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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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는 케른텐 공작 마인하르트 2세의 아들로, 케른텐과 티롤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그는 보헤미아 왕위 계승 분쟁에 연루되어 1306년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알브레히트 1세의 개입으로 루돌프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루돌프 1세 사망 후 복위했으나 1310년 다시 폐위되었고, 이후에도 보헤미아 왕의 칭호와 선제후 지위를 주장했다. 그는 세 번 결혼했으며, 딸 마르가레테를 통해 티롤 영지를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335년 사망 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케른텐과 티롤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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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하인리히 |
독일어 이름 | 하인리히 |
체코어 이름 | 인드르지흐 |
신분 | |
직위 | 보헤미아 왕 |
통치 기간 | 1307년 7월 3/4일 – 1310년 8월 31일 |
이전 통치자 | 루돌프 1세 |
다음 통치자 | 얀 |
직위 1 | 케른텐 공작 및 크라인 변경백 |
통치 기간 1 | 1295년 – 1335년 |
이전 통치자 1 | 마인하르트 |
다음 통치자 1 | 오토 |
직위 2 | 티롤 백작 |
통치 기간 2 | 1295년 – 1335년 |
이전 통치자 2 | 마인하르트 |
다음 통치자 2 | 마르가레테 |
직위 3 | 산야 변경백 |
통치 기간 3 | 1295년 – 1308년 |
이전 통치자 3 | 마인하르트 |
다음 통치자 3 | 미남왕 프리드리히 |
가족 관계 | |
가문 | 게르츠 가문 |
아버지 | 마인하르트 |
어머니 |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안나 폰 뵈멘, 아델하이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베아트리체 디 사보이아 |
자녀 | 마르가레테 |
생애 및 사망 | |
출생 추정 | 1265년경 |
사망일 | 1335년 4월 2일 (70세) |
사망 장소 | 티롤, 티롤 성 |
매장지 | 슈탐스 수도원 |
2. 생애
마인하르트 2세와 그의 아내인 비텔스바흐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누나 엘리자베트는 훗날 알브레히트 1세의 아내가 되었다.
1306년 바츨라프 2세의 딸인 프르셰미슬의 안나와 결혼했지만, 같은 해에 안나의 오빠인 바츨라프 3세가 암살되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인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했다.[1] 1307년 프라하를 점령한 알브레히트 1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를 바츨라프 2세의 왕비이자 폴란드 공주였던 리차 엘주비에타와 결혼시키고,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시켰다.[1]
보헤미아 귀족들이 인드르지흐 지지파와 루돌프 1세 지지파로 나뉘면서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1] 1307년 루돌프 1세가 사망하면서 인드르지흐는 복위했지만, 1310년 보헤미아 귀족들이 얀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퇴위당했다.[1]
인드르지흐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화해를 통해 카린티아와 티롤을 유지했고, 슈타이어 공국에 잔 강 변경백령(오늘날 슬로베니아 사비냐 계곡)을 양도했다. 또한 카르니올라에 대한 "사실상" 지배권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베르크의 주교후가 소유한 카린티아 영지는 얻지 못했다. 반면, 트렌토 주교후와 브릭센 주교후의 저항에 맞서 티롤에서 자신의 종주권을 강화했다.
폐위 후에도 인드르지흐는 보헤미아 왕 칭호와 선제후 지위를 계속 주장하며, 131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중 선거에서 합스부르크 후보 미남 프리드리히에게 투표했다. 그의 논쟁적인 투표권은 모호한 결과를 낳았는데, 인드르지흐의 경쟁자였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왕 요한은 보헤미아 표를 바이에른의 루이 4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1322년 뮐도르프 전투에서 루이의 승리 후 인드르지흐는 경쟁자들 간의 우호적 해결을 중재했다.
1330년, 인드르지흐는 룩셈부르크 가문과 화해하여 딸 마르가레테를 요한 왕의 아들 요한 하인리히와 결혼시켰다. 그는 마인하르트 가문의 티롤 지파 마지막 남성 상속자였기에 영지 유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황제 루이 4세는 1330년 딸의 상속권을 보장했지만, 같은 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비밀 조약을 맺어 약속을 어겼다.
1335년 인드르지흐 사후, 합스부르크 공작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2세와 그의 형제 오토가 카린티아와 카르니올라를 장악했다. 인드르지흐의 딸 마르가레테는 티롤에서 그를 계승했으나, 1363년 결국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4세에게 유증해야 했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배경
마인하르트 2세와 그의 아내인 비텔스바흐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누나 엘리자베트는 훗날 알브레히트 1세의 아내가 된다.1295년 10월 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인드르지흐는 티롤과 카린티아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처음에는 형제인 오토(1310년 사망)와 루이(1305년 사망)와 공동으로 통치했으나, 형제들보다 오래 살았다. 그는 매제인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1세를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혔고, 알브레히트는 그 덕분에 1298년 굘하임 전투에서 경쟁자인 나사우의 아돌프를 물리치고 같은 해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또한 1301년에는 알브레히트 왕과 그의 비텔스바흐 동맹인 루이 4세가 루이의 반란을 일으킨 형제 팔라티나트의 루돌프 1세의 하이델베르크 저택을 포위하는 것을 도왔다.
1306년 바츨라프 2세의 딸인 프르셰미슬의 안나와 결혼했지만, 같은 해에 안나의 오빠인 바츨라프 3세가 암살되었다. 그 결과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인드르지흐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했다.[1]
2. 2. 보헤미아 왕위 계승 분쟁
1306년 바츨라프 2세의 딸인 프르셰미슬의 안나와 결혼했지만, 같은 해에 안나의 오빠인 바츨라프 3세가 암살되었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인드르지흐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했다.[1] 그러나, 의붓 형부 알브레히트 1세는 아들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를 바츨라프 2세의 후처 리차 엘주비에타와 결혼시킨 후 프라하를 점령하고, 보헤미아 왕 즉위를 선언했다.1307년 알브레히트 1세는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의 국왕인 루돌프 1세로 즉위시켰다.[1] 보헤미아 제후들 중에는 인드르지흐를 지지하는 자들도 있어, 루돌프와 다투었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인드르지흐를 지지하는 진영과 루돌프 1세를 지지하는 진영으로 나뉘면서 양측 간의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1] 1307년 루돌프 1세가 사망하면서 인드르지흐는 복위했지만, 1310년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얀을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퇴위당했다.[1]
1310년에는 왕비 안나의 여동생 엘리슈카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룩셈부르크 가문의 요한 (얀)이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어, 인드르지흐는 폐위되어 안나와 함께 케른텐으로 도망쳤다.
2. 3. 케른텐과 티롤 통치
마인하르트 2세 백작과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의 아들인 하인리히는 1295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티롤과 카린티아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초기에는 형제들인 오토 및 루이와 공동 통치했지만, 결국 그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1] 그는 매제인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1세를 지지하여 1298년 굘하임 전투에서 나사우의 아돌프를 물리치고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도록 도왔으며, 1301년에는 알브레히트 왕과 루이 4세가 반란을 일으킨 루이의 형제 팔라티나트의 루돌프 1세의 하이델베르크 저택을 포위하는 것을 도왔다.[1]헨리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화해를 통해 카린티아와 티롤을 유지했고, 슈타이어 공국에 잔 강 변경백령 (오늘날 슬로베니아의 사비냐 계곡)을 양도했다.[1] 그는 카르니올라에 대한 "사실상" 지배권도 유지했다.[1] 그러나 밤베르크의 주교후가 소유한 카린티아 영지는 얻지 못했다.[1] 반면, 트렌토 주교후와 브릭센 주교후의 저항에 맞서 티롤에서 자신의 종주권을 강화했다.[1]
131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중 선거에서 보헤미아 왕의 칭호와 선제후 지위를 주장하며 합스부르크 후보 미남 프리드리히에게 투표했다.[1] 그의 경쟁적인 투표권은 모호한 결과를 낳았고, 룩셈부르크 왕 요한은 보헤미아 표를 바이에른의 루이 4세에게 주었다.[1] 이후 1322년 뮐도르프 전투에서 루이의 승리 이후 경쟁자들 간의 우호적인 해결을 중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
1330년, 룩셈부르크 가문과 화해하여 딸 마르가레테를 요한 왕의 아들 요한 하인리히와 결혼시켰다.[1] 그는 마인하르트 가문의 티롤 지파의 마지막 남성 상속자였기 때문에 영지를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 황제 루이 4세가 1330년에 그의 딸이 계승할 수 있다고 보장했지만, 같은 해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비밀 조약에서 약속을 어겼다.[1]
1335년 헨리 사후, 합스부르크 공작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2세와 그의 형제 오토가 카린티아와 카르니올라를 장악했다.[1] 헨리의 딸 마르가레테는 티롤에서 그를 계승했으나, 1363년 결국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4세 공작에게 유증해야 했다.[1]
2. 4. 상속 문제와 사망
헨리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화해를 통해 카린티아와 티롤을 유지했고, 슈타이어 공국에 잔 강 변경백령(오늘날 슬로베니아의 사비냐 계곡)을 양도했다. 그는 또한 카르니올라에 대한 "사실상" 지배권을 유지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동의를 얻어 밤베르크의 주교후가 소유한 카린티아 영지를 얻지 못했다.[1] 필라흐와 타르비시오 사이의 콤팩트한 영토에 위치한 이 영지는 사실상 주권 공국의 지위를 누렸으며, 카린티아에서 프리울리와 이탈리아로 가는 유일한 주요 경로에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했다.[1] 반면에 헨리는 트렌토 주교후와 브릭센 주교후의 저항에 대항하여 티롤에서 자신의 종주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1]폐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보헤미아 왕의 칭호와 그에 수반되는 선제후 지위를 계속 주장하며, 131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중 선거에서 합스부르크 후보 미남 프리드리히에게 투표했다.[1] 그의 논쟁적인 투표권은 모호한 결과의 이유 중 하나였는데, 헨리의 경쟁자였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왕 요한은 보헤미아 표를 바이에른의 루이 4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1] 1322년 뮐도르프 전투에서 루이의 승리 이후 헨리는 경쟁자들 간의 우호적인 해결을 중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
헨리는 또한 룩셈부르크 가문과 화해하여 1330년 자신의 딸 마르가레테를 요한 왕의 아들 요한 하인리히와 결혼시켰다.[1] 그는 마인하르트 가문의 티롤 지파의 마지막 남성 상속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영지를 유지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1] 황제 루이 4세가 헨리가 미남 프리드리히와의 분쟁을 중재한 대가로 1330년에 그의 딸이 그를 계승할 수 있다고 보장했지만, 루이는 같은 해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비밀 조약에서 약속을 어겼다.[1]
헨리가 1335년에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공작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2세와 그의 형제 오토가 카린티아와 카르니올라를 장악했다.[1] 헨리의 딸 마르가레테는 지역 귀족의 지원으로만 티롤에서 그를 계승할 수 있었다.[1] 그러나 1363년 그녀는 결국 자신의 영지를 알베르트 2세의 아들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4세 공작에게 유증해야 했다.[1] 마인하르트 가문의 고리치아 지파는 1500년 가문이 단절될 때까지 그들의 백작령을 통치했으며, 그 후 영지는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갔다.[1]
3. 결혼과 자녀
헨리는 세 번 결혼했다.
1306년, 안나 프셰미슬로브나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313년, 벨프 공작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하인리히 1세의 딸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아델하이드(1285년 – 1324년 8월 16일)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름 | 출생-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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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하이드 | 1317년–1325년 5월 25일 |
마르가레테 "마울타슈" | 1318년 – 1369년 10월 3일 (빈) |
- 마르가레테는 1335년부터 1363년까지 티롤 백작이었다.
1327년, 사보이의 아메데오 5세 백작의 딸인 베아트리체(1310년–1331년)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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