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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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홍조는 1844년에 거인이 되고, 1852년에 진사가 된 청나라 말기의 문신이다. 함풍제의 황태자 재순(동치제)의 제사(帝師)를 거쳐 동치제 즉위 후 내각대학사, 군기대신, 호부 부상서, 공부상서를 역임했다. 광서제 치세에서도 예부상서, 병부상서, 이조상서를 지냈으며, 이홍장과는 정적 관계였다.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후 1897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태자태부와 문정의 시호를 받았다. 베이징 사범대학 학장을 지낸 리스쩡이 그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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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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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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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 |
직함 | 그랜드 컨설러 |
임기 시작 | 1894년 11월 3일 |
임기 종료 | 1897년 7월 31일 |
임기 시작 | 1896년 12월 2일 |
임기 종료 | 1897년 7월 31일 |
직함 | 총리야문 장관 |
임기 시작 | 1895년 8월 6일 |
임기 종료 | 1897년 7월 31일 |
직함 | 예부 장관 |
임기 시작 | 1887년 |
임기 종료 | 1896년 |
직함 | 이부 장관 |
임기 시작 | 1896년 12월 3일 |
임기 종료 | 1897년 7월 31일 |
겸임 | 시징 |
전임 | 서동 |
후임 | 손가내 |
직함 | 이부 장관 |
임기 시작 | 1882년 3월 13일 |
임기 종료 | 1884년 4월 8일 |
겸임 | 경수 |
전임 | 만청리 |
후임 | 서동 |
직함 | 병부 장관 |
임기 시작 | 1881년 2월 1일 |
임기 종료 | 1882년 3월 13일 |
겸임 | 경수 (1881년까지), 지허 (1881년부터) |
전임 | 심귀분 |
후임 | 모창희 |
개인 정보 | |
교육 | 진사 학위 (1852년) |
출생일 | 1820년 |
출생지 | 가오양 현, 직례 |
사망일 | 1897년 7월 31일 (향년 77세) |
사망지 | 베이징 |
자 | 란쑨 (蘭孫) |
호 | 스쑨 (石孫) |
시호 | 원정 (文正) |
2. 생애
이홍조는 현재 허베이성 가오양현 즈리에서 태어났다.[2] 그는 1844년 거인, 1852년 진사가 되었고, 한림원 서길사로 선정되어 편수와 하남학정을 역임했다. 1861년 함풍제의 황태자 재순(이후 동치제)이 학문을 시작할 나이가 되자 대학사 팽온장의 추천으로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동치제와 광서제 시대에 걸쳐 중용되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더 큰 의무를 부여받았지만, 1897년 세상을 떠났다.[3] 사후 태자태부(太子太傅)와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3] 베이징 사범대학의 학장을 지낸 이석증(李石曾)은 그의 아들이다.[3]
2. 1. 관직 생활 초기
1844년에 거인, 1852년에 진사가 되었고, 한림원 서길사로 선정되어 편수와 하남학정을 역임했다.[3]1861년, 함풍제의 황태자 재순(동치제)이 학문을 시작할 나이가 되자 대학사 팽온장의 추천으로 제사(帝師)가 되었다.[3] 당시 5세가 채 안 된 황제는 학문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홍조가 가르칠 때만 집중했다.[2]
2. 2. 동치제 시대
1861년, 함풍제의 황태자 재순(이후 동치제)이 학문을 시작할 나이가 되자 대학사 팽온장의 추천으로 제사(帝師)가 되었다.[3] 동치제는 즉위 당시 5세가 채 안 된 어린 나이였는데, 학문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홍조가 가르칠 때만 집중하였다고 한다.[2] 1865년 동치제가 즉위하자 이홍조는 내각대학사 · 군기대신이 되었고,[3] 호부 부상서를 거쳐[2] 1872년에 공부상서가 되었다.[3] 1874년 10월 동치제의 병이 깊어지자, 황제를 대신해 상소에 비평을 하기도 했다.[3]2. 3. 광서제 시대
광서제 즉위 후 예부상서, 병부상서, 이조상서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옹동화와 함께 광서제를 지원했다. 이홍장과 친족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혈연관계가 없었으며 청불 전쟁과 청일 전쟁에서 주전론을 주장하는 등 이홍장과는 정적이었다.[3]1894년 청일 전쟁 발발 후 더 큰 책임을 맡았으나, 1897년 사망했다.[3] 그는 관직에 복귀하여 군기처와 총리아문(사실상 청나라의 외교부)에서 직무를 다시 수행했다. 1884년, 이홍조는 奕訢 등 다른 군기대신들과 함께 서태후의 지지를 받았으나, 보수적인 관리들과의 분쟁으로 인해 해임되었다. 이후 점차 책임을 다시 맡게 되었지만, 종종 업무 처리가 신속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1]
2. 4. 청일 전쟁과 사망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홍조는 더 큰 책임을 맡게 되었지만, 1897년 세상을 떠났다.[3] 이홍조는 청일 전쟁에서 이홍장과는 정적으로 주전론을 주장했다.[3]사후 태자태부(太子太傅)와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3]
3. 가족
아들 이석증(李石曾)은 베이징 사범대학 학장을 지냈다.[3]
참조
[1]
문서
Draft History of Qing
[2]
간행물
Li Hung-tsao
[3]
서적
Li Hung-ts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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