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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5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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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왜5왕은 중국 남조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고 관직을 제수받은 5세기 일본의 왜왕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동진, 유송, 남제, 양나라 등과 조공 관계를 맺고, 안동장군, 정동대장군 등의 관직을 받았으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도독백제제군사' 칭호를 요구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왜5왕의 정체와 한반도와의 관계, 그리고 이들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며, 특히 일본서기의 천황과 왜5왕의 동일성 여부가 중요한 연구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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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5왕
개요
명칭왜오왕 (倭의五王)
다른 이름왜왕부 (倭王部)
로마자 표기Wa no Goō
시대고훈 시대
위치일본 열도
역대 국왕
제1대찬(讚)
로마자 표기Zan
비고나라에 사신을 보냄
제2대진(珍)
로마자 표기Chin
비고찬의 아들
제3대제(濟)
로마자 표기Sai
비고진의 아들
제4대흥(興)
로마자 표기
비고제의 아들
제5대무(武)
로마자 표기Bu
비고흥의 동생
주요 활동
대외 관계중국 남조의 , 제와 외교 관계를 맺고, 관직과 작위를 받음
정치적 목표한반도 남부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군사적 지원 요청
역사적 기록
관련 기록송서 왜국전(宋書 倭國傳)
내용왜오왕이 에 보낸 외교 문서와 그에 대한 의 응답 기록
학술적 분석
연구왜오왕 시대의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동아시아 국제 관계 연구
기시모토 나오후미고분 시대의 이중 왕권 체제 연구
기타
특징중국과의 외교를 통해 정치적 지위 강화
영향이후 일본의 국가 형성 과정에 영향

2. 왜 5왕에게 부여된 관직들

### 관직 변천

왜5왕은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와 교류하며 관직을 제수받았다. 413년 동진에 조공한 것을 시작으로, 송나라에는 421년부터 찬(讚)이 조공을 시작하여 438년에 진(珍)이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 443년에는 제(濟)가, 451년에는 제가 안동장군과 함께 도독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에 임명되었다. 462년에는 흥(興)이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

477년, 흥이 죽고 무(武)가 왕위를 이었으며, 스스로 7국제군사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했다. 478년, 순제는 무를 6국제군사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했다. 479년 남제 고제는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고, 502년 무제는 무를 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

왜왕들은 주로 왜국왕, 사지절, 안동대장군, 도독-지역-제군사 등의 칭호를 요청했다. 유송은 안동대장군 칭호를 반복적으로 거부하고 안동장군을 수여했는데, 이는 국력 쇠퇴로 동맹국이 절실해진 통치 마지막 해까지 지속되었다. 유송 시대 군 지휘관 최고위 계급은 구품중정법의 2등급이었고, 이는 동쪽에 위치한 속국의 군주에게도 수여되었다.

송나라 시대에 황제들은 3개의 동쪽 군주국에 칭호를 수여했는데, 고구려 국왕에게는 정동대장군(413년, 2등급 4품)과 거기대장군(463년, 2등급 2품), 백제 국왕에게는 진동장군(416년, 3등급 2품)과 진동대장군(420년, 2등급 5품), 왜 국왕에게는 안동장군(421년, 3등급 3품)과 안동대장군(478년, 2등급 6품)이 수여되었다. 이 중 왜만이 자칭 칭호를 가지고 송나라를 방문했다.

이에 대해 고구려 국왕이 최고 지위, 왜 국왕이 최하위였다는 해석이 있지만,[3] 세 국가 간 장군 계급 차이는 사신 파견 순서에 기인하며, 왜의 계급이 실질적으로 낮다고 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4] 왜가 자칭한 안동대장군 칭호 승인을 요청하면서 고구려백제보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려 했다면, 438년 사이의 6개국 군사 업무 지휘관에 백제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왕젠췬은 왜가 빈번하게 인정을 요청하고 자칭 칭호가 거부된 점이 주장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송나라는 479년에 멸망했고, 중국 왕조 변화와 함께 새로운 칭호가 발행되었다. 479년 남제고구려 국왕에게 표기대장군(2등급 1품), 왜 국왕에게 진동대장군(2등급 5품)을 수여했다. 백제 국왕은 495년에 같은 칭호를 받았다. 가야하지는 보국장군(3등급 14품)을 받았다.

502년 양나라는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거기대장군, 백제 동성왕과 왜의 무에게 정동대장군을 수여했다. 당창의 량미하는 진서장군, 토욕혼의 수류대는 정서장군을 받았다.

왜 왕들은 한반도 남부 군사적 지배권을 승인해 줄 것을 반복해서 상소했다. 진은 인정받지 못했고, 제는 6국 제군사 안동장군 왜왕을 수여받았지만, 백제에 관해서는 무를 포함해서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를 중시하고, 고구려의 반발을 피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28] 왜왕의 장군호가 고구려왕·백제왕보다 항상 낮았던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라는 주장이 있다.[29]

대한민국에서는 중국 관직 제도는 사안장군→사진장군→사정장군으로 승진하므로, 고구려왕(정동(대)장군), 백제왕(진동(대)장군), 왜왕(안동(대)장군) 군호에는 상하 우열 관계가 있고, 동이 제왕에게 제정된 지위는 고구려, 백제, 왜 순서이며 남북조 시대를 통해 바뀌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30] 박종대는 백제는 진동대장군, 왜는 안동장군에 불과함에도 백제를 포함하는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말했다.[31]

이에 대해, 서열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조에의 입공 순서대로 동방장군호의 상위에서 수여된 것이고, 남조에 의한 등급 매김도 아니며, 삼국 간 상하 우열 관계는 없고, 왜에 대한 평가가 낮아서 안동(대)장군에 나타났다고 간주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32]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남조가 왜왕의 백제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승인하지 않은 것은 북위를 봉쇄하기 위해 백제를 중시했기 때문이며, 남조가 왜왕의 군호를 높여 백제의 상위로 하는 것은 가능했기에 본말전도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33]

이시이 마사토시는 왜왕이 백제왕보다 하위라면, 상위인 진동(대)장군인 백제의 군사적 지배권을 하위인 안동(대)장군인 왜왕이 요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고 지적했다.[31] 남조로부터 책봉되어 관작을 자칭하고 제정을 요구하는 왜왕이 남조의 관작 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백제의 군사적 지배권을 주장한 왜왕은 안동(대)장군이라도 도독백제제군사 호 요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왜왕이 자신의 안동(대)장군이 백제왕의 진동(대)장군보다 하위이고, 도독백제제군사 호 요구가 부당한 요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백제왕과 동등한 진동(대)장군을 자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가 고구려와의 대결을 명확히 한 것은 고구려왕과 동등한 대우인 開府儀同三司중국어를 자칭하고 제정을 요구한 것에서 뒷받침된다.[34]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백제왕에게 진동장군이 수여된 40년 후 고구려왕에게 상위인 정동장군이 수여된 것으로부터, 임관의 선후가 군호의 상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34]

이시이 마사토시는 고구려왕이 남조로부터 장군호를 수여받은 첫 기록은 413년이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이 355년에 전연에 사자를 보내 정동대장군을 수여받은 것, 고구려왕이 336년과 343년에 동진에 조공한 사실을 언급하며, 동진·고구려를 위해 동방장군호 최상위를 비워두고 기다렸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35] 고구려에 앞서 조공한 백제에 정동장군을 수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백제왕에게 진동장군이 수여된 것은 336년 또는 343년 조공에서 고구려왕에게 정동장군을 수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35] 따라서 군호 수여는 고구려백제→왜 순이 되며, 왜왕은 남북조 시대를 통해 안동대장군을 자칭하는 데 그쳤고, 진동(대)장군, 정동(대)장군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백제 군사적 지배권 요구는 안동(대)장군으로 충분하고 안동(대)장군은 진동(대)장군에 못 미친다고 인식하지 않았고, 실제로 안동(대)장군으로 도독백제제군사를 얻을 수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며, 안동(대)장군인 채로 도독백제제군사를 요구한 데에 문제는 없었다고 지적한다.[32] 또한, 왜왕에 의한 도독백제제군사 요구는 백제령은 1지역 2군사권 대상 외이며 제도상 허가할 수 없기에 남조도독백제제군사를 왜왕에게 승인하지 않은 것은 이미 백제왕에게 도독백제제군사를 수여했기 때문이며, 왜왕 군호가 백제왕 군호에 못 미친다는 이유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36]

###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직 비교

고구려왕, 백제왕, 왜왕의 장군 호칭 변화
고구려백제
317년<동진 건국>
372년진동장군 (여구)
386년진동장군 (여휘)
413년정동장군 (고련)
416년정동대장군 (고련)진동장군 (여영)
420년<유송 건국>
진동대장군 (여영)
421년(안동장군?(찬))
438년안동장군 (진)
443년안동장군 (제)
451년안동대장군 (제)
457년진동대장군 (여경)
462년안동장군 (흥)
463년거기대장군 (고련)
478년안동대장군 (무)
479년<남제 건국>
진동대장군 (무)
480년표기대장군 (고련)진동대장군 (모도)
490년진동대장군 (모대)
494년정동대장군 (고운)
502년< 건국>
거기대장군 (고운)정동대장군 (모대)정동장군(무)



왜5왕은 송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지만, 이는 당시 한반도 지역의 역사 기록과 비교했을 때 여러 불일치점이 발견되어 허위임을 알 수 있다.[7] 이러한 허위 주장은 중국이 동쪽 문제에 무관심한 틈을 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신라가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고, 고구려백제신라 모두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 '''438년''': 진은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한모한은 이미 수 세기 전에 멸망한 국가들이었기에, 진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7] 진한 연맹은 1~3세기에 걸쳐 신라에 병합되었고, 마한 연맹은 4세기까지 백제에 병합되었다.

  • '''451년''': 유송은 사이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7] 그러나 유송은 왜가 백제를 점령하려는 것을 승인하지 않고 제외했다. 이는 백제 전지왕이 416년과 420년에 각각 鎮東將軍중국어 (진동장군)과 鎮東大將軍중국어 (진동대장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유송은 사이가 요청하지 않은 가야를 임명했는데, 이는 임나 지역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 '''477년''': 부는 왜,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7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는 가야를 추가하는 유송의 실수를 따랐으며, 이는 부 역시 자신이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 '''478년''': 유송은 부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 유송은 왜가 백제를 추가해 달라는 요청을 다시 무시하고 451년에 사이에게 임명했던 것만을 재확인했다.[7]


송서는 왜왕에 대한 기록보다 앞서 백제가 요서 지역을,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통치했다고 설명했다.[8] 이는 유송이 동쪽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2. 1. 관직 변천

왜5왕은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와 교류하며 관직을 제수받았다. 413년 동진에 조공한 것을 시작으로, 송나라에는 421년부터 찬(讚)이 조공을 시작하여 438년에 진(珍)이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 443년에는 제(濟)가, 451년에는 제가 안동장군과 함께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에 임명되었다. 462년에는 흥(興)이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

477년, 흥이 죽고 무(武)가 왕위를 이었으며, 스스로 7국제군사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했다. 478년, 송 순제는 무를 6국제군사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했다. 479년 남제 고제는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고, 502년 양 무제는 무를 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

왜왕들은 주로 왜국왕, 사지절, 안동대장군, 도독-지역-제군사 등의 칭호를 요청했다. 유송은 안동대장군 칭호를 반복적으로 거부하고 안동장군을 수여했는데, 이는 국력 쇠퇴로 동맹국이 절실해진 통치 마지막 해까지 지속되었다. 유송 시대 군 지휘관 최고위 계급은 구품중정법의 2등급이었고, 이는 동쪽에 위치한 속국의 군주에게도 수여되었다.

송나라 시대에 황제들은 3개의 동쪽 군주국에 칭호를 수여했는데, 고구려 국왕에게는 정동대장군(413년, 2등급 4품)과 거기대장군(463년, 2등급 2품), 백제 국왕에게는 진동장군(416년, 3등급 2품)과 진동대장군(420년, 2등급 5품), 왜 국왕에게는 안동장군(421년, 3등급 3품)과 안동대장군(478년, 2등급 6품)이 수여되었다. 이 중 왜만이 자칭 칭호를 가지고 송나라를 방문했다.

이에 대해 고구려 국왕이 최고 지위, 왜 국왕이 최하위였다는 해석이 있지만,[3] 세 국가 간 장군 계급 차이는 사신 파견 순서에 기인하며, 왜의 계급이 실질적으로 낮다고 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4] 왜가 자칭한 안동대장군 칭호 승인을 요청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려 했다면, 438년 사이의 6개국 군사 업무 지휘관에 백제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왕젠췬은 왜가 빈번하게 인정을 요청하고 자칭 칭호가 거부된 점이 주장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송나라는 479년에 멸망했고, 중국 왕조 변화와 함께 새로운 칭호가 발행되었다. 479년 남제는 고구려 국왕에게 표기대장군(2등급 1품), 왜 국왕에게 진동대장군(2등급 5품)을 수여했다. 백제 국왕은 495년에 같은 칭호를 받았다. 가야의 하지는 보국장군(3등급 14품)을 받았다.

502년 양나라는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거기대장군, 백제 동성왕과 왜의 무에게 정동대장군을 수여했다. 당창의 량미하는 진서장군, 토욕혼의 수류대는 정서장군을 받았다.

왜 왕들은 한반도 남부 군사적 지배권을 승인해 줄 것을 반복해서 상소했다. 진은 인정받지 못했고, 제는 6국 제군사 안동장군 왜왕을 수여받았지만, 백제에 관해서는 무를 포함해서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송이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를 중시하고, 고구려의 반발을 피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28] 왜왕의 장군호가 고구려왕·백제왕보다 항상 낮았던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라는 주장이 있다.[29]

대한민국에서는 중국 관직 제도는 사안장군→사진장군→사정장군으로 승진하므로, 고구려왕(정동(대)장군), 백제왕(진동(대)장군), 왜왕(안동(대)장군) 군호에는 상하 우열 관계가 있고, 동이 제왕에게 제정된 지위는 고구려, 백제, 왜 순서이며 남북조 시대를 통해 바뀌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30] 박종대는 백제는 진동대장군, 왜는 안동장군에 불과함에도 백제를 포함하는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말했다.[31]

이에 대해, 서열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조에의 입공 순서대로 동방장군호의 상위에서 수여된 것이고, 남조에 의한 등급 매김도 아니며, 삼국 간 상하 우열 관계는 없고, 왜에 대한 평가가 낮아서 안동(대)장군에 나타났다고 간주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32]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남조가 왜왕의 백제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승인하지 않은 것은 북위를 봉쇄하기 위해 백제를 중시했기 때문이며, 남조가 왜왕의 군호를 높여 백제의 상위로 하는 것은 가능했기에 본말전도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33]

이시이 마사토시는 왜왕이 백제왕보다 하위라면, 상위인 진동(대)장군인 백제의 군사적 지배권을 하위인 안동(대)장군인 왜왕이 요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고 지적했다.[31] 남조로부터 책봉되어 관작을 자칭하고 제정을 요구하는 왜왕이 남조의 관작 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백제의 군사적 지배권을 주장한 왜왕은 안동(대)장군이라도 도독백제제군사 호 요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왜왕이 자신의 안동(대)장군이 백제왕의 진동(대)장군보다 하위이고, 도독백제제군사 호 요구가 부당한 요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백제왕과 동등한 진동(대)장군을 자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가 고구려와의 대결을 명확히 한 것은 고구려왕과 동등한 대우인 개부의동삼사를 자칭하고 제정을 요구한 것에서 뒷받침된다.[34]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백제왕에게 진동장군이 수여된 40년 후 고구려왕에게 상위인 정동장군이 수여된 것으로부터, 임관의 선후가 군호의 상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34]

이시이 마사토시는 고구려왕이 남조로부터 장군호를 수여받은 첫 기록은 413년이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이 355년에 전연에 사자를 보내 정동대장군을 수여받은 것, 고구려왕이 336년과 343년에 동진에 조공한 사실을 언급하며, 동진·송이 고구려를 위해 동방장군호 최상위를 비워두고 기다렸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35] 고구려에 앞서 조공한 백제에 정동장군을 수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백제왕에게 진동장군이 수여된 것은 336년 또는 343년 조공에서 고구려왕에게 정동장군을 수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35] 따라서 군호 수여는 고구려→백제→왜 순이 되며, 왜왕은 남북조 시대를 통해 안동대장군을 자칭하는 데 그쳤고, 진동(대)장군, 정동(대)장군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백제 군사적 지배권 요구는 안동(대)장군으로 충분하고 안동(대)장군은 진동(대)장군에 못 미친다고 인식하지 않았고, 실제로 안동(대)장군으로 도독백제제군사를 얻을 수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며, 안동(대)장군인 채로 도독백제제군사를 요구한 데에 문제는 없었다고 지적한다.[32] 또한, 왜왕에 의한 도독백제제군사 요구는 백제령은 1지역 2군사권 대상 외이며 제도상 허가할 수 없기에 남조가 도독백제제군사를 왜왕에게 승인하지 않은 것은 이미 백제왕에게 도독백제제군사를 수여했기 때문이며, 왜왕 군호가 백제왕 군호에 못 미친다는 이유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36]

2. 2.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직 비교

고구려왕, 백제왕, 왜왕의 장군 호칭 변화
고구려백제
317년<동진 건국>
372년진동장군 (여구)
386년진동장군 (여휘)
413년정동장군 (고련)
416년정동대장군 (고련)진동장군 (여영)
420년<유송 건국>
진동대장군 (여영)
421년(안동장군?(찬))
438년안동장군 (진)
443년안동장군 (제)
451년안동대장군 (제)
457년진동대장군 (여경)
462년안동장군 (흥)
463년거기대장군 (고련)
478년안동대장군 (무)
479년<남제 건국>
진동대장군 (무)
480년표기대장군 (고련)진동대장군 (모도)
490년진동대장군 (모대)
494년정동대장군 (고운)
502년< 건국>
거기대장군 (고운)정동대장군 (모대)정동장군(무)



왜5왕은 송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지만, 이는 당시 한반도 지역의 역사 기록과 비교했을 때 여러 불일치점이 발견되어 허위임을 알 수 있다.[7] 이러한 허위 주장은 중국이 동쪽 문제에 무관심한 틈을 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신라가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고,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모두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 '''438년''': 진은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한과 모한은 이미 수 세기 전에 멸망한 국가들이었기에, 진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7] 진한 연맹은 1~3세기에 걸쳐 신라에 병합되었고, 마한 연맹은 4세기까지 백제에 병합되었다.

  • '''451년''': 유송은 사이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7] 그러나 유송은 왜가 백제를 점령하려는 것을 승인하지 않고 제외했다. 이는 백제 전지왕이 416년과 420년에 각각 鎮東將軍중국어 (진동장군)과 鎮東大將軍중국어 (진동대장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유송은 사이가 요청하지 않은 가야를 임명했는데, 이는 임나 지역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 '''477년''': 부는 왜,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7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는 가야를 추가하는 유송의 실수를 따랐으며, 이는 부 역시 자신이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 '''478년''': 유송은 부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 유송은 왜가 백제를 추가해 달라는 요청을 다시 무시하고 451년에 사이에게 임명했던 것만을 재확인했다.[7]


송서는 왜왕에 대한 기록보다 앞서 백제가 요서 지역을,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통치했다고 설명했다.[8] 이는 유송이 동쪽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3. 왜 5왕의 조공 기록

4월, 문제 황제는 진에게 안동장군/安東將軍중국어 (안동장군, 동쪽의 평화 유지 장군)과 왜국왕/倭國王중국어 (왜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황제는 또한 왜수(왜수/倭隋일본어)와 진의 다른 13명의 부하에게 평서정로관군보국장군/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중국어의 칭호를 수여했다.원가(元嘉) 20년사이가 조공을 바쳤고 안동장군/安東將軍중국어 (안동장군, 동쪽의 평화 유지 장군)과 왜국왕/倭國王중국어 (왜왕)의 칭호를 받았다.원가(元嘉) 28년7월, 사이왕은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중국어와 안동장군/安東將軍중국어 (안동장군, 동쪽의 평화 유지 장군)과 왜국왕/倭國王중국어 (왜왕)의 칭호를 받았다. 23명의 부하도 승진했다.대명(大明) 4년12월, 왜왕이 조공을 바쳤다.대명(大明) 6년3월, 송 효무제는 사이의 태자인 고에게 안동장군/安東將軍중국어 (안동장군, 동쪽의 평화 유지 장군)과 왜국왕/倭國王중국어 (왜왕)의 칭호를 수여했다.승명(昇明) 원년11월, 왜왕이 조공을 바쳤다.
고왕이 죽고 그의 동생 부가 왕위를 계승했다. 부는 스스로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중국어와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중국어 (안동대장군, 동쪽의 평화 유지 장군)과 왜국왕/倭國王중국어 (왜왕)의 칭호를 자칭했다.승명(昇明) 2년부는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중국어라는 칭호를 자칭하고 정식 임명을 청원했다. 송 순제는 부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중국어와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중국어 (안동대장군, 동쪽의 평화 유지 장군)과 왜왕/倭王중국어의 칭호를 수여했다.건원(建元) 원년요청 없이 남제 고제는 새로운 남제 왕조의 출범을 기념하는 의미로 부를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중국어 (동쪽을 진압하는 대장군)으로 승진시키는 등 수많은 외국 군주들을 승진시켰다.천감(天監) 원년요청 없이 새로운 양나라 왕조의 양 무제는 부를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중국어 (동쪽을 정벌하는 대장군)으로 승진시키는 등 수많은 외국 군주들을 승진시켰다. 그러나 부는 이미 사망했다.



413년부터 502년 사이의 중국 정사 기록을 연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는 왜왕 자신이 사자를 보냈는지 확실하지 않은 것, 왜왕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지만, 진, 송, 제, 양의 4대에 걸쳐 총 9차례의 견사 및 영사(중국 황제의 사자 접수)와 제정(관직 수여)을 행하고 있다.

왜(倭)의 오왕 견사 연표
서기중국 왕조중국 연호왜왕용건
413년동진의희9?고구려·왜국 및 서남이의 동두대사가 안제에게 공물을 헌상함. (『진서』안제기, 『태평어람』)
421년영초2송에 조공하고, 무제로부터 제수 조서를 받음. 아마도 "안동장군 왜왕". (『송서』이만전)
425년원가2사마 조달/司馬曹達일본어을 보내 문제에게 공물을 헌상함. (『송서』이만전)
430년원가7?1월, 송에 사자를 보내 공물을 헌상함. (『송서』문제기)
438년원가15이보다 먼저(이전의 의미, 이하 동일), 왜왕 찬이 죽고 아우 진이 즉위. 이 해, 송에 조공하고,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이라고 칭하며, 정식 임명을 요구함. 조서를 내려 "안동장군 왜왕"에 제수함. (『송서』이만전)
4월, 송 문제, 진을 "안동장군 왜왕"으로 함. (『송서』문제기)
진은 또한, 왜수/倭隋일본어 등 13인을 평서·정로·관군·보국장군으로 해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음. (『송서』이만전)
443년원가20이보다 먼저, 진과 제가 다른 인물이라면 진이 죽고 제가 즉위해야 하지만 『송서』에는 그러한 기사가 없음. 이 해, 제는 송 문제에게 조공하여 "안동장군 왜왕"으로 됨. (『송서』이만전)
451년원가28송조 문제로부터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를 가호받음. 안동장군은 이전과 같음. (『송서』왜국전)
7월, "안동대장군"으로 진호함. (『송서』문제기)
또한, 올라온 23인도 송조로부터 장군호·군태수호를 받음. (『송서』이만전)
460년대명4?12월, 효무제에게 사자를 보내 공물을 헌상함. (『송서』효무제기)
462년대명6이보다 먼저, 제가 죽고 세자 흥이 사자를 보내 공헌함. 3월, 송 효무제, 흥을 "안동장군 왜왕"으로 함. (『송서』효무제기, 이만전)
477년승명1무?11월, 사자를 보내 공물을 헌상함. (『송서』순제기)
이보다 먼저, 흥이 죽고 아우 무가 즉위. 무는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7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이라고 칭함. (『송서』이만전)
478년승명2상표하여,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중국어"[39]라고 칭하고, 서정을 요구함. 순제, 무를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함. (『송서』순제기, 이만전) ( "무"라고 명기한 것으로는 처음)
479년건원1고제, 왕조 수립에 따라, 왜왕 무를 "진동대장군"(정동장군)으로 진호함. (『남제서』동남이전)
502년천감14월, 무제, 왕조 수립에 따라, 왜왕 무를 "정동대장군"으로 진호함. (『양서』무제기)[40]



최초의 413년의 견사 입공은 송 제국에 앞선 진 제국(동진)에 대한 것으로, 『진서』(648년)에 따르면 "고구려·왜국 및 서남이의 동두대사가 방물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79년502년의 기록은 각각 제 제국(남제), 양 제국 건국 시(479년·502년)의 것으로, 이는 제국 건설·왕조 교체에 따른 사무적인 임관이며, 전 왕조의 관위를 답습한 것으로 생각되며, 왜국의 견사가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견사는 478년이며, 사료상 확실한 왜국의 다음 견사는 600년·607년견수사까지 끊어지게 된다.

3. 1. 찬(贊)

왜왕 찬(贊)은 413년 (동진 의희 9년)에 고구려, 서남이 동두대사들과 함께 동진에 방물을 바쳤다.[74] 안제 때 왜왕 찬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74] 421년 (유송 영초 2년), 고조는 조서를 내려 왜왕 찬의 조공에 대한 답례로 제수를 내렸다.[75] 425년 (태조 원가 2년), 왜왕 찬은 사마 조달(曹達)을 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75]

3. 2. 진(珍)

왜왕 찬(贊)이 죽고 그의 동생 진(珍)이 왕위를 계승하였다.[75] 진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스스로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 칭하며, 송나라에 정식 임명을 요청하였다.[75] 그러나 송 문제는 진에게 안동장군 왜국왕(安東將軍 倭國王)이라는 관직만을 제수하였다.[75] 진은 다시 왜수(倭隋) 등 13인에게 평서(平西), 정로(征虜), 관군(冠軍), 보국장군(輔國將軍) 등의 관직을 제수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 문제는 이를 허락하였다.[75]

3. 3. 제(濟)

왜국왕 제(濟)는 438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봉헌하였고, 송 문제는 제를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삼았다.[75] 451년에는 제가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를 겸하게 되었고, 23명의 신하들도 관직을 제수받았다.[75]

3. 4. 흥(興)

왜왕 제(濟)가 죽고, 세자 흥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75] 세조 대명 6년(462년) 조서에 의해 왜왕 세자 흥은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75]

3. 5. 무(武)

왜왕 흥(興)이 죽고 동생 무(武)가 왕위를 이었다.[75] 무는 스스로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七國諸軍事(7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 칭하였다.[75]

478년, 순제 승명 2년에 무는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렸다. 표문에는 "옛 조상 때부터 몸소 갑옷을 입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편히 쉬지 못하였습니다.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했다는 내용과, "고구려가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75] 또한 스스로 開府儀(개부의)同三司(동삼사)라는 문관 1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당히 가수(假授)한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75] 이에 순제는 무를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王(왜왕)에 제수하였다.[75]

479년, 고제 건원 원년에는 무를 鎮東大將軍(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고,[76][74] 502년, 무제 천감 원년에는 征東大將軍(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74]

4. 일본 역사책과의 비교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왜왕의 이름들은 일본서기의 천황의 이름들과 매우 달라서 어느 천황이 어느 왜왕인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71][72] 이나리야마의 칼과 에다 후나야마 칼의 금석문을 근거로 왜 무왕이 유랴쿠 천황(웅략)이라는 주장이 있으나,[73] 나머지 왕들에 대해서는 중국 사기의 기록을 어림잡아 다른 천황에 비정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 왕이 5세기경 야마토 조정(현재의 천황가의 조정)이 아닌 다른 왕조의 지배자들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 왕조들은 현재 천황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무(武)가 유랴쿠일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무의 형이라고 하는 흥은 유랴쿠의 형이기도 한 안코 천황과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송서''는 흥을 "''태자'' 흥"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안코가 아니라 인교 천황의 태자였던 가라 왕자일 가능성도 있다.

『고사기』에는 기년의 기술이 없지만, 분주로서 일부 천황의 붕년간지(몰년 간지)를 기록한다. 이 붕년 간지를 단서로 역대 천황을 왜(倭)의 오왕(五王)에 비정하는 설이 있다.

『고사기』의 천황 붕년 간지
서기간지이름
394년갑오15대오진
427년정묘16대닌토쿠
432년임신17대리추
437년정축18대한제이
454년갑오19대인교
489년기사21대유랴쿠
527년정미26대게이타이



『고사기』의 천황 붕년 간지가 어느 정도 정확하고, 또한 오왕이 모두 별개의 왕(대왕)이었다면, 「찬(讃)」=오호사자키=닌토쿠 천황(仁德)、「진(珍)」=미즈하와케=한제이 천황(反正)、「제(済)」=오아사즈마와쿠고노스쿠네=인교 천황(允恭)、「흥(興)」=아나호=안코 천황(安康)、「무(武)」=오호하쓰세노와카타케=유랴쿠 천황(雄略)가 된다(수년 정도의 오차는 존재한다).

송서』의 왜왕 계보와 명백히 모순되는 곳은 「진(珍)」을 「찬(讃)」의 동생으로 보는 점이다. 『고사기』가 정축년=437년에 붕어했다고 하는 한제이 천황은, 『고사기』, 일본서기에 따르면 리추 천황으로부터의 형제 계승이며, 닌토쿠 천황의 아들이다. 그러나 「찬(讃)」을 닌토쿠 천황, 「진(珍)」을 한제이 천황에 비정하면, 『송서』왜국전에 있어서 「진(珍)」을 「찬(讃)」의 동생으로 하는 기술과 모순된다.

『일본서기』의 천황 붕년 간지
서기간지이름설명
405년을사17대리추닌토쿠 천황의 첫째 황자
410년경술18대한제이닌토쿠 천황의 셋째 황자
453년계사19대인교닌토쿠 천황의 넷째 황자
456년병신20대안코인교 천황의 둘째 황자
479년기미21대유랴쿠인교 천황의 다섯째 황자



『일본서기』의 오진 천황기와 닌토쿠 천황기에 「오(呉)」와의 외교 기사가 있고, 리추 천황기와 한제이 천황기에는 없는 것을 중시하면 「찬(讃)」은 오진 천황, 「진(珍)」은 닌토쿠 천황이 된다. 이 설은 오진 천황닌토쿠 천황이 형제가 된다는 점에서 『일본서기』나 『고사기』와 모순되지만, 「미(彌)(진(珍))」과 「제(済)」가 부자라는 『양서』의 기사와는 일치한다.[72]

5. 왜 5왕과 한반도와의 관계

당시 한반도 지역에 대한 동시대의 역사 기록을 비교하면 여러 불일치점을 통해 왜5왕의 주장이 허위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이 동쪽 문제에 무관심한 틈을 타 인접 영토에 대한 허위 주장을 펼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관습이 아니었다. 백제 자체도 신라가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가 모두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왜왕(Kings of Wa)에 대한 몇 개의 항목보다 앞서, 《송서(宋書)》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통치하고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통치한다고 설명했다.[8] 이러한 노골적인 부정확성은 유송이 동쪽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거나 무관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5. 1. 고구려와의 관계

5. 2. 백제와의 관계

5. 3. 신라, 임나, 가야와의 관계

왜5왕은 중국 남조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왜왕들이 스스로 칭한 작호에 신라, 임나, 가야 등에 대한 지배권을 포함시키려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동시대의 역사 기록과 비교했을 때 여러 불일치점이 발견되어 허위로 판단된다.

438년, 왜는 진(Chin)에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한과 모한은 이미 수 세기 전에 소멸했거나 다른 국가에 병합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진한 연맹은 1~3세기에 걸쳐 신라에, 마한 연맹은 4세기까지 백제에 병합되었다.

451년, 유송(劉宋)은 사이(Sai)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군사 업무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7] 유송은 왜가 백제를 점령하려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는데, 이는 백제 전지왕이 이미 유송으로부터 진동장군(鎭東將軍),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7] 또한 유송은 사이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가야 연맹에 임명했는데, 이는 임나와 상호 교환 가능한 지역이었다.[7]

477년, 부(Bu)는 왜,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7개국에 대한 군사 업무 사령관 직책을 요청했다. 부는 가야를 추가하는 유송의 실수를 따랐는데, 이는 그 역시 자신이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478년, 유송은 부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군사 업무 사령관 직책을 수여하며, 백제를 추가해 달라는 요청을 다시 무시했다.

《송서(宋書)》는 백제가 요서 지역을,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통치했다고 기록하는 등 부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유송이 동쪽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8] 이는 중국이 동쪽 문제에 무관심한 틈을 타 인접 영토에 대한 허위 주장을 펼치는 동아시아의 관습과 무관하지 않다. 백제는 신라가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고,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모두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6. 왜 5왕 시대의 의의와 한계

7. 논쟁점

1968년에 간행된 『왜5왕』에서 후지마 이쿠오는 『송서』 왜국전이 『진』과 『제』의 혈연 관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혈연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거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제가 그 사실을 무시하고 본인이 초대라고 주장했기 때문 중 하나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

후지마의 문제 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 하라시마 레이지의 「왜5왕과 그 전후」였다. 더욱이 후지마-하라시마 설을 계승하는 가와구치 가쓰야스의 「거대 고분과 왜5왕」도 발표되어 「두 개의 대왕가」설은 유력한 설이 되었다.

그러나 요시무라 다케히코는 최초의 왜5왕은 왜국의 「왜」 자를 성으로 하여 왜찬을 칭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원가 15년의 사자 파견 시에 「왜수이」 등 13인에게 평서·정로 등의 장군호가 제정되어 인정되었는데, 이 왜수이도 「왜」가 성이고 「수이」가 이름인 왕족의 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문제가 되는 진과 제의 혈연 관계는 『송서』 문제기, 원가 28년 조에 『안동장군 왜왕 왜제』라는 기술이 있어, 「왜왕인 왜제」라고 하여 중국 측은 왜왕을 부계의 동일 씨족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혈연 관계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실수일 것이라고 언급했다[65]

또한 「왜」가 왜왕의 성이라는 점은 오래 전에 스게 마사토모가 「한적 왜인고」에서 지적했고, 조선사 연구자인 다케다 유키오가 「평서장군·왜수의 해석」의 논문에서 설득력 있게 언급했다고 소개하고 있다[66]

덧붙여, 『양서』에는 진과 제가 부자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다[67]

7. 1. 왜 5왕의 정체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왜왕의 이름들은 일본서기의 천황의 이름들과 매우 달라 어느 천황이 어느 왜왕인지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45] 이나리야마의 칼과 에다 후나야마 칼의 금석문을 근거로 왜 무왕이 유랴쿠 천황(오하츠세 와카타케)이라는 주장이 있으나[46] 나머지 왕들에 대해서는 중국 사기의 기록을 어림잡아 다른 천황에 비정하고 있다.

무(왜왕)가 유랴쿠일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무의 형이라고 하는 흥은 유랴쿠의 형이기도 한 안코 천황(아나호)과 동일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송서''는 흥을 "''태자'' 흥"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가 안코가 아니라 인교 천황의 태자였던 가라 왕자일 가능성도 있다.

왜5왕의 천황 비정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행해졌으며, 에도 시대의 여러 학자들도 비정을 시도했다.[45]

"찬"과 "진"의 인물 비정에 대해서는 『송서』와 『고사기』, 『일본서기』의 전승에 어긋나는 점이 있어 여러 설이 존재한다.[48]

왜5왕이라고 하지만, 왜왕 자신이 사자를 보냈는지 분명하지 않은 것, 왜왕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오왕 중 『양서』는 "진"이 아닌 "미"를 기록했다. "찬-진"과 "제-흥-무" 사이에 왕통의 단절이 있었다고 하는 왕조 교체설도 존재한다.[47]

"왜5왕"은 야마토 왕권과는 다른 나라의 왕이라고 하는 설도 에도 시대부터 존재했다.[60]

7. 2. 왕조 교체설

1968년에 간행된 『왜5왕』에서 후지마 이쿠오는 『송서』 왜국전이 『진』과 『제』의 혈연 관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혈연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거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제가 그 사실을 무시하고 본인이 초대라고 주장했기 때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65] 하라시마 레이지는 「왜5왕과 그 전후」에서 후지마의 주장을 적극 수용하였고, 가와구치 가쓰야스는 「거대 고분과 왜5왕」을 발표하여 「두 개의 대왕가」설은 유력한 설이 되었다.

그러나 요시무라 다케히코는 최초의 왜5왕은 왜국의 「왜」 자를 성으로 하여 왜찬을 칭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원가 15년의 사자 파견 시에 「왜수이」 등 13인에게 평서·정로 등의 장군호가 제정되어 인정되었는데, 이 왜수이도 「왜」가 성이고 「수이」가 이름인 왕족의 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진과 제의 혈연 관계는 『송서』 문제기, 원가 28년 조에 『안동장군 왜왕 왜제』라는 기술이 있어, 중국 측은 왜왕을 부계의 동일 씨족 집단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혈연 관계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실수일 것이라고 언급했다[65]

「왜」가 왜왕의 성이라는 점은 스게 마사토모가 「한적 왜인고」에서 지적했고, 다케다 유키오가 「평서장군·왜수의 해석」에서 설득력 있게 언급했다[66]。 『양서』에는 진과 제가 부자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다[67]

2018년 가와우치 하루토는 『왜찬』은 "근래의 연구에서 '왜'는 국명이 아니라 성이고, '찬'이 이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한 글자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백제의 영향이라고 논했다. 혈연 관계가 불분명하여 왕조 교체설도 있는 『왜제』에 대해서도 먼 친척으로부터의 즉위 등 어떠한 단절이 있었을 가능성은 인정하면서[68], 기본적으로는 "그 이전의 왜왕과 동족이었음은 틀림없다"고 보고 "부계 동족 집단"이었다고 보았다.

미즈타니 치아키는 사카모토 요시타네, 다케다 유키오가 왜의 5왕은 "왜"가 성이고 "찬"이나 "수이"가 이름임을 밝혀냈으며, 초대 찬부터 무까지 일관되게 왜라는 성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세키 카즈히코는 이로부터, "진"과 "제"는 혈연 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부계 친족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왜왕 무의 상표문을 예로 들며, 만약 후지마 등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과 제에게 혈연 관계가 없다면, "무"에게 "조(祖)와 예(禰)"는 아버지 "제"와 형 "흥" 두 명뿐이 되지만, "조예"라는 표현은 수 세대 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표현이므로, 역시 5명의 왜왕은 같은 부계 친족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69]

고이치 아키라는 진과 제 사이에 혈연 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에 대해, 『송서』는 다른 왕조의 혈연 관계에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진과 제에게 혈연 관계가 없는 것은 사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찬, 진은 각각 리추, 한제로 보아야 하며, 『송서』와 「기기」의 계보의 대응 관계에 주목한다면, 제 즉, 인교 이후와 그 이전의 왜왕 사이에는 혈연 관계가 없으며, 왜왕을 배출하는 왕족 집단은 적어도 복수 존재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토 나가토는, 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그곳에서 왕통의 단절이 일어나 혈연 관계가 없는 왕족 그룹이 복수 존재하며, 그 중에서 왕권의 계승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모리 기미아키는 왜왕이 「왜(倭)」성을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나 백제와 비교해 가신 등과 관작의 격차가 적다는 점을 들어, 왜국은 왕과 동족 또는 대등한 다수의 사람들이 왕권을 보좌하는 구조이며, 찬, 진과 제, 흥, 무의 관계는 불분명하지만 두 개의 왕통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70]

7. 3. '도독백제제군사' 칭호 문제

왜5왕이 송나라에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인정받지 못한 칭호 중에 '도독백제제군사'가 있었다.[37]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하고 백제왕을 살해하는 등 백제가 국난을 겪자, 왜왕은 이 기회를 틈타 백제를 군사적 지배 하에 두려 했다.[37] 이는 무(武)의 상표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무는 왜국을 송나라의 충실한 외번으로 칭하며 고구려가 왜국의 조공로를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37] 무는 고구려 토벌을 명분으로 자신에게는 개부의동삼사를, 부하에게는 관직을 제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37]

송나라는 무의 요청을 받고 곤혹스러워했는데, 고구려는 송나라가 북위에 대항하기 위한 중요한 국가였기 때문이다.[37] 또한 무가 요구한 개부의동삼사는 왜왕에게 주기에 너무 높은 관직이었다.[37] 결국 송나라는 무에게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이라는 지위를 주어 무마하려 했으나, 왜왕의 백제 지배 야망은 좌절되었고, 왜왕은 중국 왕조를 통한 백제 지배에 한계를 느껴 대중(對中) 복속 외교를 중단했다.[37]

구리하라 가오루(栗原薫)는 광개토대왕비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바탕으로, 399년 왜·고구려 전쟁이 발발하고 400년 후연이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왜국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보았다.[38] 또한, 『일본서기』 닌토쿠키(仁德紀) 12년 기사를 372년, 402년, 432년 중 402년으로 비정하고, 후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삼한은 왜국에, 대방군은 고구려에 귀속시키는 타협안을 제시했을 것이라 추정했다.[38] 『일본서기』 유랴쿠키(雄略紀) 20년 기사에 따르면, 고구려가 백제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을 때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라는 이유로 추격을 멈췄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가 대방군 고지에 건국되었기 때문이며, 왜·고구려 전쟁의 타협안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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