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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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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기(李期)는 오호십육국 시대 성한의 황족으로, 이웅의 넷째 아들이다.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을 죽이고 황제가 되었으나, 자파 세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폭정을 자행하여 338년에 이수의 반란으로 폐위된 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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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성한)
기본 정보
한자 표기李期
로마자 표기Li Qi
출생314년
사망338년
이름기 (期)
봉호충도 유공 (邛都幽公)
통치 정보
직위황제
국가성한
재위 기간334년 12월 6일 - 338년
이전 통치자이반
다음 통치자이수
묘호없음
시호유공(幽公)
연호옥항(玉恆)
연호 기간335년 2월 10일 - 338년
가문
왕조성한
부황이웅
황후염황후(閻皇后)

2. 생애

이기는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이다.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였다.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웅(李雄)은 그의 여러 아들과 종실의 자제들에게 명하여 은덕과 신의로써 무리를 모으게 했는데, 많은 자들이 수백 명밖에 모으지 못했지만, 이기(李期)는 천 명을 넘게 모았다. 이기가 추천하는 사람 중 많은 수가 이웅에게 발탁되어 장사(長史)에 임명되었으므로, 이기의 문하에 들어가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20세가 되자 문장에 능했다.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겸손하게 행동하여 인재를 초빙했다. 후에 건위장군(建威將軍)에 임명되었다.

이웅이 아들들에게 재능 있는 인재를 찾아 관료로 임명하도록 지시했을 때, 이기가 가장 많은 인재를 발굴하여 많은 성한의 관리들이 이기가 발탁한 사람들이었다. 이웅은 그의 형제 이탕의 아들 이반태자이자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334년 이웅이 죽고 이반이 즉위한 후, 이기와 그의 형제 이월(李越)은 불만을 품고 이반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이반의 동생 이무(李玝)는 이 음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반에게 즉시 이월과 이기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방어 기지로 보내라고 제안했지만, 이반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전에 이웅의 아들들을 내칠 마음이 없었다. 대신 그는 이무를 내보내 갈등을 줄이려 했다. 겨울, 이반이 이웅의 관 앞에서 밤에 상중 시찰을 하던 중, 이월은 이반과 그의 형 이두(李都)를 암살하고, 임씨 태후의 조서를 위조하여 이반의 죄를 뒤집어씌워 이기를 황제로 옹립했다.

관료들은 처음에는 이월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있고 임씨 태후에 의해 길러졌다는 이유로 그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에 이기가 왕위에 올랐다.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인 이기는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였다.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기는 옥항(玉恒)으로 개원하고, 이수(李壽)를 한왕으로, 이월을 건녕왕으로 봉했다.

이기는 자파 세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상벌을 가볍게 여겨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국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즉위 초, 이기는 명망이 높았던 대장군 이수(李壽)를 경계하여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아 북쪽 변경으로 쫓아내었으며, 이수의 상관담과 이반의 어머니 라부인을 처형했다. 폭정을 자행하여 신하들이 두려워 하였다.

338년, 이수가 모반을 획책하자 이를 경계하여 첩자를 파견하고 이수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에 이수가 거병하여 성도(成都)로 접근하였으나 이기는 대비를 하지 않아 결국 성도가 함락되었다. 이수의 태자 이세는 수도 경비대 장교였는데, 성문을 열어 이수를 맞이했다.

처음에 이수는 이기의 황위를 존중하여 이기의 도당을 처형하는 것도 이기에게 표문을 올리고 행하였으나, 곧 태후 임씨(任氏)의 명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였고 공도현공(邛都縣公)에 봉해진 이기는 5월에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은 이기의 사망을 338년 5월로 기록하고 있으나 《진서(晉書)》 〈재기(載記)〉에는 33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기는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로,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였다.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기는 자파 세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상벌을 가볍게 여겨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국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즉위 초, 이기는 명망이 높았던 대장군 이수(李壽)를 경계하여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아 북쪽 변경으로 쫓아내었으며, 폭정을 자행하여 신하들이 두려워 하였다. 이 기는 국사를 대부분 그의 동생인 건녕왕 이악에게 맡겼고, 경건, 요화, 전포, 그리고 환관인 허부 또한 신뢰하며, 다른 관료들과 상의하는 일이 드물었고, 그들 중 재능이 뛰어나거나 정직한 자는 없었다. 이 웅이 세운 평화로운 질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335년, 이 반의 삼촌인 나연과 관료 상관담은 이 기를 암살하고 이 반의 아들로 교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음모는 발각되었고, 이 기는 나연과 상관담을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이 반의 어머니인 부인 나씨도 처형했다. 336년, 이 기는 조카인 무릉공 이재의 재능을 질투하여, 이재를 반역죄로 모함하여 처형했다.

338년, 이수가 모반을 획책하자 이를 경계하여 첩자를 파견하고 이수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 기와 이 악은 모두 아버지의 사촌인 이수 한왕(이 웅의 삼촌 이양의 아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이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다음 처형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방어 지역인 부성(현 쓰촨성 몐양시)에서 수도 청두를 방문할 때마다, 부하들에게 후자오 또는 진의 침략을 허위 보고하게 하여, 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이수가 거병하여 성도(成都)로 접근하였으나 이기는 대비를 하지 않아 결국 성도가 함락되었다. 338년, 은둔자 공장의 조언에 따라, 그는 고문인 나형과 해사명과 함께 청두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성공하면 진의 신하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한 매형인 임조로부터 이 기가 이수를 처형하려 한다는 편지를 위조하여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다. 병사들은 그를 믿었고, 청두를 기습 공격하여 이 기를 대비하지 못하게 했다. 이수의 태자 이세는 수도 경비대 장교였는데, 성문을 열어 이수를 맞이했다.

처음에 이수는 이기의 황위를 존중하여 이기의 도당을 처형하는 것도 이기에게 표문을 올리고 행하였으나 곧 태후 임씨(任氏)의 명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였고 공도현공(邛都縣公)에 봉해진 이기는 5월에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이수는 이 악과 이 기가 신뢰하던 다른 관료들을 체포하고 이 기에게 그들을 처형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이후 렌 태후의 조서를 위조하여 이 기를 폐위시키고 옹도공으로 강등시켰다. 이수는 황위에 오를지 진의 신하가 될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황위에 올라 국호를 한으로 바꾸면서 이 웅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이 기는 작은 현의 공작이 된 것에 대해 우울해하며 338년 말에 자살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은 이기의 사망을 338년 5월로 기록하고 있으나 《진서(晉書)》 〈재기(載記)〉에는 33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기는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로,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이고 황제에 옹립되었다. 이기는 자파 세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상벌을 가볍게 여겨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국력이 쇠퇴하였다. 즉위 초, 이기는 명망 높았던 대장군 이수(李壽)를 경계하여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아 북쪽 변경으로 쫓아내고 폭정을 자행하여 신하들이 두려워하였다.

335년, 이반의 삼촌인 나연과 관료 상관담이 이기를 암살하고 이반의 아들로 교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이반의 어머니인 부인 나씨도 처형되었다. 336년, 이기는 조카인 무릉공 이재의 재능을 질투하여 반역죄로 모함해 처형했다.

338년, 이수가 모반을 획책하자 이기는 첩자를 파견하고 이수의 일파를 처형하려 했다. 이에 이수는 거병하여 성도(成都)로 진군했고, 이기는 대비하지 못해 성도가 함락되었다. 이수는 이기의 도당을 처형하는 것을 이기에게 표문을 올리고 행하였으나, 곧 태후 임씨(任氏)의 명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고 공도현공(邛都縣公)에 봉했다.

이수는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부성에서 성도로 진군했고, 이혁을 선봉으로 삼았다. 이수가 성도에 도착하자 이기와 이월은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이수의 세자 이세는 안에서 호응하여 성문을 열고 이수를 맞이했다. 이수는 성도성을 제압하고, 궁문에 병사를 배치했다.

이기는 시중을 파견하여 위로했지만, 이수는 상국 건녕왕 이월, 상서령 하남공 경건, 상서 전포, 요화, 중상시 허부, 정서장군 이하, 장군 이서 등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이며, 정사를 어지럽혀 사직을 기울이려 꾀하고 있으니, 대역부도의 죄로 멸족하도록 상주했다. 이기는 이를 거부할 방법을 알지 못하고, 이월과 경건 등을 살해했다.

이수는 황태후의 명이라고 속여 이기를 폐하고 궁도현공으로 강등시켜 별궁에 유폐했다. 이기는 "천하의 군주가 소현의 공이 된다는 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탄식했다.

결국 이기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은 이기의 사망을 338년 5월로 기록하고 있으나, 《진서(晉書)》 〈재기(載記)〉에는 33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5월, 목을 매어 자살했을 당시 향년 25세였으며, 재위 기간은 5년이었다. 유공(幽公)으로 시호되었고, 장례는 왕례로 치러졌다. 이웅의 아들들은 모두 이수에 의해 살해되었다.

2. 1. 초기 생애

이기는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이다.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였다.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웅(李雄)은 그의 여러 아들과 종실의 자제들에게 명하여 은덕과 신의로써 무리를 모으게 했는데, 많은 자들이 수백 명밖에 모으지 못했지만, 이기(李期)는 천 명을 넘게 모았다. 이기가 추천하는 사람 중 많은 수가 이웅에게 발탁되어 장사(長史)에 임명되었으므로, 이기의 문하에 들어가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20세가 되자 문장에 능했다.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겸손하게 행동하여 인재를 초빙했다. 후에 건위장군(建威將軍)에 임명되었다.

이웅이 아들들에게 재능 있는 인재를 찾아 관료로 임명하도록 지시했을 때, 이기가 가장 많은 인재를 발굴하여 많은 성한의 관리들이 이기가 발탁한 사람들이었다. 이웅은 그의 형제 이탕의 아들 이반태자이자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334년 이웅이 죽고 이반이 즉위한 후, 이기와 그의 형제 이월(李越)은 불만을 품고 이반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이반의 동생 이무(李玝)는 이 음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반에게 즉시 이월과 이기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방어 기지로 보내라고 제안했지만, 이반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전에 이웅의 아들들을 내칠 마음이 없었다. 대신 그는 이무를 내보내 갈등을 줄이려 했다. 겨울, 이반이 이웅의 관 앞에서 밤에 상중 시찰을 하던 중, 이월은 이반과 그의 형 이두(李都)를 암살하고, 임씨 태후의 조서를 위조하여 이반의 죄를 뒤집어씌워 이기를 황제로 옹립했다.

관료들은 처음에는 이월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있고 임씨 태후에 의해 길러졌다는 이유로 그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에 이기가 왕위에 올랐다.

2. 2. 황제 즉위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인 이기는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였다.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기는 옥항(玉恒)으로 개원하고, 이수(李壽)를 한왕으로, 이월을 건녕왕으로 봉했다.

이기는 자파 세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상벌을 가볍게 여겨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국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즉위 초, 이기는 명망이 높았던 대장군 이수(李壽)를 경계하여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아 북쪽 변경으로 쫓아내었으며, 이수의 상관담과 이반의 어머니 라부인을 처형했다. 폭정을 자행하여 신하들이 두려워 하였다.

338년, 이수가 모반을 획책하자 이를 경계하여 첩자를 파견하고 이수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에 이수가 거병하여 성도(成都)로 접근하였으나 이기는 대비를 하지 않아 결국 성도가 함락되었다. 이수의 태자 이세는 수도 경비대 장교였는데, 성문을 열어 이수를 맞이했다.

처음에 이수는 이기의 황위를 존중하여 이기의 도당을 처형하는 것도 이기에게 표문을 올리고 행하였으나, 곧 태후 임씨(任氏)의 명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였고 공도현공(邛都縣公)에 봉해진 이기는 5월에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은 이기의 사망을 338년 5월로 기록하고 있으나 《진서(晉書)》 〈재기(載記)〉에는 33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3. 실정과 이수의 반란

이기는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로,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였다. 이월은 이기가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기는 자파 세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상벌을 가볍게 여겨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국력이 점차 쇠퇴하였다. 즉위 초, 이기는 명망이 높았던 대장군 이수(李壽)를 경계하여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아 북쪽 변경으로 쫓아내었으며, 폭정을 자행하여 신하들이 두려워 하였다. 이 기는 국사를 대부분 그의 동생인 건녕왕 이악에게 맡겼고, 경건, 요화, 전포, 그리고 환관인 허부 또한 신뢰하며, 다른 관료들과 상의하는 일이 드물었고, 그들 중 재능이 뛰어나거나 정직한 자는 없었다. 이 웅이 세운 평화로운 질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335년, 이 반의 삼촌인 나연과 관료 상관담은 이 기를 암살하고 이 반의 아들로 교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음모는 발각되었고, 이 기는 나연과 상관담을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이 반의 어머니인 부인 나씨도 처형했다. 336년, 이 기는 조카인 무릉공 이재의 재능을 질투하여, 이재를 반역죄로 모함하여 처형했다.

338년, 이수가 모반을 획책하자 이를 경계하여 첩자를 파견하고 이수의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 기와 이 악은 모두 아버지의 사촌인 이수 한왕(이 웅의 삼촌 이양의 아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이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다음 처형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방어 지역인 부성(현 쓰촨성 몐양시)에서 수도 청두를 방문할 때마다, 부하들에게 후자오 또는 진의 침략을 허위 보고하게 하여, 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이수가 거병하여 성도(成都)로 접근하였으나 이기는 대비를 하지 않아 결국 성도가 함락되었다. 338년, 은둔자 공장의 조언에 따라, 그는 고문인 나형과 해사명과 함께 청두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성공하면 진의 신하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한 매형인 임조로부터 이 기가 이수를 처형하려 한다는 편지를 위조하여 병사들에게 보여주었다. 병사들은 그를 믿었고, 청두를 기습 공격하여 이 기를 대비하지 못하게 했다. 이수의 태자 이세는 수도 경비대 장교였는데, 성문을 열어 이수를 맞이했다.

처음에 이수는 이기의 황위를 존중하여 이기의 도당을 처형하는 것도 이기에게 표문을 올리고 행하였으나 곧 태후 임씨(任氏)의 명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였고 공도현공(邛都縣公)에 봉해진 이기는 5월에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이수는 이 악과 이 기가 신뢰하던 다른 관료들을 체포하고 이 기에게 그들을 처형하라고 강요했다. 그는 이후 렌 태후의 조서를 위조하여 이 기를 폐위시키고 옹도공으로 강등시켰다. 이수는 황위에 오를지 진의 신하가 될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황위에 올라 국호를 한으로 바꾸면서 이 웅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이 기는 작은 현의 공작이 된 것에 대해 우울해하며 338년 말에 자살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은 이기의 사망을 338년 5월로 기록하고 있으나 《진서(晉書)》 〈재기(載記)〉에는 33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4. 폐위와 죽음

이기는 이웅(李雄)의 넷째 아들로, 형인 이월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이반(李班)을 죽이고 황제에 옹립되었다. 이기는 자파 세력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상벌을 가볍게 여겨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국력이 쇠퇴하였다. 즉위 초, 이기는 명망 높았던 대장군 이수(李壽)를 경계하여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아 북쪽 변경으로 쫓아내고 폭정을 자행하여 신하들이 두려워하였다.

335년, 이반의 삼촌인 나연과 관료 상관담이 이기를 암살하고 이반의 아들로 교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이반의 어머니인 부인 나씨도 처형되었다. 336년, 이기는 조카인 무릉공 이재의 재능을 질투하여 반역죄로 모함해 처형했다.

338년, 이수가 모반을 획책하자 이기는 첩자를 파견하고 이수의 일파를 처형하려 했다. 이에 이수는 거병하여 성도(成都)로 진군했고, 이기는 대비하지 못해 성도가 함락되었다. 이수는 이기의 도당을 처형하는 것을 이기에게 표문을 올리고 행하였으나, 곧 태후 임씨(任氏)의 명을 빙자하여 이기를 폐위하고 공도현공(邛都縣公)에 봉했다.

이수는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부성에서 성도로 진군했고, 이혁을 선봉으로 삼았다. 이수가 성도에 도착하자 이기와 이월은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이수의 세자 이세는 안에서 호응하여 성문을 열고 이수를 맞이했다. 이수는 성도성을 제압하고, 궁문에 병사를 배치했다.

이기는 시중을 파견하여 위로했지만, 이수는 상국 건녕왕 이월, 상서령 하남공 경건, 상서 전포, 요화, 중상시 허부, 정서장군 이하, 장군 이서 등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이며, 정사를 어지럽혀 사직을 기울이려 꾀하고 있으니, 대역부도의 죄로 멸족하도록 상주했다. 이기는 이를 거부할 방법을 알지 못하고, 이월과 경건 등을 살해했다.

이수는 황태후의 명이라고 속여 이기를 폐하고 궁도현공으로 강등시켜 별궁에 유폐했다. 이기는 "천하의 군주가 소현의 공이 된다는 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탄식했다.

결국 이기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은 이기의 사망을 338년 5월로 기록하고 있으나, 《진서(晉書)》 〈재기(載記)〉에는 33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5월, 목을 매어 자살했을 당시 향년 25세였으며, 재위 기간은 5년이었다. 유공(幽公)으로 시호되었고, 장례는 왕례로 치러졌다. 이웅의 아들들은 모두 이수에 의해 살해되었다.

3. 가족 관계

이웅을 아버지로 두었으며, 생모는 전씨이다. 양어머니는 이웅의 부인인 황후 임씨이다. 부인은 연황후로 334년에 책봉되었다. 형제로는 이월, 이패, 이보가 있었다.

4. 연호

5. 평가

6. 둘러보기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 서적 Book of Jin https://zh.wikisourc[...]
[3]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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