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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토쿠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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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닌토쿠 천황은 전설적인 일본의 천황으로,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으나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그는 오진 천황의 아들로, 즉위 후 난바의 다카쓰궁으로 천도하고 3년간의 조세와 노역 면제, 대규모 치수 공사, 백제·신라·남조 송·고구려 등과의 외교 활동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닌토쿠 천황은 다이센 고분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능묘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치세는 백성을 위한 선정으로 묘사되지만, 기록의 과장 가능성 및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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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토쿠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호사자키노 미코토 (大鷦鷯尊)
별호성제 (聖帝, Hijiri-no-mikado)
시호 (한풍)닌토쿠 (仁徳)
시호 (화풍)오호사자키노 스메라미코토 (大鷦鷯天皇)
능호모즈노미미하라 중릉 (百舌鳥耳原中陵, 다이센 고분)
신상 정보
출생257년
사망399년
아버지오진 천황
어머니나카쓰히메노 미코토
통치 정보
작위제16대 일본 천황
재위 기간 (전통적)313년–399년
선대 천황오진 천황
후대 천황리추 천황
가족 관계
배우자이와노히메노 미코토
야타노 히메미코
자녀리추 천황 (외 다수)
기타
종교신토
매장지모즈노미미하라 중릉 (百舌鳥耳原中陵, 오사카)

2. 생애와 전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닌토쿠 천황(仁徳天皇)의 실존을 받아들여 왔으며, 현재도 그의 (陵, 미사사기)이 관리되고 있다. 닌토쿠 천황에 대한 정보는 주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통칭 기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는 전설과 신화적 요소가 많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 기기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은 오진 천황과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 사이에서 290년경 태어나 오호사자키노미코토(大鷦鷯尊)라는 이름을 받았다.[2][7]

역사가들은 닌토쿠 천황을 5세기 초의 통치자로 여기며, 그의 존재 자체는 일반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만[9], 기록된 모든 업적을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당시 그의 칭호는 후대에 사용된 '천황'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천황' 칭호가 덴무 천황지토 천황 시대에 도입되었다고 보며, 그 이전에는 治天下大王|치천하대왕일본어(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나 ヤマト大王/大君|야마토 오키미일본어 등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닌토쿠(仁徳)'라는 이름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수 세기 후, 고사기와 같은 연대기가 편찬될 무렵에 붙여진 시호일 가능성이 있다.[10][11]

일본서기는 닌토쿠 천황이 313년부터 399년까지 87년간 통치했다고 기록하지만, 이 연대는 현대 역사학 연구 결과와 맞지 않아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12] 윌리엄 조지 애스턴은 이 기록대로라면 닌토쿠 천황이 300세가 넘는 나이가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13] 현대 역사학에서 연대 검증이 가능한 최초의 천황은 29대 긴메이 천황(509년경 ~ 571년)이며[14], 초기 천황들의 이름과 연대는 8세기 간무 천황 시대에 이르러서야 '전통적인 것'으로 확립되었다.[10]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는 닌토쿠 천황을 왜5왕보다 앞선 시기의 왜왕으로 보기도 한다.[15]

기기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은 오진 천황의 넷째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황태자였던 동생 우지노와키이라쓰코와 서로 황위를 양보하다가 동생이 사망하자 즉위했다고 전해진다. 즉위 후에는 난바의 다카쓰 궁(高津宮)으로 수도를 옮겼고,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딸 이와노히메노미코토를 황후로 맞이했다.

닌토쿠 천황의 치세는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인정(仁政)'으로 유명하며, 특히 민가의 부뚜막(かま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3년간 조세를 면제해주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22] 이 때문에 '인덕(仁徳)'이라는 시호가 붙여졌고, 성제(聖帝, 히지리노미카도)라 칭송받았다. 조세 재개 후에는 대규모 관개 공사를 벌여 농업 생산력을 높였다고 한다.

한편, 기기에는 닌토쿠 천황이 여색을 밝혀 황후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심한 질투에 시달리는 인간적인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복 여동생인 야타노히메미코를 후궁으로 삼으려다 황후와 심하게 갈등하여 황후가 별거에 들어가기도 했다.

일본서기 기준으로 재위 87년째에 110세(또는 고사기 기준 8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24],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일본 최대 규모의 고분인 다이센 고분이 그의 능인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노미사사기(百舌鳥耳原中陵)로 비정된다.[3][19]

2. 1. 즉위 전

일본서기고사기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은 오진 천황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이다.[7] 오진 천황 40년 1월 8일, 오진 천황은 두 아들 오야마모리노미코토(大山守命)와 오호사자키노미코토(大鷦鷯尊, 닌토쿠 천황의 아명)에게 "나이가 많은 아들과 어린 아들 중 누가 더 사랑스러운가?"라고 물었다. 형인 오야마모리노미코토는 나이 많은 아들이라고 대답했지만, 오호사자키노미코토는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어린 아들은 아직 미숙하여 걱정되므로 더 사랑스럽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오진 천황이 막내아들인 우지노와키이라쓰코(菟道稚郎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간파한 대답이었다. 같은 달 24일, 오진 천황은 우지노와키이라쓰코를 황태자로 삼고, 오호사자키노미코토를 태자의 보좌역으로, 오야마모리노미코토는 산천 관리자로 임명했다.[23]

오진 천황이 사망한 후, 황태자인 우지노와키이라쓰코와 오호사자키노미코토는 서로에게 황위를 양보했다. 이러한 상황이 3년간 지속되면서 황위는 공석 상태였다. 이 기간 동안 진상품 전달 장소를 두고 혼란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생기자, 이를 심각하게 여긴 황태자 우지노와키이라쓰코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황태자의 죽음으로 인해 오호사자키노미코토가 결국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23]

2. 2. 즉위 과정

오진 천황 40년 1월 8일, 아버지인 오진 천황은 형인 오야마모리노미코토와 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훗날의 닌토쿠 천황)에게 "나이 많은 아들과 나이 어린 아들 중 누가 더 사랑스러운가?"라고 질문했다.[23] 오야마모리노미코토는 나이 많은 아들이라고 대답했지만, 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는 아버지의 뜻을 간파하고 동생인 토도와키라츠코 うじのわきいらつこ|우지노와키이라쓰코일본어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나이 어린 아들은 아직 미숙하여 매우 걱정되고 사랑스럽습니다"라고 대답했다.[23] 같은 해 1월 24일, 오진 천황의 뜻에 따라 토도와키라츠코가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는 태자의 보좌역을 맡게 되었다. 오야마모리노미코토는 산천 초목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23]

오진 천황이 세상을 떠난 후, 황태자인 토도와키라츠코와 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는 서로에게 황위를 양보하였다. 이 때문에 3년 동안 황위는 비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태자 토도와키라츠코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23], 《일본서기》는 이를 황위를 양보하기 위한 자살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토도와키라츠코의 죽음으로 오사자키노스메라미코토가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2. 3. 치세와 업적

일본서기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은 313년부터 399년까지 왜를 통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대 사학자들은 이 연대가 부정확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12] 윌리엄 조지 애스턴은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닌토쿠 천황이 78년의 재위 기간 동안 312세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13] 일반적으로 닌토쿠 천황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실존 인물로 여겨지지만[9],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고사기일본서기(통칭 기기)에 기반하며 전설, 신화, 과장되거나 왜곡된 사실이 포함될 수 있다. 당시 칭호는 '천황'이 아니라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치텐카 다이오일본어) 즉,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 또는 '야마토 대왕'(ヤマト大王/大君|야마토 오키미일본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닌토쿠'라는 이름 자체도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10][11] 오카다 히데히로는 그를 왜5왕 이전의 왜의 대왕으로 본다.[15]

닌토쿠 천황은 오진 천황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게이코 천황의 황자인 오호도노 이리히코 황자(五百城入彦皇子)의 손녀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이다.[7] 오진 천황 사후, 황태자였던 우지노와키이라쓰코와 서로 황위를 양보하다가 황태자가 사망(일본서기에서는 자살로 기록)한 후 즉위했다고 전해진다. 이 기간 3년은 공위 상태였다.

즉위 원년, 난바의 다카쓰궁(高津宮)으로 수도를 옮겼다. 2023년 간사이대학의 니시모토 마사히로 교수는 난바의 다카쓰궁이 오사카성 혼마루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를 발표했다.[27]

고즈궁 터 비석 (오사카부 오사카시)


닌토쿠 천황의 치세는 인정(仁政)으로 알려져 있으며, "닌토쿠(仁徳)"라는 시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즉위 4년, 천황이 높은 곳에서 나라를 살폈으나 민가의 부뚜막(かまど)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백성들의 곤궁함을 알았다.[22] 이에 3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했으며, 그동안 궁궐 지붕의 가 낡아 비가 새도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3년 후 다시 살피니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졌음을 확인했다. 조세 면제는 즉위 10년까지 연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화(민가의 부뚜막)는 그의 치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성제(聖帝, 히지리노미카도)라 칭송받는 계기가 되었다.

조세 재개 후에는 가와치 평야 일대에서 대규모 토목 및 관개 공사를 실시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국토를 개발했다.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대외적으로는 백제, 신라, 오(남조 송), 고구려 등과 교류하거나 대립했다.

  • 기노 쓰노노 스쿠네(紀角宿禰)를 백제에 파견하여 국경을 정하고 산물을 기록하게 했다.
  • 백제에서 온 주군(酒君)에게 매사냥을 시작하게 했다. (주군이 기노 쓰노노 스쿠네에게 무례를 범한 대가로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음)
  • 조공을 거부한 신라에 가모노 다케쓰누(武津努)와 다미치(膽道) 형제를 파견하여 토벌하게 했다.
  • 오(남조 송)와 고려(고구려)가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 따르면, 천황가 구성원들을 위해 여러 부(部, 베)를 제정했다.

기기에는 인간적인 면모도 묘사되어 있다. 호색적인 성격으로 인해 황후 이와노히메노미코토의 질투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즉위 2년,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손녀인 이와노히메노미코토를 황후로 맞이했다. 즉위 30년에는 이복 여동생인 야타노히메미코(八田皇女)를 후궁으로 삼으려 하자 격분한 황후가 야마시로(山城)의 쓰쓰키(筒城) 궁에 별거했으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황후는 분노를 풀지 못한 채 즉위 35년에 사망했다. 이후 즉위 38년에 야타노히메미코를 황후로 삼았다고 한다. 반면 고사기에서는 천황이 야타노히메미코를 포기한 것으로 묘사된다. 황후 이와노히메와의 사이에서는 리추 천황, 스미노에노나카쓰미코, 한제이 천황, 인교 천황 등을 두었고, 히무카노카미나가히메(日向髪長媛)와의 사이에서는 오쿠사카노미코(大草香皇子), 구사카노하타비히메노히메미코(유랴쿠 천황의 황후)를 두었다.

닌토쿠 천황의 업적 중 일부는 아버지 오진 천황의 것과 혼동되거나 중복된다는 지적이 있다. 이는 원래 한 인물의 업적을 둘로 나누었거나, 당시의 특수한 기년법 기록을 후대에 그대로 적용하면서 발생한 혼란이라는 설 등이 제기된다. 반대로 하리마 국 풍토기에서는 대작천황(大雀天皇, 닌토쿠)과 난파고즈궁천황(難波高津宮天皇)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어, 두 인물의 업적이 합쳐졌다는 설도 있다.

쓰다 소키치는 닌토쿠 천황의 인정(仁政) 관련 기사가 사기의 요, 순, 우 전설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며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쓰다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나오키 코지로 역시 중국 사서를 바탕으로 왕조 초기에 성군(聖君)이 나타난다는 사상에 따라 창작된 기사로 보았다.[25] 또한, 민가의 부뚜막(かまど) 설화는 5세기 당시 긴키 지방에 부뚜막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26]

2. 4. 황후와의 갈등

닌토쿠 천황은 즉위 2년 3월, 무내숙녜(武内宿禰)의 손녀이자 가쓰라기 소쓰히코(葛城襲津彦)의 딸인 가쓰라기 이와노히메(葛城磐之媛)를 황후로 맞이했다. 당시 난바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던 닌토쿠 천황에게 야마토 지역의 유력 호족인 가쓰라기 씨족과의 결합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황후 이와노히메는 이후 리추 천황, 한정 천황, 윤공 천황이 되는 세 아들(서래호별존, 츠이하베츠존, 유조쓰마와기코스쿠네존)과 스미요시나카황자를 낳았고, 가쓰라기 씨족은 외척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닌토쿠 천황은 여러 후궁을 두었으며, 황후 이와노히메는 질투심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기에 여성 문제로 인한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고사기》에 따르면, 구로히메(黒媛)라는 여성이 후궁으로 들어왔으나 황후의 질투를 견디지 못하고 친정인 기비로 도망쳤다고 한다.

즉위 16년에는 여관(女官)인 구와타노쿠가히메(桑田玖賀媛)를 총애했지만, 황후의 심한 질투 때문에 가까이하지 못하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즉위 22년에는 이복 여동생인 하다 히메미코(八田皇女)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번에도 황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8년 뒤인 즉위 30년 9월, 황후가 연회에 쓸 나뭇잎(오쓰나가시와, 御綱柏)을 따러 기이국으로 떠난 사이, 닌토쿠 천황은 결국 하다 히메미코와 관계를 맺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 소식을 들은 황후는 분노하여 따온 나뭇잎을 모두 바다에 버리고, 천황이 마중 나온 난바의 항구를 그대로 지나쳐 야마시로국으로 가버렸다.

닌토쿠 천황은 황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항구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 난바 사람, 방울 달린 배를 보내어 허리를 굽히게 하였네. 그 배를 보내어, 큰 배를 몰고 오너라

그러나 황후는 배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야마시로국의 쓰쓰키오카(筒城岡)에 궁을 짓고 은거에 들어갔다. 천황은 신하에게 노래를 지어 황후의 기분을 풀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 야마시로에, 딱딱한 새들의 산, 딱딱딱딱, 내가 생각하는 아내와, 딱딱하게 만나리라

11월, 천황이 직접 쓰쓰키궁으로 찾아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뽕나무 가지를 보고 노래를 짓고, 궁 앞에 이르러 황후를 향해 다시 노래를 부르며 설득했지만, 황후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 가지가 떠내려가는구나, 이와노히메가, 아련하게, 듣지 못하는구나, 멀리 있는 뽕나무 가지여, 기대어 가는구나, 강가를 따라, 기대어서 가는구나, 멀리 있는 뽕나무 가지여

: 잇대어 심은, 야마시로의 여인이, 나무 괭이를 들고, 캔 무, 푸르푸르하게, 네가 말하였던 대로, 캔 무, 무성하게 자라니, 들어와서 참석하라
잇대어 심은, 야마시로의 여인이, 나무 괭이를 들고, 캔 무, 뿌리가 흰 흰 팔, 베개에 대고 있으면, 알지 못한다고는 말하지 못하리라

결국 황후와의 별거는 계속되었다. 즉위 35년, 황후 이와노히메는 5년간의 별거 끝에 쓰쓰키궁에서 사망했고, 2년 뒤 노라산에 묻혔다.

닌토쿠 천황은 황후가 죽고 3년 뒤인 즉위 38년에 하다 히메미코를 새로운 황후로 맞이했다. 한편, 《고사기》에는 닌토쿠 천황이 결국 하다 히메미코를 포기했다는 식으로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즉위 40년에는 또 다른 여성인 메도리 히메미코(雌鳥皇女)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으나, 그녀는 천황을 거절하고 천황의 사자였던 하야베 아카히코(隼別皇子)와 결혼해 버렸다. 처음에는 이를 묵인했던 천황이었으나, 두 사람이 반역을 도모하자 격노하여 처형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인정 많은 성군(聖君)의 모습과 함께, 호색적인 면모와 그로 인한 황후와의 극심한 갈등이라는 인간적인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2. 5. 죽음과 무덤

닌토쿠 천황은 재위 87년째인 닌토쿠 87년 1월 16일에 붕어하였다.[24]일본서기』에는 수명 기록이 없으나, 『수경(水鏡)』과 『황대기(皇代記)』에는 110세, 『고사기』에는 83세로 기록되어 있다.[24]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일본 최대 규모의 고분인 다이센 고분(大仙古墳)이 닌토쿠 천황의 능으로 비정된다.[3] 그의 (미사사기)의 공식 명칭은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노미사사기'''(百舌鳥耳原中陵)이다.[19] 궁내청에 의해 오사카부 사카이시 사카이구 다이센초에 있는 유적명 '대선릉고분(大山古墳)'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궁내청이 정한 능의 형식은 전방후원분이다.

다이센 고분, 닌토쿠 천황의 능으로 비정되는 곳, 오사카


닌토쿠 천황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노미사사기 배소
(오사카부 사카이시)


다이센 고분은 봉분 길이와 체적 모두 일본 제일의 전방후원분이며, 세계적으로도 최대급 능묘이다. 2018년 4월 12일 발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봉분 길이는 525m, 후원부 지름은 286.33m, 전방부 너비는 347m에 달한다. 이는 5세기 중반에 약 2,000명의 인부가 거의 16년간 매일 작업하여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17] 고분의 특징은 열쇠구멍 모양을 하고 있으며, 물로 채워진 넓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고사기』에는 "능은 모즈(百舌鳥)의 미미하라(耳原)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수릉(寿陵, 생전에 미리 지어놓는 무덤)이었다고 기록하며, "(닌토쿠 87년) 겨울 10월 계미 초하루 기축에 모즈노노미사사기(百舌鳥野陵)에 장사지냈다"라고 적혀 있다. 『연희식』 제릉료에는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노미사사기(百舌鳥耳原中陵). 이즈미국 오토리군(大鳥郡)에 있다. 조역(兆域, 묘역)은 동서 8정, 남북 8정. 능호(陵戸)는 5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능 이름의 유래는 능묘 조영 중에 들에서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뛰어들어와 쓰러져 죽었는데, 그 사슴의 귀 속에서 모즈(백설조, 때까치)가 울며 튀어나왔기 때문에 그 땅의 이름을 '모즈미미하라'라고 명명했다는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참고로 모즈는 오사카부의 부조(府鳥)이다. 또한 이 고분의 북쪽에는 反正天皇릉(다데이야마 고분), 남쪽에는 리추 천황릉(미세고료야마 고분)이 있어, 그 가운데에 위치하기 때문에 '나카노미사사기(中陵)'라고 불린다.

닌토쿠 천황의 부인인 이와노히메 황후의 무덤은 나라시의 사키 정(佐紀町)에 있는 사키타테나미훈큐보 고분으로 비정된다.[18] 이 고분 역시 다이센 고분처럼 열쇠구멍 모양에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천황릉과 능묘는 문화재이지만, 황실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궁내청에 따르면, 능묘는 단순히 역사적 유물이 묻힌 장소가 아니라 신성한 종교적 장소이며, 각 능묘를 조상들의 영혼을 위한 성역으로 해석하고 있다.[12] 닌토쿠 천황은 오사카신토 신사 형태인 배소(拝所)에서 전통적으로 숭배되며, 궁내청은 이곳을 그의 능묘로 지정하고 있다.[19] 또한 황거에서는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 다른 역대 천황 및 황족과 함께 닌토쿠 천황의 영이 모셔져 있다.

3. 가족 관계

닌토쿠 천황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오진 천황(應神天皇)제15대 천황[7]
어머니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게이코 천황의 증손녀[7][2]
황후 (첫 번째)이와노히메노미코토(磐之媛命)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딸. 시인.[7][29] 즉위 2년에 황후가 되었으며, 질투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7][22]
자녀 (이와노히메 소생)리추 천황(履中天皇)장남, 제17대 천황[7]
자녀 (이와노히메 소생)스미노에나카노오우지(住吉仲王子)차남 (?~399)[30][7]
자녀 (이와노히메 소생)한제이 천황(反正天皇)3남, 제18대 천황[7]
자녀 (이와노히메 소생)인교 천황(允恭天皇)4남, 제19대 천황[7]
자녀 (이와노히메 소생)사코도 왕자(酒人王)[7]
황후 (두 번째)야타노히메미코(矢田皇女)오진 천황의 딸. 이와노히메노미코토 사후 즉위 38년에 황후가 됨.[7]
히무카노카미나가히메(日向髪長媛)모로카타노 키미 우시모로이의 딸[7]
자녀 (히무카노카미나가히메 소생)오오쿠사카노미코(大草香皇子)아들 (?~454)[7]
자녀 (히무카노카미나가히메 소생)쿠사카노하타비노히메미코(草香幡梭姫皇女)딸, 제21대 유랴쿠 천황의 왕후[7]
우지노와키이라츠메(宇遅之若郎女)오진 천황의 딸[7]
기타쿠로히메(黒日売)기비노 아마베노 아타이의 딸. 《고사기》에 등장하며, 황후 이와노히메의 질투를 받아 기비로 돌아갔다고 하나 비(妃)는 아님.[7]



닌토쿠 천황의 남계 황통은 현손인 무렬천황 대에 자식 없이 끊겼다. 그러나 현손이자 무렬천황의 누이인 수백향황녀(계체천황의 황후)와 귤중황녀(선화천황의 황후)를 통해 방계 후손(각각 흠명천황, 석희황녀)으로 이어졌고, 이 황통이 현재의 일본 황실까지 이어지고 있다.

4. 닌토쿠 천황의 업적

닌토쿠 천황의 업적은 주로 일본서기고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가와치 평야의 홍수를 막기 위한 대규모 치수 사업이 꼽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 최초의 대규모 토목 공사로 여겨지는 '난바노호리에'라는 제방을 건설하고, 황실이 직접 관할하는 둔전(마무타노미야케)을 설치했으며, 요코노 제방(오늘날의 오사카시 이쿠노구) 등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9] 이러한 치수 사업 외에도 농업 장려 정책과 주변국과의 외교 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각 하위 항목에서 다룬다.

다만, 일본서기에 기록된 닌토쿠 천황의 통치 연대(313년~399년)는 현대 사학자들 대부분이 부정확하다고 보고 있다.[12][13] 그가 이룩했다고 알려진 모든 업적을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닌토쿠 천황의 존재 자체는 5세기 초의 통치자로서 일반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9]

4. 1. 치수 사업

닌토쿠 천황은 가와치 평야의 홍수를 막고 농지 개발을 위해 대규모 치수 사업을 벌였다. 이는 일본서기고사기 등 고대 기록에 주요 업적으로 나타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은 가와치 평야의 수해를 막고 개발하기 위해 難波の堀江|난바노호리에일본어를 파고 茨田堤|이즈타 제방일본어(오늘날의 오사카부 네야가와시 부근)을 축조했다.[22] 이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토목 공사로 여겨진다. 또한, 황실 직할령인 茨田屯倉|이즈타 둔창일본어(마무타노미야케)을 설치하여 농업 경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외에도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치수 관련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茨田堤|이즈타 제방일본어과 茨田三宅|이즈타 미야케일본어 건설, 丸邇池|와니이케일본어, 依網池|요사미이케일본어 축조, 難波の堀江|난바노호리에일본어를 파서 바다로 통하게 한 것, 木橋之江|코하시노에일본어 정비, 住吉津|스미노에노츠일본어 항구 정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는 당시 사회에 큰 부담이었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닌토쿠 천황이 민가의 부뚜막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3년간 조세를 면제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더불어[22] 이러한 치수 사업은 그를 성제(聖帝)로 칭송받게 한 주요 배경이 되었다.

4. 2. 농업 장려

닌토쿠 천황의 치세는 백성을 아끼는 인정(仁政)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농업 발전을 위한 노력이 두드러진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즉위 4년에 천황이 높은 곳에서 나라를 살폈을 때 민가의 부뚜막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백성들의 궁핍함을 알게 되었다. 이에 3년 간 조세와 부역을 모두 면제하였고, 이 기간 동안 궁궐 지붕의 가 헤져 비가 새도 수리하지 않을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했다고 전해진다.[22] 이러한 일화는 닌토쿠 천황의 애민 정신을 보여주며, '인덕(仁徳)'이라는 시호의 유래가 되었다. 조세 면제는 이후에도 연장되어 즉위 10년까지 이어졌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

조세가 재개된 후, 닌토쿠 천황은 가와치 평야를 중심으로 대규모 치수 및 관개 공사를 벌여 농업 생산력 향상에 힘썼다.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 치수 사업: 가와치 평야의 홍수를 막고 농지를 개발하기 위해 난바의 호리에라는 수로를 파고 이즈타 제방(현재의 오사카부 네야가와시 부근)을 축조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토목 공사로 평가받는다. 또한, 오늘날의 오사카시 이쿠노구 지역에 요코노 제방을 건설했다.
  • 관개 시설 확충: 나라현 부근으로 추정되는 와니이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의 요사미이케 등 여러 저수지를 만들었다. 또한 교토부 조요시 북서부에서 구세군 구미야마정에 이르는 야마시로의 쿠루쿠마 아가타 지역에 관개 용수를 끌어들였다. 특히,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 코난정 부근에 코무쿠노오미조라는 관개 수로를 굴착하여 광대한 농지를 새로 개척했다.
  • 둔전 설치: 황실이 직접 관리하는 농지인 이즈타 둔창(마무타노미야케)을 설치하여 안정적인 농업 경영과 국가 재정의 기반을 마련했다. 고사기에도 이즈타 제방과 이즈타 미야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농업 장려 정책과 대규모 토목 사업을 통해 닌토쿠 천황은 농업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성제(聖帝)'로 칭송받게 되었다.

4. 3. 외교 관계

일본서기에 따르면, 닌토쿠 천황 시기에는 주변국과의 외교 활동이 있었다.

  • 백제와의 관계: 기카쿠스쿠네(紀角宿禰)를 백제에 파견하여 양국 간 국경 문제를 논의하고 지역 산물을 기록하게 했다고 전해진다.[22] 또한, 기카쿠스쿠네에게 무례를 행했다는 이유로 백제에서 왜로 보내진 주군(酒君)이라는 인물에게 매사냥을 하도록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22] 이는 당시 왜와 백제 간의 교류 및 외교적 마찰 가능성을 보여준다.
  • 신라와의 관계: 일본서기신라가 조공을 거부하자 가모노 다케하세(上毛野竹葉瀬)와 가모노 타미치(田道) 형제를 파견하여 토벌을 시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2]
  • 중국 왕조 및 고구려와의 관계: 당시 중국의 남조 송고구려가 왜에 조공을 바쳤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22] 다만 이는 일본 측의 일방적인 기록으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4. 4. 기타

5. 다이센 고분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위치한 다이센 고분(大仙古墳)은 일본에서 가장 큰 고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닌토쿠 천황의 무덤으로 여겨진다.[3] 이 고분은 도시 주변에 모여 있는 약 50개의 고분군인 "모즈 고분군(百舌鳥古墳群)" 중 하나이다.

다이센 고분은 열쇠 구멍 모양의 전방후원분 형태를 하고 있으며 넓은 물로 채워진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닌토쿠 천황의 부인으로 알려진 이와노히메 황후의 무덤 역시 나라시의 사키 정에 비슷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전해진다.[18] 능의 규모, 구조, 관리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5. 1. 규모와 구조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위치한 다이센 고분은 닌토쿠 천황의 능으로 여겨지는 일본 최대 규모의 고분이다.[3] 이 고분은 모즈 고분군의 일부이며,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능이기도 하다.

5세기 중반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약 2,000명의 인부가 거의 16년 동안 매일 작업하여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17] 초기 측정에서는 봉분 길이가 약 486m, 높이가 약 35m로 알려졌으나,[17] 2018년 4월 12일에 발표된 궁내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봉토 길이는 525m, 후원부 지름은 286.33m, 전방부 너비는 347m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이집트 기자의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기저부 길이의 두 배에 달하는 크기이다.[17]

다이센 고분은 일본 고유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형태로, 하늘에서 보았을 때 열쇠 구멍과 같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고분 주위는 넓은 해자가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다.[18] 닌토쿠 천황의 부인으로 알려진 이와노히메 황후의 능 역시 나라시에 비슷한 열쇠 구멍 모양과 해자를 가진 형태로 존재한다.[18]

이 능묘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천황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일본 정부 부처인 궁내청에서 관리하고 있다.[12] 궁내청은 이 능을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신성한 성역으로 간주하며 관리하고 있다.[12]

5. 2. 관리와 보존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일본 최대 규모의 고분인 다이센 고분은 닌토쿠 천황의 무덤으로 여겨진다.[3] 이 거대한 무덤은 궁내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궁내청은 황실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정부 부처로, 천황릉과 능묘를 문화재로서 관리 및 보호한다.[12]

궁내청에 따르면, 천황의 무덤은 단순히 역사적 유물이 묻힌 장소가 아니라 신성한 종교적 장소로 취급된다. 각 황실 묘지는 황실 조상의 영혼을 위한 성역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관점에서 관리되고 있다.[12] 닌토쿠 천황은 오사카의 신토 신사(미사사기)에서 전통적으로 숭배되며, 궁내청은 이곳을 그의 능묘로 공식 지정하였다. 공식 명칭은 '모즈노미미하라노나카노미사사기(百舌鳥の御領の中陵)'이다.[19] 궁내청이 지정한 유적명은 대선릉고분(大山古墳)이며, 형식은 전방후원분이다.

닌토쿠 천황의 부인인 이와노히메 황후의 무덤은 나라시 사키 정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8]고분 형태의 능은 모두 넓은 물로 채워진 해자 안에 자리한 열쇠구멍 모양의 섬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또한 황거 내 궁중삼전의 하나인 황령전에는 다른 역대 천황 및 황족들과 함께 닌토쿠 천황의 영이 봉안되어 있다.

6. 역사적 평가와 논란

일본서기》나 《고사기》와 같은 고대 기록 속 닌토쿠 천황은 백성의 어려움을 헤아려 세금을 면제해주고,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국가의 기반을 닦은 어진 군주로 묘사된다. 특히 높은 곳에 올라 민가의 부엌 연기를 살피며 백성의 삶을 걱정했다는 인정(仁政) 설화는 그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전해진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에서는 이러한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닌토쿠 천황의 치세가 유교적인 이상적 군주상에 맞춰 과장되거나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닌토쿠 천황의 인정 설화가 중국 《사기》에 나오는 요(堯), 순(舜), 우(禹) 임금의 이야기를 본떠 만들어진 것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쓰다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나오키 코우지로 역시 해당 기록들이 중국 사서를 바탕으로 왕조 초기에 성군(聖君)이 나타난다는 사상에 따라 창작된 것이라고 보았다.[25]

구체적으로, 민가의 부엌 연기를 보고 백성의 빈곤을 파악했다는 설화는 당시 일본 긴키 지방에 카마도가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는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맞지 않아[26],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더한다. 또한, 아버지 오진 천황과의 업적이 일부 혼동되거나 중복되어 기록된 점 역시 기록의 정확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이처럼 닌토쿠 천황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전승과 함께 기록의 신뢰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공존한다. 그의 실존 여부나 구체적인 통치 내용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6. 1. 실존 여부 논란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닌토쿠 천황(仁徳天皇일본어)의 실존을 받아들여 왔으며, 현재 궁내청에서 관리하는 그의 능(미사사기(陵))도 존재한다. 이러한 전통적 인식은 주로 기기(고사기일본서기)라 불리는 기록에 기반하는데, 이 문헌들은 신화와 전설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과장되거나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고 있어 사료로서의 한계가 지적된다.[2] 기기에는 닌토쿠 천황이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일본어)와의 사이에서 기원후 290년경 태어났으며, 이름은 오호사자키노미코토(大鷦鷯尊일본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오진 천황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7]

그러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닌토쿠 천황의 실존 여부와 기록의 정확성에 대해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를 5세기 초의 통치자로 추정하며 그의 존재 자체는 일반적으로 인정하지만[9], 기기에 기록된 모든 업적이나 세부 사항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기록된 연대의 신뢰성 문제이다. 일본서기는 닌토쿠가 기원후 313년부터 399년까지 87년간 통치했다고 기록하지만[12], 이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긴 재위 기간이다. 학자 윌리엄 조지 에스턴은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닌토쿠는 78년의 통치 기간 동안 312세가 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기록의 비현실성을 비판했다.[13] 실제로 현대 역사학에서 연대 검증이 가능한 최초의 천황은 기원후 6세기 초의 킨메이 천황(기원후 509년경 – 571년)으로 여겨진다.[14] 초기 천황들의 이름과 재위 연대가 오늘날과 같이 "전통적인 것"으로 확립된 것은 기원후 8세기 간무 천황(기원후 737년–806년) 시대에 이르러서였다.[10]

또한, 닌토쿠 천황 당시 사용된 칭호가 '천황'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지적된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천황' 칭호가 덴무 천황지토 천황의 치세(7세기 후반)에 도입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닌토쿠는 당시 治天下大王|치천하대왕일본어(スメラミコト|스메라미코토일본어 또는 アメノシタシロシメスオオキミ|아메노시타 시로시메스 오오키미일본어,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나, ヤマト大王/大君|야마토 대왕일본어("야마토의 위대한 왕") 등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닌토쿠'라는 이름 자체도 그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후, 아마도 고사기와 같은 연대기가 편찬될 때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10][11]

일부 연구자들은 닌토쿠 천황을 다른 역사 기록 속 인물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오카다 히데히로는 그를 왜의 대왕[15] 중 한 명으로, 특히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왜의 다섯 왕[16]보다 앞선 시기의 왕으로 보았다. 또한, 중국 남조 송의 역사서인 송서 왜국전에 기록된 왜의 오왕 중 (讃), (珍), 또는 무(武)의 조상으로 언급되는 (禰)라는 인물과 닌토쿠 천황을 동일시하는 설도 제기된다. 고사기에서는 오진 천황의 사망 연도(즉, 닌토쿠의 즉위년)를 갑오년(기원후 394년?), 닌토쿠 천황의 사망 연도를 정묘년(기원후 427년?), 향년을 83세로 기록하고 있다.[21]

결론적으로, 닌토쿠 천황은 일본의 전설적인 통치자로 전해지지만, 그의 실존을 뒷받침할 명확한 역사적 증거는 매우 부족하다. 그의 이야기는 주로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으며,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닌토쿠 천황이 실존하지 않은 가공의 인물이거나, 여러 통치자의 행적이 합쳐져 만들어진 상징적인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28]

6. 2. 왕조 교체설

왕조 교체설에서는 일부 연구자들이 오진 천황의 탄생 설화가 전설적이라는 점과 닌토쿠 천황과의 업적이 중복된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들은 닌토쿠 천황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오진 천황의 경력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오진 천황'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6. 3. 현대적 관점에서의 평가

역사가들은 닌토쿠 천황을 일반적으로 5세기 초의 실존 인물로 간주하지만,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 특히 『일본서기』나 『고사기』에 나타난 연대나 업적 전반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9][12] 예를 들어, 『일본서기』는 그가 313년부터 399년까지 통치했다고 기록하지만, 이는 현대 역사학 연구 결과와 잘 맞지 않으며, 이 기록대로라면 닌토쿠는 300세가 넘는 나이가 된다.[13] 또한, 당시 군주의 칭호가 후대에 사용된 '천황'이 아니라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 즉,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나 '야마토 대왕(大王/大君)' 등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10][11] '닌토쿠'라는 이름 자체도 후대에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0][11] 오카다 히데히로와 같은 일부 연구자는 그를 왜의 다섯 왕 이전에 활동했던 왜의 대왕 중 한 명으로 보기도 한다.[15][16] --

이러한 기록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닌토쿠 천황은 전통적으로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군주로 묘사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즉위 4년에 높은 곳에 올라 백성들의 집에 밥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의 빈곤함을 파악했다. 이에 3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었으며, 자신의 궁궐 지붕이 새는데도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3년 뒤 다시 살펴보니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백성들의 생활이 나아졌음을 확인했으며, 조세 면제는 즉위 10년까지 연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화는 후대의 윤색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부담을 덜어주려 노력한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닌토쿠 시대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생활 기반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와치 평야의 홍수를 막고 개발하기 위해 난바의 호리에를 파고 이즈타 제방을 쌓았으며, 관개 시설인 와니이케(丸邇池), 요코노노쓰쓰미(横野堤), 요사미이케(依網池) 등을 축조하고 코무쿠노오미조(茨田衫子) 수로를 파 농지를 개간하는 등 치수 사업에 힘썼다. 이러한 대규모 사업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백성들의 삶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외교적으로는 백제에 기각숙네를 파견하여 국경을 정하고 산물을 기록하게 했으며, 조공을 거부한 신라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 남조고구려가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어, 당시 가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류 혹은 긴장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활동은 고대 국가로서 세력을 확장하고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닌토쿠 천황에 대한 평가는 고대 군주라는 시대적 한계와 기록의 신뢰성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그의 통치 방식은 현대적인 민주주의인권 개념과는 거리가 멀며, 백성을 위한 정책 역시 강력한 왕권 유지 및 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일본서기』나 『고사기』의 기록은 후대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닌토쿠 천황의 궁궐로 알려진 난바 고쓰궁의 위치가 오사카성 본마루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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