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광
1. 개요
이홍광(1910~1935)은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홍해 또는 홍규이며, 가명으로 의산을 사용했다. 1910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1926년 길림성 이통현에 정착한 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 1935년 동흥읍 습격 사건을 지휘했으며, 같은 해 일만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을 딴 이홍광지대가 창설되어 활동했으며, 마오쩌둥과 김일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씨명 | 리 홍광 |
|---|---|
| 한국어 표기 | 리 홍광 |
| 로마자 표기 | Ri Hong-gwang |
| 출생 | 1910년 |
| 출생지 | 경기도 용인군 |
| 사망 | 1935년 |
| 사망지 | 환인현 흑하(黑瞎子)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소속 조직 | 만주 공농 반일 의용군 중국 공농 홍군 동북 인민 혁명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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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경력 | 타구대(打狗隊) 만주 공농 반일 의용군 제4종대 중국 공농 홍군 제32군 남만 유격대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독립사 참모장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참모장 겸 제1사 사장 |
| 묘 |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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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이씨 -
이한빈 (1926년)
대한민국의 관료, 교육자, 학자 이한빈은 서울대 영문과 졸업 후 하버드 MBA를 취득하고 재무부 예산국장, 차관, 주스위스 대사, 숭전대학교 총장, 아주공과대학 학장,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하며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교수, 인간개발연구원 회장으로 활동했고, 「행정학원론」, 「사회변동과 행정」 등의 저서를 남겼다. -
용인 이씨 -
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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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사망 -
김철주 (군인)
김철주는 김형직과 강반석의 아들이자 김일성의 동생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유격대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1935년 전사한 항일운동가이다. -
1935년 사망 -
윌 로저스
윌 로저스는 1879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한 체로키족 혈통의 미국의 배우, 유머 작가, 칼럼니스트, 사회 평론가로, 로프 기술을 시작으로 영화, 라디오, 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며 미국적 가치관을 대변하고 사회와 정치 문제를 풍자하며 큰 인기를 얻었으며, 비행 중 사고로 사망했다. -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
김동인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감자'와 같은 작품을 통해 사실주의를 개척하고, 《창조》를 창간했으며, 사후 동인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
주요한
주요한은 일제강점기 시인이자 언론인이자 정치인이며, 친일 행위로 인해 논란이 있으며, 국회의원과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
2. 생애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장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 5월 일만군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환인현 흑할자 밀영에서 사망했다.
2.1. 출생과 초기 활동
이홍광(李紅光, 1910~1935)은 본명이 이홍해(李弘海) 또는 이홍규(李弘奎)이며, 의산(義山)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1910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 400번지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용인 이씨이다. 용인 이씨 족보와 제적등본에는 이름이 이홍규(李鴻圭)로 나와 있다.
1926년 길림성 이통현 류사취자둔에 정착했다. 1927년 남만 농민 동맹과 청년 동맹에 가입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였다.
1930년 8월 적위대(타구대) 대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9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1년 중공 반석현위원회 이통・쌍양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거쳐 1932년 반석 중심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2. 항일 무장 투쟁
1932년 2월, 만주성위원회에서 파견된 양좌청에 의해 적위대가 반석 유격대로 발전하면서 이홍광은 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양림이 파견되어 반석 공농 의용군이 성립되자, 이홍광은 제2분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1932년 6월, 만주 공농 반일 의용군 제4군 제1종대 참모장을 역임하고, 11월에는 중국 공농 홍군 제32군 남만 유격대 교도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1933년 9월,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독립사 참모장이 되었다. 1934년 말,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제1사 사장 겸 정치위원이 되었다. 1935년 2월 13일 밤에는 2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조선 국경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東興邑)을 습격하여 일본 측에 큰 타격을 입혔다(동흥습격사건). 이 사건은 김일성의 보천보 사건보다 2년 먼저 일어났고, 일본측에 입힌 타격도 더 컸지만 잊혀졌다.
2.3. 동흥읍 습격 사건
1935년 2월 13일, 이홍광은 2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조선 국경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 경관대와 교전을 벌여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등 큰 타격을 입혔다. 동흥습격사건은 김일성의 보천보 사건보다 2년 먼저 일어났으며, 일본 측에 더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 당시 이홍광이 18세 미소녀라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이는 이홍광 측의 심리전으로 밝혀졌다.
3. 사후
이홍광 사후, 1946년 남만주에서 전투를 벌여 해방 전선에서 활약한 이홍광지대(李紅光支隊)가 설립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후, 만주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중국 정부에 협력하여 공산당의 지배에 대항하여 봉기한 통화 사건 진압과 체포, 처형에 이홍광지대가 주력으로 활약했다.
3.1. 이홍광지대
이홍광 사후, 이홍광지대(李紅光支隊)라는 부대가 설립되어 1946년 남만주에서 전투를 벌여 해방 전선에서 활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만주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이 중국 정부에 협력하여 공산당의 지배에 대항하여 봉기한 통화 사건 진압과 체포, 처형에 주력 부대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