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슈트라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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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25년 빈에서 태어난 작곡가로,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1844년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데뷔하여 아버지의 악단과 경쟁하며 성장했고, 1849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악단을 합병하여 지휘자 및 작곡가로서 인기를 얻었다. 1848년 혁명 당시 혁명군을 지지하며 작품을 작곡했으며, 이후 황제에게 헌정하는 곡을 작곡하는 등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왈츠, 폴카, 오페레타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으며, 특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박쥐'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슈트라우스는 당대 음악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음악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세 번 결혼했으며, 1899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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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슈트라우스 2세 | |
---|---|
기본 정보 | |
이름 | 요한 슈트라우스 2세 |
로마자 표기 | Johann Baptist Strauss |
별칭 | 와르츠 왕 빈의 태양 빈의 또 다른 황제 오페레타 왕 |
출생일 | 1825년 10월 25일 |
출생지 | 빈, 오스트리아 제국 |
사망일 | 1899년 6월 3일 |
사망지 | 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안장 장소 | 빈 중앙 묘지 |
국적 | 1825-1887: 오스트리아 제국 1887-1899: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
직업 | 작곡가 지휘자 |
활동 시기 | 1844년 - 1899년 |
장르 | 빈 왈츠 오페레타 폴카 등 |
악기 | 바이올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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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요한 슈트라우스 1세 |
어머니 |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 |
친척 | 요제프 슈트라우스 (형제)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 (형제) |
결혼 | |
배우자 | 헨리에타 트레프츠 (1862년 결혼, 1878년 사망) 앙겔리카 디트리히 (1878년 결혼, 1882년 이혼) 아델레 도이치 (1887년 결혼) |
2. 생애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44년 자신의 악단을 결성하여 데뷔했고, 1849년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악단을 흡수, 합병하여 지휘자와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다.[13] 1851년부터 세계 연주 여행을 통해 국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13] 1872년에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세계 평화 기념 음악제 및 국제 음악 축제에 참가하여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를 연주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8] 1870년대부터는 오페레타 작곡에도 힘써 〈박쥐〉, 〈집시 남작〉 등 명작을 남겼다.[13]
1848년 혁명 당시 혁명군을 지지하여 오스트리아 황실의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13] 아버지 사망 후에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헌정하는 곡을 작곡하는 등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슈트라우스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 헨리에테 트레프츠가 1878년 사망한 후, 앙겔리카 디트리히와 재혼했으나 이혼했다.[13] 이후 아델레 도이치와 결혼하여 만년까지 함께 했다.[13]
1899년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발레곡 ''신데렐라(Aschenbrödel)''를 작곡 중이었다.[13]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의 시민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90]
연도 | 사건 |
---|---|
1844년 | 악단 결성 및 데뷔 |
1849년 | 아버지 사망, 악단 합병 |
1851년 | 세계 연주 여행 시작 |
1856년 | 러시아 파블롭스크에서 연주[13] |
1862년 | 헨리에테 트레프츠와 결혼 |
1867년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합창판) 초연 |
1871년 | 오페레타 〈인디고와 40인의 도적〉 초연 |
1872년 | 미국 보스턴 세계 평화 기념제 콘서트 출연 |
1874년 | 오페레타 〈박쥐〉 초연 |
1878년 | 첫 번째 부인 헨리에테 사망 |
1887년 | 세 번째 부인 아델레 도이치와 결혼 |
1899년 | 폐렴으로 사망 |
(그림) 아우구스트 아이젠멘겔
2. 1. 유년 시절과 음악적 성장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25년 10월 25일 빈에서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의 외증조부는 헝가리 유대인이었다.[2]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은행가가 되기를 바랐다.[13]


하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 몰래 프란츠 아몬(Franz Amon)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13] 아버지가 Emilie Trampusch(de)라는 정부를 위해 가족을 버리자, 어머니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4]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요아힘 호프만(Joachim Hoffmann)에게 대위법과 화성을, 요제프 드렉슬러(Joseph Drechsler)에게 화성 연습을 배웠다.[13] 특히 드렉슬러에게서 화성학을 배운 것이 그의 음악적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44년,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자신의 악단을 결성하여 빈 교외의 히칭(Hietzing)에 있는 도마이어 카지노(Dommayer's Casino)에서 데뷔하였다.[6] 이때 "징게딕테(Sinngedichte)" 작품 1번, "군스트베르버(Gunstwerber)" 작품 4번, 폴카 "헤르첸슬루스트(Herzenslust)" 작품 3번 등을 연주했다.[13]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의 데뷔에 분노하여 다시는 도마이어 카지노에서 연주하지 않겠다고 했다.[6]


초기에는 아버지와의 경쟁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곧 실력을 인정받아 빈 제2 시민 연대의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 명예직을 얻었다.[7] 1848년 혁명(revolutions of 1848 in the Austrian Empire) 당시 혁명가 편에 섰다가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13] 1849년 아버지 사망 후 두 악단을 합병하여 더 많은 순회공연을 하였다.[13]
다음은 유년 시절과 음악적 성장에 관한 연표이다.
연도 | 사건 |
---|---|
1825년 10월 25일 | 빈에서 출생 |
1832년 | 6세 때 첫 작품인 ‘첫 번째 착상’(왈츠, 작품 번호 없음) 작곡 |
1841년 가을 | 쇼텐 김나지움 졸업 |
1844년 10월 15일 | 돔마이어 카지노에서 데뷔 연주회 개최 |
1846년 6월 23일 | 아버지 요한 1세의 집 앞에서 자신의 악단원 수 명과 함께 연주 (관계 회복 시도) |
1848년 | 빈 남성 합창 협회와 계약 |
2. 2. 1848년 혁명 참여와 정치적 성향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48년 동유럽 혁명 당시 혁명군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48] 조국으로 돌아와 슈타이어마르크주에서 빈 혁명의 상황을 지켜보다가, 시민 측이 우세하다고 판단되자 혁명 지지자를 자처하며 빈으로 돌아왔다.[48] 그는 『혁명 행진곡』, 『학생 행진곡』, 『자유의 노래』 등을 작곡하여 학생 중심의 젊은 혁명 참가자들을 이끌었다.[48][49] 또한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금지되었던 프랑스 혁명가요 『라 마르세이예즈』를 연주하기도 했다.[50][49]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궁정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49]혁명이 진압된 후, 요한 2세는 황제가 페르디난트 1세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로 바뀌자 『황제 프란츠-요제프 행진곡』을 작곡해 헌정했지만, 황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49] 오히려 경찰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경찰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았다.[51] 그는 자신의 행동이 확고한 사상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순한 충동이었다고 진술하며,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용서를 구했다.[52]
2. 3. 국제적 명성과 활발한 활동
1849년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나자,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의 악단을 흡수하여 자신의 악단과 합병하였고, 지휘자이자 작곡가로서 인기를 높였다.[13] 1851년부터는 악단을 이끌고 세계 연주 여행을 떠나 큰 호응을 얻었다.1855년, 슈트라우스는 차르스코예 셀로 철도 회사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영진으로부터 1856년 파블롭스크의 폭스홀 파빌리온에서 연주할 위촉을 받았다.[13] 이후 1865년까지 매년 러시아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이 콘서트들로 슈트라우스 가문은 막대한 부를 얻었다.[64]

빈 궁정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러시아 궁정의 총아였다.[63] 파블로프스크 연주회에는 알렉산드르 2세 일가도 모습을 보였고, 황제의 동생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요한의 오케스트라에 가입하여 연주하기도 했다.[63] 요한은 자주 차르스코예 셀로와 파블로프스크 궁전에 초대되어 러시아 황실의 환대를 받았고, 대관식과 그 축하 행사에도 초대되었다.[63]
1872년에는 패트릭 길모어의 초청으로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세계 평화 기념 음악제 및 국제 음악 축제에 참가하여 1000명이 넘는 연주자들의 "대규모 콘서트"에서 주요 지휘자를 맡았다.[8] 이 공연에서 그는 "푸른 도나우" 왈츠를 연주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8]

당시 보스턴 세계 평화 기념제는 전례 없는 규모의 연주회였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지휘 시에는 2만 명의 연주자와 가수에게 정확한 템포를 맞추기 위해 100명의 부지휘자가 보조로 배치되었다.[68][70]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 연주회에 대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68][70]
보스턴에서 10여 차례의 콘서트와 무도회를 지휘한 후,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뉴욕에서의 콘서트에도 참여하여 모두 큰 성공을 거두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70]
2. 4. 오페레타 작곡과 만년
1870년경부터 오페레타도 만들기 시작하여, 〈인디고와 40명의 도적〉(1871년 초연)으로 성공을 거두었다(이 작품은 오늘날 〈천일야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3] 1874년 빈에서 초연됐던 오페레타 〈박쥐〉는 빈 오페레타의 최고의 명작이 되었다.[13]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오페레타는 전부 합쳐서 16곡에 이르나, 〈박쥐〉를 빼고는 〈베네치아의 한밤〉(1883년 초연)과 슈트라우스의 만 60세 탄생을 축하하여 1885년에 초연된 〈집시 남작〉이 지금도 애호되고 있다.[13] 또한 〈빈 기질〉이라고 제목 붙여진 오페레타는 슈트라우스의 유명한 음악을 이어 모아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슈트라우스 자신이 작품을 보고 승인하여 주었다.[13]슈트라우스는 1862년 가수 헨리에타 트레프츠(Henrietta Treffz)와 결혼하여 그녀가 1878년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13] 그녀가 사망한 지 6주 후,[13][14] 슈트라우스는 여배우 앙겔리카 디트리히(Angelika Dittrich)와 결혼했다.[13] 디트리히는 그의 음악을 열렬히 지지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신분과 의견 차이, 특히 그녀의 경솔함으로 인해 그는 이혼을 추구하게 되었다.[13]
슈트라우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혼인 무효 선언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종교와 국적을 변경하여 1887년 1월 작센-코부르크-고타(Saxe-Coburg-Gotha) 시민이 되었다.[13] 슈트라우스는 세 번째 부인인 아델레 도이치(Adele Deutsch)에게서 위안을 찾았고, 1887년 8월 그녀와 결혼했다.[13] 그녀는 그의 후년에 그의 창작 재능이 다시 흘러나오도록 격려했고, 그 결과 "집시 남작(Der Zigeunerbaron)"과 "숲 속의 제왕(Waldmeister)"과 같은 유명한 오페레타들과 "황제 왈츠(Kaiser-Walzer)" 작품번호 437, "황제 즉위 기념 왈츠(Kaiser Jubiläum)" 작품번호 434, "똑똑한 그레텔(Klug Gretelein)" 작품번호 462 와 같은 왈츠들이 탄생했다.
1899년 5월 하순,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던 요한은 심한 오한을 느꼈고,[74] 며칠 후 무리해서 사인회를 연 후 그날 밤부터 앓아눕게 되었다.[75] 여러 의사의 진찰 결과 당시에는 치명적인 병이었던 폐렴임이 밝혀졌다.[74] 아내 아델레는 요한에게 진짜 병의 상태를 숨기고, “신경통이니까, 잠시 참아. 금방 나을 거야.”라고 거짓말을 했다.[74] 미완성 발레곡이 매우 신경 쓰였던 듯, 작업을 중단해야만 하는 안타까움을 여러 번 토로했다.[75] 6월 3일, 전날 밤부터 밤낮으로 간호하던 아내 아델레가 “당신, 피곤하겠어요. 조금 쉬었다가……”라고 말하자, 요한은 미소 지으며 “그렇지. 어차피 그렇게 될 거야……”라고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74] 이것이 요한의 마지막 말이었다.[74] 그날 오후 4시 15분, 아내의 간호 속에 사망했다.[74] 향년 75세. 사망 당시 그는 발레곡 ''신데렐라(Aschenbrödel)''를 작곡 중이었다.[13]
요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빈 시는 즉시 빈 중앙묘지 내에 특별 묘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했다.[76] 장례식에는 10만 명의 시민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90] 이때 요한의 "신곡" 여러 곡이 추모곡으로 연주되었다.[76]
3. 주요 작품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왈츠, 폴카, 오페레타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오페레타 중에서는 박쥐, 베니스의 한밤, 집시 남작이 유명하고, 왈츠 중에서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빈 숲 이야기, 황제 왈츠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오페라 기사 파즈만을 작곡했으며, 사망 당시에는 발레 신데렐라를 작곡 중이었다.[23][24] 그의 작품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에서 자주 연주된다.
1856년부터 1865년까지 10년간, 그리고 1869년과 1886년에 러시아 파블로프스크에서 연주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64] 러시아 황실의 총애를 받으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63][62]
3. 1. 왈츠
제목 | 작품 번호 |
---|---|
기념의 시(Sinngedichte) | op.1 |
사랑의 노래(Liebeslieder) | op.114 |
가속도 론도(Accelerationen) | op.234 |
아침 신문(Morgenblätter) | op.279 |
빈의 봉봉(Wiener Bonbons) | op.307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 | op.314 |
예술가의 삶(Künstlerleben) | op.316 |
빈 숲 이야기(G'schichten aus dem Wienerwald) | op.325 |
술, 여자, 노래(Wein, Weib und Gesang) | op.333 |
인생을 즐겨라(Freuet euch des Lebens) | op.340 |
천일야화(Tausend und eine Nacht) | op.346 |
빈 기질(Wiener Blut) | op.354 |
우리 집에서(Bei uns z'Haus) | op.361 |
레몬꽃 피는 곳(Wo die Zitronen blüh'n) | op.364 |
칼리오스트로 왈츠(Cagliostro-Walzer) | op.370 |
오, 아름다운 5월이여!(O schöner Mai!) | op.375 |
남국의 장미(Rosen aus dem Süden) | op.388 |
북해의 그림(Nordseebilder) | op.390 |
봄의 소리(Frühlingsstimmen) | op.410 |
석호의 왈츠(Lagunen-Walzer) | op.411 |
보물의 왈츠(Schatz-Walzer) | op.418 |
도나우의 처녀(Donauweibchen) | op.427 |
황제 왈츠(Kaiserwalzer) | op.437 |
모두 손을 잡고(Seid umschlungen, Millionen) | op.443 |
소위 "10대 왈츠"[91]는 굵은 글씨로 표기합니다.(여러 설이 있으며, 자료에 따라 약간의 순서 변경이 있습니다)
3. 2. 폴카
작품 번호 | 작품명 |
---|---|
op. 43 | 폭발 폴카(Explosions-Polka) |
op. 72 | 농담 폴카(Scherz-Polka) |
op. 110 | 전자기 폴카(Elektro-magnetische Polka) |
op. 117 | 안넨 폴카(Annen-Polka)[23] |
op. 190 | 작은 것(Etwas Kleines) |
op. 202 | 천진난만한 아이(L'Enfantillage) |
op. 211 | 샴페인 폴카(Champagner-Polka) |
op. 214 | 트리치-트라치 폴카(Tritsch-Tratsch-Polka)[24] |
op. 260 | 광란의 폴카(Furioso-Polka) |
op. 269 | 파괴 폴카(Demolirer-Polka) |
op. 281 | 관광열차(Vergnügungszug) |
op. 288 | 네바 강 폴카(Newa-polka) |
op. 291 | 제국 수도는 하나, 빈은 하나(Sgibt nur a Kaiserstadt, sgibt nur a Wien) |
op. 319 | 바람기(Leichtes Blut) |
op. 332 | 헝가리 만세!(Éljen a Magyár!) |
op. 336 | 크라프펜 숲에서(Im Krapfenwald'l) |
op. 348 | 돌진!(Im Sturmschritt!) |
op. 351 | 인도의 무희(Die Bajadere) |
op. 365 | 틱택 폴카(Tik-Tak-Polka) |
op. 373 | 사냥(Auf der Jagd) |
op. 449 | 신 피치카토 폴카(Neue Pizzicato-Polka) |
피치카토 폴카(Pizzicato-Polka) | |
요제프 슈트라우스와의 공동 작품 | |
op. 315 | 여성 찬미(Lob der Frauen) |
op. 322 | 도시와 시골(Stadt und Land) |
op. 323 | 마음과 영혼(Ein Herz, ein Sinn) |
op. 330 | 신기루(Fata Morgana) |
op. 413 | 별로 무섭지 않아요 (So ängstlich sind wir nicht!) |
op. 324 | 천둥과 번개(Unter Donner und Blitz) |
3. 3. 오페레타
1870년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가족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난 불행한 해였다. 어머니 안나, 남동생 요제프, 그리고 고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죽음에 대한 병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 요한은 정신적으로 크게 지쳐 있었다. 작곡 의욕을 잃은 요한에게 아내 헨리에테와 주변 사람들은 오페레타 작곡을 열렬히 권유했다. 한때 오펜바흐에게 "당신도 오페레타를 써보는 건 어떻겠소?"라는 제안을 받았던 영향도 있어 요한은 오페레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힘들게 얻은 궁정무도회 음악감독 자리를 1871년 1월에 남동생 에두아르트에게 물려주고[66][65], 첫 오페레타 『박쥐』에 집중했다[65]. 대본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요한의 음악과 화려한 무대, 밝은 춤 덕분에 성공을 거두었다. 1871년 오페레타에 진출한 이후 요한은 새로운 댄스 음악을 거의 작곡하지 않았다.[66] 이후 요한은 오페레타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에두아르트는 슈트라우스 관현악단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초기에는 오펜바흐에게 크게 뒤처졌지만, 곧 요한은 오펜바흐를 훨씬 능가하는 오페레타 작곡가가 되었다.[67] 오늘날 요한의 『박쥐』과 『집시 남작』이 오페레타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상연 횟수는 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67] 요한은 대본 선택에 서툴렀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의 오페레타 대부분은 오늘날 잊혀졌지만, 『집시 남작』, 『베니스의 한밤』, 기성곡을 엮은 『빈 기질』 등은 오늘날에도 종종 상연되고 있다.
- 인디고와 40인의 도적 (Indigo und die vierzig Räuber / Tausend und eine Nacht)
- *: 《천일야화》라고도 한다. 3막. 1871년 초연.
- Karneval in Rom|로마의 사육제de (Der Karneval in Rom)
- *: 3막. 1873년 초연.
- '''박쥐''' (Die Fledermaus)
- *: 빈 오페레타의 대표적인 작품. 1874년 초연. 3막.
- '''빈의 칼리오스트로''' (Cagliostro in Wien)
- *: 3막. 1875년 초연.
- '''메투살렘 왕자''' (Prinz Methusalem)
- *: 3막. 1877년 초연.
- 鬼ごっこ (Blindekuh)
- *: 3막. 1878년 초연.
- '''여왕의 레이스 손수건''' (Das Spitzentuch der Königin)
- *: 3막. 1880년 초연.
- 즐거운 전쟁 (Der lustige Krieg)
- *: 3막. 1881년 초연.
- 베니스의 밤 (Eine Nacht in Venedig)
- *: 3막. 1883년 초연.
- '''집시 남작''' (Der Zigeunerbaron)
- *: 3막. 1885년 초연.
- Simplicius (operetta)|심플리키우스영어 (Simplicius)
- *: 3막. 1887년 초연.
- 니네타 후작 부인 (Fürstin Ninetta)
- *: 3막. 1893년 초연. “니네타 공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 야부카 (Jabuka, oder Das Apfelfest)
- *: “사과 축제”라고도 한다. 3막. 1894년 초연.
- 엘더플라워 (Waldmeister)
- *: 3막. 1895년 초연.
- 이성의 여신 (Die Göttin der Vernunft)
- *: 3막. 1897년 초연.
- 빈 기질 (Wiener Blut)
- *: 3막. 1899년 초연. 이것은 처음부터 기성의 무곡을 사용하는 기획으로 진행되었고, 도중에 슈트라우스가 사망했기 때문에 친구인 아돌프 뮐러 2세가 완성한 것이다.
3. 4. 기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오페레타 외에도 오페라와 발레 작품을 남겼다. 1892년 초연된 3막 오페라 파즈만 기사가 있으며,[24] 3막 발레 '신데렐라(Aschenbrödel)'는 1막만 완성되었고, 2막과 3막은 스케치만 남아있다. 후에 요제프 바이어(ヨーゼフ・バイヤー)가 이를 보완하였다.슈트라우스 2세는 러시아에서도 활동했다. 1856년 러시아 철도 회사와 계약을 맺고 여름 시즌에는 파블로프스크 역에서 연주회를 지휘했다.[60] 당시 러시아에서 받는 보수는 빈에서의 수입에 비해 파격적이었다.[61] 1857년 여름, 요한은 "살려면 러시아뿐입니다. 여기에는 돈이 있습니다. 돈이 있는 곳에야말로 인생이, 바로 인생이 있는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62]
러시아 궁정은 빈 궁정과는 대조적으로 슈트라우스 2세를 총애했다.[63] 파블로프스크 연주회에는 알렉산드르 2세 일가도 참석했고, 황제의 동생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첼로 연주 실력이 뛰어나 슈트라우스 2세의 오케스트라에 합류해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63] 슈트라우스 2세는 차르스코예 셀로와 파블로프스크 궁전에 자주 초대받아 러시아 황실의 환대를 받았으며, 대관식과 축하 행사에도 초대되었다.[63] 계약금은 계속 인상되어, 파블로프스크에서의 연주는 슈트라우스 가문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이 콘서트는 1856년부터 1865년까지 10년간 계속되었고, 이후에도 1869년과 1886년에 두 차례 더 맡았다.[64]
4. 평가와 영향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평생 빈 왈츠와 폴카 등 경쾌한 음악을 작곡하여 '왈츠의 제왕', '빈의 태양'[23], '빈의 또 다른 황제' 등으로 불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빈 숲 이야기』, 『황제 왈츠』 등 그의 대표적인 왈츠곡들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또한 오페레타 분야에서도 『박쥐』와 같은 걸작을 남겨 '오페레타의 제왕'으로도 불렸다.[24]
하지만 그의 음악은 '저속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107] 한때 고전 음악계에서 다소 경시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 당시 『혁명 행진곡』, 『학생 행진곡』, 『자유의 노래』 등을 작곡하고, 금지곡이었던 라 마르세이예즈를 연주하는 등[48][49][50]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빈 필의 신년음악회에서는 매년 1월 1일, 그를 중심으로 한 슈트라우스 가문의 작품이 연주되고 있다.
4. 1. 당대 음악가들의 찬사
당대 활동했던 대다수의 음악가들은 요한 2세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동명이인이지만 혈연관계는 없다)는 요한 2세를 두고 "'''타고난 재능으로 세상에 기쁨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 중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야말로 나를 특별히 사로잡는 최고의 인물이다'''"라고 칭찬했으며[102], 요한 2세를 떠올리지 않고는 『장미의 기사』의 왈츠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103]브람스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비엔나의 피이며, 베토벤, 슈베르트의 흐름을 직접 이어받은 주류이다'''"라고 말했다.[104] 브람스의 지지는 큰 영향을 미쳤고, 과거 요한 2세의 작품을 "너무 현대적이다", "왈츠의 레퀴엠" 등으로 혹평했던 음악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릭은 입장을 바꾸어[105], 오페라 『기사 파즈만』 무렵에는 "오늘날 그가 가장 효과적인 발레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작곡가이다"라고 칭찬할 정도가 되었다.
바그너도 요한 2세의 왈츠를 지휘한 후 "나에게 이런 가벼운 음악을 쓸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했고, "'''그는 유럽 음악의 최정상 중 하나이다. 우리의 고전은 모차르트에서 슈트라우스까지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라고 평가했다.[104] 차이콥스키도 그의 작품을 사랑한 사람 중 한 명이며, 발레 음악 『호두까기 인형』의 "꽃의 왈츠"는 요한 2세의 양식을 본떠 만들어졌다. 말러는 빈 궁정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때까지 오페레타를 상연한 적이 없던 동 극장에서 오페레타 『박쥐』를 공식 레퍼토리로 삼았다(1897년).
4. 2. 대중적 인기와 비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와 폴카는 당대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지만, 일각에서는 "저속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07] 그의 음악은 고전 음악계에서 다소 경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1989년 신년음악회와 관련된 일화가 좋은 예인데, 음악회 녹음이 끝난 후 소니 클래시컬은 CD 발매권을 얻기 위해 카를로스 클라이버에게 50만 마르크라는 고액을 제시했지만, 독일 그라모폰의 전 사장은 "겨우 댄스 음악에? 그렇다면 베토벤 작품의 CD를 한 장 내놓는 데는 얼마나 되겠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106]로린 마젤 퇴임 후 신년 음악회가 순회 제로 바뀌면서, 오늘날에는 세계의 지휘자 대부분이 슈트라우스 작품을 많이 다루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녹음 활동은 활발했어도 빈 왈츠 모음집 등을 한 장도 다루지 않은 지휘자가 대다수였고, 슈트라우스 작품을 여러 번에 걸쳐 계속 녹음한 지휘자는 마젤 이전 세대에서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클레멘스 크라우스 정도였다.
클레멘스 크라우스의 노력으로 1929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특별한 슈트라우스 전곡 프로그램을 공연한 이후,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매년 열리는 빈 신년 음악회에서 정기적으로 연주되고 있다. 저명한 슈트라우스 연주자로는 빌리 보스콥스키[19]가 있는데, 그는 슈트라우스 가족의 관습대로 바이올린을 들고 지휘하는 Vorgeigerde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 외에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를로스 클라이버, 로린 마젤,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등이 있다.
1848년 혁명 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혁명 행진곡』, 『학생 행진곡』, 『자유의 노래』 등을 작곡하여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혁명 참가자들의 선두에 섰으며, 심지어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금지되었던 프랑스 혁명가요 라 마르세이예즈를 연주하기까지 했다.[48][49][50] 이러한 활동은 대중들에게 그에 대한 인기를 높여주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비엔나의 피이며,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의 흐름을 직접 이어받은 주류이다"라고 말했다.[104] 리하르트 바그너도 요한 2세의 왈츠를 지휘한 후 "나에게 이런 가벼운 음악을 쓸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했고, "그는 유럽 음악의 최정상 중 하나이다. 우리의 고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서 슈트라우스까지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라고 평가했다.[104]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를 통해 그의 작품이 재조명되면서 대중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4. 3. 후대에 미친 영향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은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발레 음악 《호두까기 인형》 중 〈꽃의 왈츠〉 등 후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104] 그의 오페레타 《박쥐》는 구스타프 말러에 의해 빈 궁정 오페라 극장(1897년)의 공식 레퍼토리에 포함되는 등 오페레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67]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타고난 재능으로 세상에 기쁨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 중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야말로 나를 특별히 사로잡는 최고의 인물이다"라고 칭찬했으며[102], 브람스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비엔나의 피이며, 베토벤, 슈베르트의 흐름을 직접 이어받은 주류이다"라고 말했다.[104] 바그너도 "그는 유럽 음악의 최정상 중 하나이다. 우리의 고전은 모차르트에서 슈트라우스까지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라고 평가했다.[104]
클레멘스 크라우스 덕분에 1929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특별한 슈트라우스 전곡 프로그램을 공연한 이후,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매년 열리는 빈 신년 음악회에서 정기적으로 연주되고 있다.[19] 저명한 슈트라우스 연주자로는 빌리 보스콥스키가 있는데, 그는 슈트라우스 가족의 관습대로 바이올린을 들고 지휘하는 Vorgeigerde 전통을 이어받았다. 그 외에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를로스 클라이버, 로린 마젤,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등이 있다. 1966년에 결성된 비너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는 한때 슈트라우스 가족을 유명하게 만든 순회 오케스트라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20] 1987년에는 네덜란드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안드레 리우가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며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우주 비행 장면에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사용된 것이 대표적이다.
5. 일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죽음에 대한 공포, 기차 혐오증 등 특이한 면모를 보였다.[108][111]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어머니 안나, 동생 요제프, 아내 헨리에테의 장례식에 모두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했다.[110] 기차를 탈 때는 창밖 풍경을 보지 않으려고 커튼을 치고 바닥에 웅크린 채 샴페인을 마셨다고 한다.[111]
여성 편력이 심해 여러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세 번 결혼했다.[82] 첫 번째 아내는 11살 연상의 헨리에테 트레프츠, 두 번째 아내는 27살 연하의 안게리카 디트리히, 세 번째 아내는 26살 연하의 아델레 도이체였다.[86][94][98] 특히 안게리카는 결혼 5년 만에 요한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도망갔다.[97]
탈모가 있었던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원하는 팬들에게 애견인 검은 푸들의 털을 대신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115]
6. 기념
빈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기리는 두 곳의 박물관이 있다. 그가 1860년대에 살았던 프라터슈트라세의 거주지는 현재 비엔나 박물관의 일부이다.[21] 슈트라우스 박물관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중심으로 슈트라우스 가문 전체를 소개한다.[21]
빈 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사망하자 빈 중앙묘지 내에 특별 묘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했다.[76]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참석했다고 알려져 있다.[90] 1921년에는 황금빛 요한 슈트라우스 기념상이 건립되었는데,[79] 너무 사치스럽다는 비판을 받아 검은색으로 칠해졌다가 1991년에 다시 금색으로 복원되어 현재 빈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사랑받고 있다.[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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