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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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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치제는 청나라의 제10대 황제이다. 1861년 함풍제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어린 나이로 인해 섭정 체제 하에서 통치했다. 서태후의 섭정 아래 양무운동이 추진되었고, 동치 중흥으로 불리는 시기를 맞이했다. 1873년 친정을 시작했으나, 1875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광서제가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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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청나라 목종 동치제 어진
청나라 목종 동치제 어진
이름아이신 교로 자이춘 (만주어: Dzai šun)
애신각라 재순 (愛新覺羅 載淳)
만주어 이름Dzai šun ()
몽골어 이름Бүрэн засагч ()
연호동치 (同治)
만주어 연호Yooningga dasan ()
몽골어 연호Бүрэн засагч
묘호목종 (穆宗)
만주어 묘호Mudzung ()
시호'계천개운수중거정보다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명숙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明肅毅皇帝)
만주어 시호Filingga hūwangdi ()
출생일1856년 4월 27일 (음력 함풍 6년 3월 23일)
출생 장소자금성 저수궁 (儲秀宮), 베이징
사망일1875년 1월 12일 (음력 동치 13년 12월 5일)
사망 장소자금성 양심전 (養心殿), 베이징
매장 장소청동릉 혜릉 (惠陵)
통치
재위 기간1861년 11월 11일 ~ 1875년 1월 12일
즉위일함풍 11년 10월 9일 (음력)
선대 황제함풍제
후대 황제광서제
섭정경수 (1861)
목인 (1861)
광원 (1861)
두한 (1861)
교유영 (1861)
재원 (1861)
단화 (1861)
숙순 (1861)
효정현황후 (1861–1875)
서태후 (1861–1875)
가계
아버지함풍제
어머니서태후 (효흠현황후)
배우자효철의황후 (1872)
기타
왕조청나라
가문아이신기오로

2. 생애

청나라의 제10대 황제. 함풍제서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다.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재순(愛新覺羅 載淳)이다.

1861년 아버지 함풍제가 열하 피서산장에서 붕어하자 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11] 초기 연호는 '기상(祺祥)'이었으나, 생모 서태후와 적모 동태후가 공친왕 혁흔과 함께 신유정변을 일으켜 숙순 등 고명대신을 제거한 후, 두 태후의 공동 섭정을 의미하는 '동치(同治)'로 변경되었다. '동치'는 유교 사상에 기반하여 "질서와 번영"을 뜻한다.[3]

어린 나이로 인해 즉위 초부터 서태후, 동태후, 공친왕 혁흔에 의한 수렴청정이 이루어졌다. 강희제와 같은 유능한 군주가 되리라는 기대도 있었으나[4], 성장 과정에서 학문보다 유흥에 관심을 보였고, 엄격한 생모 서태후에게 반항하며[4] 온화한 적모 동태후에게 더 의지했다.[12]

1872년 혼인 후 1873년 친정을 시작했으나[5],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장악하고 있었다.[11] 서태후는 황후 간택[12], 사생활[13], 국정 운영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동치제는 원명원 재건 문제 등으로 신하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의 치세 동안 14년간 지속된 태평천국의 난이 종결되었고(1864년), 증국번, 이홍장 등이 주도한 양무운동이 추진되어 일시적인 안정기를 맞아 '동치중흥'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회민봉기, 야쿠브 베크의 난 등 내부 혼란이 지속되었고, 1874년 일본 제국의 타이완 출병과 같은 외교적 문제도 발생했다.

1874년 말 천연두에 걸려 다시 두 태후가 섭정을 시작했고, 1875년 1월 12일 후사 없이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천연두이나, 민간에서는 매독이라는 설도 존재한다.[11] 그의 죽음으로 사촌인 광서제함풍제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했다. 황후 아로특씨는 동치제 사후 약 70일 만에 사망했다.

2. 1. 즉위와 섭정

동치제 서예


1861년 8월 22일, 아버지 함풍제가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붕어하자, 함풍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던 재순(載淳)이 5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함풍제는 임종 직전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숙순 등 8명의 고명대신에게 어린 황제의 보필을 맡겼다.

그러나 황제의 생모인 서태후는 함풍제의 정실 황후였던 동태후, 그리고 함풍제의 이복 동생이자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공친왕 혁흔과 손을 잡고 신유정변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함풍제가 지명한 8명의 고명대신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이로써 동치제는 사실상 서태후, 동태후, 공친왕 혁흔에 의해 옹립된 형태가 되었다.

동치제의 연호는 처음에는 '기상(祺祥)'으로 정해졌으나, 신유정변 이후 두 태후의 공동 섭정을 의미하는 '동치(同治)'로 변경되었다. '동치'라는 연호는 유교 사상에서 "선정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모두 질서와 번영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서 유래한 "질서와 번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3]

즉위 당시 동치제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초기에는 숙부인 공친왕 혁흔이 의정왕(議政王)으로서 섭정을 맡았다(1861년 12월 15일 ~ 1863년 3월 3일). 이후에는 두 태후가 수렴청정의 형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는데, 먼저 동태후(1863년 3월 3일 ~ 1870년 3월 3일)가, 다음으로 서태후(1870년 3월 3일 ~ 1873년 3월 3일)가 차례로 섭정을 맡았다.

강희제처럼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동치제는 성장하면서 고집이 세고 방탕한 젊은이로 자라면서 어머니 서태후에 대한 불만을 표출함으로써 그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4] 특히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려는 생모 서태후보다 상대적으로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의 적모 동태후에게 더 의지하고 가까이 지냈다.

1872년 가을, 동치제가 15세가 되자 혼례를 치렀다. 황후로는 생모 서태후가 아닌 적모 동태후가 고른 효철의황후 아로특씨를 선택했다.[12] 이를 못마땅히 여긴 서태후는 동치제에게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으니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황후의 침실에 드나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13]

1873년 2월 23일, 동치제는 만 17세가 되어 공식적으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5]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막후에서 서태후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서태후는 명목상으로만 권력을 아들에게 넘겨주었을 뿐 계속해서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동치제가 권력을 잡은 다음 날, 외국 공사관의 대신들이 황제 알현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총리야문(외교부)과 의례 절차에 대한 심각한 의견 불일치를 초래했는데, 외국 공사관의 대신들이 황제에게 고두 의식을 행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청 정부는 또한 자금성 안에서 알현을 갖는 것을 꺼려했고, 결국 자금성 서쪽 호숫가 궁전 중 하나인 "자광각"에서 알현하기로 결정했다.[6] 알현은 마침내 1873년 6월 29일에 열렸다. 그러나 알현 후 외국 대표들은 청 황제들이 조공국 사신을 받을 때 사용했던 홀에서 받은 것에 대해 불쾌감을 분명히 했다.

1874년 가을, 동치제는 그의 두 삼촌인 공친왕 혁흔과 순친왕 혁현을 포함한 신하들과 크게 충돌했는데, 그 이유는 제국이 파산한 시기에 원명원을 재건하려는 황제의 계획과 그의 방탕한 행실 때문이었다. 황제는 신하들을 해임했지만, 동태후와 서태후가 개입하여 신하들은 복직되었다. 그해 12월, 그는 천연두에 걸렸다는 발표가 있었고, 황태후들은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그는 1875년 1월 12일에 아들을 남기지 않고 사망했다.

동치제의 사인은 천연두라고도 하며, 몰래 유곽에 나갔다가 걸린 매독이라고도 한다.[11]

2. 2. 동치중흥과 양무운동

동치제


함풍제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서태후이다. 함풍제1861년 승하하자, 서태후 등은 신유정변을 일으켜 재원, 단화, 숙순 등 함풍제의 측근 세력을 제거하고 어린 동치제를 황제로 옹립했다. 즉위 초부터 계모인 동태후, 생모인 서태후, 숙부인 공친왕 익신이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를 이끌었으며, 동치제는 재위 기간 내내 실권을 어머니 서태후가 쥐고 있었다.

동치 3년(1864년)에는 14년간 지속된 태평천국의 난이 마침내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반란을 진압한 주력은 청나라 정규군이 아닌, 한족 출신 관료인 증국번이홍장 등이 조직한 사병 집단인 향용(향군·회군)이었다. 이로 인해 기존 최고 정치 기구였던 군기처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인물들이 정치적 발언권을 높여갔다. 이는 청나라 내부에서 군벌 세력이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내부 반란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운동 등으로 막대한 비용을 치르면서 국가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관료들은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1840년 아편전쟁 당시 린쩌슈는 영국 군함의 위력을 보고 서구 해군 기술 도입을 주장했으며, 1860년 무렵에는 많은 학자들이 서구 기술 연구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소위 양무운동(자강운동)이 추진되었다. 서태후의 신임을 얻은 이홍장 등이 주도하여 군수 공장 설립, 신식 군대 창설, 서구 기술 도입 등 정치와 군사 분야의 근대화를 시도했다. 또한 대외 정책에서도 이전보다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비록 정치적 암투와 보수 세력의 반발 등으로 인해 개혁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7][8] 이 시기 청나라의 국력이 일시적으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동치제 재위 기간 동안 청나라는 여전히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북서부 섬서성과 감숙성에서는 1862년부터 무슬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회민봉기), 1865년에는 야쿠브 베크가 신강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이슬람 국가를 세웠다(야쿠브 베크의 난). 섬감총독 좌종당이 한인 군대를 이끌고 1866년부터 토벌에 나서 1873년에야 회민 반란을 진압하고 섬서성과 감숙성을 되찾았다. 야쿠브 베크 세력 토벌은 동치제 사후인 1876년에 시작되었다.

한편, 동치 10년(1871년)에는 타이완에 표류한 류큐 주민 54명이 현지 원주민에게 살해당하는 미야코지마 도민 조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빌미로 청나라에 항의했으나, 청나라는 타이완 원주민은 통치권 밖에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1874년, 사이고 종도가 이끄는 일본군이 타이완을 침공했다(타이완 출병). 청나라는 오쿠보 도시미치와의 협상을 통해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의 출병 명분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타이완 영유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조공국이었던 류큐 왕국이 일본에 편입되는 것을 사실상 묵인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2. 3. 친정과 죽음

1872년 가을, 동치제는 효철의황후(아로특씨) 및 두 명의 측실과 혼인하였다. 이후 1873년 2월 23일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5], 어머니 서태후는 명목상으로만 정권을 넘겨주었을 뿐 실제로는 계속 아들을 감시하며 권력을 행사했다.[11] 동치제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생모 서태후보다 자애로운 적모 동태후와 더 가까웠으며, 황후 간택 시에도 동태후가 추천한 아로특씨를 선택했다.[12] 이에 불만을 품은 서태후는 학업을 이유로 동치제가 황후의 침실에 드나드는 것을 제한하기도 했다.[13]

친정 시작 이후인 1873년 6월 29일, 자금성 서쪽의 자광각(紫光閣)에서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이는 고두 의식 문제와 알현 장소를 둘러싼 총리야문과의 이견 끝에 결정된 것이었으나, 외국 대표들은 과거 청 황제들이 조공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에서 접견이 이루어진 것에 불쾌감을 표시했다.[6]

1874년 가을, 동치제는 국가 재정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원명원 재건을 추진하려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숙부인 공친왕과 순친왕을 포함한 신하들과 크게 충돌하였다. 동치제는 이들을 해임하려 했으나 동태후와 서태후의 개입으로 무산되고 신하들은 복직되었다. 그해 12월, 동치제가 천연두에 걸렸다는 발표가 나왔고, 두 태후는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결국 동치제는 1875년 1월 12일, 후사 없이 1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천연두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스승이었던 옹동화의 일기[14]와 청 황실의 의료 기록인 《만세야진약용약저부》(萬歲爺進藥用藥底簿)[15]에도 천연두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동치제가 매독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16] 황후 아로특씨와 사이가 좋았으나 서태후의 감시로 인해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자, 환관들의 권유로 사창가에 드나들다 병을 얻었으며[13], 이를 증상이 비슷한 천연두로 위장했다는 것이다.[17] 동치제의 얼굴에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악취가 나는 종기가 생기자 서태후가 거울을 치워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7] 황실 어의였던 이덕립(李德立)은 훗날 "황제를 진찰했을 때 성병 초기 증세가 있었으나 황실의 체면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18]

동치제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고, 결국 그의 사촌이자 순친왕의 아들인 재첨(載湉)이 함풍제의 양자로 입적되어 광서제로 즉위했다. 동태후와 서태후는 다시 섭정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동치제의 황후였던 아로특씨는 남편이 사망한 후 식음을 전폐하고 70여 일 만에 사망하였다.

3. 가족 관계

동치제는 효철의황후 1명을 황후로 맞이하였으며, 숙신황귀비, 공숙황귀비, 헌철황귀비, 돈혜황귀비 등 4명의 황귀비를 두었다. 이들의 자세한 정보는 아래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황후

wikitext

봉호시호이름(성씨)재위년도생몰년도국구(장인/장모)비고
황후(皇后)효철의황후
(孝哲懿皇后)
阿魯特氏|아로특 씨중국어1872년 ~ 1874년1854년 7월 25일 ~ 1875년 3월 27일장인: 삼등승은문절공
(三等承恩文節公)
阿魯特 崇綺|아로특 숭기중국어
장모: 일품부인(一品夫人)
愛新覺羅氏|아이신기오로 씨중국어
[19][20]


3. 2. 후궁

'''황후'''

'''황귀비'''

봉호시호성씨생몰년도별칭비고
혜황귀비
(慧皇貴妃)
숙신황귀비
(淑愼皇貴妃)
푸차 씨
(富察氏)
1859년 12월 24일1904년 4월 13일혜비(慧妃)[21]
순황귀비
(珣皇貴妃)
공숙황귀비
(恭肅皇貴妃)
아로특 씨
(阿魯特氏)
1857년 9월 20일1921년 4월 14일순비(珣妃), 장화황귀비(莊和皇貴妃)[22][23]
유황귀비
(瑜皇貴妃)
헌철황귀비
(獻哲皇貴妃)
혀서리 씨
(赫舍里氏)
1856년 7월 2일1932년 2월 3일유비(瑜妃), 경의황귀비(敬懿皇貴妃)[24][25]
진황귀비
(瑨皇貴妃)
돈혜황귀비
(敦惠皇貴妃)
시린기오로 씨
(西林覺羅氏)
1856년 9월 6일1933년 5월 18일진비(瑨妃), 영혜황귀비(榮惠皇貴妃)[26][27]


4. 연호

연호사용기간년수비고
동치(同治)1862년1874년13년


참조

[1] 웹사이트 Tongzhi {{!}} emperor of Qing dynasty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2-12-17
[2] ECCP Tsai-ch'un
[3] 서적 Empress Dowager Cixi
[4] 서적 The Last Empress of China 2006
[5] 서적 Dragon Lady: the Life and Legend of the Last Empress of China Knopf 1992
[6] 서적
[7]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8
[8] 서적 China's early industrialization: Sheng Hsuan-huai (1844-1916) and Mandarin enterprise Volume 1 of Harvard East Asian series Atheneum/the University of Michigan 1970
[9] 웹사이트 daicing gurun i mudzung filingga hūwangdi i enduringge tacihiyan https://digital.staa[...] 1880
[10] 웹사이트 八旗満洲氏族通譜 https://iiif.dl.itc.[...]
[11] 서적 중국역사 오류사전 이룸 2005
[12] 서적 여왕의 시대 미래의 창 2008
[13] 서적 거대한 시간의 도시에서 나를 보다 동아일보사 2008
[14] 서적
[15] 서적 서태후의 인간 경영학 지식여행 2008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기타 가순황후(嘉順皇后)
[20] 기타 동치제 사후 자결함.
[21] 기타 혜비(慧妃) → 돈의영경황귀비(敦宜榮慶皇貴妃)
[22] 기타 순빈(珣嬪) → 순비(珣妃) → 순귀비(珣貴妃) → 황고순황귀비(皇考珣皇貴妃) → 황고장화황귀태비(皇考莊和皇貴太妃)
[23] 기타 중화민국 시기에 황귀비로 책봉받음.
[24] 기타 유빈(瑜嬪) → 유비(瑜妃) → 유귀비(瑜貴妃) → 황고유황귀비(皇考瑜皇貴妃) → 황고경의황귀태비(皇考敬懿皇貴太妃)
[25] 기타 중화민국 시기에 황귀비로 책봉받음.
[26] 기타 진빈(瑨嬪) → 진비(瑨妃) → 황고진귀비(皇考瑨貴妃)→ 황고진황귀비(皇考瑨皇貴妃) → 황고영혜황귀태비(皇考榮惠皇貴太妃)
[27] 기타 중화민국 시기에 황귀비로 책봉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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