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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노히메노미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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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와노히메노미코토는 닌토쿠 천황의 황후로,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 등 여러 문헌에 등장하며, 질투심이 강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녀는 닌토쿠 천황과의 관계에서 겪은 일화와, 야타노히메미코 등 다른 여성들과의 갈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만엽집에 수록된 그녀의 시를 통해 닌토쿠 천황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나라현에는 그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릉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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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노히메노미코토
기본 정보
이름이와
칸지磐之媛命
로마자 표기Iwa no hime no Mikoto
다른 이름이와노히메 황후 (磐姫皇后, Iwa no hime kōgō)
신분
배우자닌토쿠 천황
자녀리추 천황
스미노에노 나카쓰 황자
한제이 천황
오아사쓰마 와카고노 스쿠네 왕자
왕가일본 황실
아버지가쓰라기노 소쓰히코
생애
재위314년–347년 (전통적인 연도)
사망347년
사망 장소쓰쓰키 궁 (筒城宮, 교토부교타나베시 다다라 부근)
기타
매장일알 수 없음
매장 장소알 수 없음

2. 생애 및 일화

닌토쿠 천황의 황후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생애와 재위 기간은 정확하게 특정할 수 없다. 닌토쿠 천황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관련 정보는 부족하여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와노히메노미코토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들은 고지키, 일본서기, 만엽집에 전해진다. 나라현에는 그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고지키와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와노히메노미코토는 질투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닌토쿠 천황이 다른 여인들에게 관심을 보이자 크게 분노하여 갈등을 겪었는데, 야타노히메미코(八田皇女)를 후궁으로 맞이한 사건과 메도리노오(雌鳥皇女) 사건은 이러한 질투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만엽집에는 닌토쿠 천황을 향한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노래 4수가 실려 있다.


  • '''임이 가신 날이 길어졌네 산을 찾아 맞이하러 갈까 기다리고만 있을까'''
  • '''이토록 사랑하며 살지 못한다면 높은 산의 바윗돌을 베고 죽어야지'''
  • '''살아 있으면서도 임을 기다리리니, 흔들리는 나의 검은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릴 때까지'''
  • '''가을 들의 벼 이삭 위에 안개 낄까, 아침 안개는 어느 쪽으로 내 사랑 멈출까'''


다만, 세 번째 수의 "풍성한 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구절은 앞선 시들과의 연관성이 낮아 후대에 다른 사람이 창작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2. 1. 질투심 많은 황후

고사기 닌토쿠 천황 조에는 "그 태후 이와노히메노미코토는 매우 질투하였다. 고로, 천황의 첩은 궁중에 들어갈 수 없었고, 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질투했다"라는 기술이 있을 정도로 질투심이 많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11] 다른 첩들은 이러한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질투심 때문에 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닌토쿠 천황은 궁을 떠났을 때나 황후가 궁에서 나갔을 때 첩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사기』에는 닌토쿠 천황이 구로히메(黒日姫)라는 미녀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구로히메는 이와노히메의 질투를 두려워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본서기』에는 닌토쿠가 여관(女官)인 구와타노쿠가히메(桑田玖賀媛)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이와노히메의 질투가 심해서 맞이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11]

천황이 야타노히메미코(八田皇女)를 궁에 들인 것에 대한 태후의 분노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모두 전하고 있다.[9] 태후가 풍악(豊楽, 술잔치의 일[12]) 준비를 위해 음식을 담는 나뭇잎 미즈나카시와(어음백)를 채취하러 기이로 간 사이에 천황이 야타노히메를 후궁에 들인 것을 알고 채취한 나뭇잎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고 천황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고사기』에는 야타노히메가 천황에게 화답하는 노래가 덧붙여져 있으며, 그 일로 인해 야타가 물러나 천황과 이와노히메는 화해했다는 연구자의 해석이 있다.[13]

이후, 메도리노오(야타노히메의 여동생)와 그 남편 하야스케노와케 왕의 토벌 사건이 일어났다. 닌토쿠에게 구혼받은 메도리노오는 이와노히메의 분노를 두려워해 하야스케노와케 왕과 결혼했지만, 닌토쿠의 분노를 사서 두 사람 모두 살해당했다. 이 사건 이후의 술잔치에 다시 이와노히메가 등장하여, 토벌을 실행한 무인 야마베노오타테노무라지(山部大楯連)의 아내가 메도리노오의 팔찌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군의 시체에서 팔찌를 빼앗아 아내에게 주다니 무례하다"라고 격노하여 야마베를 사형에 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3]

『일본서기』에서는 천황의 바람을 안 이와노히메는 친정인 가쓰라기를 그리워하며 근처의 쓰쓰키(筒木) 언덕에 궁실을 조성하여 그곳에서 살며, 천황이 면회를 와도 만나지 않았고 쓰쓰키노미야에서 사망했다고 전한다.[9] (『일본서기』에서는 야타노히메의 여동생 부부 토벌 이야기는 태후의 사후로 하고 있다). 연구자 오쿠마 기이치로는, 태후가 야타노히메를 완강하게 인정하지 않은 것은 호족 출신인 태후에 비해 야타노히메는 오진 천황의 딸이기 때문에 격이 높은 집안의 여성을 궁중에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9] 또한, 천황이 즉위 후에 그 전의 아내 대신에 지위가 높은 여성을 황후로 다시 맞이하는 예는 많지만, 야타노히메가 황후가 된 것은 태후의 사후이며, 태후의 4명의 아들 중 3명이 연속으로 천황으로 즉위한 것을 보아도 태후의 권위는 컸다고 추측하고 있다.[9]

일본 최고의 가집으로 여겨지는 만엽집에는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애정을 나타내는 노래가 네 수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군"은 닌토쿠 천황을 가리킨다.

'''임이 가신 날이 길어졌네 산을 찾아 맞이하러 갈까 기다리고만 있을까'''

'''이토록 사랑하며 살지 못한다면 높은 산의 바윗돌을 베고 죽어야지'''

'''살아 있으면서도 임을 기다리리니, 흔들리는 나의 검은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릴 때까지'''

'''가을 들의 벼 이삭 위에 안개 낄까, 아침 안개는 어느 쪽으로 내 사랑 멈출까'''

3번째 수의 의미는 "풍성한 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의미이며, 이 노래를 읊은 사람이 위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우며, 후대의 다른 누군가에 의한 창작이라고도 생각된다.

2. 2. 야타노히메미코(八田皇女)와의 갈등

고사기일본서기는 모두 닌토쿠 천황이 야타노히메미코(八田皇女)를 궁중에 맞이한 것에 대한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분노를 전하고 있다.[9] 이와노히메노미코토는 풍악(豊明, 술잔치의 일종[12]) 준비를 위해 미즈나카시와 잎을 채취하러 기이국에 간 사이, 천황이 야타노히메미코를 후궁으로 들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격분하여 채취한 잎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고 천황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고사기에는 야타노히메미코가 천황에게 바친 답가가 덧붙여져 있으며, 이 일로 인해 야타노히메미코가 물러나 천황과 이와노히메노미코토가 화해했다는 해석도 있다.[13]

일본서기에서는 이와노히메노미코토가 천황의 행동을 알고 친정인 가쓰라기노타카미야를 그리워하며 근처의 쓰쓰키(筒木) 언덕에 궁실을 조성하여 그곳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천황이 면회를 와도 만나지 않았고, 결국 쓰쓰키노미야에서 사망했다고 한다.[9] (야타노히메미코의 여동생 부부 토벌 이야기는 태후 사후로 기록되어 있다).

연구자 오쿠마 기이치로는 이와노히메노미코토가 야타노히메미코를 강하게 거부한 이유가, 호족 출신인 자신과 달리 오진 천황의 딸인 야타노히메미코의 높은 신분 때문이라고 추측한다.[9] 또한, 천황 즉위 후 이전의 아내 대신 지위가 높은 여성을 황후로 다시 맞이하는 예는 많지만, 야타노히메미코가 황후가 된 것은 이와노히메노미코토 사후였으며, 그녀의 네 아들 중 세 명이 연속으로 천황으로 즉위한 것을 볼 때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권위가 컸음을 알 수 있다.[9]

2. 3. 메도리노오(雌鳥皇女) 사건

고사기 닌토쿠 천황 조에는 "그 태후 이와노히메노미코토는 매우 질투가 심하였다. 고로, 천황의 첩은 궁중에 들어갈 수 없었고, 말하면 발도 들 수 없었다."라는 기술이 있을 정도로 질투가 심하였다.[11] 닌토쿠 천황이 야타노히메미코(팔전황녀)를 궁중에 맞이한 것에 대한 태후의 분노는 고사기일본서기 모두 전하고 있다.[9] 태후가 풍악(토요노아카리, 술잔치의 일[12]) 준비를 위해 음식을 담는 나뭇잎 미즈나카시와(어음백)를 채취하러 기이국으로 간 사이에 천황이 야타노히메를 후궁에 들인 것을 알고 채취한 어음백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고 천황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고사기에서는 홀몸을 노래한 야타노히메의 천황에 대한 답가가 덧붙여져 있으며, 그 일로 인해 야타가 물러나 천황과 이와노히메는 화해했다는 연구자의 해석이 있다.[13]

그 후, 메도리노오(야타노히메의 여동생)와 그 남편 하야스케노와케 왕의 토벌 사건이 일어났다. 닌토쿠에게 구혼받은 메도리노오는 이와노히메의 분노를 두려워해 하야스케노와케 왕과 결혼했지만, 닌토쿠의 분노를 사 두 사람 모두 살해당했다. 이 사건 이후의 술잔치에 이와노히메가 다시 등장하여, 토벌을 실행한 무인 야마베노오타테노무라지(산부대순련)의 아내가 메도리노오의 팔찌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군의 시체에서 팔찌를 빼앗아 아내에게 주다니 무례하다"라고 격노하여 야마베를 사형에 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3]

3. 문학 작품 속 이와노히메노미코토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이와노히메노미코토가 남편 닌토쿠 천황과 주고받았다고 전해지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2] 닌토쿠 천황은 조세 징수를 중단한 기간 동안 이와노히메의 원한을 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궁궐의 통상적인 보수조차 미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3]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편집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시가집인 만엽집에는 이와노히메노미코토가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 시 4수가 수록되어 있다.[2][4] 다만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확인하기 어려운 귀속에 대해 건전한 회의론을 가질 것을 권고한다.[5]

3. 1. 《만엽집》에 수록된 시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편집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시가집인 만요슈에는 닌토쿠 천황에 대한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 시 4수가 수록되어 있다.[2][4]

'''임이 가신 날이 길어졌네 산을 찾아 맞이하러 갈까 기다리고만 있을까'''

'''이토록 사랑하며 살지 못한다면 높은 산의 바윗돌을 베고 죽어야지'''

'''살아 있으면서도 임을 기다리리니, 흔들리는 나의 검은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릴 때까지'''

'''가을 들의 벼 이삭 위에 안개 낄까, 아침 안개는 어느 쪽으로 내 사랑 멈출까'''

3번째 시는 "풍성한 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의미이다. 다만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 시의 작가가 이와노히메노미코토 본인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5]

3. 2. 《고사기》, 《일본서기》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이와노히메노미코토가 남편 닌토쿠 천황과 주고받았다고 전해지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2] 닌토쿠 천황은 조세 징수를 중단한 기간 동안 이와노히메의 원한을 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궁궐의 통상적인 보수조차 미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3]

이와노히메의 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시가집인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편집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엽집에 수집되어 있다.[2] 그녀는 4편의 시에서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했다.[4] 그러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확인하기 어려운 귀속에 대해 건전한 회의론을 가질 것을 권고한다.[5]

고사기 하권 닌토쿠 천황 조에는 "그 태후 이와노히메노미코토, 매우 (매우) 질투(질투)하였다. 고로, 천황의 쓰이는 첩(첩)은, 궁중에 들어갈 수 없고, 말하면, 발도 들 수 없다(=땅을 치며) 질투했다"라는 기술이 보여지는 것처럼, 질투심이 많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첩들이 궁전에 만나러 갈 수 없었고, 닌토쿠 천황은 궁전을 떠났을 때나 그녀가 궁전에서 나갔을 때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만, 뒤집어보면 그만큼 닌토쿠 천황이 다정했다는 것이리라. 고사기에는 닌토쿠가 구로히메(흑일희)라는 미녀를 첫눈에 반했지만, 구로히메는 이와노히메의 질투를 두려워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서기에는 닌토쿠가 여관(女官)인 구와타노쿠가히메(상전구가희)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이와노히메의 질투가 심해서 맞이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11]

천황이 야타노히메미코(팔전황녀)를 궁중에 맞이한 것에 대한 태후의 분노는 고지키와 일본서기 모두 전하고 있다.[9] 태후가 풍악(토요노아카리, 술잔치의 일[12]) 준비를 위해 음식을 담는 나뭇잎 미즈나카시와(어음백)를 채취하러 기이의 나라로 간 사이에 천황이 야타노히메를 후궁에 들인 것을 알고 채취한 어음백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고 천황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고사기에서는 홀몸을 노래한 야타노히메의 천황에 대한 답가가 덧붙여져 있으며, 그 일로 인해 야타가 몸을 물러 천황과 이와노히메는 화해했다는 연구자의 해석이 있다.[13]

그 후 일어난 메도리노오(야타노히메의 여동생)와 그 남편 하야스케노와케 왕의 토벌(닌토쿠에게 구혼받은 메도리노오는 이와노히메의 분노를 두려워해 하야스케노와케 왕과 결혼했지만 닌토쿠의 분노를 사서 두 사람 모두 살해당했다) 이후의 술잔치에 다시 이와노히메가 등장한다. 토벌을 실행한 무인 야마베노오타테노무라지(산부대순련)의 아내가 메도리노오의 팔찌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군의 시체에서 팔찌를 빼앗아 아내에게 주다니 무례하다"라고 격노하여 야마베를 사형에 처했다고 고사기에 기록하고 있다.[13] 일본서기에서는 천황의 바람을 안 이와노히메는 친정인 가쓰라기노타카미야를 그리워하며 근처의 쓰쓰키(통목) 언덕에 궁실을 조성하여 이후 그곳에서 살며, 천황이 면회를 와도 만날 수 없었고 쓰쓰키노미야에서 사망했다고 전한다.[9]( 일본서기에서는 야타노히메의 여동생 부부 토벌 이야기는 태후의 사후로 하고 있다).

연구자인 오쿠마 기이치로는, 태후가 야타노히메를 완강하게 인정하지 않은 것은, 호족 출신인 태후에 대해 야타노히메는 오진 천황의 딸이기 때문에 격이 높은 집안의 여성을 궁중에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있다.[9] 또한, 천황이 즉위 후에, 그 전의 아내 대신에 지위가 높은 여성을 황후로 다시 맞이하는 예는 많지만, 야타노히메가 황후가 되는 것은 태후의 사후이며, 태후의 4명의 아들 중 3명이 연속으로 천황으로 즉위한 것을 보아도 태후의 권위는 컸다고 추측하고 있다.[9]

일본 최고의 가집으로 여겨지는 만엽집에는 그녀의 애정의 깊이를 나타내는 노래가 네 수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군"은 물론 닌토쿠 천황을 가리킨다.

'''임이 가신 날이 길어졌네 산을 찾아 맞이하러 갈까 기다리고만 있을까'''

'''이토록 사랑하며 살지 못한다면 높은 산의 바윗돌을 베고 죽어야지'''

'''살아 있으면서도 임을 기다리리니, 흔들리는 나의 검은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릴 때까지'''

'''가을 들의 벼 이삭 위에 안개 낄까, 아침 안개는 어느 쪽으로 내 사랑 멈출까'''

3번째 수의 의미는 "풍성한 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의미이며, 이 노래를 읊은 사람이 위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우며, 후대의 다른 누군가에 의한 창작이라고도 생각된다.

4. 무덤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황릉은 나라시 사키초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두 개의 ''고분'' 형태의 황릉은 넓고 물이 채워진 해자 안에 열쇠 구멍 모양의 섬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7]


  • 히시아게 고분
  • 코나베 고분

5.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
닌토쿠 천황


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1] 서적 Jinnō Shōtōki 1980
[2] 백과사전 Iwa no Hime https://books.google[...] Japan encyclopedia 2005
[3] 서적 The Six National Histories of Japan https://books.google[...] 1991
[4] 웹사이트 Man'yōshū Best 100 http://home.earthlin[...] 2014-08-03
[5]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Ancient Japan https://books.google[...] 1993
[6] 웹사이트 Iwa-no hime no Mikoto's misasagi -- map (upper right) http://narashikanko.[...] 2012-02-07
[7] 웹사이트 see kofun context of kofun-like elements http://www.ozlab.osa[...] 2008-01-19
[8] 웹사이트 磐之媛/石之日売 イワノヒメ https://kotobank.jp/[...] Kotobank
[9] 간행물 仁徳天皇記の構想 https://hdl.handle.n[...] 明治大学教養論集刊行会 2007-03
[10] 웹사이트 筒城宮伝承地(つつきのみやでんしょうち) http://kyotana.be/ob[...] 京田辺市観光協会
[11] 논문 中日両国古代における離婚及び嫉妬について http://ir.hust.edu.t[...] 修平人文社會學報 2008
[12] 웹사이트 とよのあかり豊の宴Toyonoakari http://k-amc.kokugak[...] 万葉神事語辞典、國學院大学デジタルミュージアム
[13] 간행물 石之日賣命の嫉妬:「嫉妬」による排除 https://hdl.handle.n[...] 早稲田大学国文学会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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