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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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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저수량(褚遂良, 596년 ~ 658년)은 당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서예가로, 해서에 특히 뛰어났다. 그는 수나라 말기에 설거에게 임관했다가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 태종 시기에 왕희지의 글씨를 수집하고 서예를 지도했으며, 구양순, 우세남과 함께 당나라 서예의 일인자로 꼽혔다. 정치적으로는 고종을 보좌했으나, 측천무후의 황후 등극을 반대하다가 탄주, 귀주를 거쳐 애주로 유배되어 사망했다. 그의 서예는 초당 삼대가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해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안탑성교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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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추수량 초상화
초상화가 있는 추수량의 비문 탁본
이름추수량
한자褚遂良
로마자 표기Chǔ Suìliáng
등선(登善)
작위하남공(河南公)
출생596년
출생지항저우, 저장 성, 수나라
사망658년
사망지타인호아 성, 안남, 당나라
아버지추량(褚亮)
자녀추언보(褚彥甫)
추언충(褚彥沖)
추언기(褚彥幾)
직업서예가, 사학자, 정치인

2. 생애

저수량은 당태종의 서예를 지도했으며,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수집하는 사업을 관리했다. 구양순, 우세남과 함께 당나라 서예의 일인자로 손꼽혔으며, 해서, 행서, 초서에 모두 능했지만 특히 해서에 뛰어났다. 벼슬은 중서령, 상서복야에 이르렀다.

장손무기와 저수량은 고종의 통치를 효과적으로 보좌했으며, 고종 초기의 정치는 태종 재위 기간만큼 효과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고종은 저수량을 하남공(河南公)에 봉했다.

650년 겨울, 저수량은 어사대부 위사겸에게 토지를 강매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대법정 부판사 장예책은 저수량이 보상금을 지불했으므로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결했으나, 위사겸은 고종에게 저수량이 정부의 토지 수용에 해당하는 보상금만 지불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고종은 저수량을 동주 자사로 강등시켰다. 652년 봄, 고종은 저수량을 다시 불러 문부성의 상서로 임명하고,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 지위를 부여하여 실질적인 재상으로 삼았다.

652년 겨울, 고양공주 부부의 모반 사건 조사 과정에서, 장손무기이각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허위로 공모자로 몰아 처형했다. 저수량 역시 이러한 혐의에 연루되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으나,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이도종이 장손무기와 저수량의 경쟁자였기 때문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고 전해진다.

653년 가을, 저수량은 정부 행정부 수장인 '부야(僕射)'에 임명되었지만, 문부성 사무는 계속 담당했다.

655년, 고종이 무조(무측천)를 황후로 세우려 하자 저수량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로 인해 무측천의 원한을 사 사형당할 뻔했으나, 유조 덕분에 사형은 면하고 담주 도독, 계주 도독을 거쳐 애주까지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신룡 원년(705년), 저수량의 일가는 명예 회복되어 작위를 되돌려 받았다.[2]

2. 1. 초기 생애와 수나라 시기

수나라 문제 치세인 596년 항저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저량(Chu Liang)은 진나라(Chen Dynasty)와 수나라 모두에서 중간급 관료였으며 문학적 재능으로 명성이 높았다. 604년 문제의 죽음 이후 저량은 문제의 아들 양제를 계속 섬겼지만 양제는 그의 재능을 질투했고, 613년 장군 양현감(Yang Xuangan)이 반란을 일으켜 곧 진압되자 저량을 양현감과 친밀하다는 이유로 기소하여 멀리 떨어진 서해군(西海, 현대의 칭하이성 하이베이 티베트족 자치주)의 호적 담당관으로 좌천시켰다.[1] 추수량은 아버지를 따라 그곳으로 갔다.[1]

617년, 농민 반란 지도자 설거(Xue Ju)가 수나라에 대항하여 봉기하여 스스로를 진나라 황제라고 선포했을 때, 저량과 추수량은 모두 설거의 행정부에 합류했다.[1] 저량은 중간급 관료가 되었고, 추수량은 하급 관료가 되었다.[1] 618년 설거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후계자 설인고(Xue Rengao)는 당나라의 황자 이세민(고조의 둘째 아들)에게 패했다.[1] 이세민은 저량과 추수량을 살려주었고, 저량은 이세민의 참모로 합류했고, 추수량은 진주(秦州, 대략 현대의 간쑤성 톈수이)에 남아 진주 사령관의 참모로 일했다.[1] 그 이후 636년까지 그의 활동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는 문학과 역사에 정통하고 재능 있는 서예가였으며, 아버지의 친구인 구양순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언급되었다.[1] 구양순 자신도 유명한 서예가였다.[1]

저량의 아들로 태어났다. 항주 전당현 출신이다. 본관하남군 양적현이다. 대업 13년(617년), 설거가 자립하자, 그의 밑에서 통사사인(通事舍人)을 지냈다.[2] 무덕 원년(618년), 아버지와 함께 당에 투항하여, 진왕부(태종 즉위 전의 막부)의 갑조참군(무기 관리)이 되었다.[2]

2. 2. 당나라 건국과 태종 시기

636년, 이세민(당 태종)이 황제가 된 지 10년(정관 10년)이 되었을 때, 저수량은 황실 기록국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면서 태종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1] 640년, 태종이 장군 후군집을 보내 고창을 정복한 후, 저수량과 위징은 고창을 합병하지 말고 고창을 속국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청원했다. 태종은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이 일은 저수량이 태종에게 정직한 조언을 자주 했고, 태종은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이를 받아들였으며, 항상 존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패턴의 시작이었으며, 저수량의 이러한 역할은 643년 봄 위징이 사망한 후 더욱 중요해졌다.

641년, 태종은 천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산에서 대규모 의식을 거행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설이와 저수량의 제안으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는 또한 저수량에게 황제의 고문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지만 그의 행적 기록자 역할은 계속 유지시켰다. 한번은 태종이 저수량이 보관하는 황실 기록을 검토하려 하자, 저수량은 황제가 황실 역사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쓰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태종은 "내가 하는 나쁜 일도 기록하나?"라고 질문했다. 저수량은 "제 책임이며 감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유기 재상은 "저수량이 기록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기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은 둘 모두에게 동의했다.

642년, 저수량은 태종이 그의 아들 위왕 이태를 태자 이승건보다 지나치게 편애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고, 황제가 후계자 외의 아들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것은 누가 황제의 뒤를 이을지 추측하게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태종은 그의 조언에 구두로 동의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 후 몇 달 동안, 저수량은 이 문제에 대해 태종에게 거듭 상기시켰지만, 태종은 이태를 이승건으로 교체할 의사가 없다고 관료들에게 반복적으로 알리면서도 정부가 이승건 지지자들과 이태 지지자들로 분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643년, 이승건은 이태에게 대체될까 봐 두려워하여 자신의 매형 조걸(趙節)과 두하(杜荷), 그리고 삼촌 한왕 이원창과 함께 태종을 전복시키려 음모를 꾸몄다. 음모가 발각되자, 태종은 이승건을 폐위시키고 다른 공모자들을 처형했다. 그는 이태에게 그를 태자로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이태는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태종에게 만약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면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동생 진왕 이치를 태자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태종은 감동했지만, 저수량은 즉시 이태의 말에 진실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대신 이치를 태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견은 태종의 매형 장손무기와 같았는데, 그는 이태와 이치의 외삼촌이었다. 곧, 이태의 책략이 이승건의 몰락의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린 태종은 장손, 저수량, 방현령, 이세적에게만 먼저 결정을 밝힌 후 이치를 태자로 세우고 이태를 유배 보냈다. 저수량은 새로운 태자의 보좌관이 되었고, 태종은 그, 유기, 잠문본, 마주에게 이치를 자주 방문하여 이치의 학업에 대해 조언하도록 했다.

643년 말, 태종은 앞서 약속한 대로 딸 신흥공주를 설연타의 진주 칸 이난과 결혼시키려 했지만, 장군 기필하력(契苾何力)과 동의하여 핑계를 대고 결혼 조약을 파기했다. 저수량은 조약을 파기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644년, 저수량은 고구려-당 전쟁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지만, 태종은 이세적의 주장에 따라 어쨌든 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결국 645년에 실패로 끝났다.) 644년 말, 태종은 황실 회의에서 자신의 핵심 관료들에게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말하면서 저수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저수량은 박식하고 굳건하다. 그는 종종 충실한 조언을 했고, 부드러운 대우를 받아야 하는 섬세한 새와 같이 내 마음에 가깝다."

그는 곧 저수량을 황문시랑으로 임명하여 정부의 심사국의 부국장(門下省, Menxia Sheng)으로 삼았지만, 더 나아가 저수량에게 사실상 재상인 "참여 조정"의 지위를 부여했다.

645년, 저수량은 유기의 죽음을 초래한 사건에 연루되었다. 고구려 원정이 끝난 후, 태종은 정주(定州, 대략 현대 바오딩, 허베이)로 돌아왔고 당시 병을 앓고 있었다. 유기와 마주가 그의 별궁에서 태종을 방문하고 나오자, 저수량은 황제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고, 유기는 울면서 "황제께서 매우 아프시니 걱정됩니다!"라고 말했다. 저수량은 그 후 유기가 "국가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젊은 황제를 돕기만 하면 됩니다. 이윤과 곽광의 선례에 따라, 마음이 두 마음인 고위 관료들을 처형하면 국가는 안전할 것입니다."라고 태종에게 거짓 보고했다. 유기가 이전에 태종에게 만약 어떤 관료가 불충하면 즉시 처형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태종은 이 주장을 믿었다. 유기는 마주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달라고 요청했고, 마주는 그렇게 했지만, 저수량은 유기가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저수량의 말을 믿은 태종은 유기에게 자결을 명령했지만 그의 가족은 사면했다.

646년, 태종은 제국 전역의 지방 행정을 점검하기 위해 22명의 황실 관료를 파견했다. 이 관료들은 지방관과 현령에 대한 많은 부정 행위를 고발했고, 해당 지방관과 현령을 처벌할 것을 제안했다. 기소된 많은 관료들이 태종에게 상소를 했고, 태종은 저수량에게 이 상소를 검토하도록 했다. 결국, 태종은 20명의 관료를 무죄로 판결하고 승진시키고, 7명에게는 중대한 유죄를 선고하여 처형하고, 다른 1,000명에게는 경미한 처벌을 내리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해 말, 방현령은 사소한 위반으로 재상직에서 해임되었고, 저수량은 태종에게 방현령이 통치에 큰 공헌을 했으므로 쉽게 해임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태종은 동의했고 방현령을 불러 재상으로 복귀시켰다.

648년, 저수량은 중서령이 되었는데, 이는 정부의 입법국을 이끄는 직책이자 재상으로 여겨지는 직책이었다.

649년 여름, 태종은 취미궁(翠微宮)에서 심각한 병을 앓았다. 그는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불러 이치를 그들에게 맡겼다. 그는 곧 사망했고, 이치가 그의 뒤를 이었다(고종 황제). 새 황제의 신임을 받은 장손무기와 저수량은 사실상 정부를 책임지게 되었다.

2. 3. 고종 시기와 측천무후와의 갈등

고종측천무후가 허경종, 이의부 등의 모함으로 저수량을 애주(지금의 베트남 타인호아성)자사로 좌천시켰고, 저수량은 그곳에서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저언보와 저언충도 애주로 유배되었다가 모두 살해당했다.[2]

영휘 6년(655년), 고종이 무조를 황후로 세우려 하자 저수량은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측천무후와 고종에 의해 좌천되었다. 이로 인해 측천무후의 원한을 사 사형당할 뻔했으나, 유조 덕분에 사형은 면했다. 대신 담주 도독, 계주 도독을 거쳐 최종적으로 애주까지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1]

3. 정치적 업적과 유산

저수량은 당 태종고종 시기에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측천무후와의 갈등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태종 시기, 저수량은 황실 기록관으로 일하며 태종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640년 고창 정복 후 고창을 속국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641년 태산 봉선 의식 중단을 건의했으며, 643년 태자 책봉 문제에서 이치를 지지했다. 태종은 저수량을 "박식하고 굳건하며 충실한 조언을 하는 인물"로 평가하며 황문시랑으로 임명하고, 사실상 재상 지위인 "참여 조정" 지위를 부여했다.[1]

649년 태종 사후, 저수량은 장손무기와 함께 고종을 보필하며 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655년 고종이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려 하자, 저수량은 유교적 원칙에 따라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태종이 자신에게 고종과 왕황후를 맡겼고, 무측천은 태종의 후궁이었으므로 황후가 되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주장했다. 이로 인해 무측천의 미움을 사 탄주, 계주를 거쳐 애주(현재 베트남 타인호아성)까지 유배되었고, 658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1]

659년, 장손무기가 모함으로 자결을 강요받은 후, 허경종과 이의부는 저수량이 장손무기의 반역을 부추겼다고 무고했다. 고종은 저수량의 관직을 박탈하고, 아들 저언보와 저언충은 유배 도중 살해되었다.[1]

705년, 중종 복위 후 저수량은 신원되어 명예를 회복했다.[1]

3. 1. 당 태종 시기의 정치적 역할

636년, 이세민(당 태종)이 황제가 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저수량은 황실 기록국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면서 태종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640년, 태종이 장군 후군집을 보내 고창을 정복한 후, 저수량과 위징은 고창을 합병하지 말고 고창을 속국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청원했다. 태종은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이 일은 저수량이 태종에게 정직한 조언을 자주 했고, 태종은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이를 받아들였으며, 항상 존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패턴의 시작이었다. 저수량의 이러한 역할은 643년 봄 위징이 사망한 후 더욱 중요해졌는데, 위징은 태종 재위 기간 대부분 동안 태종에게 그가 옳게 하고 있는 것과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조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641년, 태종은 천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산에서 대규모 의식을 거행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설이(薛頤)와 저수량의 제안으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태종은 또한 저수량에게 황제의 고문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지만 그의 행적 기록자 역할은 계속 유지시켰다. 한번은 태종이 저수량이 보관하는 황실 기록을 검토하려 하자, 저수량은 황제가 황실 역사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쓰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태종은 "내가 하는 나쁜 일도 기록하나?"라고 질문했다. 저수량은 "제 책임이며 감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유기 재상은 "저수량이 기록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기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은 둘 모두에게 동의했다. 642년, 저수량은 태종이 그의 아들 위왕 이태를 태자 이승건보다 지나치게 편애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고, 황제가 후계자 외의 아들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것은 누가 황제의 뒤를 이을지 추측하게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태종은 그의 조언에 구두로 동의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 후 몇 달 동안, 저수량은 이 문제에 대해 태종에게 거듭 상기시켰지만, 태종은 이태를 이승건으로 교체할 의사가 없다고 관료들에게 반복적으로 알리면서도 정부가 이승건 지지자들과 이태 지지자들로 분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1]

643년, 이승건은 이태에게 대체될까 봐 두려워하여 자신의 매형 조걸(趙節)과 두하(杜荷), 그리고 삼촌 한왕 이원창과 함께 태종을 전복시키려 음모를 꾸몄다. 음모가 발각되자, 태종은 이승건을 폐위시키고 다른 공모자들을 처형했다. 태종은 이태에게 그를 태자로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이태는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태종에게 만약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면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동생 진왕 이치를 태자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태종은 감동했지만, 저수량은 즉시 이태의 말에 진실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대신 이치를 태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견은 태종의 매형 장손무기와 같았는데, 그는 이태와 이치의 외삼촌이었다. 곧, 이태의 책략이 이승건의 몰락의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린 태종은 장손, 저수량, 방현령, 이세적에게만 먼저 결정을 밝힌 후 이치를 태자로 세우고 이태를 유배 보냈다. 저수량은 새로운 태자의 보좌관이 되었고, 태종은 그, 유기, 잠문본, 마주에게 이치를 자주 방문하여 이치의 학업에 대해 조언하도록 했다.[1]

643년 말, 태종은 앞서 약속한 대로 딸 신흥공주를 설연타의 진주 칸 이난과 결혼시키려 했지만, 장군 기필하력(契苾何力)과 동의하여 핑계를 대고 결혼 조약을 파기했다. 저수량은 조약을 파기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태종은 듣지 않았다. 644년, 저수량은 고구려-당 전쟁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지만, 태종은 이세적의 주장에 따라 어쨌든 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결국 645년에 실패로 끝났다.) 644년 말, 태종은 황실 회의에서 자신의 핵심 관료들에게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말하면서 저수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1]

:"저수량은 박식하고 굳건하다. 그는 종종 충실한 조언을 했고, 부드러운 대우를 받아야 하는 섬세한 새와 같이 내 마음에 가깝다."

태종은 곧 저수량을 황문시랑으로 임명하여 정부의 심사국의 부국장(門下省, Menxia Sheng)으로 삼았지만, 더 나아가 저수량에게 사실상 재상인 "참여 조정"의 지위를 부여했다.[1]

645년, 저수량은 유기의 죽음을 초래한 사건에 연루되었다. 고구려 원정이 끝난 후, 태종은 정주(定州, 대략 현대 바오딩, 허베이)로 돌아왔고 당시 병을 앓고 있었다. 유기와 마주가 그의 별궁에서 태종을 방문하고 나오자, 저수량은 황제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고, 유기는 울면서 "황제께서 매우 아프시니 걱정됩니다!"라고 말했다. 저수량은 그 후 유기가 "국가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젊은 황제를 돕기만 하면 됩니다. 이윤과 곽광의 선례에 따라, 마음이 두 마음인 고위 관료들을 처형하면 국가는 안전할 것입니다."라고 태종에게 거짓 보고했다. 유기가 이전에 태종에게 만약 어떤 관료가 불충하면 즉시 처형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태종은 이 주장을 믿었다. 유기는 마주에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달라고 요청했고, 마주는 그렇게 했지만, 저수량은 유기가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저수량의 말을 믿은 태종은 유기에게 자결을 명령했지만 그의 가족은 사면했다.[1]

646년, 태종은 제국 전역의 지방 행정을 점검하기 위해 22명의 황실 관료를 파견했다. 이 관료들은 지방관과 현령에 대한 많은 부정 행위를 고발했고, 해당 지방관과 현령을 처벌할 것을 제안했다. 기소된 많은 관료들이 태종에게 상소를 했고, 태종은 저수량에게 이 상소를 검토하도록 했다. 결국, 태종은 20명의 관료를 무죄로 판결하고 승진시키고, 7명에게는 중대한 유죄를 선고하여 처형하고, 다른 1,000명에게는 경미한 처벌을 내리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 해 말, 방현령은 사소한 위반으로 재상직에서 해임되었고, 저수량은 태종에게 방현령이 통치에 큰 공헌을 했으므로 쉽게 해임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태종은 동의했고 방현령을 불러 재상으로 복귀시켰다.[1]

648년, 저수량은 중서령이 되었는데, 이는 정부의 입법국을 이끄는 직책이자 재상으로 여겨지는 직책이었다.[1]

649년 여름, 태종은 취미궁에서 심각한 병을 앓았다. 태종은 장손무기와 저수량을 불러 이치를 그들에게 맡겼다. 태종은 곧 사망했고, 이치가 그의 뒤를 이었다(고종 황제). 새 황제의 신임을 받은 장손무기와 저수량은 사실상 정부를 책임지게 되었다.[1]

3. 2. 측천무후와의 갈등과 비극적 최후

측천무후는 허경종(許敬宗), 이의부(李義府) 등이 모함하는 말을 믿고 저수량을 애주(愛州, 지금의 베트남 타인호아성)자사로 좌천시켰고,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4] 그의 아들 저언보(褚彦甫)·저언충(褚彥沖)도 애주로 유배되었다가 모두 살해당했다.[4]

650년 겨울, 저수량은 어사대부 위사겸(魏思謙)으로부터 정부 통역관에게 토지를 강매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652년 봄, 고종은 저수량을 동주에서 소환하여 문부성의 상서로 임명하고, 실질적인 재상 지위인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을 부여했다.

653년 가을, 저수량은 정부 행정부 수장인 '부야(僕射)'로 임명되었지만, 계속해서 문부성 사무를 담당했다.

655년 무렵, 고종의 부인 왕황후는 총애를 잃었고, 후궁 무소의는 그녀를 몰아내고 싶어 했다. 어느 조정 회의 후, 고종은 재상 저수량, 장손무기, 이세적(이지) , 우지녕(虞志寧)을 궁궐로 소환했다. 저수량은 고종이 왕황후를 폐위하고 무소의로 교체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려 한다는 것을 짐작했다. 저수량, 장손무기, 우지녕이 고종을 만났을 때, 고종은 왕황후를 폐위하고 무소의로 교체하는 것에 동의를 구하려 했다. 저수량은 완강하게 반대했는데, 태종이 고종뿐만 아니라 왕황후까지 그에게 위탁했고, 무소의는 이전에 태종의 후궁이었으므로 그녀를 황후로 삼는 것은 근친상간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유교 원칙에 근거하여 주장했다. 회의 중에 그는 너무 감정적이 되어 머리를 바닥에 반복해서 부딪치며 피를 흘렸고, 사임을 제안하여 고종의 분노를 샀다. 다른 두 재상 한원(韓瑗)과 내제(來濟) 역시 무소의의 등극에 반대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결국 이지가 이것은 단지 황제의 가족 문제일 뿐이라고 언급하자, 고종은 그 변화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저수량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탄주 (대략 현대의 창사, 호남)의 사령관으로 강등시켰고, 한 달 후인 655년 겨울, 왕황후와 소숙비를 폐위했다. 그리고 무소의를 황후로 삼아 왕황후를 대체했다.

657년, 저수량은 사령관으로 남아있으면서도, 그의 사령부는 탄주에서 더 멀리 떨어진 귀주(桂州, 대략 현대의 계림, 광서)로 옮겨졌다. 무소의의 동맹 이의부와 허경종은 한원과 내제가 저수량과 함께 반역을 음모했다고 거짓으로 비난했다. 고종은 한원과 내제를 멀리 떨어진 지방관으로 강등시키고, 저수량은 제국 최남단 국경인 애주(愛州) 자사로 더욱 강등시켰다. 저수량은 애주에 도착한 후, 자신이 황태자를 지지하고 나중에 통치를 도왔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청원을 제출했지만, 무시되었다. 그는 658년에 애주 자사로 재직하던 중 사망했다.

659년, 장손무기가 반역죄로 허위 고발되어 유배되었고 (나중에 자결을 강요받음), 허경종과 이의부는 저수량이 장손무기의 음모를 부추겼다고 허위로 비난했다. 이에 대응하여, 고종은 사후에 저수량의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그의 후손들을 애주로 유배보냈는데; 저수량의 아들 저언보(楮彥甫)와 저언충(楮彥沖)은 유배 도중에 살해되었다.

3. 3. 사후 복권과 역사적 평가

고종이 무측천을 황후로 세우는 것에 대해 유교적 원칙에 근거하여 강력하게 반대했다.[1] 이로 인해 무측천의 원한을 사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태종에게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형은 면한다는 권리를 얻었기에[1] 담주 도독, 계주 도독으로 좌천되었고, 최종적으로 애주(현재 베트남 중부, 타잉호아 성)까지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1]

신룡 원년(705년)에 저수량의 일가는 명예 회복되어, 작위를 되돌려 받았다.[1]

4. 서예

저수량은 당태종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는 그의 서예 실력 때문일 수 있다. 당태종이 재상 위징에게 우세남이 죽은 후 서예에 대해 논의할 사람이 없다고 말하자, 위징은 저수량의 서예를 추천했고, 당 태종은 즉시 저수량을 불러들였다. 한번은 당 태종이 포상 공고를 내고 백성들에게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의 작품을 제출하도록 요청했는데, 진품과 위조품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제출되었다. 저수량은 이 작품들을 감정하는 책임을 맡았고, 명확하게 구별해냈다.[2]

육조 시대부터 발전해 온 해서를 고도로 완성시킨 남파의 우세남, 북파의 구양순의 서풍을 흡수·융합하여 독자적인 서풍("저법")을 확립했다. 특히 만년의 『안탑성교서』는 해서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며, 후대의 수금체로 이어지는 등 후세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힘이 넘치는 북파에 속한다고 여겨지지만, 결체는 편평하고 안정감 있는 남파의 성질을 함께 지니고 있다. 왕희지의 진서 감정 직무를 맡았으며, 그의 글씨를 잘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40대에 쓴 『이궐불감비』나 『맹법사비』에는 예서의 필법이 보이며, 가는 선이면서도 굳세고 날카롭다는 평을 받는다. 50대에 쓴 『방현령비』나 『안탑성교서』에서는 약동적이고 유려한 작풍으로 변화했다.

저수량의 글씨는 결체가 한가하고 우아하며, 변화의 다양성과 정취가 풍부한 점에서는 초당의 삼대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2]

4. 1. 서예가로서의 명성과 초당 3대가

당태종의 서예를 지도하였고,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그 수집 사업의 관리를 맡았다. 그는 글씨에 뛰어나 구양순, 우세남과 함께 당 서도의 일인자가 되었다. 해서, 행서, 초서를 잘 썼는데, 특히 해서에 뛰어났다.[2]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상서복야에까지 이르렀으나, 당고종 때 측천무후가 허경종(許敬宗), 이의부(李義府) 등이 그를 모함하는 말을 믿고 애주(愛州, 지금의 베트남 타인호아성) 자사로 좌천시켰고,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저언보(褚彦甫)·저언충(褚彦沖)도 애주로 유배되었다가 모두 살해당했다.

636년, 저수량이 당 태종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은 그의 서예 실력 때문일 수도 있다. 당 태종이 재상 위징에게 우세남이 죽은 후 서예에 대해 논의할 사람이 없다고 말하자, 위징은 저수량의 서예를 추천했고, 당 태종은 즉시 저수량을 불러들였다. 한번은 당 태종이 포상 공고를 내고 백성들에게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의 작품을 제출하도록 요청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왕희지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작품들을 제출하여 진품과 위조품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저수량은 이 왕희지 작품들을 감정하는 책임을 맡았고,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육조 시대부터 발전해 온 해서를 고도로 완성시킨 남파의 우세남, 북파의 구양순 서풍의 특징을 흡수·융합하면서, 이를 뛰어넘어 독자적인 서풍("저법")을 확립했다. 특히 만년의 『안탑성교서』는 해서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며, 후대의 수금체로 이어지는 등 후세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힘이 넘치는 북파에 속한다고 여겨지지만, 결체는 편평하고 안정감 있는 남파의 성질을 함께 지니고 있어, 종래부터의 귀속 논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왕희지의 진서 감정 직무를 맡았으며, 그의 글씨를 잘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40대에 쓴 『이궐불감비』나 『맹법사비』에는 예서의 필법이 보이며, 가는 선이면서도 굳세고 날카롭다는 평을 받는 한편, 50대에 쓴 『방현령비』나 『안탑성교서』에서는 약동적이고 유려한 작풍으로 일변했다.

저수량의 글씨는 결체가 한가하고 우아하며, 변화의 다양성과 정취가 풍부한 점에서는 초당의 삼대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2]

4. 2. 대표 작품과 서풍의 변화

육조 시대부터 발전해 온 해서를 고도로 완성시킨 우세남, 구양순의 서풍을 흡수·융합하면서, 이를 뛰어넘어 독자적인 서풍("저법")을 확립했다. 특히 만년의 『안탑성교서』는 해서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며, 후대의 수금체로 이어지는 등 후세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힘이 넘치는 북파에 속한다고 여겨지지만, 결체는 편평하고 안정감 있는 남파의 성질을 함께 지니고 있어, 종래부터의 귀속 논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희지의 진서 감정 직무를 맡았으며, 그의 글씨를 잘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2] 40대에 쓴 『이궐불감비』나 『맹법사비』에는 예서의 필법이 보이며, 가는 선이면서도 굳세고 날카롭다는 평을 받는 한편, 50대에 쓴 『방현령비』나 『안탑성교서』에서는 약동적이고 유려한 작풍으로 일변했다.

수량의 글씨는 결체가 한가하고 우아하며, 변화의 다양성과 정취가 풍부한 점에서는 초당의 삼대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

『맹법사비』(부분)


『안탑성교서』(부분)


현재 남아 있는 저수량의 작품은 다음 4가지이며, 모두 해서체이다.

  • 이궐불감비
  • 맹법사비
  • 방현령비
  • 안탑성교서


근거가 부족하지만, 저수량의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주로 다음과 같다.

  • 난정서 팔주본 제2(임모)
  • 고수부
  • 문황애책
  • 예관찬
  • 음부경
  • 해서천자문
  • 행서천자문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書道辞典
[6] 서적 書道全集
[7] 서적
[8] 서적
[9] 서적 書道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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