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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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옹동화는 청나라 말기의 문신으로, 함풍제와 동치제, 광서제의 스승을 역임했다. 상숙 출신으로, 1856년 장원 급제 후 공부상서, 군기대신, 총리각국사무아문 대신 등을 지냈다. 청불 전쟁과 청일 전쟁에서 주전론을 펼쳤으며, 광서제의 친정 이후 이홍조와 함께 제당의 영수가 되어 서태후, 이홍장 등 후당과 대립했다. 변법자강 운동 시기 캉유웨이를 광서제에게 추천했으나, 서태후의 압력으로 해임되었고, 1904년 고향에서 사망하여 문공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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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동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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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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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황실 스승 |
이름 | 옹동화 |
자 | 서평 (叔平) |
호 | 송선 (松禪) |
시호 | 문공 (文恭) |
출생일 | 1830년 5월 19일 |
출생지 | 창수, 장쑤성, 청나라 |
사망일 | 1904년 7월 4일 |
사망지 | 베이징, 청나라 |
직업 | 정치가 |
학력 | 진사 |
아버지 | 옹심존 (翁心存) |
형제 | 옹동서 (翁同書) |
관직 경력 | |
관직 | 군기대신 |
임기 시작 | 1894년 11월 13일 |
임기 종료 | 1898년 6월 15일 |
관직 | 군기대신 |
임기 시작 | 1882년 12월 14일 |
임기 종료 | 1884년 4월 8일 |
관직 | 대학사 |
임기 시작 | 1897년 |
임기 종료 | 1898년 |
관직 | 호부상서 |
임기 시작 | 1886년 1월 3일 |
임기 종료 | 1898년 6월 15일 |
재임 시 동료 | 복곤 (1892년까지), 희경 (1892년–1895년), 경흠 (1895년부터) |
이전 | 언경명 |
이후 | 왕문소 |
관직 | 공부상서 |
임기 시작 | 1879년 6월 18일 |
임기 종료 | 1886년 1월 3일 |
재임 시 동료 | 전경 (1880년까지), 롼롄 (1880–1883), 임서 (1883–1884), 복곤 (1884년부터) |
이전 | 반조윤 |
이후 | 반조윤 |
관직 | 형부상서 |
임기 시작 | 1879년 2월 17일 |
임기 종료 | 1879년 6월 18일 |
재임 시 동료 | 문유 |
이전 | 상춘용 |
이후 | 반조윤 |
2. 생애
강소성(江蘇省) 상숙(常熟) 출신으로, 아버지는 함풍제 · 동치제 시절 대학사였고, 함풍제, 공친왕 혁흔 형제의 스승이었다. 맏형 옹동서는 안휘순무에 이르렀지만, 증국번, 이홍장 등에게 탄핵당했다. 이 일로 훗날 이홍장과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856년에 장원이 되고, 동치제와 광서제의 스승을 맡았다. 관직은 공부상서, 군기대신, 총리각국사무아문 대신에 이르렀다. 1873년의 양내무와 소백채 사건 판결에 이의를 의심한 서태후는 재심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사건은 ‘양호파’와 ‘강절파’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제사(帝師)라는 입장에서 황제의 정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1889년에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풍계분의 ‘교빈로항의’(校邠盧抗議)를 제출하고 서양 학문의 중요성과 온건한 개혁을 주창했다.
1884년, 청불 전쟁에서 유영복을 지지했고, 1894년의 청일 전쟁에서 주전론을 주창했다. 광서제의 친정과 함께 이홍조(李鴻藻)와 함께 제당(帝黨) 파벌의 영수가 되어 서태후, 이홍장 등 후당과 대립해 나갔다.
변법 운동이 높아지면서, 캉유웨이를 광서제에게 추천했지만, 변법자강 운동 직전에 서태후에 강요당한 광서제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다.
1904년, 고향에서 병사했고, 문공(文恭)의 시호가 주어졌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옹동화는 강소성 상숙 출신으로, 아버지는 함풍제와 공친왕 혁흔 형제의 스승이자 대학사였다. 맏형 옹동서는 안휘순무에 이르렀지만, 증국번, 이홍장 등에게 탄핵당했다. 이 일로 훗날 이홍장과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1856년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며, 동치제와 광서제의 스승을 맡았다. 관직은 공부상서, 군기대신, 총리각국사무아문 대신에 이르렀다. 제사(帝師)라는 입장에서 황제의 정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1889년에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풍계분의 ‘교빈로항의’(校邠盧抗議)를 제출하고 서양 학문의 중요성과 온건한 개혁을 주창했다.
2. 2. 청불 전쟁과 청일 전쟁
1884년, 청불 전쟁에서 옹동화는 유영복을 지지하며, 프랑스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는 당시 청나라 내 주전론의 대표적인 목소리였다. 1894년의 청일 전쟁에서 주전론을 주창했다.2. 3. 제당 파벌과 변법자강 운동
광서제의 친정 이후, 옹동화는 이홍조와 함께 제당(帝黨) 파벌의 영수가 되어, 서태후와 이홍장 등 후당(后黨) 세력과 대립했다. 옹동화는 풍계분의 '교빈로항의(校邠盧抗議)'를 광서제에게 제출하며, 서양 학문의 중요성과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는 변법자강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옹동화는 캉유웨이를 광서제에게 추천하여 변법자강 운동을 주도하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서태후의 쿠데타로 인해 변법자강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옹동화는 실각하게 되었다.2. 4. 실각과 죽음
변법자강 운동 직전, 옹동화는 서태후의 압력으로 인해 광서제에 의해 해임되었다. 이는 보수 세력의 반격과 변법파에 대한 탄압의 시작이었다.1904년, 옹동화는 고향인 상숙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문공(文恭)'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3. 사상과 영향
4. 저서
옹동화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여, 그의 학문적 깊이와 정치적 식견을 보여주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병암시고 (甁庵詩稿)
- 옹문공공일기(翁文恭公日記)
- 옹문공공군기처일기(翁文恭公軍機處日記)
만년에는 책의 대필로 조고니를 기용했다.
5. 평가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참조
[1]
서적
A Mosaic of the Hundred Days: Personalities, Politics and Ideas of 1898
Harvard University Study Center
1984
[2]
서적
A Mosaic of the Hundred Days: Personalities, Politics and Ideas of 1898
Harvard University Study Center
1984
[3]
서적
Dragon Lady: the Life & Legend of the Last Empress of China
Alfred A. Knopf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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