훈위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 일본 제국 훈일등 욱일장,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
1912년일본 제국 한국병합기념장


5. 평가와 비판

이준용은 권력을 추구했던 야심가라는 평가와 함께,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그는 우유부단한 고종이나 병약했던 순종과는 달리,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이준용을 '''종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기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일본 니치니치 신문의 서울 특파원 역시 '조선에서 가장 재능 있는 젊은이' 중 한 명이라고 언급했다.[84] 사토 경도 1896년 2월 도쿄에서 이준용을 만난 후 유능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84]

그러나 뮈텔에 따르면, 20대에는 평범한 체격이었던 이준용은 30대 후반에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뮈텔 주교가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매우 비대해져 있었다고 한다.[97][98] 이 때문에 그는 '양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장정 두 명 이상이 끄는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97][98] 이는 한때 민첩하고 날렵하여 고종의 대안으로 거론되었고, 고종과 민씨 척족 계열이 보낸 자객과 암살 위협을 피했던 그의 영특했던 소년 시절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에 대한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윤치호 역시 그의 인척이 됨에도 불구하고, 이준용이 '양돼지'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기록했다.[99][100] 윤치호는 이준용이 한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마나 교자 위에 앉아 아랫사람들에게만 빨리 가라고 재촉하며, 자신은 걸어서 올라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의 계비 광산 김씨는 훗날 양자 이우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박영효가 이준용을 처형하려 했던 점 때문인지, 아니면 박영효의 손녀가 적손이 아닌 서손녀였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운현궁 주인들의 초상화 중 흥선대원군은 생전인 1869년, 1880년, 흥친왕은 1880년에 초상화가 그려졌다. 그러나 이준용은 영정을 남기지 않아, 사후인 1918년 그의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다.

5. 1. 긍정적 평가

그는 유능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영국 공사 사토 경 등 외국 인사들도 그를 유능한 인물로 평가하였다.[1]

5. 2. 비판

이준용은 초기에는 반일·배일주의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이후 일본에 타협하고 변절했다는 비판을 받는다.[97][98]

뮈텔의 기록에 따르면, 이준용은 20대에는 보통 체격이었으나 30대 후반 귀국했을 때는 뮈텔도 몰라볼 정도로 비대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양(洋)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장정 2명 이상이 끄는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97][98] 이는 민첩하고 영특했던 소년기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한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윤치호는 이준용이 '양돼지'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기록했다.[99][100] 그는 이준용이 한여름에도 땀을 흘리면서 가마나 교자 위에 앉아 아랫사람들에게만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자신은 걸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조롱했다.

5. 2. 1. 친일 행적 논란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이준용을 포함시켰다. 이준용이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 체결에 관여하고, 친일 단체의 총재직을 수행한 점[85][86][87]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흥친왕의 친일 행적이나 은사금 수령이 일제에 의한 회유책이었을 뿐, 자발적인 행적은 아니었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2007년 1월 18일, 이준용의 손자 이모씨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이 증조부와 조부의 행위를 친일행위로 규정한 것은 부당하다며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88] 그는 2006년 11월, 위원회의 결정이 헌법상 보장된 인격권 등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기도 했다.[86][89][90] 소장에서 이씨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증조부와 조부의 행위를 일제강점기하에서의 친일반민족 행위로 결정한 근거법률인 반민족특별법이 위헌이기 때문에 이 결정은 효력이 없어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88]

그러나 2009년 10월 5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 소송을 각하했다.[85][87] 재판부는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통한 후손의 인격권 침해는 법률조항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른 결정과 사료의 공개라는 구체적인 집행행위를 매개로 발생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행정소송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86] 또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으로 인해 조사대상자 및 그 후손의 인격권이 제한받게 되더라도 이는 부수적 결과에 불과할 뿐 이것을 두고 일종의 형벌로서 수치형이나 명예형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90]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이준용은 포함되었다.

하지만 이준용이 일제의 침략을 노골적으로 찬양하지 않았다는 점, 친일단체인 신궁봉경회에 참여한 것이나 일본 신사에 단군, 기자, 이성계를 배향한 것이 적극적인 친일행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6. 사상적 측면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준용을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시켰다.[85][86][87]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친일 단체 총재직을 수행한 점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흥친왕의 친일 행적이나 은사금 수령이 일제에 의한 회유책이었을 뿐, 자발적인 행적은 아니었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2007년 1월 18일, 이준용의 손자 이모씨는 증조부와 조부의 행위를 친일행위로 규정한 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하여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88] 그는 2006년 11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며[86][89][90] "반민족특별법이 위헌이기 때문에 이 결정은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88] 그러나 2009년 10월 5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으로 인한 후손의 인격권 침해는 법률 조항 자체가 아니라 위원회의 조사에 따른 결정과 사료 공개라는 구체적인 집행 행위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며, 이는 행정소송으로 구제받을 수 있다"고 판시했다.[85][87] 또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 조사대상자와 그 후손의 인격권을 제한하더라도, 이는 부수적인 결과일 뿐 형벌로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90]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이준용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준용이 일제 침략을 노골적으로 찬양하지 않았다는 점, 신궁봉경회 참여와 단군, 기자, 이성계를 일본 신사에 배향한 것이 적극적인 친일행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 이준용은 일본 망명 이전부터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신이 깊어져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장기간의 망명생활로 가족애가 무뎌졌고, 자신을 사지로 내몬 흥선대원군과 부모, 자신을 돕지 않은 친척들에 대한 증오와 좌절감에 휩싸였다.[66]

1907년 귀국 후 흥선대원군의 사당을 배알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아 '무루공자(武淚公子)'라는 조롱을 받았고,[66] 1912년 아버지의 임종과 장례에도 정성을 다하지 않아 비판받았다.[66][96] 이는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욕과 통치 전략에 대한 반감,[66] 을미사변 직전 대원군이 자신의 일본 유학을 허락한 사실, 일본 망명 중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 부족 등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 때문이었다.[81]

특히 10여 년간 일본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불안한 날들을 보낸 개인적인 경험이 그의 감정과 가족애를 무디게 만든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81] 조선 조정과 가족, 친척들이 자신을 암살하려던 자객들을 막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 환멸감, 불신이 컸다.

6. 1. 교육 입국론

다방면의 책을 다독했고, 개화파들에 의해 입수된 서양 서적들을 읽은 이준용은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서구 문명의 위력을 인식한 그는 조선도 일본과 같이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의 틀을 바꿔나간다면 서양 열강과 같은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71] 그는 나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교육이라 보았고, 국세가 나날이 기울어가고 민생이 나날이 곤궁해지는 암흑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을 중시해야 한다고 보았다.[71] 그렇게 해야만이 한국이 문명의 진보의 영역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71]

1908년 그는 정부 고관들이 다수 참여한 대동학회나 기호흥학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기호흥학회 회원으로서 1908년 10월 아버지와 함께 매년간 매월 50KRW을 기호흥학회에 보조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보조 활동은 1909년 1월부터 기호흥학회월보의 발행이 중단된 1909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나아가 이준용은 기호흥학회월보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범교육을 권장하는 2편의 논설을 기고하였다.[71] 1908년부터 1909년 전국적으로 강연을 다니며 교육과 개항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준용은 자신의 교육론을 직접 실천에 옮겼다. 1908년 봄에 이지용, 이재극 등과 함께 경서우 북부 계동에 황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돈명학교(敦明學敎)를 설립하였다.[91] 처음에는 황족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점차 문호를 개방하여 양반가 자제들, 평민, 민간인의 아동들 100명 정도가 수학하게 되었다. 1909년 6월 이준용은 자신이 소유한 전답을 저당잡혀 2만의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돈명학교를 건립하기 위한 방안을 황족들과 논의하기도 하였다.[91][94]

6. 2. 실력 양성론

그는 인재 채용에 장벽을 없애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 사회가 붕괴한 원인은 문벌과 학맥에 의한 인재 채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명성황후의 친족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던 그는 소수 문벌이 관직과 권력을 독점하여 실력 있는 인재를 채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학통, 학파 등 학연에 의해 서로 밀어주고 당기는 식으로 관직에 등용하는 것 역시 참된 인재 채용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준용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논설에서 한국 민족의 우수성은 타고난 것으로, 결코 서구인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71]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국민들이 민생의 방도를 모르고 옛날 습관만 따르며 고루함을 편히 여겨 이웃 나라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은 모두 근대 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71]

그는 사회진화론적 문명론에 입각해 논리를 전개하며, 자질이 우수한 한국인이 무지와 빈곤을 벗어나 문명 부강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교육할 학교를 설립해야 하며,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통적 교육기관이 아닌 근대적 인재를 길러낼 사범학교를 세워 교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95]

6. 3. 정변 기도

흥선대원군은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는 정변을 기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이는 이준용을 조선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깊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13] 이 외에도 고종 정부에 반대하는 국내외 여러 정치 세력들이 고종이나 순종의 대안으로 이준용을 주목하였다.[16] 이준용은 15세부터 30대 중반까지 끊임없이 반정부 세력들로부터 고종과 태자를 대신할 왕으로 주목받았다.[17] 이 때문에 숱한 자객과 피습, 폭탄 테러의 위협과 친고종, 친민씨계 언관들의 주된 탄핵,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는 날렵하고 민첩하게 행동하여 테러와 암살 위협, 자객을 피할 수 있었다. 초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추대되는 입장이었지만, 점차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나라고 못할 것은 무엇이냐"며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의 총명함과 야심, 욕망은 소문이 되어 고종과 왕비 민씨의 귀에도 전해졌다.

아버지 흥친왕이나 삼촌 이재선과는 달리, 이준용은 직접 왕위에 오르려는 시도를 했다.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한 이후 그는 왕위에 오르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보이기도 한다.

1894년부터 을사보호조약 이전까지 그는 왕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 이후 왕 또는 황제가 될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실망하게 된다.

고종과 명성황후와 대립하던 조부 흥선대원군에 의해 고종을 대신할 국왕으로 의도되었지만, 활동은 모두 실패했다.

1895년 5월, 친일파 내각 대신 암살을 음모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특별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대원군의 탄원으로 국왕의 특사로 유배형으로 감형되었고, 그해 8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유학했다. 출국 후 귀국이 허용되지 않아 일본에 체류하다가 1897년 일본을 떠나 유럽 각지를 시찰했다. 1899년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지바현에 한거했다.

1900년 6월, 이준용은 안경수의 쿠데타 시도에 연루되었다.[4]

6. 4. 무뎌진 가족애와 개인주의

일본 망명 이전부터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불신이 깊어져, 개인주의적인 성향으로 변하였다. 장기간의 망명생활로 가족애가 무뎌졌는데, 자신을 사지로 내몬 할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부모 내외에 대한 원망과 증오,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행실을 비난하는 친척들에 대한 증오와 좌절, 환멸감에 몸부림쳤다.[66]

장기간의 일본 망명생활을 하던 이준용은 1907년 귀국 후 흥선대원군의 사당을 배알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슬퍼하는 기색도 없어 주변으로부터 무루공자(武淚公子)라는 조소를 받았다.[66] 1912년 아버지의 임종을 맞을 때와 장례를 치를 때에도 아들로서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고 비판받기도 하였다.[66][96] 또한 이를 지적하는 일가들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들은 이준용이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회한들을 잘 보여준다.[66] 여기에는 수차례 이준용 자신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야욕, 열강들의 발전상에 역행하는 흥선대원군의 통치전략에 대한[66] 반감과 거부감, 을미사변 직전 대원군이 입궐을 위해 자신의 일본 유학을 일본인들에게 허락한 사실, 국왕의 친형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신원을 요청하지 못하고 자객들의 일본행도 막지 못한 점, 일본 망명 중에 아버지가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경영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81]

무엇보다도 이준용이 10여 년 동안 일본에서 젊은 날의 대부분을 생명의 위협에 떠는 불안한 나날들을 보냈던 개인적인 쓰라린 경험이 그의 감정과 가족애를 무디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81] 일본에까지 자객을 보내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조선 조정과, 자신의 가족, 친척들이 자신을 암살하려던 자객들을 막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것도 가족과 친척, 조국에 대한 그의 원망과 배신감, 환멸감, 불신을 증폭시켰다.

7. 가족 관계

南陽 洪氏|남양 홍씨중국어, 光山 金氏|광산 김씨중국어, 全順赫|전순혁중국어

8. 기타

20대에는 보통 체격이었으나, 30대 후반에 비대한 체격으로 변하여 '양돼지'라는 별명을 얻었다.[97][98] 윤치호는 그가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가마나 교자 위에 앉아 아랫사람들에게만 빨리 올라가지 못하느냐고 재촉한다며, 걸어서라도 올라갈 생각은 못한다고 조롱했다.[99][100]

명성황후 암살 기도 의혹이 제기되었다.[52] 고종은 이준용이 을미사변의 주요 배후 중 한 사람이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가 을미사변에 직접 협력했거나 가담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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