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교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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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교 지진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지진으로, 인교 천황 5년(416년) 7월 14일에 발생했다. 이 지진은 정치적 사건의 발단으로 기록되었으며, 옥전숙녜가 빈궁을 관리하지 않고 술자리를 벌이다가 살인 사건을 일으키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구마노 연대기』와 『도요하마정지』에도 지진 기록이 있으나, 『일본서기』보다 후대에 기록되었고 출처가 불분명하다. 지진의 위치는 카와치국으로 추정되나, 진원은 불확실하다. 지진의 규모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으며, 고대 일본어에서 지진을 나타내는 말인 '나이후루'가 사용되었다는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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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교 지진 | |
---|---|
개요 | |
명칭 | 인교 지진 (允恭地震) |
발생 시기 (율리우스력) | 416년 |
피해 기록 시기 | 일본서기 |
특징 | 일본서기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지진 기록 |
역사적 기록 | |
일본서기 기록 (인교 5년) | 5년 봄 2월 계추삭 경인에 지진이 있었다. 이에 모든 백성들이 탄식하였다. |
일본서기 기록 (인교 5년) | 五年の春二月癸丑朔庚寅に、地震あり。仍りて、百姓(おほみたから)みな歎きき。 |
기타 정보 | |
관련 자료 | ja:日本書紀の地震史料 |
참고 자료 | 16세기 이전 (-1600) 일본 부근의 주요 피해 지진 연대표 (일본지진학회) |
2. 지진 기록
『일본서기』 인교 천황 5년 7월 14일(율리우스력 416년 8월 22일, 그레고리력 8월 23일) 조항에 "지진(나이후루)"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1]
인교 천황은 옥전숙녜에게 반정 천황의 빈궁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지진이 발생한 날 밤 옥전숙녜는 빈궁에 없었다. 옥전숙녜는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고, 오와리노무라지 고소(小佐)를 죽이고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묘역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 이처럼 이 지진 기사는 정치적 사건의 발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진 자체의 상황이나 피해 모습은 기록되지 않았다. 또한 무열 천황 8년 (서기 506년) 이전에는 일본 역법이 명확하지 않아 서기로 정확히 환산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2]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인교 천황 5년 가을 7월에 지진이 발생하였고,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손자인 옥전숙녜에게 수치별 천황의 빈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지진 발생 당일 저녁, 오와리노무라지 고소가 빈궁의 상황을 살피러 갔으나 옥전숙녜는 자리에 없었다. 고소는 옥전숙녜가 남녀를 모아 술자리를 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옥전숙녜는 고소에게 말 한 필을 뇌물로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고소를 죽인 뒤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묘역에 숨었다. 천황은 옥전숙녜를 불렀으나, 옥전숙녜는 옷 속에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천황은 오바타노 아야메에게 옥전숙녜에게 술을 내리게 하였고, 아야메는 옥전숙녜가 갑옷을 입고 있음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천황은 병사를 보내 옥전숙녜를 죽이려 했으나, 옥전숙녜는 도망쳐 집에 숨었다. 천황은 군사를 보내 옥전숙녜의 집을 포위하고 그를 잡아 죽였다.
『구마노 연대기』에도 여러 나라에서 큰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3], 『도요하마정지』에도 사누키국에서 지진이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들은 『일본서기』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된 것이며 출처와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
2. 1. 『일본서기』의 기록
『일본서기』 인교 천황 5년 7월 14일 (율리우스력 416년 8월 22일, 그레고리력 8월 23일) 조항에 "지진 (나이후루)"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1]인교 천황은 옥전숙녜에게 반정 천황의 빈궁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지진이 발생한 날 밤 옥전숙녜는 빈궁에 없었다. 옥전숙녜는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고, 오와리노무라지 고소(小佐)를 죽이고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묘역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 이처럼 이 지진 기사는 정치적 사건의 발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진 자체의 상황이나 피해 모습은 기록되지 않았다. 또한 무열 천황 8년 (서기 506년) 이전에는 일본 역법이 명확하지 않아 서기로 정확히 환산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2]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인교 천황 5년 가을 7월에 지진이 발생하였고,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손자인 옥전숙녜에게 수치별 천황의 빈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지진 발생 당일 저녁, 오와리노무라지 고소가 빈궁의 상황을 살피러 갔으나 옥전숙녜는 자리에 없었다. 고소는 옥전숙녜가 남녀를 모아 술자리를 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옥전숙녜는 고소에게 말 한 필을 뇌물로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고소를 죽인 뒤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묘역에 숨었다. 천황은 옥전숙녜를 불렀으나, 옥전숙녜는 옷 속에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천황은 오바타노 아야메에게 옥전숙녜에게 술을 내리게 하였고, 아야메는 옥전숙녜가 갑옷을 입고 있음을 확인하고 보고했다. 천황은 병사를 보내 옥전숙녜를 죽이려 했으나, 옥전숙녜는 도망쳐 집에 숨었다. 천황은 군사를 보내 옥전숙녜의 집을 포위하고 그를 잡아 죽였다.
『구마노 연대기』에도 여러 나라에서 큰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3], 『도요하마정지』에도 사누키국에서 지진이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들은 『일본서기』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된 것이며 출처와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
2. 2. 기타 기록
3. 지진의 해석
『대일본 지진사료』에는 "카와치국 지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4], 이는 지진 기록이 기록된 당시의 수도가 카와치국에 있었을 뿐이며, 그 진원이 카와치국에 있었는지 다른 국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5]。 잉교 천황의 황거는 토비아스카 궁인데, 이는 현 아스카촌과 동일하다고 여겨진다.
오모리 후유키치는 『본방 대지진 개표』의 서두에서 본 지진을 대지진 부류에 포함시켰지만[6], 이마무라 아키츠네는 이 지진의 기록이 다음 스이코 지진까지 약 200년 동안 대지진에 대한 기술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흔들림의 강도나 가옥의 붕괴에 언급이 없고 빈전에 이상이 있는지 여부가 문제시될 정도의 지진으로 해석되어 대지진으로 분류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4. '나이후루'
국립국어연구소가 1903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언어 조사에서 "지진"을 "나이", "나에" 등으로 발음하는 예가 이와테와 규슈·오키나와에서 확인되었다. (방언 주권론)[7] 이는 고대 일본어에서 지진을 나타내는 말이었던 '나이후루'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참조
[1]
서적
地震の日本史
中央公論新社
2007-11
[2]
웹사이트
'[古代・中世]地震・噴火史料データベース(β版)'
http://historical.se[...]
[3]
서적
日本の歴史地震史料 拾遺 二
1993
[4]
서적
大日本地震史料
丸善
1904
[5]
논문
本邦正史に現はれる最初の大地震
1944
[6]
간행물
本邦大地震概表
1919-03-30
[7]
웹사이트
'『日本言語地図』地図画像 {{!}} 国立国語研究所'
https://mmsrv.ninjal[...]
2024-07-18
[8]
웹인용
16世紀以前(-1600)|日本付近のおもな被害地震年代表|公益社団法人 日本地震学会
https://www.zisin.jp[...]
2021-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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