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5왕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왜5왕은 중국 남조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고 관직을 제수받은 5세기 일본의 왜왕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동진, 유송, 남제, 양나라 등과 조공 관계를 맺고, 안동장군, 정동대장군 등의 관직을 받았으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도독백제제군사' 칭호를 요구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왜5왕의 정체와 한반도와의 관계, 그리고 이들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며, 특히 일본서기의 천황과 왜5왕의 동일성 여부가 중요한 연구 과제로 남아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교 천황 - 인교 지진
인교 지진은 416년 7월 14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정치적 사건과 연관되어 기록되었으며, 카와치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나 진원은 불확실하다.
왜5왕 | |
---|---|
개요 | |
명칭 | 왜오왕 (倭의五王) |
다른 이름 | 왜왕부 (倭王部) |
로마자 표기 | Wa no Goō |
시대 | 고훈 시대 |
위치 | 일본 열도 |
역대 국왕 | |
제1대 | 찬(讚) |
로마자 표기 | Zan |
비고 | 송나라에 사신을 보냄 |
제2대 | 진(珍) |
로마자 표기 | Chin |
비고 | 찬의 아들 |
제3대 | 제(濟) |
로마자 표기 | Sai |
비고 | 진의 아들 |
제4대 | 흥(興) |
로마자 표기 | Kō |
비고 | 제의 아들 |
제5대 | 무(武) |
로마자 표기 | Bu |
비고 | 흥의 동생 |
주요 활동 | |
대외 관계 | 중국 남조의 송, 제와 외교 관계를 맺고, 관직과 작위를 받음 |
정치적 목표 | 한반도 남부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군사적 지원 요청 |
역사적 기록 | |
관련 기록 | 송서 왜국전(宋書 倭國傳) |
내용 | 왜오왕이 송에 보낸 외교 문서와 그에 대한 송의 응답 기록 |
학술적 분석 | |
연구 | 왜오왕 시대의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동아시아 국제 관계 연구 |
기시모토 나오후미 | 고분 시대의 이중 왕권 체제 연구 |
기타 | |
특징 | 중국과의 외교를 통해 정치적 지위 강화 |
영향 | 이후 일본의 국가 형성 과정에 영향 |
2. 왜 5왕에게 부여된 관직들
### 관직 변천
왜5왕은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와 교류하며 관직을 제수받았다. 413년 동진에 조공한 것을 시작으로, 송나라에는 421년부터 찬(讚)이 조공을 시작하여 438년에 진(珍)이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 443년에는 제(濟)가, 451년에는 제가 안동장군과 함께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에 임명되었다. 462년에는 흥(興)이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
477년, 흥이 죽고 무(武)가 왕위를 이었으며, 스스로 7국제군사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했다. 478년, 송 순제는 무를 6국제군사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했다. 479년 남제 고제는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고, 502년 양 무제는 무를 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
왜왕들은 주로 왜국왕, 사지절, 안동대장군, 도독-지역-제군사 등의 칭호를 요청했다. 유송은 안동대장군 칭호를 반복적으로 거부하고 안동장군을 수여했는데, 이는 국력 쇠퇴로 동맹국이 절실해진 통치 마지막 해까지 지속되었다. 유송 시대 군 지휘관 최고위 계급은 구품중정법의 2등급이었고, 이는 동쪽에 위치한 속국의 군주에게도 수여되었다.
송나라 시대에 황제들은 3개의 동쪽 군주국에 칭호를 수여했는데, 고구려 국왕에게는 정동대장군(413년, 2등급 4품)과 거기대장군(463년, 2등급 2품), 백제 국왕에게는 진동장군(416년, 3등급 2품)과 진동대장군(420년, 2등급 5품), 왜 국왕에게는 안동장군(421년, 3등급 3품)과 안동대장군(478년, 2등급 6품)이 수여되었다. 이 중 왜만이 자칭 칭호를 가지고 송나라를 방문했다.
이에 대해 고구려 국왕이 최고 지위, 왜 국왕이 최하위였다는 해석이 있지만,[3] 세 국가 간 장군 계급 차이는 사신 파견 순서에 기인하며, 왜의 계급이 실질적으로 낮다고 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4] 왜가 자칭한 안동대장군 칭호 승인을 요청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려 했다면, 438년 사이의 6개국 군사 업무 지휘관에 백제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왕젠췬은 왜가 빈번하게 인정을 요청하고 자칭 칭호가 거부된 점이 주장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송나라는 479년에 멸망했고, 중국 왕조 변화와 함께 새로운 칭호가 발행되었다. 479년 남제는 고구려 국왕에게 표기대장군(2등급 1품), 왜 국왕에게 진동대장군(2등급 5품)을 수여했다. 백제 국왕은 495년에 같은 칭호를 받았다. 가야의 하지는 보국장군(3등급 14품)을 받았다.
502년 양나라는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거기대장군, 백제 동성왕과 왜의 무에게 정동대장군을 수여했다. 당창의 량미하는 진서장군, 토욕혼의 수류대는 정서장군을 받았다.
왜 왕들은 한반도 남부 군사적 지배권을 승인해 줄 것을 반복해서 상소했다. 진은 인정받지 못했고, 제는 6국 제군사 안동장군 왜왕을 수여받았지만, 백제에 관해서는 무를 포함해서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송이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를 중시하고, 고구려의 반발을 피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28] 왜왕의 장군호가 고구려왕·백제왕보다 항상 낮았던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라는 주장이 있다.[29]
대한민국에서는 중국 관직 제도는 사안장군→사진장군→사정장군으로 승진하므로, 고구려왕(정동(대)장군), 백제왕(진동(대)장군), 왜왕(안동(대)장군) 군호에는 상하 우열 관계가 있고, 동이 제왕에게 제정된 지위는 고구려, 백제, 왜 순서이며 남북조 시대를 통해 바뀌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30] 박종대는 백제는 진동대장군, 왜는 안동장군에 불과함에도 백제를 포함하는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말했다.[31]
이에 대해, 서열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조에의 입공 순서대로 동방장군호의 상위에서 수여된 것이고, 남조에 의한 등급 매김도 아니며, 삼국 간 상하 우열 관계는 없고, 왜에 대한 평가가 낮아서 안동(대)장군에 나타났다고 간주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32]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남조가 왜왕의 백제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승인하지 않은 것은 북위를 봉쇄하기 위해 백제를 중시했기 때문이며, 남조가 왜왕의 군호를 높여 백제의 상위로 하는 것은 가능했기에 본말전도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33]
이시이 마사토시는 왜왕이 백제왕보다 하위라면, 상위인 진동(대)장군인 백제의 군사적 지배권을 하위인 안동(대)장군인 왜왕이 요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고 지적했다.[31] 남조로부터 책봉되어 관작을 자칭하고 제정을 요구하는 왜왕이 남조의 관작 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백제의 군사적 지배권을 주장한 왜왕은 안동(대)장군이라도 도독백제제군사 호 요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왜왕이 자신의 안동(대)장군이 백제왕의 진동(대)장군보다 하위이고, 도독백제제군사 호 요구가 부당한 요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백제왕과 동등한 진동(대)장군을 자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가 고구려와의 대결을 명확히 한 것은 고구려왕과 동등한 대우인 開府儀同三司중국어를 자칭하고 제정을 요구한 것에서 뒷받침된다.[34]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백제왕에게 진동장군이 수여된 40년 후 고구려왕에게 상위인 정동장군이 수여된 것으로부터, 임관의 선후가 군호의 상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34]
이시이 마사토시는 고구려왕이 남조로부터 장군호를 수여받은 첫 기록은 413년이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이 355년에 전연에 사자를 보내 정동대장군을 수여받은 것, 고구려왕이 336년과 343년에 동진에 조공한 사실을 언급하며, 동진·송이 고구려를 위해 동방장군호 최상위를 비워두고 기다렸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35] 고구려에 앞서 조공한 백제에 정동장군을 수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백제왕에게 진동장군이 수여된 것은 336년 또는 343년 조공에서 고구려왕에게 정동장군을 수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35] 따라서 군호 수여는 고구려→백제→왜 순이 되며, 왜왕은 남북조 시대를 통해 안동대장군을 자칭하는 데 그쳤고, 진동(대)장군, 정동(대)장군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백제 군사적 지배권 요구는 안동(대)장군으로 충분하고 안동(대)장군은 진동(대)장군에 못 미친다고 인식하지 않았고, 실제로 안동(대)장군으로 도독백제제군사를 얻을 수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며, 안동(대)장군인 채로 도독백제제군사를 요구한 데에 문제는 없었다고 지적한다.[32] 또한, 왜왕에 의한 도독백제제군사 요구는 백제령은 1지역 2군사권 대상 외이며 제도상 허가할 수 없기에 남조가 도독백제제군사를 왜왕에게 승인하지 않은 것은 이미 백제왕에게 도독백제제군사를 수여했기 때문이며, 왜왕 군호가 백제왕 군호에 못 미친다는 이유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36]
###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직 비교
년 | 고구려 | 백제 | 왜 |
---|---|---|---|
317년 | <동진 건국> | ||
372년 | 진동장군 (여구) | ||
386년 | 진동장군 (여휘) | ||
413년 | 정동장군 (고련) | ||
416년 | 정동대장군 (고련) | 진동장군 (여영) | |
420년 | <유송 건국> | ||
진동대장군 (여영) | |||
421년 | (안동장군?(찬)) | ||
438년 | 안동장군 (진) | ||
443년 | 안동장군 (제) | ||
451년 | 안동대장군 (제) | ||
457년 | 진동대장군 (여경) | ||
462년 | 안동장군 (흥) | ||
463년 | 거기대장군 (고련) | ||
478년 | 안동대장군 (무) | ||
479년 | <남제 건국> | ||
진동대장군 (무) | |||
480년 | 표기대장군 (고련) | 진동대장군 (모도) | |
490년 | 진동대장군 (모대) | ||
494년 | 정동대장군 (고운) | ||
502년 | <양 건국> | ||
거기대장군 (고운) | 정동대장군 (모대) | 정동장군(무) |
왜5왕은 송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지만, 이는 당시 한반도 지역의 역사 기록과 비교했을 때 여러 불일치점이 발견되어 허위임을 알 수 있다.[7] 이러한 허위 주장은 중국이 동쪽 문제에 무관심한 틈을 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신라가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고,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모두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 '''438년''': 진은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한과 모한은 이미 수 세기 전에 멸망한 국가들이었기에, 진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7] 진한 연맹은 1~3세기에 걸쳐 신라에 병합되었고, 마한 연맹은 4세기까지 백제에 병합되었다.
- '''451년''': 유송은 사이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7] 그러나 유송은 왜가 백제를 점령하려는 것을 승인하지 않고 제외했다. 이는 백제 전지왕이 416년과 420년에 각각 鎮東將軍중국어 (진동장군)과 鎮東大將軍중국어 (진동대장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유송은 사이가 요청하지 않은 가야를 임명했는데, 이는 임나 지역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 '''477년''': 부는 왜,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7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는 가야를 추가하는 유송의 실수를 따랐으며, 이는 부 역시 자신이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 '''478년''': 유송은 부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 유송은 왜가 백제를 추가해 달라는 요청을 다시 무시하고 451년에 사이에게 임명했던 것만을 재확인했다.[7]
송서는 왜왕에 대한 기록보다 앞서 백제가 요서 지역을,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통치했다고 설명했다.[8] 이는 유송이 동쪽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2. 1. 관직 변천
왜5왕은 중국 남조의 여러 왕조와 교류하며 관직을 제수받았다. 413년 동진에 조공한 것을 시작으로, 송나라에는 421년부터 찬(讚)이 조공을 시작하여 438년에 진(珍)이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 443년에는 제(濟)가, 451년에는 제가 안동장군과 함께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에 임명되었다. 462년에는 흥(興)이 안동장군 왜국왕에 임명되었다.477년, 흥이 죽고 무(武)가 왕위를 이었으며, 스스로 7국제군사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칭했다. 478년, 송 순제는 무를 6국제군사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했다. 479년 남제 고제는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고, 502년 양 무제는 무를 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
왜왕들은 주로 왜국왕, 사지절, 안동대장군, 도독-지역-제군사 등의 칭호를 요청했다. 유송은 안동대장군 칭호를 반복적으로 거부하고 안동장군을 수여했는데, 이는 국력 쇠퇴로 동맹국이 절실해진 통치 마지막 해까지 지속되었다. 유송 시대 군 지휘관 최고위 계급은 구품중정법의 2등급이었고, 이는 동쪽에 위치한 속국의 군주에게도 수여되었다.
송나라 시대에 황제들은 3개의 동쪽 군주국에 칭호를 수여했는데, 고구려 국왕에게는 정동대장군(413년, 2등급 4품)과 거기대장군(463년, 2등급 2품), 백제 국왕에게는 진동장군(416년, 3등급 2품)과 진동대장군(420년, 2등급 5품), 왜 국왕에게는 안동장군(421년, 3등급 3품)과 안동대장군(478년, 2등급 6품)이 수여되었다. 이 중 왜만이 자칭 칭호를 가지고 송나라를 방문했다.
이에 대해 고구려 국왕이 최고 지위, 왜 국왕이 최하위였다는 해석이 있지만,[3] 세 국가 간 장군 계급 차이는 사신 파견 순서에 기인하며, 왜의 계급이 실질적으로 낮다고 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4] 왜가 자칭한 안동대장군 칭호 승인을 요청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려 했다면, 438년 사이의 6개국 군사 업무 지휘관에 백제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왕젠췬은 왜가 빈번하게 인정을 요청하고 자칭 칭호가 거부된 점이 주장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송나라는 479년에 멸망했고, 중국 왕조 변화와 함께 새로운 칭호가 발행되었다. 479년 남제는 고구려 국왕에게 표기대장군(2등급 1품), 왜 국왕에게 진동대장군(2등급 5품)을 수여했다. 백제 국왕은 495년에 같은 칭호를 받았다. 가야의 하지는 보국장군(3등급 14품)을 받았다.
502년 양나라는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거기대장군, 백제 동성왕과 왜의 무에게 정동대장군을 수여했다. 당창의 량미하는 진서장군, 토욕혼의 수류대는 정서장군을 받았다.
왜 왕들은 한반도 남부 군사적 지배권을 승인해 줄 것을 반복해서 상소했다. 진은 인정받지 못했고, 제는 6국 제군사 안동장군 왜왕을 수여받았지만, 백제에 관해서는 무를 포함해서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송이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를 중시하고, 고구려의 반발을 피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28] 왜왕의 장군호가 고구려왕·백제왕보다 항상 낮았던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라는 주장이 있다.[29]
대한민국에서는 중국 관직 제도는 사안장군→사진장군→사정장군으로 승진하므로, 고구려왕(정동(대)장군), 백제왕(진동(대)장군), 왜왕(안동(대)장군) 군호에는 상하 우열 관계가 있고, 동이 제왕에게 제정된 지위는 고구려, 백제, 왜 순서이며 남북조 시대를 통해 바뀌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30] 박종대는 백제는 진동대장군, 왜는 안동장군에 불과함에도 백제를 포함하는 한반도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말했다.[31]
이에 대해, 서열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조에의 입공 순서대로 동방장군호의 상위에서 수여된 것이고, 남조에 의한 등급 매김도 아니며, 삼국 간 상하 우열 관계는 없고, 왜에 대한 평가가 낮아서 안동(대)장군에 나타났다고 간주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32]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남조가 왜왕의 백제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승인하지 않은 것은 북위를 봉쇄하기 위해 백제를 중시했기 때문이며, 남조가 왜왕의 군호를 높여 백제의 상위로 하는 것은 가능했기에 본말전도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33]
이시이 마사토시는 왜왕이 백제왕보다 하위라면, 상위인 진동(대)장군인 백제의 군사적 지배권을 하위인 안동(대)장군인 왜왕이 요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고 지적했다.[31] 남조로부터 책봉되어 관작을 자칭하고 제정을 요구하는 왜왕이 남조의 관작 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백제의 군사적 지배권을 주장한 왜왕은 안동(대)장군이라도 도독백제제군사 호 요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왜왕이 자신의 안동(대)장군이 백제왕의 진동(대)장군보다 하위이고, 도독백제제군사 호 요구가 부당한 요구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백제왕과 동등한 진동(대)장군을 자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가 고구려와의 대결을 명확히 한 것은 고구려왕과 동등한 대우인 개부의동삼사를 자칭하고 제정을 요구한 것에서 뒷받침된다.[34]
사카모토 요시타네는 백제왕에게 진동장군이 수여된 40년 후 고구려왕에게 상위인 정동장군이 수여된 것으로부터, 임관의 선후가 군호의 상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34]
이시이 마사토시는 고구려왕이 남조로부터 장군호를 수여받은 첫 기록은 413년이지만, 고구려 고국원왕이 355년에 전연에 사자를 보내 정동대장군을 수여받은 것, 고구려왕이 336년과 343년에 동진에 조공한 사실을 언급하며, 동진·송이 고구려를 위해 동방장군호 최상위를 비워두고 기다렸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35] 고구려에 앞서 조공한 백제에 정동장군을 수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백제왕에게 진동장군이 수여된 것은 336년 또는 343년 조공에서 고구려왕에게 정동장군을 수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35] 따라서 군호 수여는 고구려→백제→왜 순이 되며, 왜왕은 남북조 시대를 통해 안동대장군을 자칭하는 데 그쳤고, 진동(대)장군, 정동(대)장군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백제 군사적 지배권 요구는 안동(대)장군으로 충분하고 안동(대)장군은 진동(대)장군에 못 미친다고 인식하지 않았고, 실제로 안동(대)장군으로 도독백제제군사를 얻을 수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며, 안동(대)장군인 채로 도독백제제군사를 요구한 데에 문제는 없었다고 지적한다.[32] 또한, 왜왕에 의한 도독백제제군사 요구는 백제령은 1지역 2군사권 대상 외이며 제도상 허가할 수 없기에 남조가 도독백제제군사를 왜왕에게 승인하지 않은 것은 이미 백제왕에게 도독백제제군사를 수여했기 때문이며, 왜왕 군호가 백제왕 군호에 못 미친다는 이유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36]
2. 2.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직 비교
년 | 고구려 | 백제 | 왜 |
---|---|---|---|
317년 | <동진 건국> | ||
372년 | 진동장군 (여구) | ||
386년 | 진동장군 (여휘) | ||
413년 | 정동장군 (고련) | ||
416년 | 정동대장군 (고련) | 진동장군 (여영) | |
420년 | <유송 건국> | ||
진동대장군 (여영) | |||
421년 | (안동장군?(찬)) | ||
438년 | 안동장군 (진) | ||
443년 | 안동장군 (제) | ||
451년 | 안동대장군 (제) | ||
457년 | 진동대장군 (여경) | ||
462년 | 안동장군 (흥) | ||
463년 | 거기대장군 (고련) | ||
478년 | 안동대장군 (무) | ||
479년 | <남제 건국> | ||
진동대장군 (무) | |||
480년 | 표기대장군 (고련) | 진동대장군 (모도) | |
490년 | 진동대장군 (모대) | ||
494년 | 정동대장군 (고운) | ||
502년 | <양 건국> | ||
거기대장군 (고운) | 정동대장군 (모대) | 정동장군(무) |
왜5왕은 송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지만, 이는 당시 한반도 지역의 역사 기록과 비교했을 때 여러 불일치점이 발견되어 허위임을 알 수 있다.[7] 이러한 허위 주장은 중국이 동쪽 문제에 무관심한 틈을 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신라가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고,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모두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 '''438년''': 진은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한과 모한은 이미 수 세기 전에 멸망한 국가들이었기에, 진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7] 진한 연맹은 1~3세기에 걸쳐 신라에 병합되었고, 마한 연맹은 4세기까지 백제에 병합되었다.
- '''451년''': 유송은 사이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7] 그러나 유송은 왜가 백제를 점령하려는 것을 승인하지 않고 제외했다. 이는 백제 전지왕이 416년과 420년에 각각 鎮東將軍중국어 (진동장군)과 鎮東大將軍중국어 (진동대장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유송은 사이가 요청하지 않은 가야를 임명했는데, 이는 임나 지역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 '''477년''': 부는 왜, 백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7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는 가야를 추가하는 유송의 실수를 따랐으며, 이는 부 역시 자신이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 '''478년''': 유송은 부에게 왜, 신라, 임나, 가야, 진한, 모한 6개국에 대한 모든 군사 업무의 사령관 직책을 수여했다. 유송은 왜가 백제를 추가해 달라는 요청을 다시 무시하고 451년에 사이에게 임명했던 것만을 재확인했다.[7]
송서는 왜왕에 대한 기록보다 앞서 백제가 요서 지역을,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통치했다고 설명했다.[8] 이는 유송이 동쪽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3. 왜 5왕의 조공 기록
4월, 문제 황제는 진에게 안동장군/安東將軍중국어 (안동장군, 동쪽의 평화 유지 장군)과 왜국왕/倭國王중국어 (왜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황제는 또한 왜수(왜수/倭隋일본어)와 진의 다른 13명의 부하에게 평서정로관군보국장군/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중국어의 칭호를 수여했다.
고왕이 죽고 그의 동생 부가 왕위를 계승했다. 부는 스스로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중국어와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중국어 (안동대장군, 동쪽의 평화 유지 장군)과 왜국왕/倭國王중국어 (왜왕)의 칭호를 자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