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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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전충은 당나라 말기 노룡군 절도사로, 유주 출신이다. 체주사마를 거쳐 노룡군 아장으로 이극거를 섬겼다. 885년, 의무군 공격에 실패하고 유주로 도주하려다 이극거를 습격하여 자결하게 하고 노룡군을 장악, 유후를 자칭했다. 조정에서 유후로 임명된 후 이듬해 정식 절도사가 되었으나 886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이광위가 뒤를 이어 노룡군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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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충 | |
|---|---|
| 기본 정보 | |
![]() | |
| 휘 | 이전충 |
| 성 | 이 |
| 이름 | 전충 |
| 시호 | 장의 |
| 출생 | 742년 |
| 사망 | 782년 |
| 활동 시기 | 당나라 |
| 직업 | 군벌 |
| 봉사 | 당나라 |
| 가족 | |
| 부친 | 이회선 |
| 형제자매 | 이보신 |
| 배우자 | 장씨 |
| 자녀 | 이납, 이원침, 이우 |
| 생애 | |
| 초기 생애 및 배경 | 이전충은 742년에 태어났으며, 원래 성은 장(章)씨였다. 그의 아버지 장회선은 유주 절도사 안록산 휘하에서 복무했다. 안록산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회선은 안록산을 따라 반란에 가담했다. |
| 안사의 난 이후 |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장회선은 이회옥을 섬기다가 이회옥이 사망하자 이회선의 아들 이보신을 섬겼다. 이보신은 장회선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고, 장회선은 이보신의 신임을 얻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 이후 장회선은 이씨 성을 하사받아 이름을 이전충으로 개명했다. |
| 위박절도사 | 765년 이보신이 사망하자, 이전충은 위박 절도사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는 당나라 조정에 복종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
| 반란 | 781년, 당나라 조정이 절도사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자, 이전충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다른 절도사들과 연합하여 당나라 조정에 대항했다. |
| 사망 | 그러나 이전충은 782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이납이 그의 뒤를 이어 위박 절도사가 되었다. |
2. 생애
이전충은 당나라 말기 혼란기에 활동한 군인으로, 뤄룽(盧龍) 절도사 휘하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당 희종 광명(光啟) 연간(880~881년)에는 디주(棣州, 현재의 산둥성 빈저우) 지사의 군사 고문으로 근무하기도 했다.[2]
885년 봄, 뤄룽 절도사 이극거는 의무 절도사(義武) 왕처촌이 이극용과 동맹을 맺을 것을 우려하여 의무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극거는 이전충에게 6만 명의 병사를 주어 의무의 이주(易州, 현재의 허베이성 바오딩 시)를 공격하게 했다. 이전충의 부하 유인공이 땅굴을 파 이주를 함락시켰으나, 방심한 틈을 타 왕처촌이 이끄는 의무군에게 기습당해 패했다.[2]
이전충은 패전 책임을 질 것이 두려워 유주(幽州)로 돌아가지 않고, 군사를 돌려 이극거를 기습했다. 이극거는 가족과 함께 자살했고, 이전충은 뤄룽 절도사를 장악하고 임시 절도사 직함을 주장했다. 이는 당나라 조정에 의해 승인되었다.[2]
2. 1. 배경
이전충은 노룡군의 본부가 있었던 유주 범양(지금의 베이징)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 희종 광명 연간(880년 ~ 881년)에 그는 체주사마(棣州司馬, 현 산둥성 빈저우시 후이민현)를 지냈다. 그 후, 노룡군 번진으로 돌아가 절도사 이가거 휘하에서 아장(牙將)으로 있었다.[3]2. 2. 노룡군 장악
885년 3월, 이가거와 그의 맹우(盟友)인 성덕군 절도사(成德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허베이성 스자좡 시) 왕용은 의무군 절도사(義武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허베이성 바오딩 시) 왕처존이 당시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닌 군벌이었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본거지는 현 산시성 타이위안시) 이극용과 동맹을 맺자 이를 우려하였다. 이들은 이극용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영지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있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노룡군과 성덕군 두 번진 사이에 놓여 있는 의무군 번진을 공동으로 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나누어 가지기로 약속하였다.[4]이가거는 이전충을 파견하여 6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의무군 번진 관하의 역주(易州, 현 허베이성 바오딩 시 이 현)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전충의 비장(裨將) 유인공은 역주성의 성벽에 땅굴을 팠고, 마침내 노룡군의 군대는 그 땅굴을 이용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노룡군의 군대가 역주를 점령하고 나자, 그들은 교만해져서 의무군의 반격에 대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후, 왕처존은 3천 명의 병력을 가지고 밤에 그의 병사들에게 양털을 씌워 양처럼 보이게 한 다음, 역주성 아래로 접근해 왔다. 노룡군의 군대는 그들이 약탈할 많은 양떼들이 모여 있다고 여긴 나머지, 성 밖으로 뛰쳐나와 이를 약탈하러 나섰다. 의무군 병사들은 이들을 기습 공격하여 대파시키고, 역주를 탈환하였다. 이 패전 후, 이전충은 유주를 향해 달아났다.[4]
이가거가 패전의 죄를 물어 자신을 처벌하려 들 것을 두려워한 이전충은 패잔병들을 수습해서 유주로 돌아가는 대신 그곳을 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가거를 습격하였고, 그 해 6월에 궁지에 몰려 급박해진 이가거는 가족들과 함께 누각에 올라가 분신 자살하기에 이르렀다. 이전충은 노룡군 번진을 접수하고 유후(留後)를 자칭하였다. 이때 이 행위는 조정에서도 인정받았고, 조정에서는 그 해 7월에 이전충을 노룡군 유후에 임명하였다.[4]
2. 3. 짧은 통치와 죽음
886년 봄, 희종은 이전충을 노룡군 절도사로 정식 임명하였다.[3] 그 해 8월에 이전충이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아들 이광위를 유후(留後)로 임명하였고, 이후 정식으로 절도사에 임명하였다.[3][4]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구당서
https://zh.wikisourc[...]
[4]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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