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가쓰라기노 소쓰히코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는 《일본서기》, 《고사기》 등 고대 일본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진구 황후, 오진 천황, 닌토쿠 천황 시기에 신라, 백제, 가야 등 한반도 국가와의 외교 및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신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백제기》의 기록을 통해 가야 공격에 관여한 사실이 전해진다.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는 다케노우치노 스쿠네의 사위로, 닌토쿠 천황의 황후를 배출하는 등 5세기 천황가의 외척으로 번성했다. 그의 무덤으로는 나라현 고세시에 있는 무로미야마 고분이 유력하게 추정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가쓰라기씨 - 이와노히메노미코토
    이와노히메노미코토는 닌토쿠 천황의 황후로서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에 등장하며, 질투심이 강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만엽집에 애정을 나타내는 시가 수록되어 현대에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등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 가쓰라기씨 - 다케우치노 스쿠네
    다케우치노 스쿠네는 일본 게이코 천황부터 닌토쿠 천황까지 5대에 걸쳐 활약한 인물로, 대신으로서 진구 황후의 섭정을 보좌하고 신라와의 관계에 관여했으며, 여러 씨족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충신이지만 실존 여부에 대한 비판도 있다.
  • 5세기 사람 - 눌지 마립간
    눌지 마립간은 신라의 19대 왕으로, 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에 대항하고 왜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립간 칭호를 처음 사용하여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 5세기 사람 - 자비 마립간
    자비 마립간은 눌지 마립간의 아들로,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을 막았으며, 삼년산성 축조와 나제동맹에 따른 고구려 공격에 대응하고 수도를 옮기는 등 영역 확장과 안보 강화에 힘쓴 신라의 제20대 왕이다.
  • 4세기 사람 - 테오도시우스 1세
    379년부터 395년까지 동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인 출신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확립하고 고트족 문제를 해결하는 등 로마 제국의 종교적, 군사적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 4세기 사람 - 디오클레티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위기 이후 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사, 행정, 경제 개혁을 단행하고 사두정치 체제를 도입하는 등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으나, 최고가격령 실패와 기독교 박해라는 어두운 면도 남겼으며,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전환점이자 후대 제국에 영향을 미쳤다.
가쓰라기노 소쓰히코
인물 정보
이름가쓰라기노 소쓰히코 (葛城襲津彦)
로마자 표기Katsuragi no Sotsuhiko
활동 시기고훈 시대
성별남성
출신 가문가쓰라기 씨 (葛城氏)
가족 관계
아버지불명
어머니불명
배우자불명
자녀불명
주요 활동
관위대신 (大臣)
주요 사건신라 정벌 계획 참여 (실패)
가계
가쓰라기노 소쓰히코 가계도
가쓰라기노 소쓰히코 가계도

2. 명칭

葛城之襲津彦일본어, 曾都毘古일본어 또는 葛城長江曾都毘古일본어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가쓰라기노 소쓰히코'''(葛城之襲津彦), 『고사기』에서는 '''가쓰라기노 나가에 소쓰비코'''(曾都毘古) 또는 '''가쓰라기노 소쓰비코'''로 표기된다. 소쓰히코의 모델이 된 인물은 실존했다고 가정하면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 무렵의 인물로 추측되지만, 그 무렵에는 (氏)·카바네(姓)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쓰라기"라는 우지명과 같은 명칭은 이 책들을 편찬할 당시의 씨성 제도의 지식에 기초하여 붙여진 것이다.[1]

다른 문헌에서는 "소쓰히코"가 "曾頭日古", "曾豆比古", "曾都比古"로도 표기되며, 『기씨가첩』의 일부 문헌에서는 "가쓰라기노 나가에 소쓰히코노 스쿠네"로 표기된다.

또한, 『일본서기』 인용의 『백제기』에 임오년(382년)의 인물로 보이는 '''사지히코'''(さちひこ)는 통설에서는 소쓰히코로 여겨진다.

3. 가계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부친다케노우치노 스쿠네
모친가쓰라기 국조 아라타히코의 딸 가쓰라히메
아내불명
장남옥전숙녜[3]
차남아시다숙녜
삼남호전숙녜적신·포식수·생전수 등의 조상[4][5]
사남요군숙녜하신씨의 조상[5]
오남불명
육남웅도숙녜인해원련·조야숙녜 등의 조상[6]
장녀반지히메닌토쿠 천황의 황후, 리추 천황·한제이 천황·인교 천황의 어머니



일본서기』에서는 "'''가쓰라기노 소쓰히코'''", 『고사기』에서는 "'''가쓰라기노 나가에 소쓰비코'''(曾都毘古)"나 "'''가쓰라기노 소쓰비코'''"로 표기된다. 소쓰히코의 모델 인물은 실존을 가정하면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 무렵의 인물로 추측되지만, 그 무렵에는 ・카바네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쓰라기"라는 씨족명과 같은 명칭은 기기 편찬 당시의 씨성 제도의 지식에 기초하여 붙여진 것이다.[1]

신찬성씨록』에는 다음의 씨족이 후예로 기록되어 있다.


  • 좌경 황별 가쓰라기아손 -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노 미코토의 후손.
  • 우경 황별 다마테 아손 - 다케우치노 스쿠네의 아들인 가쓰라기노 소즈히코노 미코토의 후손.
  • 야마시로노쿠니 황별 마토노 오미 - 이시카와 아손(石川朝臣)과 동조. 히코타니시노 미코토(彦太忍信命) 3세손인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노 미코토의 후손.
  • 셋쓰노쿠니 황별 아치나노 오미 - 다마테 아손과 동조. 다케우치노 스쿠네의 아들인 가쓰라기노 소즈히코노 미코토의 후손.
  • 셋쓰노쿠니 황별 후시키노 오미 - 다마테와 동조.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노 미코토의 후손.
  • 가와치노쿠니 황별 마토노 오미 - 미치모리 아손과 동조. 다케우치노 스쿠네의 아들인 가쓰라기노 소즈히코노 미코토의 후손.
  • 가와치노쿠니 황별 시오야노 무라지 - 동일.
  • 가와치노쿠니 황별 고이에노 무라지 - 시오야노 무라지와 동조. 다케우치노 스쿠네의 아들인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노 미코토의 후손.
  • 가와치노쿠니 황별 하라이노 무라지 - 동일.
  • 이즈미노쿠니 황별 마토노 오미 - 사카모토 아손과 동조. 다케우치노 스쿠네의 아들인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노 미코토의 후손.
  • 이즈미노쿠니 황별 후시노 오미 - 동일.
  • 셋쓰노쿠니 미정 잡성 시모가미 -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노 미코토의 아들인 코시노 스쿠네의 후손.

4. 기록 및 전승

가쓰라기노 소쓰히코(葛城襲津彦)는 일본서기고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 오진 천황, 닌토쿠 천황 3대에 걸쳐 그의 행적이 나타나지만, 고사기에는 이름만 언급될 뿐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만엽집에는 가쓰라기노 소쓰히코가 사용한 활이 언급된 시가 실려 있는데, 이는 당시 소쓰히코가 뛰어난 무장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해당 시의 내용은 "가쓰라기의 소쓰히코가 사용하는 새 나무의 강한 활처럼, 나를 아내로 믿고 의지해 주시니, 그래서 내 이름을 입 밖에 내셨겠지"라는 의미이다. 연인의 이름은 두 사람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될 때까지 서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일본 고대 사회의 관습을 고려하면, 남자를 확실히 얻은 자랑스러운 여자의 노래로 해석된다.[15]

이름은 일본서기에서는 "가쓰라기노 소쓰히코", 고사기에서는 "가쓰라기노 나가에 소쓰비코(曾都毘古)"나 "가쓰라기노 소쓰비코"로 표기된다.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 무렵의 인물로 추측되지만, 당시에는 ・카바네 제도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쓰라기"라는 씨족명은 후대 기기 편찬 당시의 지식에 기초하여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1]

다른 문헌에서는 "소쓰히코"가 "曾頭日古", "曾豆比古", "曾都比古"로도 표기되며, 『기씨가첩』의 일부 문헌에서는 "가쓰라기노 나가에 소쓰히코노 스쿠네"로 표기된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에 등장하는 "사지히코(さちひこ)"는 소쓰히코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고치현아키군나하리정의 다케・사카모토 신사에서는 사카모토노 오미씨의 조상으로서 소쓰히코가 모셔지고 있다.[7] 다만, 일본서기 등에서는 사카모토노 오미씨의 조상은 기쓰노의 자손인 네시누시라고 되어 있다. 고치현의 가쓰라기노오 신사에는 누노시노 오미가 선조인 소쓰히코를 모셨다는 전승이 있다.

효고현고베시의 이치노미야 신사 경내의 이쿠하 신사에는 소쓰히코의 아들[8]인 이쿠하토다노 스쿠네가 모셔져 있다. 이 신사는 토다노 스쿠네의 자손인 누노시키노 오비토 및 동족인 이쿠타노 오비토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9] 같은 시 나다역 부근에는 고분 시대 후기에 축조된 횡혈식 석실의 원분이 있는데, '누노시키노 오비토 영지'라고 불리며 누노시키노 오비토가 매장되어 있다는 전승이 있지만,[10]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라키"를 나라현고조시의 아라키 신사로 해석하여, 가쓰라기노 소쓰히코가 아라키 신사 부근을 지나 기이국나구사군에서 한반도로 건너갔다는 설도 있다.

『세이요쇼』에 인용된 "진조 가와카쓰 신 본계도"에 따르면, 소쓰히코는 "두마노가지(아사쓰마의 승인가)"와 "쓰키타가지(쓰키타(조다니마스 히토고토니코 신사 부근인가)의 승인가)"를 가졌다고 한다.[16]

4. 1. 일본 측 기록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 제15대 오진 천황, 제16대 닌토쿠 천황의 3대에 걸쳐 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 진구 황후 5년(서기 205년) 음력 3월 7일
  • : 신라 왕이 보낸 인질 미질한기가 일시 귀국하고자 하여 진구 황후가 소쓰히코를 감시역으로 붙여 미질한기를 보냈다. 대마도에서 신라 왕의 사자 모마리질지에게 속은 소쓰히코가 미질한기를 놓쳐 미질한기는 신라로 도망가 버렸다. 이에 소쓰히코는 분노하여 신라의 사자를 죽이고 도비진(蹈鞴津)에 진을 치고 초라성(草羅城)을 함락시킨 뒤 포로를 끌고 왔다. 이 포로들이 구와바라(桑原)・사비란(佐糜)・고미야(高宮)・닌카이(忍海) 4개 읍의 한인들의 시조가 되었다.
  • 진구 황후 62년(서기 262년)
  • : 신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소쓰히코가 신라 토벌군으로 파견되었다. 이어 백제삼서 중 하나인 백제기를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임오년(서기 382년)에 소쓰히코가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신라가 아닌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 왕 기본한기가 백제로 도망친 뒤 천황에게 직소하니 천황은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소쓰히코를 공격하게 했다.[23] 소쓰히코는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비밀리에 귀국해 잠적했다. ‘일설에 따르면’, 소쓰히코의 여동생이 황궁을 섬기고 있었기에 여동생을 통해 천황의 분노가 풀렸는지 여부를 알아보았지만 화가 풀릴 기미가 없다고 하자 석굴에 들어가 자살했다.
  • 오진 천황 14년(서기 283년)
  • : 백제에서 궁월군이 와 천황을 배알하여, 백제 백성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와 귀화하고 싶지만 신라가 방해를 해 바다를 건널 수 없다고 고했다. 천황이 궁월군의 백성들을 맞아오기 위해 소쓰히코에게 군사를 맡겨 보냈지만 소쓰히코는 3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 오진 천황 16년(서기 285년) 음력 8월
  • : 천황은 소쓰히코의 연락두절이 신라의 탓이라고 여기고 헤구리노 쓰구와 이쿠하노 도다에게 정예병력을 보내 신라로 파견했다. 신라 왕은 아연실색하여 복종하고 궁월군이 백성을 이끌고 일본으로 귀화해 왔다.
  • 닌토쿠 천황 41년(서기 353년) 음력 3월
  • : 천황이 백제에 기노 쓰노를 파견했는데, 백제 왕족 주군(酒君)이 무례를 범하여 기노 쓰노가 질책했다. 백제 왕은 주군을 쇠사슬로 묶어 소쓰히코 편에 일본에 보냈다.


고사기에서는 갈성장강회증도비고(葛城長江曾都毘古), 갈성지증도비고(葛城之曾都毘古)라는 다른 이름 표기만 언급될 뿐, 특정 사건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만엽집 제11권 2639번 시에 언급된다. “가쓰라기노 소쓰히코가 사용한 신목(新木) 강궁처럼 나를 당신이 아내로 의지하므로 내 이름을 말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고대 일본 관습에서 연인의 이름은 두 사람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서로 발설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이름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즉 남자와 확실하게 맺어진 여자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풀이된다.[24][25]

5. 연대 비정

《일본서기》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는 거의 150년 동안 활동한 것이 되지만, 이는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사료와 교차 검증하고 이주갑인상에 따라 연대를 보정하면, 그의 실재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 첫 번째 기록은 박제상미사흔 탈출 이야기인데, 삼국사기에는 418년, 삼국유사에는 425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국 측 사료에 따르면 5세기에 일어난 일이다.

  • 두 번째 기록은 이주갑인상에 따라 2갑자 내리면 382년이 된다.[26] 세 번째와 네 번째 오진 천황 시기 기록도 2갑자 내리면 403년-405년이 된다.

  • 닌토쿠 천황은 중국 사료의 왜5왕 중 한 명으로 그 실재가 인정된다. 중국 측 기록에는 460년-462년 사이에 닌토쿠에서 한제이로, 또는 리추에서 닌토쿠로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다섯 번째 기록은 1갑자만 내리면 413년이 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382년 - 백제를 도와 신라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가야를 공격했다.
  • 403년 - 일본으로 이주하려는 백제인들을 호위하기 위해 한반도로 파견되었으나, 3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다.
  • 405년 - 헤구리, 이쿠하가 이끄는 지원군 덕분에 일본으로 귀환했다.
  • 418년 또는 425년 - 박제상에게 속아 미사흔을 놓쳤다.


따라서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는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나카 후미오는 사지비귀(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대가야 공격이 왜왕 제의 의도에 반하며, 왜왕 제는 "백제와의 우호 관계를 전제로 송과 통하여, 대가야 등의 군정권을 요구하고, 백제와 함께 사지비귀 등 가야 남부 및 신라와 통했던 가쓰라기의 유력 수장을 견제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왜왕 제가 송에 대해 "가라(=대가야)"의 군정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왜왕은 대가야에 대해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지비귀(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대가야 진출은 그러한 정세를 감안한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22]

6. 해석 및 평가

葛城襲津彦|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일본어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한 사람이 거의 150년에 걸쳐 활동한 것처럼 되어 비현실적이지만, 다른 나라의 사료와 교차 검증하고 이주갑인상에 따라 연대를 보정하면 어느 정도 실재성을 파악할 수 있다.


  • 서기 382년 - 백제를 도와 신라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신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가야를 공격했다.[26]
  • 서기 403년 - 일본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백제인들을 호위하기 위해 한반도로 파견되었으나 3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다.
  • 서기 405년 - 헤구리, 이쿠하가 이끄는 지원병 덕분에 일본으로 귀환했다.
  • 서기 418년 또는 425년 - 박제상에게 속아 미사흔을 놓쳤다.


닌토쿠 천황은 중국 사료의 왜5왕 중 한 명으로 실재가 인정된다. 중국 측 기록에는 460년-462년 사이에 닌토쿠에서 한제이로 또는 리추에서 닌토쿠로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다섯 번째 기록은 1갑자만 내리면 서기 413년이 된다.

이와 같이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는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름은 『일본서기』에서는 "'''가쓰라기노 소쓰히코'''", 『고사기』에서는 "'''가쓰라기노 나가에 소쓰비코'''(曾都毘古)"나 "'''가쓰라기노 소쓰비코'''"로 표기된다. 소쓰히코의 모델이 된 인물은 실존을 가정할 경우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 무렵의 인물로 추측되지만, 그 무렵에는 ・카바네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쓰라기"라는 우지명과 같은 관칭은 기기 편찬 당시의 씨성 제도의 지식에 기초하여 붙여진 것이다.[1]

다른 문헌에서는 "소쓰히코"가 "曾頭日古", "曾豆比古", "曾都比古"로도 표기되며, 『기씨가첩』의 일부 문헌에서는 "가쓰라기노 나가에 소쓰히코노 스쿠네"로 표기된다.

또한, 『일본서기』 인용의 『백제기』에 임오년(382년)의 인물로 보이는 "'''사지히코'''(さちひこ)"는 통설에서는 소쓰히코로 비정된다.

일본서기』에서는 소쓰히코에 관한 수많은 조선 외교 전승이 기록되어 있지만, 『백제기』에 실린 "사지비귀(沙至比跪)"의 기재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실존 모델 인물을 기반으로 소쓰히코 전승이 구축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다. 한편, 소쓰히코라는 인물의 실존성에 대해 신중한 입장에서, 어디까지나 가쓰라기 세력에 의해 창출된 전승상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설과, 조선에 파견된 가쓰라기 지방 수장층의 군사적 활동을 기반으로 인물상이 구축되었다는 설도 있다.

진구기는 전승적이고 복잡한 성격이 강해 실제 연대를 결정하기 어렵지만, 진구기의 기재는 간지 삼운 가산(干支三運加算)의 수정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임오년(壬午年)은 442년에 해당한다. 친신라적인 입장의 잉쿄 천황으로 비정되는 왜왕 제가 451년 중국에 파견하여 처음으로 가라(加羅)를 포함한 육국 제군사(六国諸軍事)의 호(号)를 신청한 것과 대응한다. 442년에 가쓰라기노 소쓰히코로 비정되는 사지비귀가 대가야(고령)를 정벌했지만 실패했음을 나타낸다. 신라를 칠 마음을 가진 천황과 가라를 쳤던 "사지비귀"와의 입장 차이와, "천황"은 백제의 장・목라근자를 통해 가라국을 구원하게 했다는 전승으로 미루어, 신라-가쓰라기씨와 백제-목라근자- 야마토 왕권(大和王権)의 대립 관계를 읽을 수 있으며, 유력 씨족의 독립성과 독자적인 교통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소쓰히코는 가라에 장기 체류하며, 신라・백제・가라라는 다방면의 외교 창구가 되었으며, 자신의 휘하에 도래계 씨족을 편성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인질・미실기(微叱己知)를 송환하는 사자로 가쓰라기노 소쓰히코가 임명된 것을 중시한다면, 신라에서 인질이 왔던 5세기 전반의 상황에 적합하다.[21]

다나카 후미오는, 사지비귀(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대가야 공격이 왜왕 제의 의도에 반하며, 왜왕 제는 "백제와의 우호 관계를 전제로 과 통하여, 대가야 등의 군정권을 요구하고, 백제와 함께 사지비귀 등 가야 남부 및 신라와 통했던 가쓰라기의 유력 수장을 견제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하지만, 왜왕 제가 에 대해 "가라(=대가야)"의 군정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왜왕은 대가야에 대해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지비귀(가쓰라기노 소쓰히코)의 대가야 진출은 그러한 정세를 감안한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22]

7. 무덤

묘의 소재는 불명이다. 나라현 남서부의 가쓰라기 지방에서는, 소쓰히코와 관련이 추측되는 고분으로 무로미야마 고분 (무로오호하카, 나라현 고세시 무로)이 있다. 이 고분은 가쓰라기 지방 최대(전국 18위[17]) 규모의 전방후원분으로, 5세기 초두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품 중에서는 가야 (한반도 남부) 산의 배 모양의 도질 토기가 기기의 소쓰히코 전승과 대응하는 것으로 주목된다. 이 고분에서는 다케우치노 스쿠네의 묘로 하는 전승도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근년에는 축조 시기로부터 소쓰히코의 묘로 추정하는 것이 유력시되고 있다[18] 平林章仁는 2013년에 이 고분의 피장자와 소쓰히코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19]


참조

[1] 서적 葛城 角川書店 1990
[2] 서적 古事記
[3] 서적 日本書紀
[4] 안내판 神戸市一宮神社境内社伊久波神社案内板
[5] 서적 新撰姓氏録
[6] 서적 続日本紀 (下) 講談社 1995
[7] 문서 土佐国式社考 1734
[8] 문서 紀氏家牒
[9] 안내판 一宮神社の案内板
[10] 서적 摂津志 1734
[11]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2 日本書紀 (1) 小学館 2002
[12]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2 日本書紀 (1) 小学館 2002
[13] 웹사이트 11/2639 http://infux03.inf.e[...]
[14]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8 萬葉集 (3) 小学館 2004
[15] 논문 仁徳天皇記の構想 https://hdl.handle.n[...] 明治大学教養論集刊行会
[16] 서적 秦氏とその民 白水社 1998
[17] 웹사이트 古墳大きさランキング(日本全国版) https://www.city.sak[...] 2018-05-13
[18] 서적 宮山古墳 平凡社 1981
[19] 서적 奈良盆地の遺跡が語る有力豪族の実像 洋泉社 2015
[20] 서적 国造制の研究 -史料編・論考編- 八木書店 2013
[21] 논문 倭・百済間の人的交通と外交 : 倭人の移住と倭系百済官僚 (第1部 総論) http://id.nii.ac.jp/[...]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2] 서적 百済の王号・侯号・太守号と将軍号 : 5世紀後半の百済の支配秩序と東アジア 国立歴史民俗博物館 2018-03-30
[23]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2 日本書紀 (1) 小学館 2002
[24] 웹사이트 11/2639 http://infux03.inf.e[...]
[25]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8 萬葉集 (3) 小学館 2004
[26]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2 日本書紀 (1) 小学館 20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