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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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한장은 청나라 말기의 관료로, 공생으로 발탁되어 증국번의 상군에서 식량 수송을 담당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호남순무, 호광총독을 거쳐 양광총독을 역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온화한 성품으로 민생 안정에 힘썼다. 호광총독 대리, 호광총독을 거쳐 양광총독으로 재임하며 해방론을 주창했다. 사후에는 근각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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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한장은 증국번 휘하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여러 요직을 거치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공생(貢生) 때 지현에 발탁되어 증국번이 상군을 조직하여 식량 수송을 담당했고, 강서성 길남공녕도(吉南贛寧道), 광동 감량도, 광동 안찰사, 광동 포정사를 역임했다.

1865년(동치 4년) 호남순무에 임명되었으며, 1867년(동치 6년) 호광총독 대리를 거쳐 1870년(동치 9년) 호광총독이 되었다. 1882년(광서 8년) 어머니 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1888년(광서 14년) 조운총독으로 복귀했으나 잠시 후 양광총독으로 이동하여 해방론(海防論)을 주창했다.

사후, 근각(勤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1. 초기 관직 생활

공생(貢生) 시절 지현으로 발탁되어 증국번의 상군에서 식량 수송을 담당했으며, 강서성 길남공녕도(吉南贛寧道), 광동 감량도, 광동 안찰사, 광동 포정사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2.2. 호남순무 시절

1865년(동치 4년), 호남순무에 임명되었다. 당시 태평천국이세현이 복건성을 거쳐 강소성에 침입하여 후난성을 엿보고 있었고, 귀주성의 묘족 봉기군도 후난성 침입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한장은 전 강소성 안찰사 진사걸을 침주에 파견하여 태평천국군의 침입을 방지하였고, 전 운남 안찰사 조환련을 악주에 파견하여 병사의 반란을 막았다. 한편, 귀주성과 성의 경계에는 총군사 주홍인을 파견했다. 주홍인은 귀주 포정사 조침과 협력하여 묘족군을 무찔렀다.

2.3. 호광총독 시절

1867년(동치 6년)에 호광총독 대리가 되었고, 1870년(동치 9년)에는 호광총독이 되었다. 이한장은 온화한 성격으로 민정도 잘 숙지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평안함에 힘썼다.

2.4. 양광총독 시절과 말년

1882년(광서 8년), 어머니 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1888년(광서 14년) 조운총독으로 복귀했으나 잠시 후 양광총독으로 이동하여 해방론(海防論)을 주창했다.

사후, 근각(勤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